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사랑 (요13:1)
본문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지난 무더운 여름 동안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켜주심을 감사하고, 또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답게 신앙 생활을 잘 해주신 데 대해서 감사의 마음을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활발하게 교회를 오고 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셨으리라 확신합니다. 이제 후반기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후반기 첫 설교를 준비하는 동안 이상하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를 해야 한다는 어떤 강박관념이 저를 계속 따라 다녔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설교를 한다는 것은 설교자에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 저에게 설교하기 가장 어려운 주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서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눈으로 뻔히 보는 사랑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아무리 화려한 문장을 쓴다 해도 그 사랑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사전에서 찾아 하나님의 사랑이란 이런 것이라고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명을 하라고요 차라리 울어버리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면에서 말보다는 눈물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데 훨씬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자가 내내 눈물을 흘리며 서있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를 놓고 기도하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설교하기 곤란한 주제임에도 제가 굳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설교하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가 볼 때, 사랑의교회를 다니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병적인 반응을 보이는 분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상식화된 사랑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너무 무감각한 사랑을 알고 있습니다. 자식에게 엄마가 "얘, 엄마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니" 라고 물으면, 자식은 이렇게 대답하지 않습니까 "그야 엄마니까 당연하지. 뭘 그래" 여기에는 접촉점이 없습니다. 엄마의 가슴에 있는 진한 사랑을 자식에게 알려줄 접촉점이 생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엄마니까 당연히 사랑하는 것 아냐"라는 대답에는 감동도 없습니다. 주고 또 주어도 고마운 줄을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사랑하시는 게 당연하지 않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런 병적인 반응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시는 분이 있다면 오늘 이 시간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특별히 찾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확성기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여러분의 귓전에 울리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주자주 들어야 합니다. 자꾸 읽고 배워야 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자주 묵상하고 찬송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느낌이 오든 오지 않든 상관없습니다.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고, 생각하고, 고백하고, 찬양하다 보면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사랑의 바다에 두둥실 떠다니는 자기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어려운 설교이지만 하나님이 또 하라고 저에게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최근 많이 읽히는 책 가운데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라는 책이 있지 않습니까 아마 여러분 중에는 읽으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제가 그 책을 읽으면서 감동을 받은 내용이 있어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악성 췌장암에 걸려 6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절망적인 선고를 받고 면회도 금지된 병원 독방에서 응급조치를 받으면서 하루하루 죽음과 싸우는 아버지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이미 성인으로 의사 일을 하고 있는 아들입니다. 그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일어났던 이야기입니다. 아들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너무 고지식하고 완고하고 감정이 메말라 있어서 자식들에게 애정 표현 한번 제대로 한 적이 없었나 봅니다. 그리고 자식의 말을 잘 들어주지 않고 항상 자기 주장대로 해 버리니까 아들이 나중에는 아버지만 보면 가슴에서 분이 치밀어 올라서 참을 수가 없어지고, 결국은 둘 사이가 멀어져서 수십 년 동안 겉으로만 부자 사이지 내적인 사랑이 오고 가는 일이 없는 삭막한 관계를 유지해 왔나 봅니다. 그러나 이제 머지않아 돌아가실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아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병 문안을 와서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진정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싶어요." 그리고는 아버지를 꽉 껴안았습니다. 아들이 느닷없이 자기를 껴안으니까 아버지는 잔뜩 긴장해서는 머리를 뒤로 젖히면서 고슴도치처럼 빳빳하게 굳어 가지고 안기지를 않는 겁니다. 그렇지만 아들은 그 다음 번 병 문안 와서 다시 아버지를 안았습니다. 여전히 고슴도치처럼 빳빳이 안기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들의 마음에 더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이건 정말 소망이 없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러다가도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자기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버지를 마음으로 받아 들여야 하고, 아버지는 진정 마음으로 자기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안아주는 것 외에 달리 길이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병 문안을 갈 때마다 아버지를 안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아버지가 말을 잘 안 들으면 "아버지, 팔을 저에게 둘러보세요. 그리고 좀 꽉 껴안으세요. 그래요, 됐어요. 좀더 힘있게 껴안아보세요." 라고 하면서 아버지를 계속 유도했습니다. 아버지의 긴장된 자세가 풀어지는 데는 그로부터 몇 달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껴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점점 깊은 애정과 염려를 가지고 서로를 바라보는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2백 번째의 포옹이 있던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이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얘야, 널 사랑한다." 평생 아버지로부터 들어보지 못한 사랑의 표현, 애정의 표시를 처음으로 들은 것입니다. 해롤드 블룸필드라고 하는 그 아들 되는 사람이 쓴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는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저를 2백 번만 안아주셨나요 2천 번도 더 안아주셨지요. 하나님이 처음에 절 안아주실 때 제가 어떻게 했어요 뻣뻣했지요. 안기기 싫어 고개를 마구 쳐들었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2백 번이고, 2천 번이고, 지금까지 수없이 안아주셨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하나님, 사랑해요. 예수님 사랑해요.' 하는 말이 절로 나오지 않았어요
