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와 비둘기 (창8:6-12)
본문
홍수가 시작되기 일주일전에 미리 노아 가족을 방주 안으로 들어가게 하므로 노아로 하여금 미지에 대한 견고한 신뢰를 스스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한다. 그 방주안에는 노아 식구 이외에도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함께 동승해 있다. 많은 짐승들과 새들을 생각할 때 유독 주목을 끄는 점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러한 구별조치이다. 거룩과 비거룩이 방주에 함께 소속되어 있다. 방주가 하나님의 무서운 분노 안에서도 지탱할 수 있었던 요인은 어디에 있는가 나중에 방주 안에 있는 생물들이 토하듯이 방주 밖으로 나왔을 때 그들의 생존은 어디에 근거하여 유지될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정결한 짐승과 부정결한 짐승이 함께 방주 안에 들어 있는 이유는 방주가 지니는 구원의 의미를 새겨주기 위한 조치였다. 즉 노아가 방주 밖으로 나와서 행한 제사에서 정결한 새를 제물로 삼아 제사 드렸다는 것은 정결한 것의 희생과 헌신으로 부정결한 것까지 구원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 향긋한 제물의 냄새를 하나님이 맡으시고 다음과 같은 선언을 하신다.
인간이란 날 때부터 악하니 아예 기대를 하지 않겠다. 그렇지만 노아가 바친 제물의 정결성으로 인하여 다시는 이 세상을 그 전처럼 저주하지 않겠다. 다시 자연의 질서는 회복되리라! 노아 언약이란 인간의 비거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서 비롯되었다. 땅은 함께 고통당했는데 땅의 중보자라고 할 수 있는 노아의 등장으로 이 문제는 해결된 셈이다. 하지만 그 언약실행에 있어 정결한 짐승의 죽임이 그 가운데 끼어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언약의 모든 의의를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희생이 없는 사랑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 그 희생된 자는 같은 비거룩에 속한 것이 아니라 비거룩과 전혀 상관없는 존재이다. 거룩하기에 하나님께 소속된 존재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장래 나타나는 모든 언약의 정형(定形)이 된다. 언약이란 단순히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이요 수단이라고 여기지 말자 언약이란 하나님이 우리 죄악된 세상속에 자기자리를 마련하는 조치다. 비거룩으로 인해 저주받은 그 자리를 하나님은 자기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낮아지시고 또 찾아오신다. 꼭 그렇게 해야 되시는 이유는 인간의 구원이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 호소하는 모습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곁에 두고서도 그것을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완악하며 자기 힘으로 비거룩을 극복하여 이 땅에서 위대한 존재로 군림하려고 한다. 이 모든 시도는 신이 되고 싶어하는 타락된 아담의 형상을 날 때부터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약사상은 그것과 철저히 대립되고 상충된다.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손을 내밀며 부르짖는 그 모습속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은 극대화되고 언약을 통해 하나님은 최고의 영광을 취하시는 것이다. 인간들은 죄악된 세상속에서 고통하는 하나님과 함께 동참되어야 한다. 그 고통은 인간의 죄악으로 일그러진 세상과 왜곡된 진리관으로 배척되어 나타난 현실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정신때문에 예수님과 상응하는 고통속에 놓여 있는 것이 바로 교회이다. 이러한 고난의 모습으로 교회가 존립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중보자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이러한 교회의 본연의 자세를 회피하는 식의 목회가 눈에 띄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세상적인 권력으로 이 고난을 자기쪽에서 해소 시켜버리려고 한다. 어쩌면 고난없는 것이 정상인 것처럼 가르친다. 고난이 오는 것을 하나님의 징벌로 간주하려고 하고 반대로 고난이 없이 만사형통한 것을 하늘이 가져다 준 축복이라고 의식화시킨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사람에게 밟힌다는 엄연한 사실이 현실화되는 때가 바로 교회가 이땅에서 사라지는 때이다. 교회가 앞장서서 예수님을 또 다시 못박을 수는 없지 아니한가! 정리 설명:창 7-8장 왜 부정한 것이 방주에 들어가야 하는가 나중에 밝혀진다. 정결한 것이 희생됨은 장차 흠없는 예수님의 희생을 의미한다. 정결한 것을 희생함으로 말미암아 부정한 것도 안식의 나라에 도달 할 수 있다는 것의 정보를 담기 위해서 이다. 누가 희생될 것을 보여 주는 것이 방주의 의미이다. 8장 20-21 흠없는 제물을 바쳐라 그리하면 내가 새언약을 세운다. 무지개 언약이다. 계절과 날씨의 변화를 통하여 농사가 잘 되는 이유는 흠없는 제물의 희생 덕분이다. 계시의 통로는 하나이다. 주의 이름이다. (엡4장) 노아 가족의 소원은 빠져 나와서 새 땅에서 사는 것이다. 방주에 들어갔던 날짜와 이스라엘의 국가 성립의 시작을 나타내는 것과 동일하다. 방주 안에서의 내용은 이 땅을 떠나고자 하는 일기장이다. 우리도 매일같이 이 땅을 떠나고자 하는 일기를 써야 한다.
창세기 9장 그 다음은 9장입니다.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창9:6) 이것은 보복개념입니다. 누가 보복합니까 하나님이 보복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이 육체가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노아 언약으로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흠없는 새를 잡아서 만든 작품이기 때문에 어느 놈이든 내가 만든 사람 죽이면 하나님이 보복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셨는데 인간이 왜 인간을 죽이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선인과 악인에게 햇빛을 주셨는데 왜 인간이 뭐라고 하느냐는 말입니다. 죽일 것 같으면 하나님이 죽인다는 것입니다. 김일성 죽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인다는 것입니다. 김일성에게도 햇빛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김일성이 햇빛을 보고 죽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노아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이 김일성이를 살게 했는데 김일성이를 죽으라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김일성이도 죽어야 되고 우리도 죄 때문에 하지만 다만 우리는 수치를 예수님의 피로 가려주었기 때문에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같이 못난 인간들이 같이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는 긍휼의 그릇이고 그들은 진노의 그릇이기 때문에 같이 사는 것입니다. 못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같이 못난 인간인데 우리는 공짜로 은혜를 얻었으면 고맙다고 해야지 ‘나는 잘났는데 저는 못났습니다. 때려 죽여 버리십시오.’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땅은 안식의 땅입니다. 흠없는 생피의 땅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땅은 제물의 피가 있기 때문에 죄있는 인간이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악한 놈 선한 놈 주님이 다 다스릴 것이기 때문에 우리도 못난 놈이기 때문에 수치를 가린 것만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증인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잘남이나 자기의 성화의 증인이 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못난 인간입니다. 다만 가려진 것뿐입니다.
