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있는 사람, 깊이 있는 신앙 (출15:22-27)
본문
강물엔 나룻배를 띄우고 바다엔 고깃배를 띄웁니다. 개울엔 종이배를 띄우고 큰 바다엔 여객선이나 화물선을 내보냅니다. 사람들은 물을 보고 그 물에 뜰 수 있는 배가 어떤 배인지를 압니다. 물의 처지에서 보면 그 물이 품을 수 있는 배가 따로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장자는 말하길 “물이 깊어야 큰배가 뜰 수 있고, 얕은 물에는 술잔 하나 뜨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 아침 여러분의 마음엔 어떤 배가 떠 있습니까 큰배처럼 많은 것을 품을 수 있으려면 그만큼의 깊이를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 우리 마음의 깊이, 인생의 깊이, 신앙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가를 자가진단해 보자는 의미에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깊이 있는 사람, 깊이 있는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택한 백성에게 꼭 안겨주고 싶어하는 귀한 선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깊이 있는 신앙의 모습을 갖추게 하려고 노력하신 모습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인생의 깊이, 신앙의 깊이를 더하라고 권면하고 계십니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인간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라는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종교철학자이며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나는 고통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존재로 증명 받을 수 있는 증거가 고통 당하고 있느냐, 아니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지금 고통 당하고 있다면 그가 신 앞에 서 있는 인간,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입니다. 고통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용광로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만사형통하고 하늘에서 복이 뚝 뚝 떨어질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전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다만 믿은 사람들은 고통의 와중에서도 하늘로부터 오는 힘을 버팀목으로 능히 이긴다는 점이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찌 보면 고통은 그리스도인들의 존재양식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요즘 고통의 소리가 전국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 고통에는 남자, 여자가 따로 없고,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한 가족 5명이 집단으로 자살하는 일이 일어날 정도로 고통소리는 메이라처럼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고통에 직면하여 믿는 사람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눈앞에 놓인 고통은 무엇입니까 바로 마라의 고통입니다. 마라는 쓰다, 괴롭다는 뜻이 함축된 단어입니다. 악취가 나고 맛이 써서 사람이 먹으면 괴롭게 되는 물이란 뜻입니다. 나오미가 모압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달랑 며느리 하나만 데리고 고향에 들어설 때, 그를 알아보는 동네 사람들이 이게 누군가 나오미가 아닌가라며 반겨 맞았습니다.
그 때 나오미가 말합니다. “이제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불러 주시오.” 나오미란 의락과 기쁨이란 뜻이나, 나오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르광야에서 3일 길을 행하다가 어렵게 찾은 물이 쓴물이어서 그 지방을 마라라 명한 것을 상기하며 자기 처지의 처참함을 마라라는 말로 대신했던 것입니다. 본문이 속한 15장의 1-18절까지는 말 탄 애굽의 병거가 홍해 가운데서 멸절되는 것을 목격한 모세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감격의 찬송을 부르는 내용이고, 이 하나님의 구원을 찬야아는 노래에 뒤이어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들고 이스라엘 여인들과 함께 춤을 추며 화답송을 부르는 장면이 19-21절까지 나옵니다. 그리고 나서 곧바로 마라의 고통에 부짖치게 된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 수르광야를 걸어온 지 삼일 째가 되는 날입니다. 가죽부대에 담아온 물도 바닥이 나고, 탈수증으로 어린 자녀가 하나, 둘 쓰러지고 있습니다. 어른들도 휘청대기 시작합니다. 당장 물을 마시지 못하면 죽을 것이 뻔한 상황입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이런 고통 가운데 처하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1. 여호와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출15: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우리가 살면서 인생의 마라를 만나게 되면 제일 먼저 하늘을 봐야합니다. 고통 가운데 눈을 들어 하나님을 불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편 50편 15절에서도 “(시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땅에 있는 성난 군중들에게 눈을 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분께만 구원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시상이 되어 구원의 길이 하늘로부터 열리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부르짖는 사람에게만 들리는 말씀입니다. “얘, 모세야 너무 걱정 말아라. 쓴물을 만든 내가 그것을 달게 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부르짖는 네모습이 기특하구나.
