나와 너 (눅10:30-37)
본문
구세군의 창시자인 부쓰(Booth) 대장은 말년에 맹인으로서 불행한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불행한 가운데서도 이제는 두 눈이 없이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현대의 유대인 철학자요 신학자인 부버(M. Buber)는 인간의 기본적 두 가지 태도와 관계는 나와 너와 나와 그것의 관계라 하였으며, 그의 견해를 많은 현대 철학자와 신학자가 호응하였습니다. 나와 너의 관계는 전체 존재에 대하여 관련을 맺는 방법이요, 나와 그것은 인간 내면에서 생기는 것으로서 인간과 세계 사이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부버는나와 그것이 너무 우세하여 나와 너의 관계로 전환되는 것을 방해할 때 그것이 죄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관련성과 종합성을 나타내는 나와 너는 상관성, 직접성, 현재성, 집중성 및 표현 불가능만이 그 특색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생은 자아 중심이 되기가 쉽습니다. 못났으면서도 잘난 체하고, 못생겼으면서도 예쁜 체하며, 못하면서도 잘하는 체합니다. 잔뜩 체症(증)에 걸려 있습니다. 우리는 남보다 잘났고 바르고 재주가 많다는 환상을 가지고 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행동을 항상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남이 나를 칭송해 주고 섬겨 주기만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이 세상에 나혼자만 생존하는 양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나와 너는 나눌 수 없는 연관성이 있습니다. 너가 없다면 나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너를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나만 알고 산다면 이 이기주의로 말미암아 우리 전체와 장래가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너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나라는 중심이 너에게로 옮겨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옷을 벗기우고 맞아서 거의 죽게 되어 버려져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마침 제사장이 지나갔고 이어서 레위인이 지나갔는데 모두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나와 너가 아니고 나는 나, 너는 너식의 사고방식으로 두 사람의 생각에는 강도 만난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을 지나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그 사람을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봐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떠나면서 주막 주인에게 환자를 부탁하며 돈을 주며, 부비가 더 들면 일을 보고 돌아올 때에 갚아 주겠노라고 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을 때 내가 저 사람이라면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즉 나는 너이며, 너는 나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상대편의 입장에 선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얼마 전에 인천에서 해군 장교 하나가 태풍에 사람을 태운 배가 닻줄이 끊어져 떠내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그는 그 사람이 자기라고 생각되어 얼어붙은 차가운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파도가 그를 삼켰고, 결국 시체도 찾을 수 없도록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희생의 꽃이 바다에 떨어졌습니까 왜 싸움이 일어납니까 어디까지나 나는 나의 입장에만 서지 상대방의 입장에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부 싸움을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입장에서 보기 좋은 남의 아내 혹은 남편을 바라보기에 자기 아내 혹은 남편에게 불만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느 형제가 농사를 지었습니다. 가을에 추수한 후 각자가 생각을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나와 너의 인격적인 관계로의 생각입니다. 형은 동생이 이제 막 결혼을 하여 새 살림이 시작되었으므로 형편이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여 밤에 몰래 추수한 쌀가마를 지고 동생 집을 향해 출발합니다. 동생 또한 형은 식구가 많으므로 먹는 양도 당연히 많으리라고 생각하여 자기의 쌀가마를 지고 형 집을 향해 출발합니다.
둘째로 나와 그것의 비인격적인 관계로의 생각입니다. 형은 생각하기를 동생은 식구가 적고 자기는 식구가 많으니 당연히 자기가 추수한 양의 많은 것을 차지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어떻게 해서라도 많은 양을 차지하기 위해 갖은 술수를 다 씁니다. 동생 역시 형은 기반이 잡혔고 자기는 살림 기반이 잡히지 않았으니 자기가 많은 양을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떻게 해서라도 많이 차지하려고 방법을 강구합니다.