모든 공로는 주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안 죽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 보면 안식일 안 지킨다고 죽입니다. 그 때는 왜 죽입니까 그 때는 하나님이 죽이라고 한 놈은 죽였습니다. 그것은 사형제도입니다. 공연히 법과 제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디모데전서에도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공연히 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3장에 공연히 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위하여 세운 제도와 법에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저는 그 사형제도를 지금보다 더 엄격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죽이라고 한 놈은 죽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레위기 보면 부모가 자식을 제대로 관리 못하고 그 자식이 부모에게 대들 때는 공동체에서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자녀 교육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전화 한 통화만 하면 그런 사람은 인간을 만들어 놓습니다. 요즘 매맞는 아내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답답합니다. 남편을 사랑하면 그 문제는 해결됩니다. 남편을 사랑 안 하고 자꾸 자녀를 사랑하니까 매맞는 자기 자신을 극대화하고 위대하게 보는 것입니다. 때리는 남편을 위해서 밥을 해주는 나는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가 하고 완전히 공주병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은 기가 살아서 술먹고 더 팹니다. 사람은 자꾸 약한 사람을 이용합니다. 그러나 남편을 사랑하면 되는 것입니다. 신고하고 넣어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문제입니다. 때리는 남편 신고하세요. 그것이 사랑입니다. 여자들이 그것을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이 자존심이 깨질까봐 겁나서 그것을 못합니다. 자신이 못난 여자인 것을 모르고 그냥 얻어맞으면 되지. 그러고 그냥 있으니까 문제는 해결 안 됩니다. 가정에 그렇게 폭력이 난무하면 아내가 또 폭력을 씁니다. 가정에서 문제를 해결 안 하니까 그 인간이 잘난 척하다가 또 나가서 남의 여자 건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내가 때리거든 가차없이 신고해 주세요. 5월달의 가정의 표어는 ‘신고합시다.’입니다. 자수하여 광명을 찾읍시다. 5월은 신고의 달입니다. 이것이 가정의 달입니다.
최후의 가정의 달은 신고의 달입니다. 고려장하는 달입니다. 아버지 지게 지고 갖다 버리세. 최고의 사랑입니다. 조금 아프다고 호스 끼워서 한 달에 백만 원씩 내고 병원에 넣지 말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부모 살아있을 때 내가 이만큼 부모님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과시하려고 그렇게 합니다. 인간은 순 이기주의입니다. 사람피를 흘리지 말라는 것이 법칙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형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셈의 하체 가리기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수치를 가렸습니다. 담요로 덮어주는 것입니다. 공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덮어주는 것을 히브리어로 카파르라고 하는데 법궤를 다룰 때 이런 용어를 씁니다. 로마서 3장 25절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간과하신다는 말은 못본 척 덮어 주는 것입니다. 그냥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원어로 도배한다고 합니다. 도배라고 하는 것은 째는 것이 아니고 거기다가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 죄를 위에서 발라버리는 것입니다. 빵은 크림이 아니지만 크림이 속해 있다고 갑자기 빵이 크림빵이 됩니다. 크림빵이 되어서 갑자기 고가의 값을 받는 것입니다. 크림 때문에 갑자기 크림빵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난 주일 저녁에 설교했습니다. 그것을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콘크리트 지붕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콘크리트 집이 되는 것입니다. 콘크리트 집 위에 있으면 콘크리트 집 반석에 있는 집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콘크리트 위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콘크리트 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어머니를 나오미에서 마라로 바꾸신 하나님을 왜 그렇습니까 노아의 하체를 가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상하게 하체를 벗었습니다. 더우면 위를 벗지 말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하는데 내가 해보니까 안 아픈 손가락이 있습니다. 이것은 덜 아프고 이것은 더 아픕니다. 그런 식으로 해버리면 창세기 9장의 노아는 정말 부모답지 못한 부모입니다. 세상에 같은 자식인데 저주를 합니까 호로부모 아닙니까 부모교육을 잘 시켜놔야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한다고 합니다. 특히 엘리 제사장을 보고 부모자식이 다 망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은 자식을 잘 키워서 잘했습니까 사무엘의 자식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개판입니다. 또 흔히 이야기하기를 룻은 시어머니를 모셨으니 룻의 효를 본받으라고 합니다. 룻이 본 것은 시어머니를 본 것이 아니고 시어머니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그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시어머니의 이름이 나오미입니다.
그런데 기쁨이라는 뜻을 가진 나오미가 쓰다라는 의미를 가진 나오미로 바뀝니다. 바로 그렇게 만든 하나님을 자신의 주로 섬기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룻의 믿음이었습니다. 역시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의 유교적인 효가 들어설 자리가 한 자리도 없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면 이 땅에서 오래 살리라고 하는데 그것은 부모를 공경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주의 증인이 되어서 오래 살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십계명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 당시의 부모는 주의 복음의 전달자입니다. 결국 성경에서 내린 결론은 네가 사랑하면 부모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이웃이 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에 보면 나그네를 대접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에 보면 과부가 자식이 있거든 교회가 도와주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은 자식에게 과부된 어미를 도와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증인노릇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효도라는 개념은 유교적인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의 몸이 성전입니다. 그래서 노아에 의해서 세 식구가 모든 민족이 됩니다.