쓴물 곁에 서 있는 나무가 있을 것이니 그걸 꺾어 물에 넣으라. 마실 수 있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여기까지도 보통 믿음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만큼 단순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걸 믿고 따르기가 생각만큼 쉬운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굉장한 절차가 따르거나, 엄청난 도구를 이용하는 그럴싸한 방법이 아니기에 그만큼 의심이 생기기가 쉽습니다. 여러분, 편생을 어부로 잔뼈가 굵은 베드로는 자기의 경험과 지식을 무시하고 예수님의 말대로 따랐을 때 그물이 터질 정도로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목수 예수의 말이 아니라 주의 말씀에 의지해서 행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인 이드로의 가축을 치기위해 근동지방의 들녘을 누비고 살아온 모세입니다. 웬만한 나무의 효능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이 나무는 토사광란이 났을 때 즙내서 먹는 나무가 아닙니까 이것을 쓴물에 집어넣는다고 무슨 효과가 있겠습니까”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왔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세의 말이나 행동, 그리고 언어적 뉘앙스에서 전혀 그런 불신뢰의 흔적이나 실천을 늦추는 모습이 보이지 않ㅅ브니다. 하나님에게서 길을 구하던 모세는 하나님이 제시하신 길을 듣자마자 지시하신 나무를 지체없이 물에 던졌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쓴물 곁에 쓴물을 해독할 나무를 함께 기르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쓴물은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왔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것은 은혜를 체험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기만 하면, 하나님께 고통을 아뢰고 맡기기만 하면 해결될 일이었습니다. 끙끙 앓으면서 가슴에 묻고 계신 고통, 슬픔, 상처가 있으십니까 그것 때문에 가슴 꺼지게 한숨만 쉬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폼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구색 맞추기 위해 교회 다니는 게 아니라면 하나님께 그 고통, 그 슬픔, 그 상처를 툴툴 털어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길이 열일 것입니다. 믿음으로 순종만 하면 그 믿음의 증거를 얻게 될 것입니다.
2. 고통 가운데 있는 성도는 원망의 죄를 범치 말아야 합니다. “(출15:24)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원망은 히브리어로 룬이라고 합니다. 고집 세다, 중얼거리다, 밤새워 머물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밤을 새워가며 감정을 다해 불평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향해 하는 원망은 곧 하나님을 대하여 하는 원망입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 들이시길 바라며 하는 원망입니다. 경제적 어려움이 닥치면 변변한 재산도 물려주지 못한 부모님을 원망하게도 됩니다. 직장 구하기가 어려울 때에는 싫다고 하더라도 억지로 기술을 가르치지 않은 부모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재기하려고 할 때, 돈 많은 처가를 둔 친구를 부러워하며 괜히 아내에게 타박 놓게도 됩니다. 공부 잘하는 이웃집 아이와 비교하여 자녀에게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구역식구들에 대한 불만을 품게도 됩니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도 부모와, 자녀와, 아내, 그리고 구역식구등에 대한 원망과 불평 같지만, 그 본질은 그 모든 관계를 맺게 한 하나님에 대한 원망입니다. 여러분, 이런 자세는 신앙의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모든 관계는 다 하나님의 각별한 계획과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뭐라 해도 여러분은 바로 그들과 함께 합력 하여 선을 이뤄나가야 합니다. 아름다운 공동체를 그들과 함께 이루어나가야 할 의무가 여러분들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원망의 죄는 이런 의무를 소홀히 여기는데서 범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원망의 죄를 범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건망증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신 놀라운 손길을 금새 잊어버린 데서 원망의 죄는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원망은 마치 “나는 머리가 나쁩니다.”라고 광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이스라엘도 홍해의 기적을 체험하고 기뻐 찬양하던 상태에서 불과 3일 만에 원망의 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3일 만에 원망의 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3일 만에 하나님의 구원하신 역사를 까맣게 잊어 먹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전10: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원망의 종국은 멸망뿐임을 경고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이 믿는 사람들을 유혹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 원망과 불평입니다. 