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난 예수 (눅24:28-35)
본문
우리는 성경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며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습니다.그 외에 성경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성경은 예수를 만나기를 원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며 예수를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다시 말하면 성경은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렸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구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렸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구주로 오신 예수를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본문 역시 예수를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불의한 세력 집단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되고 나자 예수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은 이곳저곳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눈의 가시처럼 여겼던 예수를 처형하고 승리함에 젖어 있는 제사장들과 유대 민중들이 또다시 어떤 일을 저질를는지 알 수 없는 공포가 예수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예수의 사람들은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몸을 피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줄거리는 두 사람이 실의와 좌절감을 안고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라는 작은 마을로 내려가고 있을 때 길에서 주님을 만났다는 이야기입니다.그들은 예루살렘을 등지고 실망과 시름에 젖은 채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던 사람들이었으며,모략과 술수와 권모와 불법이 춤추는 도시를 떠나 낙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클레이는 그들의 걸음을 가리켜 “새벽을 향한 황혼의 길이었다”고 했습니다.그 뜻은 황혼을 향해 걸어가던 그들에게 새벽이신 주님께서 나타나셨으며 절망을 향해 걸어가던 그들에게 희망이신 주님께서 나타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언제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었고 또 만나 주셨습니다.가정에서도 만날 수 있었고 산에서도 들에서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그러나 사복음서를 보면 길에서 예수를 만났던 이야기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5:21 이하를 보면 가나안 여자는 길에서 예수를 만나 귀신 들린 자기의 딸을 살릴 수 있었고,마태복음 9:20 이하를 보면 12년간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도 길에서 예수를 만나 병고침을 받았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고 소경도,귀먹고 혀가 어눌한 사람도 길에서 예수를 만나 고침받았고 누가복음 7:14 이하를 보면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신 것도 길이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예수님께서 깊은 산속 수도원의 수도승이 아니라 길거리의 예수라는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예수님 자신이 나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물론 나는 “길”이라고 하신 그 말씀의 뜻이 나는 길바닥이라거나 고속도로라는 뜻은 아닙니다.생명과 구원의 길이며 뭇 영혼들이 걸어야 할 영생의 길이라는 뜻입니다.그러나 나는 “길”이라는 그 말씀은 예수님께서 은둔자나 수도사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해 주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감추고 은폐하고 은둔하는 폐쇄의 종교가 아닙니다.드러내고 노출시키는 개방 종교인 것입니다.심지어는 죄까지도 다 드러내고 허물도 다 노출시키고 있습니다.예를 들면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허물도 드러내고 있는가 하면 역대 왕들 가운데 성왕이었던 다윗왕의 죄도 낱낱이 노출시키고 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던 두 사람도 길에서 예수를 만났습니다.
1.그들 두 제자에게는 신앙적으로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1)스승이었던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본문 16절을 보면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이것이야말로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예수와 헤어진 것이 엊그제 일입니다.20년이나 30년만에 만나는 에수가 아니라 엊그제까지 함께 지내다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헤어졌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그 이유를 16절은 저희의 눈이 가리워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눈이 가리워졌다는 것은 눈에 다른 것이 끼었다는 것입니다.그리고 정상적인 시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그 두 사람 눈에 끼어서는 안 될 것들이 끼어서 예수를 볼 수 없었고 영적 시력의 상실 때문에 예수를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다시 말하면 그들은 영적으로 소경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서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너희는 눈멀었다.안약을 사서 바르고 보게 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하늘의 별을 세고 손가락 끝의 세균을 보고 앞일을 내다 본다고 해도 예수를 보지 못하면 영적으로 소경인 것입니다.영안을 떠야 부활의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2)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25절을 보면 주님께서 그들에게 선지자들의 예언과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지만 그들은 그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답답하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을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니었습니다.수를 셀 수 없이 듣고 또 들었습니다.그러나 그들은 그날도 깨닫지 못했습니다.그 이유는 더디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여기서 말하는 더디 믿는다는 것은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을 갖습니다.