그렇다면 안식의 땅에서 어떤 민족이 번창하겠습니까 안식에 적합한 씨, 즉 하나님의 덮어주는 은총을 아는 자만 존재하고 나머지는 모두 멸망한다는 것이 기정 사실입니다. 기정 사실이지만 그 가운데 투쟁이 발생됩니다. 그 투쟁을 저와 여러분들이 지금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덮어주는 은혜를 모독하고 자기 행위와 노력과 자기 열성에 기대를 거는 이 함과 가나안 같은 사고방식에 대해서 우리는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철저하게 공격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역사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뜻이 하나님의 전사입니다. 싸우라는 말입니다. 어떤 싸움입니까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그 교리와 싸우라는 말입니다. 교회에서 전도 많이 하고 헌금 많이 하라는 이것과 싸우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영생을 준 사람들입니다. 전도하고 헌금해서 재산 모아서 교회 세우는 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 것이 몽땅 불나서 사라져도 교회는 여전히 남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 몸이 성전입니다. 비오면 우산쓰고 예배드리면 됩니다. 조금 불편은 합니다. 불편하다고 해서 지옥 갑니까 우산쓰고 하면 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지붕 고치면 될 것인데 뭐하러 우산 쓰고 하느냐고 합니다. 자기가 지붕 고친다고 합니다. 그것은 고치라는 말입니다. 날이 더운데 에어컨 하나 들여놓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들여놓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에어컨 들여놓는다고 천당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안 한다고 지옥가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란 인간 자체가 성전입니다. 그 외부의 것은 필요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쫓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예배당 의자보다도 그냥 바닥에 앉아서 예배드리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은 모든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덮어줌의 은혜를 받는 사람만 길이 무궁할 것입니다. 시편 1편 마지막에 나옵니다.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아무리 낄려고 해도 안 됩니다.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습니다. 철저하게 공짜로 주신 은혜만을 고이고이 빈 마음에 간직하는 사람, 그 사람만이 영토로 이 땅에서 살 것입니다. 창세기 10-11장 원수의 정수리를 치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렇다면 각각의 민족들이 다른 민족을 학살시키려 하는 동기가 있고, 그 계획표가 있을 것입니다. 함과 가나안은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영웅주의입니다.
그렇다면 셈과 야벳은 비영웅주의입니다. 이들은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함과 가나안은 사람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번성은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주받은 족속의 특징입니다. 반대로 축복받은 족속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이끌어간다는 것입니다. 호두까듯이 깨보니까 한쪽은 영웅이 들어 있고, 다른 한쪽은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서로서로 다릅니다. 이 두 민족이 서로 섞여 있다는 것이 제일 희한합니다. 둘이 섞여 있다는 말은 한쪽은 압박하는 쪽이고, 한쪽은 압박을 받는 쪽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는 고난을 주는 쪽이고 다른 하나는 고난을 받는 쪽입니다. 그러나 고난받는 쪽이 오히려 역으로 승리합니다. 그것이 창세기 3장 15절 약속을 이루어 나가는 모습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서로 머리를 깨뜨리며 발꿈치를 무는 관계입니다. 말이 나왔으니까 정수리를 치는 대목에 대하여 성경을 찾아봅시다. “그 원수의 머리 곧 그 죄과에 항상 행하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치시리로다”(시68:21) 정수리를 치는 것은 사람의 몫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의 몫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몫으로 남겨 두자는 것입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심판은 주께 있습니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 할지로다”(시68:19) 구원은 짐을 대신 져주시는 것입니다. 그 짐이 사업이 안 되는 것이라든지, 부도난 중소기업이 짐입니까 환경문제입니까 짐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21절에 나오는 죄입니다. 죄라는 악마가 우리에게 죄라는 문제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 짐을 깨버렸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먼저 우리가 무엇엔가 잡혀 있다는 것이 확정적으로 전제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잡은 그 주동자의 정수리를 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기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구원관입니다. 출애굽 사상입니다. 어떤 실체에 잡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이웃집에 깡패가 사는데 맨날 우리집 앞에 와서 죽인다! 죽인다! 하고는 돌아갑니다. 얼마나 공포 분위기이겠습니까 그 때 하나님이 그 깡패의 정수리를 쳐버리니까 죽인다! 하는 게 없습니다. 그 전에는 악마가 매일 너 죽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사망이라는 깡패가 옆집에 살면서 늘 우리를 두렵게 했는데 예수님이 그의 정수리를 치심으로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게 생명이고 영생입니다.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저에게 임하리라 저는 어리석은 자식이로다 때가 임하였나니 산문에서 지체할 것이 아니니라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호13:13-14)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저에게 임하리라’ 이 말은 아이는 낳아야 하겠는데 낳으면 아이도 자신도 다 죽는 것입니다. 빼도 박도 못하고난처한 입장에 놓인 것입니다. 괴로운 입장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은 받아야 하겠습니다. 태아가 엄마의 모태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구원이듯이 나오기는 나와야 하겠는데 나올 수는 없습니다. 빠져 나오고 싶은 것은 우리의 희망 사항인데 빠져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때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시고 사망의 너의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너는 멸망을 받을지어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정수리를 누가 쳐야 합니까 주님께서 쳐주셔야 합니다. 쳐주신 분에 의하여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아닌 주님을 믿는 자기 믿음을 과시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치는 게 아니고 자기들이 열 불내서 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요즘은 찬송가나 가스펠 송도 그냥 부르면 신명이 안 나는가 봅니다. 노래방에서 나오는 음악처럼, 연안부두에 아주머니들 놀러 갈 때 나오는 노래처럼 빨리 불러야 신명이 납니다. 그 가락으로 찬송가와 복음성가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찬송하면 예수님이 빨리 내려오십니까 그게 마귀에게 빠진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주님이 치신다는 것은 믿지도 않고 내가 열불이 나야 마귀의 정수리가 깨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밋밋하면 사건이 안 일어난 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욱 더 예수를 바로 믿는 사람을 더 큰 고난으로 밀어넣는 것입니다. 믿음도 없다 하고, 냉냉하다 하고, 병고침받는 기적도 없다고 비난합니다. 