그만큼 믿는 자들이 빠지기 쉬운 신앙의 함정이 원망이라는 함정입니다. 원망과 불평이 하나님으로부터 처음에는 믿는 자의 마음을 멀어지게 하고, 나중에는 몸마저 멀어지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3. 고통 가운데 있는 성도는 엘림을 기억해야 합니다. “(출15: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 엘림은 휴식과 안식이 있는 곳입니다. 이 곳에는 샘이 12, 종려나무가 70그루가 있다고 했는데, 이 12와 70은 뉴스보도용 자료가 아닙니다. 사실적 의미를 너머 신학적 의미를 가진 숫자라는 말씀입니다. 정확히 12샘에, 종려나무가 확실히 딱 70그루인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기록이 뜻하는 바는 이스라엘 12지파에 공평하고 넉넉하게 분배할 수 있을 정도의 물이 있는 곳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이 완전수로 여기는 7의 열 곱인 70그루의 나무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만들어주는 그늘에서 이르라엘이 풍족하게 쉴 수 있는 곳이 엘림임을 강조하는 신학적 의미가 함축된 숫자입니다. 그러니 꼭 12샘에 딱 70그루라는 산술적인 숫자를 강조하는 말이 아니라는 점을 아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쓴물을 단물로 바꾸면 엘림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고통 중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고통을 이긴 사람들은 하나님이 미리 예비하신 엘림에서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고통과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키에르케고르의 말대로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증거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깊이 있는 신앙에 한 발자국 옮겨놓을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엘림에서 쉬며 안식을 얻으라는 엘림 초대권을 받은 사람이기에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고통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고통을 이길 길을 이미 예비해 놓스셨습니다. 환난도 겁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마련해 놓으신 엘림이 가까이에 있습니다. 현실도, 사람도, 하나님도 원망치 말고, 다만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고통의 현실에서 벗어나는 길은, 행복으로 가는 길은, 이렇게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서 열리는 것입니다. 끝으로 성도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환난을 이기고 정금같은 신앙을 얻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과 비견되리 만치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우리 서로가, 우리 교회가 고통에 지친 사람들을 쉬게 할 2, 제3의 엘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겨워하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쉬게 하는 일을 우리가 해야합니다. 내가 너에게, 또 네가 나에게 기대어 쉴 수 있는 엘림이 될 때 비로소 깊이를 가진 사람, 깊이를 가진 신앙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가 하면 종교철학자이며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나는 고통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존재로 증명 받을 수 있는 증거가 고통 당하고 있느냐, 아니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지금 고통 당하고 있다면 그가 신 앞에 서 있는 인간,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입니다. 고통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용광로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만사형통하고 하늘에서 복이 뚝 뚝 떨어질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전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다만 믿은 사람들은 고통의 와중에서도 하늘로부터 오는 힘을 버팀목으로 능히 이긴다는 점이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찌 보면 고통은 그리스도인들의 존재양식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요즘 고통의 소리가 전국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 고통에는 남자, 여자가 따로 없고,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한 가족 5명이 집단으로 자살하는 일이 일어날 정도로 고통소리는 메이라처럼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고통에 직면하여 믿는 사람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눈앞에 놓인 고통은 무엇입니까 바로 마라의 고통입니다. 마라는 쓰다, 괴롭다는 뜻이 함축된 단어입니다. 악취가 나고 맛이 써서 사람이 먹으면 괴롭게 되는 물이란 뜻입니다. 나오미가 모압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달랑 며느리 하나만 데리고 고향에 들어설 때, 그를 알아보는 동네 사람들이 이게 누군가 나오미가 아닌가라며 반겨 맞았습니다.
