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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옵소서 (느13: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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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의 사자로 이 강단에 선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뜻만을 온전히 소개함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얼마전 '목회와 신학'이라는 잡지에 실린 한 대담에서 감리교단 감독을 지낸 김 지길 목사는 이런 말씀을 소개하였다. 영국의 한 신학자가 우리 한국에 와서 약 6 개월 정도 머물러 있었다. 그가 한국에 온 것은 한국 교회를 보고 배우기 위해서인데 일정을 마치고 가면서 '한국교회는 불은 없고 연기만 있더라.' 이런 말을 한마디 내 던지고 갔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알맹이는 없고 말만 무성한 교회라는 이야기였다. 최근의 한 기독교 기관에서 행한 통계에서 한국교회의 과제는 질적 성장과 양적 성장중 질적성장이 81.2 %, 양적성장이 17.85% 로 절대 다수가 질적인 성장을 바라고 있다고 밝혔다. 이것은 대다수 교인들이 알맹이 없는 성장신드롬에 이끌려 살아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에 있어서 개혁이란 무엇인가 양적인 성장을 말하는가 우리가 지난 한 세대동안 추구해 온 것은 잘 살아 보자는 것이었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자 !' 노래하며 열심히 땀흘려 일을 해 왔다. 국민소득이 높아지고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올림픽도 치르고 장애인 올림픽도 치르고 지금은 엑스포도 개최 할 만큼 국력이 신장되었다. 그러나 잘 산다고 하는 것이 외형적인 변화가 있다고 해서 잘 사는 것인가 대단히 죄송한 표현이지만 우리가 외형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동안 국민심성은 상대적으로 타락 일변도를 지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된 이면에 교회의 책임이 크다고 본다.
70년 80년대를 지내면서 고도의 경제성장과 함께 우리 교회도 성장 일변도의 메시지 즉 로버트 슐러 스타일의 목회가 유행이었다. 교회는 부흥운동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장 일변도의 정책을 펼쳐 나가다 보니 교인 수와 예배당의 크기와 나아가 대 사회적인 물량공세에만 힘을 쏟게 된 것이다. 교회가 눈에 보이는 것만 추구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참된 개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안으로 부터의 변화를 말한다. 본문이 담겨져 있는 에스라서에 있어서의 개혁은 부흥의 모델이다. 이미 잘아시는 대로 에스라의 개혁에는 말씀운동/회개운동/성령님의 역사가 있었다. 이러한 운동은 엄밀히 말씀드려서 내부적인 변화이다. 이러한 내적인 변화는 에스라 뿐 아니라 왕들 가운데 히스기야나 요시야 왕의 경우에도 있었다. 특히 요시야왕의 개혁은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요시야는 서기관 사반이 율법을 읽는 순간 자기의 옷을 찢었다. 슬픔과 놀람의 표시였다. 자기의 조상들이 율법에 기록된 말씀대로 살아오지 못하였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말씀은 귀 기울여 들을 때에 그 능력이 나타난다. 바울은 우리들에게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가르쳤다.(롬 10:17)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들은 요시아 왕과는 반대로 그의 아들 여호야김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전달된 하나님의 메시지를 읽는 족족 소도로 잘라서 화로 불에 던져 태워 버린 왕이었다. 당시 왕과 신하들은 모든 말을 듣고도 두려워 하거나 옷을 찢지 아니하였다.(렘 36:)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듣는 자들에게 개혁을 가져온다. 에스라와 동시대 인물인 느헤미야도 개혁을 일으킨 인물이다. 느헤미야 역시 안으로부터 개혁을 강력하게 수행한 인물이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기억하옵소서' 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13장에는 '기억하옵소서'라는 단어가 모두 4 번 기록되었다.(14, 22, 29, 31) 제일 처음 기록은 14절에서 발견된다. 당시 민장들은 영적인 지도자들에 대하여 제대로 물질적인 지원을 하지 않았다.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사람들이 받을 것을 제대로 받지 못함으로 전리(田里) 즉 밭으로 도망하는 것을 보고 레위 사람들을 다시 불러모아 성전에 두고 온 유대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곡간에 들여 레위사람들에게 분배하는 일을 맡겼다. 하나님의 성전을 맡은 레위 사람들이 그 직무를 수행하는데 아무 걱정없이 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그후 느헤미야는 자신이 행한 이 일을 인하여 나를 기억하옵소서 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나의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않도록 간구하였다. 이러한 간구는 결코 교만에서 나온 기도가 아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생활 염려 때문에 밭으로 돌아가지 않고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취한 조치를 지켜주시기를 바란 기도인 것이다. 두번째는 안식일을 성실하게 지키도록 명한 후에 기록된 것이다.(22) 15절 이하에 기록된 말씀은 당시 사람들이 안식일에 어떻게 하였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1) 술틀을 밟고
