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한 도우심 (대하25:1-13)
본문
우리 인간을 생각하는 동물이라 해서 호모 사피엔스라고 합니다. 또 인간을 경제적 동물이라 해서 호모 이코노미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를 합해 보면 “사람은 경제를 생각한다.”는 말이 됩니다. “손해와 이익이 되는 것을 계산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이 하는 계산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계산은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어서 손해인가 또는 이익인가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을 믿어서 손해라고 생각한 사람과 하나님을 믿으면 절대 유익이라고 생각한 사람의 경우가 성경에 대조 비교되어서 나오는 모습이 있습니다. 첫 번째 주인공은 하나님을 믿어서 손해라고 생각한 유다왕 아마샤입니다. 본문 2절에 아마샤왕에 대한 간단한 평가의 말이 먼저 나옵니다.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였더라 ”첫째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으나 ”둘째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였더라” 이것이 성경이 결론 내린 아마샤의 인생 평가입니다.
계속해서 3절 4절을 보면 “그 나라가 굳게 서매 그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죽였으나 저희 자녀는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 율법 책에 기록한 대로 함이라 곧 여호와께서 명하여 이르시기를 자녀로 인하여 아비를 죽이지 말 것이요 아비로 인하여 자녀를 죽이지 말 것이라 오직 각 사람은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니라 하셨더라” 아마샤는 자기의 아버지를 죽인 반역자들을 처형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자녀들까지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율법대로 진실하게 적용을 해서 그들의 자녀들은 죽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마샤의 그 첫 번째 정직한 행함입니다. 그러면 아마샤의 두 번째 온전치 못한 마음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을 한 번 이 시간 더듬어 보겠습니다. 아마샤왕이 에돔 나라와 전쟁을 해야 할 때였습니다. 자기 나라 군대를 모집해 보니 삼십만 명이었습니다. 좀 병력이 부족한 듯 했습니다. 그래서 같은 동족인 북이스라엘 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은 일백 달란트라는 돈을 삯으로 주고 용병 10만명을 빌린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부터 이제사건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의 사람이 등장을 해서 왕을 말렸습니다. “왕이시여 저 이스라엘 군대와 함께 전장터에 가지 마소서 하나님이 그 군대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냥 왕의 군대만 나가서 힘껏 싸우십시오 만일 고집 피우면 왕은 나가서 대적 앞에 엎드러집니다. 하나님은 능히 돕기도 하시고 능히 패하게도 하십니다.” (25:7-8)
그 말을 들은 아마샤왕은 갑자기 본전 생각이 났습니다. “내가 일백 달란트를 이스라엘 군대에게 주었으니 어찌 할꼬”(25:9) 이미 준 돈이 아깝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왕이시여. 여호와께서 능히 이보다 많은 것으로 왕에게 주실 수 있나이다.”(25:9) 이 말을 들은 아마샤왕은 이제 이스라엘 군대를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이 다 채워 주신다고 하니 그 말씀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에 나갔더니 북이스라엘 군대 10만 없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대승을 거두고 돌아옵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그 돌려보낸 그 이스라엘 군대 10만명이 화가 나서 돌아가면서 유다 성읍들을 습격하고 사람 삼천을 죽이고 물건을 많이 노략질해서 돌아간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아마샤는 이 사실을 알고는 분통이 터졌습니다. ‘괜히 하나님 말을 들어서 저들을 그냥 돌려보내었더니 오히려 손해가 더욱 막심하구나 하나님이 더 많은 것으로 채워 주신다고 오히려 더욱 손해만 보았다.’ 전에 주었던 은 일백 달란트에다가 또 사람 삼천이 궐이 났고 또 많은 물건까지 빼앗겨 버리는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에 빠진 아마샤는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가 정벌한 정벌한 에돔 족속의 우상에게 경배를 드려버렸습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아마샤가 에돔 사람을 도륙하고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우상들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 앞에 경배하며 분향 한지라”라고 쓰여있습니다. 아마샤는 하나님께 반항을 했던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을 믿어서 도움은커녕 손해만 봤다는 것입니다. 전쟁에 승리를 하고 돌아왔으면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용병 십만을 돌려보내고도 승리를 하였으면 이제 당연히 돌아와서 하나님께 감사의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게 순서입니다. 이게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 왕이 갑자기 우상에게 경배를 드려 버린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 반항하는 것입니다. 이제 분한 생각에 잠 못 이루던 아마샤왕은 이번에는 더 나아가서 그 북이스라엘을 공격해서 빼앗긴 물건들과 그리고 은 일백달란트까지 도로 찾아와야 하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아마샤왕은 엄밀히 말해서 손해난 것이 아닙니다. 전쟁에 승리를 하였지 않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도움이었습니다. 승리하지 않았으면 자기 목숨도 빼앗길 뻔했는데 전쟁에 승리했습니다. 삼천명의 자기 백성이 죽였다구요 삼십만명의 군대가 가서 적 2만명을 죽였지 않습니까 30만에서 자기 백성 3천명이 죽었다면 사실 1/100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도우심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오히려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설령 물질적으로는 좀 손해라 하더라도 분명히 하나님의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능히 나중에 이보다 더 많은 것으로 주실 수 있다”(25:9)고 했는데 아마샤는 지금 자기의 손실만을 보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우상을 경배해 버렸습니다.