교회를 5년, 10년 다녔지만 하나님이 안아주려고 하면 몹시 안기려 하지 않는 힘든 사람들이 많지 않아요 반응이 없지 않아요 냉랭하지 않아요 고슴도치처럼 고개를 치켜들고 버티는 뻣뻣한 사람 많지 않아요 하나님, 저를 안아 주신 것처럼 2백 번도 좋습니다. 2만 번도 좋습니다. 주님 좀 안아 주세요. 사랑의교회를 좀 꼭 껴안아 주세요. 그래서 우리 입에서 '하나님 사랑해요.' 하는 말이 나올 수 있도록 해주세요." 라고 저도 모르게 이런 기도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무엇이 안아주는 것이며 무엇이 안기는 것입니까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듣고, 배우고, 묵상하고, 또 깨닫고, 또 나도 모르게 찬송하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안아주는 것이요, 안기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어색할지 모릅니다. 어떤 때는 감정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앞에 놓고,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사랑하시는가 하는 말씀을 2천 번이든 2만 번이든 계속 듣고 읽고 묵상하고 깨닫고 또 나중에 그것을 다시 회상하고 고백하고 찬양하다 보면, 드디어 하나님의 사랑에 내가 푹 젖어 들면서 나도 모르게 "하나님 사랑해요." 하고 고백하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사랑의교회에 그런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면서 설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은혜를 받기만 하면 이 필립 블리스라고 하는 찬송 작가가 쓴 행복한 찬송을 신나게 부를 수 있습니다. 신앙 생활하는 재미가 어디 있습니까 신앙 생활하는 사람의 행복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 사랑 받는 행복에 있는 것 아닙니까 할렐루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사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세상을 살면 얼마나 불행합니까 천국에야 들어갈지 모르지만 그 인생이 얼마나 불행합니까
블리스라는 사람이 지은 찬송 가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 귀하고 중하신 말씀일세/ 기쁘고 반가운 말씀 중에 날 사랑한단 말 참 좋도다/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즐겁고도 즐겁도다/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나는 참 기쁘다/ 주 예수 날 사랑하시오니 마귀가 놀라서 물러가네/ 주 예수 이렇게 사랑하시니 우리는 어떻게 보답할꼬/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즐겁고도 즐겁도다/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나는 참 기쁘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행복이요 재미인 것입니다. 제가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말씀을 여기저기 많이 찾아보았는데, 그 가운데서 요한복음 13장 1절은 우리에게 젖어 드는 감동이 특별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막연하게 그리기 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이 본문으로 설교할 시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13장 1절을 선택한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이제 제자들을 떠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하나님 나라로 다시 올라가실 날까지 불과
2, 3일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사랑하는 제자들을 두고 가야 한다는 사실 앞에 예수님도 마음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그가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1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것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고 계시는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12장 4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라." 그러니까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을 보는 것이고, 예수님이 하시는 행동을 보면 하나님도 저렇게 하시겠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제자기가 세상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시고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세상 끝 날까지 사랑하셨다, 마지막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을 보고 하나님의 사랑도 그러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을 잘 모르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데 어떻게 해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고 마음에 갈등이 생기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회의가 일어나는 형제자매가 있습니까 13장 1절을 마음에 잘 담아 두십시오. 그리고 집에 돌아가셔서 "세상에 있는 나를 사랑하시되 하나님은 끝까지 사랑하시느니라." 라는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고백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그 든든한 팔이 여러분을 꽉 껴안아주는 은혜를 맛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너는 내 것이라 여기서 우리가 먼저 살펴보아야 할 내용은 '자기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자기 사람들'이란 누구를 말할까요 일차적으로는 예수님이 3년 동안 데리고 다니면서 자기와 꼭 닮은 사람으로 만들어 보려고 무척 애를 쓰셨던 12제자와 그들과 함께 동거했던 수십 명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보다 넓게는 제자들 뿐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 모두를 일컫는 말입니다. 17장에 가면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어떻게 부릅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 이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1장 5절에서는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사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신 자들" 이라고 말씀합니다. 또 자기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에베소서 2장 4절을 보면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 고 말씀합니다. 이사야 43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이 "너는 내 것이라"고 못을 박은 사람들입니다. 또 이사야 49장 16절을 보면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고 했는데 손바닥에 새긴 사람들이 바로 '자기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사람들을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아 갈 자가 없다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요10:29). 이 얼마나 엄청난 특권을 입은 '자기 사람들'이란 바로 우리 모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자기 것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애정이기 때문에, 이것은 독특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것에 대한 애착은 하나님에게도 대단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모든 세상 사람을 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포괄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자기 것, 자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독특하고 특별하고 강합니다. 우리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자기 새끼에게는 그 애착이 얼마나 강합니까 지금 실종되어서 서울 사람들이 찾으려고 발 벗고 나선 박나리 양의 부모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디 잠인들 제대로 자겠습니까 음식인들 입으로 넘어가겠습니까 얼마나 속이 타고 안타깝겠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제 새끼니까 특별한 애정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특별합니다. 독특합니다. 이것은 독점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우리에게 주고 계십니다. 이 특별한 사랑에 대해서 요한일서 4장으로 넘어가서 다시 한번 확인해 봅시다.