예수님을 재현하는 사람을 그런 식으로 핍박하는 것입니다. 부흥회 시작할 때는 꼭 정글북에 온 것처럼 두둘겨댑니다. 인디언과 아프리카인들의 춤은 생체리듬을 일률적으로 상승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걸 그대로 흉내내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목회성공했다 말합니다. 그런 걸 또 배우려고 합니다. 교인들은 그런 것이 없으면 신앙생활을 안 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자기의 감정을 믿는 것입니다. 그들이 믿는 예수는 가짜입니다. 여러분 집에 친구가 찾아오면 왔니 하면 될텐데 호들갑을 떨어야 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감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목사가 잘못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감정의 만남도 아니고 사실은 죄와의 만남입니다. 이 세상 것을 좋아하는 죄와의 만남입니다. 주님을 믿는 게 아니고 주님을 믿는 자기 믿음을 과시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런 교만과 이기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 세상을 너무 좋아합니다.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자존심이 너무 셉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죽으셨다는 것을 알고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자기의 자존심, 이기주의, 욕심이 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선한 문화를 이뤄서 이 땅에서 더 잘 살고 싶어하는 것, 환경 나쁘면 하나님 나라 가면 될텐데 왜 환경을 고쳐서 이 땅에서 더 살고 싶어하는 것입니까 그게 전부 죄라고 하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통해 왜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고, 처참한 모습으로 죽으셔야 했는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니고 비참하게 죽으신 그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는데 어떻게 달리 아버지가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따로 있고 하나님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비참하고 하나님은 멋쟁이고 그런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거지처럼 오고 하나님은 양복 입고 오십니까 나비 넥타이 매고, 턱시도 입고 옵니까 심판주입니다. 다만 예수님이 그런 모습으로 오시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대신 심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무서운 심판주구나 하는 것을 발견해야 자기의 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처참한 모습, 인자가 머리 둘 곳도 없이 쫓겨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이 안 됐다 하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의 무서운 심판을 거기서 발견해야 합니다. 그 심판은 내 죄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능력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주여, 월드컵을 우리 나라에 이러고 있는데 어떤 청년이 교회 마당에 죽어 넘어져 있습니다. 그 청년을 볼 때 2002년 월드컵은 우리 나라에서 개최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저렇게 죽었구나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죄로 연결되지 않는 하나님은 전부 가짜다 보시면 됩니다. 그냥 놀이기구라고 보면 됩니다. 지나가는 바이킹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일종의 정신적인 유원지입니다. 죄가 없어졌습니다. 날마다 부족함을 깨닫고 회개하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그냥 한바탕 놓아 보세 하는 것입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불교는 부처의 고난을 받아들이는 것인데 현대 불교는 노는 것입니다.
무서운 죄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 정수리를 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나안과 함 족속을 칠 때는 결국 가나안과 함 족속을 지배하고 있는 배후 조종자, 요한계시록을 보면 그가 악마로 되어 있습니다. 뱀, 용, 사탄의 정수리를 칠 때 모든 역사의 대단원의 막은 내리게 됩니다. 연극은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 땅에서 살았던 것은 잠깐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이 승리한 것 같고 영웅과 위대한 지도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참된 지도자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흔히 신학교에서 민족과 국가를 위해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들을 하지요. 그런 사람들은 알고 보면 우상 숭배자입니다. 성경에서는 사회라는 게 없습니다. 나와 내 이웃밖에 없습니다. 이웃은 누구를 지도하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면 됩니다.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 영도자가 되지 말고 옆사람이 필요로 할 때 그냥 도움이 되어 주면 됩니다. 또 도움을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을 지도자로 여기면 안 됩니다. 그 이웃은 항상 생성되었다가 소멸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정한 이웃을 원하고 있지 위대한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자리는 예수님이 차지하셨고, 그분 한 분이면 족한 것입니다. 자꾸 남에게 착한 일을 해서 튀려고 하지 마세요. 사람이 남에게 착한 일을 하는 것도 은혜지만 남에게 해코지 안한 것도 은혜인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잘 나서 해코지 안한 것이 아닙니다. 차를 탄다든지 오토바이를 타다가 남을 다치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제가 한 번은 기차를 탔는데 그 넓은 기차칸에서 한 사람이 기침을 하는 것입니다. 9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한 사람 때문에 얼마나 고통을 당하는지 모릅니다. 본인은 또 얼마나 안타까워하는지 모릅니다. 밤기차를 타면 직장인들이 피곤해서 눈을 붙이려고 하는데 애가 우는 것입니다. 두세 시간을 그렇게 울어대는 것입니다. 사람이 남에게 일부러 해코지를 할 때도 있지만 실수로도 사고내서 남을 죽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런 경우가 없었습니까 없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잘 나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은혜로 내 갈길을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식구가 열 명이면 얼마나 사람들이 나로 인하여 피해를 받습니까 남들은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자기는 동아일보 만화까지 다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잘난 것도 그 당시에 하나님이 잘 나게 해주어야 잘날 수 있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돈을 주워 주인에게 돌려줬다고 했을 때도 마침 그 돈이 내 앞에 있었으니까 그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보트가 뒤집어졌는데 할머니가 물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엄두도 못 내고 있는데 어떤 용감한 남자가 물에 뛰어들어 구해 주었습니다. 남들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 물었더니 본인은 씩씩거리면서 어떤 놈이 나를 밀어 넣었어! 하고 호통을 치는 것입니다. 사람이 타고난 환경이 다 다르기 때문에 착한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환경을 갖는 사람도 있고,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런 것을 가지고 너 훌륭하다 안 훌륭하다 말씀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네가 얼마나 위대하게 이름을 날리느냐 하는 게 아닙니다. 네 이웃에게 얼마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 주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도 자기를 높이지 않고 그런 환경을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기차가 달려옵니다. 