오늘날의 시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신자들은 일주일에 최소한 한번 이상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주일밤, 수요일밤, 금요일밤, 구역 예배 더욱이 매일 새벽기도까지 드려야 하니 어떻게 보면 엄청난 시간 손해를 본다는 것입니다. 한 번 교회에 나왔다가 예배 드리고 가는 시간, 준비하는 시간까지 합해서 모든 예배에 참석하는 자는 일주일에 23시간 근 일주일에 하루를 드리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굉장한 시간의 손해입니다. 또 그것뿐입니까 헌금도 드립니다. 물질 손해도 본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뿐만 아니라 감사 헌금도 때로 드리고 주일 헌금, 선교 헌금 또 교회 나오려면 차비도 필요하고요, 심방 오면 과일도 대접해야 하고. 여전도회, 남전도회 회비도 내야 합니다. 이것저것 다 합친다면 물질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1/7 가량 됩니다. 시간도 잘 믿으려면 1/7, 물질도 잘 믿으려면 1/7을 내 입장에서 보면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계산한 사람들중에 교회 나오기를 꺼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 믿는 것 자체는 별로 나무랄 것이 없는데 그 아까운 시간을 많이 뺏기고 물질도 손해보는 것이 안 좋아서 예수 믿기를 꺼리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예수 잘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믿어도 적당히 믿어야지 너무 믿으면 내 시간은 없지 않은가 내 시간을 교회에 다 빼앗겨 버리면 그럼 나는 뭐란 말인가’ 아내가 너무 열심히면 주일날 교회에 아내를 빼앗겨 버리는 느낌이 든다는 말입니다. 또 오랜만의 휴일날 가족끼리 나들이도 하고 싶고 못 가본데도 가보고 싶고 또 친척들도 찾아 뵙고 싶은데 주일날 주님 앞에 나가서 예배드려야 되니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 손해가 막심한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솔직히 그런 생각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어떤 목사 부인이 쓴 글에도 그런 말이 나옵니다. “내 남편을 교회에 빼앗겨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맞는 말입니다. 아들이 너무 열심히 교회 봉사하는 경우 자식을 주님께 빼앗겨 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요즘 하루 일당이 얼마인데 교회 봉사로 그 귀한 시간을 너무 빼앗기는 것 같고 그렇다고 뭐 교회에서 돈 나오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때론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 믿으려면 시간과 봉사의 땀과 물질까지도 드려야 합니다. 바쁜 세상에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잠시로 끝나야지 늘 그런 생각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아마샤왕과 같이 온전치 못한 마음의 사람이 됩니다. 그러다가 자기 인생에서 결정적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이 되는 어떤 기회가 오면 마음속에 온전치 못한 것이 터지고 마는 것입니다. 아마샤는 어떻게 터뜨렸습니까 와 보니 백성중 삼천명이 궐이 났고 또 많은 물건까지 빼앗겨 버렸습니다. 일백 달란트도 아까운 생각이 마음속에 있었는데 결정적 순간이 온 것입니다. 승리를 얻은 것보다 손해본 것이 먼저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에게 절해 버렸습니다. 또한 아마샤는 자기 손으로 이익을 회복하겠다고 생각하고 북이스라엘을 공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자꾸 말립니다. 북이스라엘의 왕도 말립니다. 그러나 끝까지 자기 손으로 손해를 회복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론 전쟁에 이기게 되었으면 회복도 가능했을 것입니다만은 전쟁에 저 버렸으니 어떡합니까 이름하여 “벧세메스 전투” 역대하 25장 23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벧세메스에서 여호아하스의 손자 요아스의 아들 유다 왕 아마샤를 사로잡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벽을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사백 규빗을 헐고 또 하나님의 전 안에 오벧에돔의 지키는 모든 금은과 기명과 왕궁의 재물을 취하고 또 사람을 볼모로 잡아가지고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 이익은커녕 군대는 패하여 도망가고 자신은 사로잡히고 예루살렘 성벽이 헐리고 성전의 모든 금은과 기명을 빼앗기고 왕궁의 재물을 빼앗기고 사람까지도 볼모로 빼앗기고 모조리 다 날라갔습니다. 