요한일서 4장 8절로 10절 말씀입니다. 먼저 8절 끝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우리 강단 뒤에 붙여 놓은 말씀이 그대로 있지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다음에 9절과 10절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또 10절을 보십시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여러분, 이 말씀을 외우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 말씀을 마음에 담고 세상을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진짜 사랑은 여기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해서 사랑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이냐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제물로 내어놓고 사랑해 주신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자식이기 때문에 특별히 주시는 사랑이 바로 이런 사랑인 것입니다. 어거스틴이라고 하는 유명한 교부가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자기 감정을 써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인 것이고 변하는 일도 없습니다. 그가 우리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은 그 아들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이후가 아니고 오히려 세상이 창조되기 전, 우리가 무엇으로 존재하기도 전에 독생자와 한가지로 아들이 되게 해주시도록 사랑해 주신 그 때부터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우리를 눈여겨보시고 아예 '내 것'이라고 점을 찍으시고 그때부터 사랑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이 놀라운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평생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한 위대한 성자로 추앙되다가 어제 세상을 떠난 테레사 수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므로 한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몸을 맡기기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다할 줄을 모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보세요. 그 사랑에 나를 던져 보세요. 그 사랑은 끊임없이 내 안에서 솟아나서 강처럼 흐르고 흘러 많은 사람에게 주고 또 주어도 다함이 없는 사랑입니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이 그런 인생을 살다가 갈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그가 잘나서 그렇게 사랑을 쏟아 주면서 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만큼 엄청나고 특별한 것입니다. 이 사랑을 하나님이 자기 사람 된 우리에게 쏟아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있는 우리 다음으로 '이 세상'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에서 '세상'이라는 말은 '이 세상'을 말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 예수님이 매우 싫어하는 현장입니다. 또 예수님이 늘 안타깝게 여기시고 예수님께서 대단히 고통스러운 눈으로 보시던 세상입니다. 요한복음 9장 39절을 보십시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또 12장 31절을 보십시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와 같은 말씀에서와 같이 예수님은 '이 세상'이란 말을 심판에 대해 말씀하시던 중에 쓰신 적이 많습니다. 이 세상은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영역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죄로 부패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제 맘대로 사는 현장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도 양심의 가책조차 받지 아니하는 포악한 세상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수고와 슬픔만이 존재하고 그 속에서 한평생 살다가 한숨 쉬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떠나야 하는 그런 세상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핑크라고 하는 학자는 이렇게까지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셨지만 죄는 '이 세상'을 만들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과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주셨지만 죄가 들어와서 바로 '이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특별히 받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 세상을 사는 것은 모험입니다. 위험 부담이 상당히 따르는 나그네 생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마음놓고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을 사는 것이 훨씬 더 불편하고 고통스럽습니다.
오늘 1부 예배 때, 어느 형제의 간증을 들으면서 저는 참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 믿기 전이야 회사에서 마음대로 하던 것도 예수 믿고 나니 아무래도 양심상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하지 아니하면서 견디려고 하니까 사방에서 주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는 간증에서 자기의 답답한 심정을 토로를 했습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직장 다니시면 여러분들이 다 경험하는 일 아닙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 사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미국에 이민간 우리 교포들이 영어를 잘하고 시민권도 받고 그곳에서 20년, 30년 살아서 이제 그곳이 자기 고향인양 느껴지게 된 뒤에라도 그들의 마음에는 애환이 있습니다. 여전히 이방인 취급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역시 그들의 형편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죄 때문에 얼마나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는지 잘 알고 계십니다. 수고와 슬픔뿐인 이 세상에서, 눈물과 한숨, 고통이 떠날 날이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남모르게 울기도 하고 탄식하기도 하는 것을 주님이 너무 잘 알고 계십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억울한 일을 당해서 정말로 마음 둘 곳이 없어 방황하는 우리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해 상처 입은 가슴을 안고 어찌할 줄을 몰라 하는 나의 모습을 주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사랑 마지막으로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을 봅시다.