그 때 나오미가 말합니다. “이제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불러 주시오.” 나오미란 의락과 기쁨이란 뜻이나, 나오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르광야에서 3일 길을 행하다가 어렵게 찾은 물이 쓴물이어서 그 지방을 마라라 명한 것을 상기하며 자기 처지의 처참함을 마라라는 말로 대신했던 것입니다. 본문이 속한 15장의 1-18절까지는 말 탄 애굽의 병거가 홍해 가운데서 멸절되는 것을 목격한 모세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감격의 찬송을 부르는 내용이고, 이 하나님의 구원을 찬야아는 노래에 뒤이어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들고 이스라엘 여인들과 함께 춤을 추며 화답송을 부르는 장면이 19-21절까지 나옵니다. 그리고 나서 곧바로 마라의 고통에 부짖치게 된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 수르광야를 걸어온 지 삼일 째가 되는 날입니다. 가죽부대에 담아온 물도 바닥이 나고, 탈수증으로 어린 자녀가 하나, 둘 쓰러지고 있습니다. 어른들도 휘청대기 시작합니다. 당장 물을 마시지 못하면 죽을 것이 뻔한 상황입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이런 고통 가운데 처하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1. 여호와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출15: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우리가 살면서 인생의 마라를 만나게 되면 제일 먼저 하늘을 봐야합니다. 고통 가운데 눈을 들어 하나님을 불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편 50편 15절에서도 “(시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땅에 있는 성난 군중들에게 눈을 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분께만 구원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시상이 되어 구원의 길이 하늘로부터 열리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부르짖는 사람에게만 들리는 말씀입니다. “얘, 모세야 너무 걱정 말아라. 쓴물을 만든 내가 그것을 달게 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부르짖는 네모습이 기특하구나.
쓴물 곁에 서 있는 나무가 있을 것이니 그걸 꺾어 물에 넣으라. 마실 수 있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여기까지도 보통 믿음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만큼 단순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걸 믿고 따르기가 생각만큼 쉬운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굉장한 절차가 따르거나, 엄청난 도구를 이용하는 그럴싸한 방법이 아니기에 그만큼 의심이 생기기가 쉽습니다. 여러분, 편생을 어부로 잔뼈가 굵은 베드로는 자기의 경험과 지식을 무시하고 예수님의 말대로 따랐을 때 그물이 터질 정도로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목수 예수의 말이 아니라 주의 말씀에 의지해서 행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인 이드로의 가축을 치기위해 근동지방의 들녘을 누비고 살아온 모세입니다. 웬만한 나무의 효능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이 나무는 토사광란이 났을 때 즙내서 먹는 나무가 아닙니까 이것을 쓴물에 집어넣는다고 무슨 효과가 있겠습니까”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왔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세의 말이나 행동, 그리고 언어적 뉘앙스에서 전혀 그런 불신뢰의 흔적이나 실천을 늦추는 모습이 보이지 않ㅅ브니다. 하나님에게서 길을 구하던 모세는 하나님이 제시하신 길을 듣자마자 지시하신 나무를 지체없이 물에 던졌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쓴물 곁에 쓴물을 해독할 나무를 함께 기르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쓴물은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왔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것은 은혜를 체험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기만 하면, 하나님께 고통을 아뢰고 맡기기만 하면 해결될 일이었습니다. 끙끙 앓으면서 가슴에 묻고 계신 고통, 슬픔, 상처가 있으십니까 그것 때문에 가슴 꺼지게 한숨만 쉬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폼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구색 맞추기 위해 교회 다니는 게 아니라면 하나님께 그 고통, 그 슬픔, 그 상처를 툴툴 털어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길이 열일 것입니다. 믿음으로 순종만 하면 그 믿음의 증거를 얻게 될 것입니다.