어린애가 철길에 놓여 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들어 어린애도 건지고 자기도 구사일생으로 살았습니다. 남들이 다 그를 칭찬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직업이 그 때부터 어린애 구하는 일이 되겠습니까 우연히 아이가 그곳에 있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고 기관차가 그곳으로 달려오게 하신 이도 하나님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실수를 안 한다 해도 실수를 안한 것은 자기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안 하게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은 깜빡깜빡 가버립니다. 항상 이것을 생각하면 다른 것은 잊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친구 열 명에게 전화를 하는데 아홉에게는 하고 한 명에게는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 때는 한 명이 항의합니다. 그럴 수 있느냐고 따지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 했잖아요.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심음과 거둠과 웃을 때 울 때가 있는데 그 때는 하나님에 의해서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영웅, 민중의 지도자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민중의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들 참 많은데 그 모든 사람들이 민중의 지도자, 사무엘과 같은 지도자가 다 되어 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요즘 교계 지도자는 마귀가 하지 다른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란 날 때부터 악하니 아예 기대를 하지 않겠다. 그렇지만 노아가 바친 제물의 정결성으로 인하여 다시는 이 세상을 그 전처럼 저주하지 않겠다. 다시 자연의 질서는 회복되리라! 노아 언약이란 인간의 비거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서 비롯되었다. 땅은 함께 고통당했는데 땅의 중보자라고 할 수 있는 노아의 등장으로 이 문제는 해결된 셈이다. 하지만 그 언약실행에 있어 정결한 짐승의 죽임이 그 가운데 끼어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언약의 모든 의의를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희생이 없는 사랑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 그 희생된 자는 같은 비거룩에 속한 것이 아니라 비거룩과 전혀 상관없는 존재이다. 거룩하기에 하나님께 소속된 존재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장래 나타나는 모든 언약의 정형(定形)이 된다. 언약이란 단순히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이요 수단이라고 여기지 말자 언약이란 하나님이 우리 죄악된 세상속에 자기자리를 마련하는 조치다. 비거룩으로 인해 저주받은 그 자리를 하나님은 자기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낮아지시고 또 찾아오신다. 꼭 그렇게 해야 되시는 이유는 인간의 구원이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 호소하는 모습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곁에 두고서도 그것을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완악하며 자기 힘으로 비거룩을 극복하여 이 땅에서 위대한 존재로 군림하려고 한다. 이 모든 시도는 신이 되고 싶어하는 타락된 아담의 형상을 날 때부터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약사상은 그것과 철저히 대립되고 상충된다.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손을 내밀며 부르짖는 그 모습속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은 극대화되고 언약을 통해 하나님은 최고의 영광을 취하시는 것이다. 인간들은 죄악된 세상속에서 고통하는 하나님과 함께 동참되어야 한다. 그 고통은 인간의 죄악으로 일그러진 세상과 왜곡된 진리관으로 배척되어 나타난 현실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정신때문에 예수님과 상응하는 고통속에 놓여 있는 것이 바로 교회이다. 이러한 고난의 모습으로 교회가 존립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중보자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이러한 교회의 본연의 자세를 회피하는 식의 목회가 눈에 띄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세상적인 권력으로 이 고난을 자기쪽에서 해소 시켜버리려고 한다. 어쩌면 고난없는 것이 정상인 것처럼 가르친다. 고난이 오는 것을 하나님의 징벌로 간주하려고 하고 반대로 고난이 없이 만사형통한 것을 하늘이 가져다 준 축복이라고 의식화시킨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사람에게 밟힌다는 엄연한 사실이 현실화되는 때가 바로 교회가 이땅에서 사라지는 때이다. 교회가 앞장서서 예수님을 또 다시 못박을 수는 없지 아니한가! 정리 설명:창 7-8장 왜 부정한 것이 방주에 들어가야 하는가 나중에 밝혀진다. 정결한 것이 희생됨은 장차 흠없는 예수님의 희생을 의미한다. 정결한 것을 희생함으로 말미암아 부정한 것도 안식의 나라에 도달 할 수 있다는 것의 정보를 담기 위해서 이다. 누가 희생될 것을 보여 주는 것이 방주의 의미이다. 8장 20-21 흠없는 제물을 바쳐라 그리하면 내가 새언약을 세운다. 무지개 언약이다. 계절과 날씨의 변화를 통하여 농사가 잘 되는 이유는 흠없는 제물의 희생 덕분이다. 계시의 통로는 하나이다. 주의 이름이다. (엡4장) 노아 가족의 소원은 빠져 나와서 새 땅에서 사는 것이다. 방주에 들어갔던 날짜와 이스라엘의 국가 성립의 시작을 나타내는 것과 동일하다. 방주 안에서의 내용은 이 땅을 떠나고자 하는 일기장이다. 우리도 매일같이 이 땅을 떠나고자 하는 일기를 써야 한다.
창세기 9장 그 다음은 9장입니다.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창9:6) 이것은 보복개념입니다. 누가 보복합니까 하나님이 보복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이 육체가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노아 언약으로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흠없는 새를 잡아서 만든 작품이기 때문에 어느 놈이든 내가 만든 사람 죽이면 하나님이 보복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셨는데 인간이 왜 인간을 죽이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선인과 악인에게 햇빛을 주셨는데 왜 인간이 뭐라고 하느냐는 말입니다. 죽일 것 같으면 하나님이 죽인다는 것입니다. 김일성 죽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인다는 것입니다. 김일성에게도 햇빛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김일성이 햇빛을 보고 죽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노아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이 김일성이를 살게 했는데 김일성이를 죽으라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김일성이도 죽어야 되고 우리도 죄 때문에 하지만 다만 우리는 수치를 예수님의 피로 가려주었기 때문에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같이 못난 인간들이 같이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는 긍휼의 그릇이고 그들은 진노의 그릇이기 때문에 같이 사는 것입니다. 못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같이 못난 인간인데 우리는 공짜로 은혜를 얻었으면 고맙다고 해야지 ‘나는 잘났는데 저는 못났습니다. 때려 죽여 버리십시오.’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땅은 안식의 땅입니다. 흠없는 생피의 땅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땅은 제물의 피가 있기 때문에 죄있는 인간이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악한 놈 선한 놈 주님이 다 다스릴 것이기 때문에 우리도 못난 놈이기 때문에 수치를 가린 것만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증인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잘남이나 자기의 성화의 증인이 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못난 인간입니다. 다만 가려진 것뿐입니다.