이 '끝까지'라는 말은 '생명이 다하기까지'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라는 말도 되고, 제자들이 이 세상을 사는 마지막 날까지라는 말도 됩니다. 더 나아가서는 어떤 형편에서든지 하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완전하게 사랑하시고 영원히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3년 동안 그렇게 예수님 뒤를 따라다니면서 열심히 배웠고, 그래도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수제자로 대접받던 사람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얼마나 그 사람을 믿었습니까 그러나 그는 자기가 급하니까 세 번이나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저 같으면 쳐다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쓸개가 있느냐고 한방 먹여 주고 싶을 정도 아닙니까 세상에 제일 괘씸한 사람이 사람을 배신하는 사람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모든 사람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나를 따르라." 다시금 그를 사랑의 관계로 불러 주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자리로 불러주셨습니다. 자기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때는 우리의 믿음이 병들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살다 보면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자리에 가서 서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그때도 주님은 여전히 가까이 계셔서 나를 향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끝까지 너를 사랑한다." 믿습니까 남이 모르는 골방에서 나 혼자 슬픔을 삭이며 한숨쉬고 고통스러워 할 때, 그때도 주님은 나를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이것이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서 머리는 하얗게 세고 힘은 빠지고 이제는 그렇게 따르고 존경하던 사람들도 한둘 다 떠나고 혼자 빈방 지키면서 자식들 눈치봐 가면서 남은 여생을 살아야 하는 피곤한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끝까지 너를 사랑한다." 남편을 먼저 잃었습니까 아내를 먼저 잃었습니까 자식을 먼저 보냈습니까 아니면 사랑하던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습니까 이런 일을 당해 마음 둘 곳이 없을 때에도 주님은 내 곁에 서서 "나는 끝까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음성을 들으십시오. 부요할 때만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쪼들리는 삶 속에서,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져 버린 삭막한 삶 속에서 허덕일 때도 주님은 찾아 오셔서 "그래도 난 널 끝까지 사랑해."하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끝까지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기도 많이 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 보려고 하는데도, 하나님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납니까' 하고 이해할 수 없는 때가 있지요 그런 때도 주님은 찾아 오셔서 "그래도 난 끝까지 너를 사랑해."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번에 캄보디아로 돌아가다가 가족이 몰살한 선교사가 있지 않습니까 오형석 선교사라는 분인데, 캄보디아에 가족 전체가 피를 뿌리고 순교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기사를 볼 때 '하나님 어떻게 하려고 그럽니까 왜 이러세요 왜 이러세요' 나도 모르게 마음에서 그런 소리가 튀어나옵니다. 그러다가도 저의 귀에 이런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래도 나는 오 선교사 가족을 사랑하고 있어.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거야." 그 선교사는 2주전에 제가 인도하는 교회갱신협의회 수련회에 참석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한국을 떠나면서 교회 앞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캄보디아는 선교의 오지입니다. 매우 위험하고 어려운 곳이기에 더욱 선교활동이 필요합니다. 선교가 자유롭고 평안한 곳이라면 나는 이곳을 선교지로 택하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얼마나 성실한 주의 종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아들과 함께 그곳에 선교의 피를 뿌렸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래도 나는 그들을 사랑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야곱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야곱이라면 어떻게 생명처럼 아끼던 아내가 일찍 세상을 떠나도록 하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런 비극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애를 낳다가 자기 사랑하는 처가 죽어 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사랑한다는데 말입니다. 훅 불면 날아갈까 싶어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아들이, 아침저녁으로 그 아들을 보는 재미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야곱에게 어떻게 그 아들이 하루아침에 실종이 되어 20년 동안 소식을 알 수 없는 그런 불행이 닥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너를 사랑해. 끝까지 사랑해."