2)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며
3) 포도주,포도, 무화과와 여러가지 짐을 지고 예루살렘에 들어와 식물을 팔았다. 느헤미야는 유다 모든 귀인을 꾸짖었다.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 ' 느헤미야는 이 일도 기억하고 주의 큰 은혜로 나를 아끼시옵소서 간구하였다. 1980년도 초에 아카데미상의 주요부문을 휩쓸은 영화가 있었다. 그 영화의 제목은 "CHARIOT OF FIRE" 즉 "불병거" 엘리야의 불수레라는 뜻이다. 이 영화는 1942년 파리 올림픽의 영웅이었던 에릭 리델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영화화 한 것이다. 그는 천진에서 선교사 부모로부터 태어난 경건한 믿음의 아들이었다. 그는 자기 나라 스코틀랜드에서 공부를 하면서 육상선수로서 전 유럽에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 당시 리델은 옥스포드 대학을 졸업한 유태인 아브라함과 쌍벽을 이루었다. 마치 벤 존슨과 칼 루이스만큼 두사람은 난형난제였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늘 말하길 자기는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하지만 저 라델을 이길 수가 없다고 하였다. 꼭 반걸음 차이 정로로 언제나 에릭 리델이 앞서는 것이다. 이 두사람이 파리 올림픽에서 누가 과연 승자인가 결정을 짓는 경기를 가지게 되었다. 모든 세계인의 관심이 집중되는 세기의 경주였다.
그런데 배를 타고 도버해협을 건너던 중 리델은 100미터 결승전이 있는 날이 주일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코치에게, 왜 처음부터 내가 주일날 달려야 된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항의하였다. 왜 이제서야 그 얘기를 하느냐 한 것이다. 그때 코치는 "내가 너를 오늘까지 사랑으로 키워왔다. 코치의 명예를 걸고 권위를 갖고 너에게 요구하는데 너는 이번 100미터 대회에 영국을 위해서 꼭 출전해야 된다" 고 강권했다. 그때 그는 "저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내 양심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하고 거절하였다. 이에 당황한 영국은 심프슨 부인과의 염문으로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에드워드 황태자를 보냈다.
황태자가 직접 와서 당신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반드시 이번 대회에 출전해야 한다고 왕실의 권위를 가지고 명령했으나 그는"나는 내 조국 영국을 사랑하지만 그러나 우리 주님을 더욱 사랑한다"고 거절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100미터를 달려야 할 시간에 그는 그 도시에 있는 장로교회에 가서 태평스럽게 예배를 드렸다. 이 리델의 친구가 다음날 400미터 경기에 출전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출전권을 리델에게 넘겨주었다. 100미터에 출전을 못했으니 400미터에서 기량을 발휘해 보라는 뜻이었다. 원래 100미터 선수와 400미터 선수와는 골격이 다르고 운동하는 모습이 다르고 훈련방법이 다르다고 한다. 다음날 400미터에 리델이 출전했는데 그만 출발 선상에서 넘어졌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일어나서 완주했고 결국 금메달을 땄다. 그 당시 그가 세운 올림픽 신기록은 16년간이나 아무도 깰 수 없는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자기 믿음을 굳건히 지켰다. 믿음을 가진 운동선수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확증한 사람이었다. 올림픽 다음해에 이 리델은 선교사로 떠나서 20년 동안 중국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순교자로서 주님 앞에 신앙의 경주를 끝까지 잘 달린 한 신앙의 인물이었다.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지키는 안식일은 사람이 주인이 되고 있다. 죄와 사망과 사단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속하신 그분을 찬양하고 천국의 안식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날이다. 안식일은 장식품이 아니다. 우리 생활의 중심이다. 오다가다 들리고 준비없이 지켜지는 날이 결코 아니다. 오늘의 안식일은 주일이다. 주님의 부활 후에 지켜진 안식후 첫날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예배하는 주일인 것이다.