모든 공로는 주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안 죽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 보면 안식일 안 지킨다고 죽입니다. 그 때는 왜 죽입니까 그 때는 하나님이 죽이라고 한 놈은 죽였습니다. 그것은 사형제도입니다. 공연히 법과 제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디모데전서에도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공연히 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3장에 공연히 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위하여 세운 제도와 법에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저는 그 사형제도를 지금보다 더 엄격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죽이라고 한 놈은 죽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레위기 보면 부모가 자식을 제대로 관리 못하고 그 자식이 부모에게 대들 때는 공동체에서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자녀 교육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전화 한 통화만 하면 그런 사람은 인간을 만들어 놓습니다. 요즘 매맞는 아내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답답합니다. 남편을 사랑하면 그 문제는 해결됩니다. 남편을 사랑 안 하고 자꾸 자녀를 사랑하니까 매맞는 자기 자신을 극대화하고 위대하게 보는 것입니다. 때리는 남편을 위해서 밥을 해주는 나는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가 하고 완전히 공주병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은 기가 살아서 술먹고 더 팹니다. 사람은 자꾸 약한 사람을 이용합니다. 그러나 남편을 사랑하면 되는 것입니다. 신고하고 넣어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문제입니다. 때리는 남편 신고하세요. 그것이 사랑입니다. 여자들이 그것을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이 자존심이 깨질까봐 겁나서 그것을 못합니다. 자신이 못난 여자인 것을 모르고 그냥 얻어맞으면 되지. 그러고 그냥 있으니까 문제는 해결 안 됩니다. 가정에 그렇게 폭력이 난무하면 아내가 또 폭력을 씁니다. 가정에서 문제를 해결 안 하니까 그 인간이 잘난 척하다가 또 나가서 남의 여자 건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내가 때리거든 가차없이 신고해 주세요. 5월달의 가정의 표어는 ‘신고합시다.’입니다. 자수하여 광명을 찾읍시다. 5월은 신고의 달입니다. 이것이 가정의 달입니다.
최후의 가정의 달은 신고의 달입니다. 고려장하는 달입니다. 아버지 지게 지고 갖다 버리세. 최고의 사랑입니다. 조금 아프다고 호스 끼워서 한 달에 백만 원씩 내고 병원에 넣지 말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부모 살아있을 때 내가 이만큼 부모님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과시하려고 그렇게 합니다. 인간은 순 이기주의입니다. 사람피를 흘리지 말라는 것이 법칙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형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셈의 하체 가리기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수치를 가렸습니다. 담요로 덮어주는 것입니다. 공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덮어주는 것을 히브리어로 카파르라고 하는데 법궤를 다룰 때 이런 용어를 씁니다. 로마서 3장 25절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간과하신다는 말은 못본 척 덮어 주는 것입니다. 그냥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원어로 도배한다고 합니다. 도배라고 하는 것은 째는 것이 아니고 거기다가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 죄를 위에서 발라버리는 것입니다. 빵은 크림이 아니지만 크림이 속해 있다고 갑자기 빵이 크림빵이 됩니다. 크림빵이 되어서 갑자기 고가의 값을 받는 것입니다. 크림 때문에 갑자기 크림빵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난 주일 저녁에 설교했습니다. 그것을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콘크리트 지붕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콘크리트 집이 되는 것입니다. 콘크리트 집 위에 있으면 콘크리트 집 반석에 있는 집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콘크리트 위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콘크리트 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어머니를 나오미에서 마라로 바꾸신 하나님을 왜 그렇습니까 노아의 하체를 가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상하게 하체를 벗었습니다. 더우면 위를 벗지 말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하는데 내가 해보니까 안 아픈 손가락이 있습니다. 이것은 덜 아프고 이것은 더 아픕니다. 그런 식으로 해버리면 창세기 9장의 노아는 정말 부모답지 못한 부모입니다. 세상에 같은 자식인데 저주를 합니까 호로부모 아닙니까 부모교육을 잘 시켜놔야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한다고 합니다. 특히 엘리 제사장을 보고 부모자식이 다 망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은 자식을 잘 키워서 잘했습니까 사무엘의 자식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개판입니다. 또 흔히 이야기하기를 룻은 시어머니를 모셨으니 룻의 효를 본받으라고 합니다. 룻이 본 것은 시어머니를 본 것이 아니고 시어머니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그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시어머니의 이름이 나오미입니다.
그런데 기쁨이라는 뜻을 가진 나오미가 쓰다라는 의미를 가진 나오미로 바뀝니다. 바로 그렇게 만든 하나님을 자신의 주로 섬기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룻의 믿음이었습니다. 역시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의 유교적인 효가 들어설 자리가 한 자리도 없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면 이 땅에서 오래 살리라고 하는데 그것은 부모를 공경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주의 증인이 되어서 오래 살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십계명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 당시의 부모는 주의 복음의 전달자입니다. 결국 성경에서 내린 결론은 네가 사랑하면 부모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이웃이 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에 보면 나그네를 대접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에 보면 과부가 자식이 있거든 교회가 도와주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은 자식에게 과부된 어미를 도와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증인노릇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효도라는 개념은 유교적인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의 몸이 성전입니다. 그래서 노아에 의해서 세 식구가 모든 민족이 됩니다.