로마서 8장 35절에 위대한 고백이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하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의 사랑은 '끝까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지금 누가 받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이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날마다 어떤 형편에 있든지 이렇게 외치십시오. "그래도 하나님은 끝까지 나를 사랑하셔!" 어떤 상황에 들어가 있더라도 그렇게 외치고 고백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래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셔. 끝까지 사랑하셔!" 계속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마귀가 도망갑니다. 우리 마음에 기쁨이 차 오를 것입니다. 하나님의 팔이 포근히 안아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여러분이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 같지 아니한 환경일수록 우리는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끝까지 나를 사랑하셔." 이 사랑을 가득히 담고 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다이애나의 경우를 보세요. 남편의 사랑을 놓치고 나니까 사람이 완전히 파괴돼버리지 않습니까 영국에서 어떤 장례식을 치루든 간에 우리는 참 불쌍한 사람이라고 보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독교 국가라고 할 만하고, 모든 장례식이 기독교 예식으로 치루어지는 나라지만 다이애나는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면 인격이 파괴됩니다. 생활이 파괴됩니다. 이런 사람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만 독차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몰라서 죽어 가는 사람들과 병들어 가는 사람들, 심지어 인격이 파괴되는 사람들, 삶이 무너져 내리는 사람들에게 찾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것입니다. '끝까지 사랑'이 이런 것입니다." 하고 대신 전해 주어 그들도 살아나고 고침 받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사랑은 우리를 치료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비극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절망이 없습니다. 원망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마음에 담고 부를 수 있는 찬송가가 하나 있습니다. 주보 제 4면에 보면 그 찬송 가사가 나와 있는데, 그 가사를 보고 찬양하면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한번 푹 젖어보는 귀한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 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자녀 삼으셨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서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하나님의 말씀이 확성기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여러분의 귓전에 울리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주자주 들어야 합니다. 자꾸 읽고 배워야 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자주 묵상하고 찬송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느낌이 오든 오지 않든 상관없습니다.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고, 생각하고, 고백하고, 찬양하다 보면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사랑의 바다에 두둥실 떠다니는 자기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어려운 설교이지만 하나님이 또 하라고 저에게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최근 많이 읽히는 책 가운데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라는 책이 있지 않습니까 아마 여러분 중에는 읽으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제가 그 책을 읽으면서 감동을 받은 내용이 있어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악성 췌장암에 걸려 6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절망적인 선고를 받고 면회도 금지된 병원 독방에서 응급조치를 받으면서 하루하루 죽음과 싸우는 아버지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이미 성인으로 의사 일을 하고 있는 아들입니다. 그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일어났던 이야기입니다. 아들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너무 고지식하고 완고하고 감정이 메말라 있어서 자식들에게 애정 표현 한번 제대로 한 적이 없었나 봅니다. 그리고 자식의 말을 잘 들어주지 않고 항상 자기 주장대로 해 버리니까 아들이 나중에는 아버지만 보면 가슴에서 분이 치밀어 올라서 참을 수가 없어지고, 결국은 둘 사이가 멀어져서 수십 년 동안 겉으로만 부자 사이지 내적인 사랑이 오고 가는 일이 없는 삭막한 관계를 유지해 왔나 봅니다. 그러나 이제 머지않아 돌아가실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아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병 문안을 와서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진정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싶어요." 그리고는 아버지를 꽉 껴안았습니다. 아들이 느닷없이 자기를 껴안으니까 아버지는 잔뜩 긴장해서는 머리를 뒤로 젖히면서 고슴도치처럼 빳빳하게 굳어 가지고 안기지를 않는 겁니다. 그렇지만 아들은 그 다음 번 병 문안 와서 다시 아버지를 안았습니다. 여전히 고슴도치처럼 빳빳이 안기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들의 마음에 더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이건 정말 소망이 없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러다가도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자기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버지를 마음으로 받아 들여야 하고, 아버지는 진정 마음으로 자기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안아주는 것 외에 달리 길이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병 문안을 갈 때마다 아버지를 안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아버지가 말을 잘 안 들으면 "아버지, 팔을 저에게 둘러보세요. 그리고 좀 꽉 껴안으세요. 그래요, 됐어요. 좀더 힘있게 껴안아보세요." 라고 하면서 아버지를 계속 유도했습니다. 아버지의 긴장된 자세가 풀어지는 데는 그로부터 몇 달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껴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점점 깊은 애정과 염려를 가지고 서로를 바라보는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2백 번째의 포옹이 있던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이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얘야, 널 사랑한다." 평생 아버지로부터 들어보지 못한 사랑의 표현, 애정의 표시를 처음으로 들은 것입니다. 해롤드 블룸필드라고 하는 그 아들 되는 사람이 쓴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는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저를 2백 번만 안아주셨나요 2천 번도 더 안아주셨지요. 하나님이 처음에 절 안아주실 때 제가 어떻게 했어요 뻣뻣했지요. 안기기 싫어 고개를 마구 쳐들었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2백 번이고, 2천 번이고, 지금까지 수없이 안아주셨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하나님, 사랑해요. 예수님 사랑해요.' 하는 말이 절로 나오지 않았어요