그러므로 형제가 서로 싸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니라고 시작합니다. 여호와와 나와의 관계를 말합니다. 즉 여호와는 나의 목자의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내가 부족함이 없도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 입장에 서 주시기 때문에 부족함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님께서 나의 입장에 서 주시기 때문에 곤고함을 당할지라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은 하나님과 나의 인격적인 관계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나이고 우리 인류는 너입니다. 우리 인류가 강도 만난 여리고 행인같이 죄의 상처를 입고 다 멸망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의 고통스러운 자리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Incarnation, 成肉身),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를 죄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자아 중심이 되기가 쉽습니다. 못났으면서도 잘난 체하고, 못생겼으면서도 예쁜 체하며, 못하면서도 잘하는 체합니다. 잔뜩 체症(증)에 걸려 있습니다. 우리는 남보다 잘났고 바르고 재주가 많다는 환상을 가지고 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행동을 항상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남이 나를 칭송해 주고 섬겨 주기만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이 세상에 나혼자만 생존하는 양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나와 너는 나눌 수 없는 연관성이 있습니다. 너가 없다면 나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너를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나만 알고 산다면 이 이기주의로 말미암아 우리 전체와 장래가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너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나라는 중심이 너에게로 옮겨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옷을 벗기우고 맞아서 거의 죽게 되어 버려져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마침 제사장이 지나갔고 이어서 레위인이 지나갔는데 모두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나와 너가 아니고 나는 나, 너는 너식의 사고방식으로 두 사람의 생각에는 강도 만난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을 지나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그 사람을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봐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떠나면서 주막 주인에게 환자를 부탁하며 돈을 주며, 부비가 더 들면 일을 보고 돌아올 때에 갚아 주겠노라고 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을 때 내가 저 사람이라면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즉 나는 너이며, 너는 나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상대편의 입장에 선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얼마 전에 인천에서 해군 장교 하나가 태풍에 사람을 태운 배가 닻줄이 끊어져 떠내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그는 그 사람이 자기라고 생각되어 얼어붙은 차가운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파도가 그를 삼켰고, 결국 시체도 찾을 수 없도록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희생의 꽃이 바다에 떨어졌습니까 왜 싸움이 일어납니까 어디까지나 나는 나의 입장에만 서지 상대방의 입장에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부 싸움을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입장에서 보기 좋은 남의 아내 혹은 남편을 바라보기에 자기 아내 혹은 남편에게 불만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느 형제가 농사를 지었습니다. 가을에 추수한 후 각자가 생각을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나와 너의 인격적인 관계로의 생각입니다. 형은 동생이 이제 막 결혼을 하여 새 살림이 시작되었으므로 형편이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여 밤에 몰래 추수한 쌀가마를 지고 동생 집을 향해 출발합니다. 동생 또한 형은 식구가 많으므로 먹는 양도 당연히 많으리라고 생각하여 자기의 쌀가마를 지고 형 집을 향해 출발합니다.
둘째로 나와 그것의 비인격적인 관계로의 생각입니다. 형은 생각하기를 동생은 식구가 적고 자기는 식구가 많으니 당연히 자기가 추수한 양의 많은 것을 차지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어떻게 해서라도 많은 양을 차지하기 위해 갖은 술수를 다 씁니다. 동생 역시 형은 기반이 잡혔고 자기는 살림 기반이 잡히지 않았으니 자기가 많은 양을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떻게 해서라도 많이 차지하려고 방법을 강구합니다.
그러므로 형제가 서로 싸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니라고 시작합니다. 여호와와 나와의 관계를 말합니다. 즉 여호와는 나의 목자의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내가 부족함이 없도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 입장에 서 주시기 때문에 부족함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님께서 나의 입장에 서 주시기 때문에 곤고함을 당할지라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은 하나님과 나의 인격적인 관계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나이고 우리 인류는 너입니다. 우리 인류가 강도 만난 여리고 행인같이 죄의 상처를 입고 다 멸망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의 고통스러운 자리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Incarnation, 成肉身),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를 죄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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