主日이라는 의미는 주님의 날이란 뜻이다. 그분을 위하여 준비된 예배를 드리도록 하자. 23절 이하에서 느헤미야는 유다사람들이 이방여인을 아내로 삼은 사실을 크게 꾸짖었다. 솔로몬이 저지른 실수를 지적하면서 '열국 중에 비길데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왕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나 이방 여인 때문에 범죄하였음을 지적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좋은 믿음을 소유했다 하여도 죄의 유혹은 우리가 경계를 게을리 하고 깨어 있지 않으면 우리를 타락하게 만든다. 느헤미야는 유다의 범죄를 인하여 어느 정도 분노를 나타내었는가 25절을 보자 ! 責望하고, 詛呪하며, 두어 사람을 때리고, 그 머리털을 뽑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 ! 너희 딸들로 저희 아들에게 주지말며, 너희 아들들이나 너희를 위하여 저희 딸을 데려오지 말라 !' 지금은 좀 생소한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한세대전 만 해도 세례문답을 행할 때에는 당회에서 반드시 미혼자들에게 이방인과의 결혼을 하지 말도록 당부하였다. 믿지 않는 사람과의 결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성도가 성도가정의 자녀와 짝을 이루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인 줄 알아야 한다. 다른 한가지 중요한 일은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제사장의 직분을 더럽히고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 대한 언약을 어기었기 때문에 저희를 위하여 간구한 일이다. 엘리아십은 앞 부분에서 예루살렘 건축을 방해한 도비야를 성전 골방에 거하게 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잘못이었다. 느헤미야는 심히 근심하여 골방에 올라가 도비야의 세간을 모두 방 밖으로 내어 던졌다. 그리고 그 방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 전에서 사용하는 기명과 소제물과 유향을 모두 그 방에 옮겨 놓았다. 제사장이 자기 직분을 더럽혔다는 것은 제사장으로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느헤미야는 제사장과 레위사람의 잘못에 대하여는 유다백성들의 잘못을 책하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저희를 기억하옵소서 !'(29) 당시 느헤미야의 위치는 총독일 뿐이다. 총독으로서 제사장과 유다 백성들을 어떻게 구별하여 대하였는가는 눈여겨 보아두어야 할 내용이다. 그는 총독이면서 경건하고 용감한 지도자로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경륜을 먼저 깨달은 사람이다. 이래서는 안된다는 깊은 깨달음 속에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의 중책을 스스로 짊어진 사람이었다. 52일 만에 성벽 재건은 다 끝났다. 그러나 개혁이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느헤미야는 하나님 앞에 조용히 엎드려 간구하면서 '기억하옵소서 !'호소한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갈보리 동산에는 다른 두 사람의 강도도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다. 여러분이 아시는대로 한편 강도는 예수를 조롱하였다. 그러나 한편 강도는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 자신을 주님께 내어 맡겼다. 이 말은 십자가에 달려 계신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충분하였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필요한 말은 무엇일까 나를 기억하소서 ! 나를 기억하소서 ! 나를 기억하소서 ! 느헤미야는 백성들이 이방사람을 떠나게하여 깨끗하게하고 제사장과 레위사람들이 그 일을 맡게 하고 처음 익은 멸매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게 하였다. 느헤미야는 또다시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시고 복을 주옵소서.'(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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