그렇다면 안식의 땅에서 어떤 민족이 번창하겠습니까 안식에 적합한 씨, 즉 하나님의 덮어주는 은총을 아는 자만 존재하고 나머지는 모두 멸망한다는 것이 기정 사실입니다. 기정 사실이지만 그 가운데 투쟁이 발생됩니다. 그 투쟁을 저와 여러분들이 지금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덮어주는 은혜를 모독하고 자기 행위와 노력과 자기 열성에 기대를 거는 이 함과 가나안 같은 사고방식에 대해서 우리는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철저하게 공격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역사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뜻이 하나님의 전사입니다. 싸우라는 말입니다. 어떤 싸움입니까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그 교리와 싸우라는 말입니다. 교회에서 전도 많이 하고 헌금 많이 하라는 이것과 싸우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영생을 준 사람들입니다. 전도하고 헌금해서 재산 모아서 교회 세우는 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 것이 몽땅 불나서 사라져도 교회는 여전히 남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 몸이 성전입니다. 비오면 우산쓰고 예배드리면 됩니다. 조금 불편은 합니다. 불편하다고 해서 지옥 갑니까 우산쓰고 하면 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지붕 고치면 될 것인데 뭐하러 우산 쓰고 하느냐고 합니다. 자기가 지붕 고친다고 합니다. 그것은 고치라는 말입니다. 날이 더운데 에어컨 하나 들여놓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들여놓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에어컨 들여놓는다고 천당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안 한다고 지옥가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란 인간 자체가 성전입니다. 그 외부의 것은 필요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쫓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예배당 의자보다도 그냥 바닥에 앉아서 예배드리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은 모든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덮어줌의 은혜를 받는 사람만 길이 무궁할 것입니다. 시편 1편 마지막에 나옵니다.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아무리 낄려고 해도 안 됩니다.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습니다. 철저하게 공짜로 주신 은혜만을 고이고이 빈 마음에 간직하는 사람, 그 사람만이 영토로 이 땅에서 살 것입니다. 창세기 10-11장 원수의 정수리를 치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렇다면 각각의 민족들이 다른 민족을 학살시키려 하는 동기가 있고, 그 계획표가 있을 것입니다. 함과 가나안은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영웅주의입니다.
그렇다면 셈과 야벳은 비영웅주의입니다. 이들은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함과 가나안은 사람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번성은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주받은 족속의 특징입니다. 반대로 축복받은 족속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이끌어간다는 것입니다. 호두까듯이 깨보니까 한쪽은 영웅이 들어 있고, 다른 한쪽은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서로서로 다릅니다. 이 두 민족이 서로 섞여 있다는 것이 제일 희한합니다. 둘이 섞여 있다는 말은 한쪽은 압박하는 쪽이고, 한쪽은 압박을 받는 쪽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는 고난을 주는 쪽이고 다른 하나는 고난을 받는 쪽입니다. 그러나 고난받는 쪽이 오히려 역으로 승리합니다. 그것이 창세기 3장 15절 약속을 이루어 나가는 모습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서로 머리를 깨뜨리며 발꿈치를 무는 관계입니다. 말이 나왔으니까 정수리를 치는 대목에 대하여 성경을 찾아봅시다. “그 원수의 머리 곧 그 죄과에 항상 행하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치시리로다”(시68:21) 정수리를 치는 것은 사람의 몫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의 몫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몫으로 남겨 두자는 것입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심판은 주께 있습니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 할지로다”(시68:19) 구원은 짐을 대신 져주시는 것입니다. 그 짐이 사업이 안 되는 것이라든지, 부도난 중소기업이 짐입니까 환경문제입니까 짐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21절에 나오는 죄입니다. 죄라는 악마가 우리에게 죄라는 문제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 짐을 깨버렸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먼저 우리가 무엇엔가 잡혀 있다는 것이 확정적으로 전제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잡은 그 주동자의 정수리를 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기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구원관입니다. 출애굽 사상입니다. 어떤 실체에 잡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이웃집에 깡패가 사는데 맨날 우리집 앞에 와서 죽인다! 죽인다! 하고는 돌아갑니다. 얼마나 공포 분위기이겠습니까 그 때 하나님이 그 깡패의 정수리를 쳐버리니까 죽인다! 하는 게 없습니다. 그 전에는 악마가 매일 너 죽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사망이라는 깡패가 옆집에 살면서 늘 우리를 두렵게 했는데 예수님이 그의 정수리를 치심으로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게 생명이고 영생입니다.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저에게 임하리라 저는 어리석은 자식이로다 때가 임하였나니 산문에서 지체할 것이 아니니라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호13:13-14)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저에게 임하리라’ 이 말은 아이는 낳아야 하겠는데 낳으면 아이도 자신도 다 죽는 것입니다. 빼도 박도 못하고난처한 입장에 놓인 것입니다. 괴로운 입장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은 받아야 하겠습니다. 태아가 엄마의 모태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구원이듯이 나오기는 나와야 하겠는데 나올 수는 없습니다. 빠져 나오고 싶은 것은 우리의 희망 사항인데 빠져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때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시고 사망의 너의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너는 멸망을 받을지어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정수리를 누가 쳐야 합니까 주님께서 쳐주셔야 합니다. 쳐주신 분에 의하여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아닌 주님을 믿는 자기 믿음을 과시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치는 게 아니고 자기들이 열 불내서 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요즘은 찬송가나 가스펠 송도 그냥 부르면 신명이 안 나는가 봅니다. 노래방에서 나오는 음악처럼, 연안부두에 아주머니들 놀러 갈 때 나오는 노래처럼 빨리 불러야 신명이 납니다. 그 가락으로 찬송가와 복음성가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찬송하면 예수님이 빨리 내려오십니까 그게 마귀에게 빠진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주님이 치신다는 것은 믿지도 않고 내가 열불이 나야 마귀의 정수리가 깨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밋밋하면 사건이 안 일어난 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욱 더 예수를 바로 믿는 사람을 더 큰 고난으로 밀어넣는 것입니다. 믿음도 없다 하고, 냉냉하다 하고, 병고침받는 기적도 없다고 비난합니다. 예수님을 재현하는 사람을 그런 식으로 핍박하는 것입니다. 부흥회 시작할 때는 꼭 정글북에 온 것처럼 두둘겨댑니다. 인디언과 아프리카인들의 춤은 생체리듬을 일률적으로 상승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걸 그대로 흉내내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목회성공했다 말합니다. 그런 걸 또 배우려고 합니다. 교인들은 그런 것이 없으면 신앙생활을 안 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자기의 감정을 믿는 것입니다. 그들이 믿는 예수는 가짜입니다. 여러분 집에 친구가 찾아오면 왔니 하면 될텐데 호들갑을 떨어야 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감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목사가 잘못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감정의 만남도 아니고 사실은 죄와의 만남입니다. 이 세상 것을 좋아하는 죄와의 만남입니다. 