교회를 5년, 10년 다녔지만 하나님이 안아주려고 하면 몹시 안기려 하지 않는 힘든 사람들이 많지 않아요 반응이 없지 않아요 냉랭하지 않아요 고슴도치처럼 고개를 치켜들고 버티는 뻣뻣한 사람 많지 않아요 하나님, 저를 안아 주신 것처럼 2백 번도 좋습니다. 2만 번도 좋습니다. 주님 좀 안아 주세요. 사랑의교회를 좀 꼭 껴안아 주세요. 그래서 우리 입에서 '하나님 사랑해요.' 하는 말이 나올 수 있도록 해주세요." 라고 저도 모르게 이런 기도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무엇이 안아주는 것이며 무엇이 안기는 것입니까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듣고, 배우고, 묵상하고, 또 깨닫고, 또 나도 모르게 찬송하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안아주는 것이요, 안기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어색할지 모릅니다. 어떤 때는 감정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앞에 놓고,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사랑하시는가 하는 말씀을 2천 번이든 2만 번이든 계속 듣고 읽고 묵상하고 깨닫고 또 나중에 그것을 다시 회상하고 고백하고 찬양하다 보면, 드디어 하나님의 사랑에 내가 푹 젖어 들면서 나도 모르게 "하나님 사랑해요." 하고 고백하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사랑의교회에 그런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면서 설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은혜를 받기만 하면 이 필립 블리스라고 하는 찬송 작가가 쓴 행복한 찬송을 신나게 부를 수 있습니다. 신앙 생활하는 재미가 어디 있습니까 신앙 생활하는 사람의 행복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 사랑 받는 행복에 있는 것 아닙니까 할렐루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사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세상을 살면 얼마나 불행합니까 천국에야 들어갈지 모르지만 그 인생이 얼마나 불행합니까
블리스라는 사람이 지은 찬송 가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 귀하고 중하신 말씀일세/ 기쁘고 반가운 말씀 중에 날 사랑한단 말 참 좋도다/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즐겁고도 즐겁도다/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나는 참 기쁘다/ 주 예수 날 사랑하시오니 마귀가 놀라서 물러가네/ 주 예수 이렇게 사랑하시니 우리는 어떻게 보답할꼬/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즐겁고도 즐겁도다/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나는 참 기쁘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행복이요 재미인 것입니다. 제가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말씀을 여기저기 많이 찾아보았는데, 그 가운데서 요한복음 13장 1절은 우리에게 젖어 드는 감동이 특별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막연하게 그리기 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이 본문으로 설교할 시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13장 1절을 선택한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이제 제자들을 떠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하나님 나라로 다시 올라가실 날까지 불과
2, 3일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사랑하는 제자들을 두고 가야 한다는 사실 앞에 예수님도 마음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그가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1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것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고 계시는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12장 4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라." 그러니까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을 보는 것이고, 예수님이 하시는 행동을 보면 하나님도 저렇게 하시겠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제자기가 세상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시고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세상 끝 날까지 사랑하셨다, 마지막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을 보고 하나님의 사랑도 그러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을 잘 모르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데 어떻게 해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고 마음에 갈등이 생기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회의가 일어나는 형제자매가 있습니까 13장 1절을 마음에 잘 담아 두십시오. 그리고 집에 돌아가셔서 "세상에 있는 나를 사랑하시되 하나님은 끝까지 사랑하시느니라." 라는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고백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그 든든한 팔이 여러분을 꽉 껴안아주는 은혜를 맛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너는 내 것이라 여기서 우리가 먼저 살펴보아야 할 내용은 '자기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자기 사람들'이란 누구를 말할까요 일차적으로는 예수님이 3년 동안 데리고 다니면서 자기와 꼭 닮은 사람으로 만들어 보려고 무척 애를 쓰셨던 12제자와 그들과 함께 동거했던 수십 명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보다 넓게는 제자들 뿐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 모두를 일컫는 말입니다. 17장에 가면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어떻게 부릅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 이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1장 5절에서는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사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신 자들" 이라고 말씀합니다. 또 자기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에베소서 2장 4절을 보면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 고 말씀합니다. 이사야 43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이 "너는 내 것이라"고 못을 박은 사람들입니다. 또 이사야 49장 16절을 보면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고 했는데 손바닥에 새긴 사람들이 바로 '자기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사람들을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아 갈 자가 없다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요10:29). 이 얼마나 엄청난 특권을 입은 '자기 사람들'이란 바로 우리 모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자기 것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애정이기 때문에, 이것은 독특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것에 대한 애착은 하나님에게도 대단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모든 세상 사람을 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포괄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자기 것, 자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독특하고 특별하고 강합니다. 우리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자기 새끼에게는 그 애착이 얼마나 강합니까 지금 실종되어서 서울 사람들이 찾으려고 발 벗고 나선 박나리 양의 부모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디 잠인들 제대로 자겠습니까 음식인들 입으로 넘어가겠습니까 얼마나 속이 타고 안타깝겠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제 새끼니까 특별한 애정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특별합니다. 독특합니다. 이것은 독점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우리에게 주고 계십니다. 이 특별한 사랑에 대해서 요한일서 4장으로 넘어가서 다시 한번 확인해 봅시다.