그들은 말씀을 건성으로 들었을 뿐 깊이 주목하고 새기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그것은 우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15:16에서 주님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그리고 시편 49:20에서 시인은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같도다”라고 했습니다.왜 말씀을 들으면서 깨닫지 못합니까 그것은 귀담아 듣지 않기 때문이며 믿음으로 듣지 않기 때문이며 다 안다는 교만한 믿음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듣고 깨닫는다는 사실일 것입니다.짐승도 듣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사람만 듣고 깨닫고 뉘우치고 고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그래서 사람을 인격적 존재라고 합니다.다시 말하면 사람으로서의 격을 갖추었다는 뜻입니다.천만 가지의 지식과 진리를 아는 것보다는 한 가지의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2.그들 두 제자를 주님께서 만나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두 제자의 만남 속에서 다음 세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주님이 그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도 예루살렘도 희망도 포기한 채 낙향하고 있었습니다.그들은 예수가 완전히 십자가에 못박혀 비참한 최후를 마쳤기 때문에 이젠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이유도 없고 예수를 찾을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야말고 예수를 포기해 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만나 주신 것입니다.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사랑이며 일방적 섭리인 것입니다.요한복음 15:16에서 주님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고 세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예수를 만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절망과 좌절의 길을 걷고 있던 나를 찾아와 주셨고 나를 만나 주신 것입니다.걱정과 근심으로 가득 둘러싸인 나를 주님이 찾아오셨고 죄로 죽게된 나를 찾아오셔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2)주님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영적 불감증 환자였던 두 사람에게 주님은 알아듣기 쉽게 차근차근 주님 자신의 부활의 소식을 말씀해 주셨습니다.요한복음 1:1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했습니다.그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였다고 요한복음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영적 소경이며 불감증 환자인 우리들에게 성경을 통하여 설교를 통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그러나 귀가 닫히고 가슴이 굳어 있기 때문에 그 말씀이 우리의 심령에 와 닿질 못하고 있습니다.주님은 오늘도 듣긴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심령들을 안타까와하고 계십니다.그리고 “귀 있는 자는 들으라”“왜 깨달음이 없느냐”“왜 행함이 없느냐”고 마음 아파하십니다.
3.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해주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등지고 허탈감에 빠진 채 내려가던 그들의 심령은 한대 지방처럼 싸늘하게 식어 있었습니다. 신앙의 열정이 식어지면 영적 냉혈 동물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영적 냉혈 동물이 되어버리면 감동도 없고,감격도 없고,기쁨도 없고,깨달음도 없어져 버립니다.그리고 항상 그 사람 심령 속에서는 싸늘한 바람만 맴돌 뿐입니다.이런 상태를 가리켜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두 제자의 식은 가슴에 불을 던져 주셨습니다.그래서 그들은 본문 32절에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소리쳤습니다. 주님은 그들 영혼 속에 불을 질러 주셨습니다.영혼의 그늘진 구석마다 부활의 태양이 작렬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의 식은 가슴에도 불이 붙어야 합니다.우리들의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오 주여 우리 가슴에 불을 던져 주시옵소서.성령님의 불을 주시옵소서.
4.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길에서 만난 예수,절망과 좌절의 엠마오 길목에서 만난 예수 때문에 그들의 삶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가는 길이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예수 만나고 마음이 뜨거워진 다음 즉시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그들의 길은 예수를 만난후 달라진 것입니다.예수를 만나야 길이 달라집니다.예수를 만나야 사는 길이 달라지고 가는 길이 달라지고 생각하는 길이 달라집니다.석가를 만나면 석가가 간 길을 가게 될 것이고 공자를 만나면 공자가 간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그러나 예수를 만나면 예수가 곧 길이기 때문에 생명의 길을 가게 되고 영생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2)말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그 입으로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고 절망과 좌절의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예수를 만난 후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부활하신 주님을 길에서 만났다고 증거했습니다. 사마리아 수가 성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났던 어떤 죄많은 여자가 예수를 만나고난후 동네로 들어가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전파했던 것처럼,다니엘이 예수를 만나고난후 내가 그이를 만났다고 소리쳤던 것처럼,오늘날에도 예수를 만나면 입이 열리고 말이 달라지게 됩니다.
3)믿음이 달라졌습니다. 그들이 길에서 예수를 만난후 희미했던 믿음이 확실해졌습니다.더디 믿던 그들의 신앙이 철두 철미한 신앙이 되었습니다.그래서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길에서 예수를 만났던 그 사람들처럼 우리도 오늘 여기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그리고 길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고 믿음이 달라져야 합니다. 의심이 변하여 확신으로, 냉혈적 신앙이 변하여 정열적 신앙으로, 불확실한 신앙이 확실한 신앙으로, 도피적 신앙이 참여의 신앙으로, 소극적 신앙이 적극적 신앙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오 주여 지금 내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내가 가는 길과 내가 하는 말과 내가 지닌 신앙이 변화되게 하옵소서.아멘.