주님을 믿는 게 아니고 주님을 믿는 자기 믿음을 과시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런 교만과 이기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 세상을 너무 좋아합니다.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자존심이 너무 셉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죽으셨다는 것을 알고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자기의 자존심, 이기주의, 욕심이 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선한 문화를 이뤄서 이 땅에서 더 잘 살고 싶어하는 것, 환경 나쁘면 하나님 나라 가면 될텐데 왜 환경을 고쳐서 이 땅에서 더 살고 싶어하는 것입니까 그게 전부 죄라고 하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통해 왜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고, 처참한 모습으로 죽으셔야 했는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니고 비참하게 죽으신 그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는데 어떻게 달리 아버지가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따로 있고 하나님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비참하고 하나님은 멋쟁이고 그런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거지처럼 오고 하나님은 양복 입고 오십니까 나비 넥타이 매고, 턱시도 입고 옵니까 심판주입니다. 다만 예수님이 그런 모습으로 오시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대신 심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무서운 심판주구나 하는 것을 발견해야 자기의 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처참한 모습, 인자가 머리 둘 곳도 없이 쫓겨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이 안 됐다 하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의 무서운 심판을 거기서 발견해야 합니다. 그 심판은 내 죄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능력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주여, 월드컵을 우리 나라에 이러고 있는데 어떤 청년이 교회 마당에 죽어 넘어져 있습니다. 그 청년을 볼 때 2002년 월드컵은 우리 나라에서 개최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저렇게 죽었구나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죄로 연결되지 않는 하나님은 전부 가짜다 보시면 됩니다. 그냥 놀이기구라고 보면 됩니다. 지나가는 바이킹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일종의 정신적인 유원지입니다. 죄가 없어졌습니다. 날마다 부족함을 깨닫고 회개하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그냥 한바탕 놓아 보세 하는 것입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불교는 부처의 고난을 받아들이는 것인데 현대 불교는 노는 것입니다.
무서운 죄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 정수리를 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나안과 함 족속을 칠 때는 결국 가나안과 함 족속을 지배하고 있는 배후 조종자, 요한계시록을 보면 그가 악마로 되어 있습니다. 뱀, 용, 사탄의 정수리를 칠 때 모든 역사의 대단원의 막은 내리게 됩니다. 연극은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 땅에서 살았던 것은 잠깐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이 승리한 것 같고 영웅과 위대한 지도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참된 지도자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흔히 신학교에서 민족과 국가를 위해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들을 하지요. 그런 사람들은 알고 보면 우상 숭배자입니다. 성경에서는 사회라는 게 없습니다. 나와 내 이웃밖에 없습니다. 이웃은 누구를 지도하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면 됩니다.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 영도자가 되지 말고 옆사람이 필요로 할 때 그냥 도움이 되어 주면 됩니다. 또 도움을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을 지도자로 여기면 안 됩니다. 그 이웃은 항상 생성되었다가 소멸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정한 이웃을 원하고 있지 위대한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자리는 예수님이 차지하셨고, 그분 한 분이면 족한 것입니다. 자꾸 남에게 착한 일을 해서 튀려고 하지 마세요. 사람이 남에게 착한 일을 하는 것도 은혜지만 남에게 해코지 안한 것도 은혜인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잘 나서 해코지 안한 것이 아닙니다. 차를 탄다든지 오토바이를 타다가 남을 다치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제가 한 번은 기차를 탔는데 그 넓은 기차칸에서 한 사람이 기침을 하는 것입니다. 9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한 사람 때문에 얼마나 고통을 당하는지 모릅니다. 본인은 또 얼마나 안타까워하는지 모릅니다. 밤기차를 타면 직장인들이 피곤해서 눈을 붙이려고 하는데 애가 우는 것입니다. 두세 시간을 그렇게 울어대는 것입니다. 사람이 남에게 일부러 해코지를 할 때도 있지만 실수로도 사고내서 남을 죽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런 경우가 없었습니까 없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잘 나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은혜로 내 갈길을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식구가 열 명이면 얼마나 사람들이 나로 인하여 피해를 받습니까 남들은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자기는 동아일보 만화까지 다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잘난 것도 그 당시에 하나님이 잘 나게 해주어야 잘날 수 있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돈을 주워 주인에게 돌려줬다고 했을 때도 마침 그 돈이 내 앞에 있었으니까 그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보트가 뒤집어졌는데 할머니가 물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엄두도 못 내고 있는데 어떤 용감한 남자가 물에 뛰어들어 구해 주었습니다. 남들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 물었더니 본인은 씩씩거리면서 어떤 놈이 나를 밀어 넣었어! 하고 호통을 치는 것입니다. 사람이 타고난 환경이 다 다르기 때문에 착한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환경을 갖는 사람도 있고,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런 것을 가지고 너 훌륭하다 안 훌륭하다 말씀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네가 얼마나 위대하게 이름을 날리느냐 하는 게 아닙니다. 네 이웃에게 얼마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 주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도 자기를 높이지 않고 그런 환경을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기차가 달려옵니다. 어린애가 철길에 놓여 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들어 어린애도 건지고 자기도 구사일생으로 살았습니다. 남들이 다 그를 칭찬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직업이 그 때부터 어린애 구하는 일이 되겠습니까 우연히 아이가 그곳에 있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고 기관차가 그곳으로 달려오게 하신 이도 하나님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실수를 안 한다 해도 실수를 안한 것은 자기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안 하게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은 깜빡깜빡 가버립니다. 항상 이것을 생각하면 다른 것은 잊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친구 열 명에게 전화를 하는데 아홉에게는 하고 한 명에게는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 때는 한 명이 항의합니다. 그럴 수 있느냐고 따지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 했잖아요.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심음과 거둠과 웃을 때 울 때가 있는데 그 때는 하나님에 의해서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영웅, 민중의 지도자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민중의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들 참 많은데 그 모든 사람들이 민중의 지도자, 사무엘과 같은 지도자가 다 되어 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요즘 교계 지도자는 마귀가 하지 다른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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