2. 고통 가운데 있는 성도는 원망의 죄를 범치 말아야 합니다. “(출15:24)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원망은 히브리어로 룬이라고 합니다. 고집 세다, 중얼거리다, 밤새워 머물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밤을 새워가며 감정을 다해 불평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향해 하는 원망은 곧 하나님을 대하여 하는 원망입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 들이시길 바라며 하는 원망입니다. 경제적 어려움이 닥치면 변변한 재산도 물려주지 못한 부모님을 원망하게도 됩니다. 직장 구하기가 어려울 때에는 싫다고 하더라도 억지로 기술을 가르치지 않은 부모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재기하려고 할 때, 돈 많은 처가를 둔 친구를 부러워하며 괜히 아내에게 타박 놓게도 됩니다. 공부 잘하는 이웃집 아이와 비교하여 자녀에게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구역식구들에 대한 불만을 품게도 됩니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도 부모와, 자녀와, 아내, 그리고 구역식구등에 대한 원망과 불평 같지만, 그 본질은 그 모든 관계를 맺게 한 하나님에 대한 원망입니다. 여러분, 이런 자세는 신앙의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모든 관계는 다 하나님의 각별한 계획과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뭐라 해도 여러분은 바로 그들과 함께 합력 하여 선을 이뤄나가야 합니다. 아름다운 공동체를 그들과 함께 이루어나가야 할 의무가 여러분들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원망의 죄는 이런 의무를 소홀히 여기는데서 범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원망의 죄를 범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건망증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신 놀라운 손길을 금새 잊어버린 데서 원망의 죄는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원망은 마치 “나는 머리가 나쁩니다.”라고 광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이스라엘도 홍해의 기적을 체험하고 기뻐 찬양하던 상태에서 불과 3일 만에 원망의 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3일 만에 원망의 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3일 만에 하나님의 구원하신 역사를 까맣게 잊어 먹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전10: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원망의 종국은 멸망뿐임을 경고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이 믿는 사람들을 유혹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 원망과 불평입니다. 그만큼 믿는 자들이 빠지기 쉬운 신앙의 함정이 원망이라는 함정입니다. 원망과 불평이 하나님으로부터 처음에는 믿는 자의 마음을 멀어지게 하고, 나중에는 몸마저 멀어지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3. 고통 가운데 있는 성도는 엘림을 기억해야 합니다. “(출15: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 엘림은 휴식과 안식이 있는 곳입니다. 이 곳에는 샘이 12, 종려나무가 70그루가 있다고 했는데, 이 12와 70은 뉴스보도용 자료가 아닙니다. 사실적 의미를 너머 신학적 의미를 가진 숫자라는 말씀입니다. 정확히 12샘에, 종려나무가 확실히 딱 70그루인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기록이 뜻하는 바는 이스라엘 12지파에 공평하고 넉넉하게 분배할 수 있을 정도의 물이 있는 곳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이 완전수로 여기는 7의 열 곱인 70그루의 나무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만들어주는 그늘에서 이르라엘이 풍족하게 쉴 수 있는 곳이 엘림임을 강조하는 신학적 의미가 함축된 숫자입니다. 그러니 꼭 12샘에 딱 70그루라는 산술적인 숫자를 강조하는 말이 아니라는 점을 아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쓴물을 단물로 바꾸면 엘림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고통 중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고통을 이긴 사람들은 하나님이 미리 예비하신 엘림에서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고통과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키에르케고르의 말대로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증거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깊이 있는 신앙에 한 발자국 옮겨놓을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엘림에서 쉬며 안식을 얻으라는 엘림 초대권을 받은 사람이기에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고통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고통을 이길 길을 이미 예비해 놓스셨습니다. 환난도 겁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마련해 놓으신 엘림이 가까이에 있습니다. 현실도, 사람도, 하나님도 원망치 말고, 다만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고통의 현실에서 벗어나는 길은, 행복으로 가는 길은, 이렇게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서 열리는 것입니다. 끝으로 성도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환난을 이기고 정금같은 신앙을 얻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과 비견되리 만치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우리 서로가, 우리 교회가 고통에 지친 사람들을 쉬게 할 2, 제3의 엘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겨워하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쉬게 하는 일을 우리가 해야합니다. 내가 너에게, 또 네가 나에게 기대어 쉴 수 있는 엘림이 될 때 비로소 깊이를 가진 사람, 깊이를 가진 신앙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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