본문의 줄거리는 두 사람이 실의와 좌절감을 안고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라는 작은 마을로 내려가고 있을 때 길에서 주님을 만났다는 이야기입니다.그들은 예루살렘을 등지고 실망과 시름에 젖은 채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던 사람들이었으며,모략과 술수와 권모와 불법이 춤추는 도시를 떠나 낙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클레이는 그들의 걸음을 가리켜 “새벽을 향한 황혼의 길이었다”고 했습니다.그 뜻은 황혼을 향해 걸어가던 그들에게 새벽이신 주님께서 나타나셨으며 절망을 향해 걸어가던 그들에게 희망이신 주님께서 나타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언제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었고 또 만나 주셨습니다.가정에서도 만날 수 있었고 산에서도 들에서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그러나 사복음서를 보면 길에서 예수를 만났던 이야기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5:21 이하를 보면 가나안 여자는 길에서 예수를 만나 귀신 들린 자기의 딸을 살릴 수 있었고,마태복음 9:20 이하를 보면 12년간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도 길에서 예수를 만나 병고침을 받았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고 소경도,귀먹고 혀가 어눌한 사람도 길에서 예수를 만나 고침받았고 누가복음 7:14 이하를 보면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신 것도 길이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예수님께서 깊은 산속 수도원의 수도승이 아니라 길거리의 예수라는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예수님 자신이 나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물론 나는 “길”이라고 하신 그 말씀의 뜻이 나는 길바닥이라거나 고속도로라는 뜻은 아닙니다.생명과 구원의 길이며 뭇 영혼들이 걸어야 할 영생의 길이라는 뜻입니다.그러나 나는 “길”이라는 그 말씀은 예수님께서 은둔자나 수도사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해 주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감추고 은폐하고 은둔하는 폐쇄의 종교가 아닙니다.드러내고 노출시키는 개방 종교인 것입니다.심지어는 죄까지도 다 드러내고 허물도 다 노출시키고 있습니다.예를 들면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허물도 드러내고 있는가 하면 역대 왕들 가운데 성왕이었던 다윗왕의 죄도 낱낱이 노출시키고 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던 두 사람도 길에서 예수를 만났습니다.
1.그들 두 제자에게는 신앙적으로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1)스승이었던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본문 16절을 보면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이것이야말로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예수와 헤어진 것이 엊그제 일입니다.20년이나 30년만에 만나는 에수가 아니라 엊그제까지 함께 지내다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헤어졌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그 이유를 16절은 저희의 눈이 가리워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눈이 가리워졌다는 것은 눈에 다른 것이 끼었다는 것입니다.그리고 정상적인 시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그 두 사람 눈에 끼어서는 안 될 것들이 끼어서 예수를 볼 수 없었고 영적 시력의 상실 때문에 예수를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다시 말하면 그들은 영적으로 소경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서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너희는 눈멀었다.안약을 사서 바르고 보게 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하늘의 별을 세고 손가락 끝의 세균을 보고 앞일을 내다 본다고 해도 예수를 보지 못하면 영적으로 소경인 것입니다.영안을 떠야 부활의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2)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25절을 보면 주님께서 그들에게 선지자들의 예언과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지만 그들은 그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답답하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을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니었습니다.수를 셀 수 없이 듣고 또 들었습니다.그러나 그들은 그날도 깨닫지 못했습니다.그 이유는 더디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여기서 말하는 더디 믿는다는 것은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을 갖습니다.그들은 말씀을 건성으로 들었을 뿐 깊이 주목하고 새기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그것은 우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15:16에서 주님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그리고 시편 49:20에서 시인은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같도다”라고 했습니다.왜 말씀을 들으면서 깨닫지 못합니까 그것은 귀담아 듣지 않기 때문이며 믿음으로 듣지 않기 때문이며 다 안다는 교만한 믿음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듣고 깨닫는다는 사실일 것입니다.짐승도 듣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사람만 듣고 깨닫고 뉘우치고 고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그래서 사람을 인격적 존재라고 합니다.다시 말하면 사람으로서의 격을 갖추었다는 뜻입니다.