아마샤 왕은 사로잡혔다고 했는데 그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25절입니다. “이스라엘 왕 요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죽은 후에도 유다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십오 년을 생존하였더라” 이것은 아마샤가 북 이스라엘로 잡혀가서 감옥에서 지냈는데 자기를 가둔 북 이스라엘왕 요아스가 죽은 후에도 그곳에서 15년을 다행스럽게 더 생존했다고 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생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임금에게는 생존이라는 단어를 잘 안 씁니다. “…몇 년을 군림했다. 통치했다. 다스렸다.” 라고 씁니다. 생존이라는 것은 더 살기는 살았으나 왕으로서 군림하며 산 것이 아니라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왕위를 잃고 완전히 빈 몸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27절에 보면 “아마샤가 돌이켜 여호와를 버린 후부터 예루살렘에 그를 모반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북 이스라엘에서 그쪽 왕이 죽은 후에도 빨리 남 유다로 오지 못하고 15년을 더 머물러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아마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라기스라는 곳으로 도망가서 그곳에서 모반한 무리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결국은 나중에 자기 생명까지도 빼앗겼습니다. 완전히 빈 몸으로 왕위도 잃어버리고 나라도 잃어버리고 재산도 잃어버리고 자식들도 잃어버리고 명예도 잃고 권력도 잃고 간신히 생존한 아마샤. 하나님의 도움이 떠나시니까 완전히 벌거벗은 몸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실 그 전에 아마샤에게 하나님이 왕위도 주셨고 재산도 주셨고 나라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다가 그 온전치 못한 마음때문에 하나님을 버리고 결국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네게 있는 것이 실은 다 누가 준 것이냐” 하나님이 한 번 깨달아 보라고 도로 다 빼앗으신 것입니다. 완전히 아마샤는 다 빼앗기고 가까스로 생존했습니다. 오늘날 내게 시간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내게 물질을 주신 분도 하나님. 내게 아내를 주신 분도 하나님. 내게 자식을 주신 분도 하나님. 내게 건강을 주신 분도 하나님. 내게 있는 모든 것은 사실 하나님이 다 주신 것 아닙니까 그 중에서 나는 일부를 하나님께 감사의 뜻으로 되돌려 드리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시면 마음이 편안합니다. 원래부터 내 것인데 교회 다니며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하면 아까운 마음이 드는데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요, 주신 것 중에서 일부를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하면 드리면서도 감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참 대조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믿어서 손해본다고 생각한 아마샤. 온전치 못했던 아마샤. 그는 결국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도움이 떠나자 완전히 벌거벗은 모습이 되었다는 것을 성경이 보여줍니다만은 성경에 이렇게 실패한 모습만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한 모습만 있으면 성경 읽을 때 늘 우울할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반대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서 하나님이 엄청나게 축복하사 은혜 받은 그런 사람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그 다음장. 26장 아마샤왕의 아들 웃시야왕의 경우입니다.