요한일서 4장 8절로 10절 말씀입니다. 먼저 8절 끝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우리 강단 뒤에 붙여 놓은 말씀이 그대로 있지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다음에 9절과 10절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또 10절을 보십시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여러분, 이 말씀을 외우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 말씀을 마음에 담고 세상을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진짜 사랑은 여기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해서 사랑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이냐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제물로 내어놓고 사랑해 주신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자식이기 때문에 특별히 주시는 사랑이 바로 이런 사랑인 것입니다. 어거스틴이라고 하는 유명한 교부가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자기 감정을 써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인 것이고 변하는 일도 없습니다. 그가 우리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은 그 아들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이후가 아니고 오히려 세상이 창조되기 전, 우리가 무엇으로 존재하기도 전에 독생자와 한가지로 아들이 되게 해주시도록 사랑해 주신 그 때부터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우리를 눈여겨보시고 아예 '내 것'이라고 점을 찍으시고 그때부터 사랑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이 놀라운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평생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한 위대한 성자로 추앙되다가 어제 세상을 떠난 테레사 수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므로 한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몸을 맡기기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다할 줄을 모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보세요. 그 사랑에 나를 던져 보세요. 그 사랑은 끊임없이 내 안에서 솟아나서 강처럼 흐르고 흘러 많은 사람에게 주고 또 주어도 다함이 없는 사랑입니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이 그런 인생을 살다가 갈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그가 잘나서 그렇게 사랑을 쏟아 주면서 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만큼 엄청나고 특별한 것입니다. 이 사랑을 하나님이 자기 사람 된 우리에게 쏟아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있는 우리 다음으로 '이 세상'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에서 '세상'이라는 말은 '이 세상'을 말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 예수님이 매우 싫어하는 현장입니다. 또 예수님이 늘 안타깝게 여기시고 예수님께서 대단히 고통스러운 눈으로 보시던 세상입니다. 요한복음 9장 39절을 보십시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또 12장 31절을 보십시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와 같은 말씀에서와 같이 예수님은 '이 세상'이란 말을 심판에 대해 말씀하시던 중에 쓰신 적이 많습니다. 이 세상은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영역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죄로 부패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제 맘대로 사는 현장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도 양심의 가책조차 받지 아니하는 포악한 세상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수고와 슬픔만이 존재하고 그 속에서 한평생 살다가 한숨 쉬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떠나야 하는 그런 세상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핑크라고 하는 학자는 이렇게까지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셨지만 죄는 '이 세상'을 만들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과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주셨지만 죄가 들어와서 바로 '이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특별히 받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 세상을 사는 것은 모험입니다. 위험 부담이 상당히 따르는 나그네 생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마음놓고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을 사는 것이 훨씬 더 불편하고 고통스럽습니다.
오늘 1부 예배 때, 어느 형제의 간증을 들으면서 저는 참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 믿기 전이야 회사에서 마음대로 하던 것도 예수 믿고 나니 아무래도 양심상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하지 아니하면서 견디려고 하니까 사방에서 주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는 간증에서 자기의 답답한 심정을 토로를 했습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직장 다니시면 여러분들이 다 경험하는 일 아닙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 사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미국에 이민간 우리 교포들이 영어를 잘하고 시민권도 받고 그곳에서 20년, 30년 살아서 이제 그곳이 자기 고향인양 느껴지게 된 뒤에라도 그들의 마음에는 애환이 있습니다. 여전히 이방인 취급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역시 그들의 형편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죄 때문에 얼마나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는지 잘 알고 계십니다. 수고와 슬픔뿐인 이 세상에서, 눈물과 한숨, 고통이 떠날 날이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남모르게 울기도 하고 탄식하기도 하는 것을 주님이 너무 잘 알고 계십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억울한 일을 당해서 정말로 마음 둘 곳이 없어 방황하는 우리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해 상처 입은 가슴을 안고 어찌할 줄을 몰라 하는 나의 모습을 주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사랑 마지막으로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을 봅시다.