천만 가지의 지식과 진리를 아는 것보다는 한 가지의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2.그들 두 제자를 주님께서 만나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두 제자의 만남 속에서 다음 세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주님이 그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도 예루살렘도 희망도 포기한 채 낙향하고 있었습니다.그들은 예수가 완전히 십자가에 못박혀 비참한 최후를 마쳤기 때문에 이젠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이유도 없고 예수를 찾을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야말고 예수를 포기해 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만나 주신 것입니다.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사랑이며 일방적 섭리인 것입니다.요한복음 15:16에서 주님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고 세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예수를 만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절망과 좌절의 길을 걷고 있던 나를 찾아와 주셨고 나를 만나 주신 것입니다.걱정과 근심으로 가득 둘러싸인 나를 주님이 찾아오셨고 죄로 죽게된 나를 찾아오셔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2)주님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영적 불감증 환자였던 두 사람에게 주님은 알아듣기 쉽게 차근차근 주님 자신의 부활의 소식을 말씀해 주셨습니다.요한복음 1:1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했습니다.그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였다고 요한복음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영적 소경이며 불감증 환자인 우리들에게 성경을 통하여 설교를 통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그러나 귀가 닫히고 가슴이 굳어 있기 때문에 그 말씀이 우리의 심령에 와 닿질 못하고 있습니다.주님은 오늘도 듣긴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심령들을 안타까와하고 계십니다.그리고 “귀 있는 자는 들으라”“왜 깨달음이 없느냐”“왜 행함이 없느냐”고 마음 아파하십니다.
3.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해주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등지고 허탈감에 빠진 채 내려가던 그들의 심령은 한대 지방처럼 싸늘하게 식어 있었습니다. 신앙의 열정이 식어지면 영적 냉혈 동물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영적 냉혈 동물이 되어버리면 감동도 없고,감격도 없고,기쁨도 없고,깨달음도 없어져 버립니다.그리고 항상 그 사람 심령 속에서는 싸늘한 바람만 맴돌 뿐입니다.이런 상태를 가리켜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두 제자의 식은 가슴에 불을 던져 주셨습니다.그래서 그들은 본문 32절에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소리쳤습니다. 주님은 그들 영혼 속에 불을 질러 주셨습니다.영혼의 그늘진 구석마다 부활의 태양이 작렬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의 식은 가슴에도 불이 붙어야 합니다.우리들의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오 주여 우리 가슴에 불을 던져 주시옵소서.성령님의 불을 주시옵소서.
4.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길에서 만난 예수,절망과 좌절의 엠마오 길목에서 만난 예수 때문에 그들의 삶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가는 길이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예수 만나고 마음이 뜨거워진 다음 즉시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그들의 길은 예수를 만난후 달라진 것입니다.예수를 만나야 길이 달라집니다.예수를 만나야 사는 길이 달라지고 가는 길이 달라지고 생각하는 길이 달라집니다.석가를 만나면 석가가 간 길을 가게 될 것이고 공자를 만나면 공자가 간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그러나 예수를 만나면 예수가 곧 길이기 때문에 생명의 길을 가게 되고 영생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2)말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그 입으로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고 절망과 좌절의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예수를 만난 후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부활하신 주님을 길에서 만났다고 증거했습니다. 사마리아 수가 성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났던 어떤 죄많은 여자가 예수를 만나고난후 동네로 들어가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전파했던 것처럼,다니엘이 예수를 만나고난후 내가 그이를 만났다고 소리쳤던 것처럼,오늘날에도 예수를 만나면 입이 열리고 말이 달라지게 됩니다.
3)믿음이 달라졌습니다. 그들이 길에서 예수를 만난후 희미했던 믿음이 확실해졌습니다.더디 믿던 그들의 신앙이 철두 철미한 신앙이 되었습니다.그래서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길에서 예수를 만났던 그 사람들처럼 우리도 오늘 여기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그리고 길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고 믿음이 달라져야 합니다. 의심이 변하여 확신으로, 냉혈적 신앙이 변하여 정열적 신앙으로, 불확실한 신앙이 확실한 신앙으로, 도피적 신앙이 참여의 신앙으로, 소극적 신앙이 적극적 신앙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오 주여 지금 내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내가 가는 길과 내가 하는 말과 내가 지닌 신앙이 변화되게 하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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