이 '끝까지'라는 말은 '생명이 다하기까지'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라는 말도 되고, 제자들이 이 세상을 사는 마지막 날까지라는 말도 됩니다. 더 나아가서는 어떤 형편에서든지 하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완전하게 사랑하시고 영원히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3년 동안 그렇게 예수님 뒤를 따라다니면서 열심히 배웠고, 그래도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수제자로 대접받던 사람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얼마나 그 사람을 믿었습니까 그러나 그는 자기가 급하니까 세 번이나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저 같으면 쳐다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쓸개가 있느냐고 한방 먹여 주고 싶을 정도 아닙니까 세상에 제일 괘씸한 사람이 사람을 배신하는 사람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모든 사람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나를 따르라." 다시금 그를 사랑의 관계로 불러 주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자리로 불러주셨습니다. 자기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때는 우리의 믿음이 병들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살다 보면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자리에 가서 서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그때도 주님은 여전히 가까이 계셔서 나를 향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끝까지 너를 사랑한다." 믿습니까 남이 모르는 골방에서 나 혼자 슬픔을 삭이며 한숨쉬고 고통스러워 할 때, 그때도 주님은 나를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이것이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서 머리는 하얗게 세고 힘은 빠지고 이제는 그렇게 따르고 존경하던 사람들도 한둘 다 떠나고 혼자 빈방 지키면서 자식들 눈치봐 가면서 남은 여생을 살아야 하는 피곤한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끝까지 너를 사랑한다." 남편을 먼저 잃었습니까 아내를 먼저 잃었습니까 자식을 먼저 보냈습니까 아니면 사랑하던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습니까 이런 일을 당해 마음 둘 곳이 없을 때에도 주님은 내 곁에 서서 "나는 끝까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음성을 들으십시오. 부요할 때만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쪼들리는 삶 속에서,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져 버린 삭막한 삶 속에서 허덕일 때도 주님은 찾아 오셔서 "그래도 난 널 끝까지 사랑해."하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끝까지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기도 많이 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 보려고 하는데도, 하나님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납니까' 하고 이해할 수 없는 때가 있지요 그런 때도 주님은 찾아 오셔서 "그래도 난 끝까지 너를 사랑해."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번에 캄보디아로 돌아가다가 가족이 몰살한 선교사가 있지 않습니까 오형석 선교사라는 분인데, 캄보디아에 가족 전체가 피를 뿌리고 순교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기사를 볼 때 '하나님 어떻게 하려고 그럽니까 왜 이러세요 왜 이러세요' 나도 모르게 마음에서 그런 소리가 튀어나옵니다. 그러다가도 저의 귀에 이런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래도 나는 오 선교사 가족을 사랑하고 있어.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거야." 그 선교사는 2주전에 제가 인도하는 교회갱신협의회 수련회에 참석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한국을 떠나면서 교회 앞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캄보디아는 선교의 오지입니다. 매우 위험하고 어려운 곳이기에 더욱 선교활동이 필요합니다. 선교가 자유롭고 평안한 곳이라면 나는 이곳을 선교지로 택하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얼마나 성실한 주의 종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아들과 함께 그곳에 선교의 피를 뿌렸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래도 나는 그들을 사랑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야곱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야곱이라면 어떻게 생명처럼 아끼던 아내가 일찍 세상을 떠나도록 하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런 비극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애를 낳다가 자기 사랑하는 처가 죽어 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사랑한다는데 말입니다. 훅 불면 날아갈까 싶어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아들이, 아침저녁으로 그 아들을 보는 재미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야곱에게 어떻게 그 아들이 하루아침에 실종이 되어 20년 동안 소식을 알 수 없는 그런 불행이 닥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너를 사랑해. 끝까지 사랑해."
로마서 8장 35절에 위대한 고백이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하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의 사랑은 '끝까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지금 누가 받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이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날마다 어떤 형편에 있든지 이렇게 외치십시오. "그래도 하나님은 끝까지 나를 사랑하셔!" 어떤 상황에 들어가 있더라도 그렇게 외치고 고백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래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셔. 끝까지 사랑하셔!" 계속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마귀가 도망갑니다. 우리 마음에 기쁨이 차 오를 것입니다. 하나님의 팔이 포근히 안아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여러분이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 같지 아니한 환경일수록 우리는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끝까지 나를 사랑하셔." 이 사랑을 가득히 담고 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다이애나의 경우를 보세요. 남편의 사랑을 놓치고 나니까 사람이 완전히 파괴돼버리지 않습니까 영국에서 어떤 장례식을 치루든 간에 우리는 참 불쌍한 사람이라고 보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독교 국가라고 할 만하고, 모든 장례식이 기독교 예식으로 치루어지는 나라지만 다이애나는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면 인격이 파괴됩니다. 생활이 파괴됩니다. 이런 사람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만 독차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몰라서 죽어 가는 사람들과 병들어 가는 사람들, 심지어 인격이 파괴되는 사람들, 삶이 무너져 내리는 사람들에게 찾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것입니다. '끝까지 사랑'이 이런 것입니다." 하고 대신 전해 주어 그들도 살아나고 고침 받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사랑은 우리를 치료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비극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절망이 없습니다. 원망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마음에 담고 부를 수 있는 찬송가가 하나 있습니다. 주보 제 4면에 보면 그 찬송 가사가 나와 있는데, 그 가사를 보고 찬양하면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한번 푹 젖어보는 귀한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 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자녀 삼으셨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서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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