26장 4절입니다. “웃시야가 그 부친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며” 그도 정직히 행합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 구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마샤처럼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나에게 도움을 주시는 분으로 알고서 도움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형통케 해 주시는 모습이 6절부터 15절까지 자세하게 나와있습니다. “…블레셋 사람과 싸우고 가드 성과 야브네 성과 아스돗 성을 헐고 아스돗 땅과 블레셋 사람 가운데 성읍들을 건축하매” 아마샤때는 성읍이 무너졌는데 웃시야때는 성읍이 건축됩니다. “하나님이 도우사 블레셋 사람과 구르바알에 거한 아라비아 사람과 마온 사람을 치게 하신지라 암몬 사람이 웃시야에게 조공을 바치매… ”갈수록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점점 풍성해 집니다. “…문과 성 굽이에 망대를 세워 견고하게 하고 …물웅덩이를 많이 팠으니 평야와 평지에 육축을 많이 기름이며 …산과 좋은 밭에 농부와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를 두었으니 … ” 농사와 목축업이 잘되어 경제적으로도 풍성합니다. “…군사가 있으니 … 족장의 총수가 이천육백 명이니 모두 큰 용사요 그 수하의 군대가 삼십만 칠천오백 명이라” 군사도 강성해 졌습니다. “ … 방패와 창과 투구와 갑옷과 활과 물매 돌을 예비하고” 군수 물자도 준비되었습니다. “ … 공교한 공장으로 기계를 창작하여 … 그 이름이 원방에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더라” 기이한 도우심. 바로 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공장도 설립하고 이상한 무기도 만들어 냅니다. 군수 물자도 넉넉합니다. 군대 숫자도 넉넉합니다. 농사도 잘 됩니다. 육축 축산업도 잘됩니다. 망대와 성도 많이 쌓았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조공까지 바칩니다. 여기서 아마샤와 웃시야의 모습이 정 반대로 비교가 되지 않으십니까 성경이 비교해서 독자들에게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 알로 심으면 오히려 30배 60배 100배로 갚아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기이한 도우심입니다. 아마샤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끊쳐졌습니다. 하나님을 믿어 도움을 얻기는커녕 하나님을 믿어 손해만 본다고 하여 하나님을 버린 아마샤. 자기 스스로 해 보겠다고 나섰으나 하나님께서 도우심을 거두시자 어디 한가지라도 얻은 것이 있습니까 있는 것까지 다 빼앗겨 버린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웃시야는 살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고 그래서 그는 모든 면에 있어서 넘치는 형통함을 얻는 기이한 도우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것을 빼앗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 믿어서 손해가 막심합니까 예수 믿어서 내 마음에 큰 의지함이 생겼습니다. 천국의 소망 바라보고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예수 믿어 때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건강도 꾸준히 지켜 주시고 소망도 생기고 기쁨이 있고 주님이 우리 가정을 사고로부터 지켜 주십니다.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나중에 영생의 복까지 얻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복을 주십니다. 손해보는 것이 아닙니다. 잠깐 시간과 물질의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나중에 이보다 더 많은 것으로 주실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121편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인생에게 도움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믿어 손해날 것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중에 다 갚아 주시고 채워 주신다고 했습니다. 기이한 도우심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하면서 웃시야처럼 살아가면서 내 인생에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기이한 처음 보는 이상한 도움이 온다는 것입니다. 성도님 여러분. 성경이 보여주는 아마샤가 되지 마시고 예수 믿어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드리면 우리 하나님이 더 많은 것으로 채워 주신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시간과 정성과 마음까지 드리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셔서 인생이 지금까지 보지 못한 웃시야의 기이한 도우심을 여러분의 인생에도 체험하시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웃시야와 같은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계속해서 3절 4절을 보면 “그 나라가 굳게 서매 그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죽였으나 저희 자녀는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 율법 책에 기록한 대로 함이라 곧 여호와께서 명하여 이르시기를 자녀로 인하여 아비를 죽이지 말 것이요 아비로 인하여 자녀를 죽이지 말 것이라 오직 각 사람은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니라 하셨더라” 아마샤는 자기의 아버지를 죽인 반역자들을 처형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자녀들까지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율법대로 진실하게 적용을 해서 그들의 자녀들은 죽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마샤의 그 첫 번째 정직한 행함입니다. 그러면 아마샤의 두 번째 온전치 못한 마음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을 한 번 이 시간 더듬어 보겠습니다. 아마샤왕이 에돔 나라와 전쟁을 해야 할 때였습니다. 자기 나라 군대를 모집해 보니 삼십만 명이었습니다. 좀 병력이 부족한 듯 했습니다. 그래서 같은 동족인 북이스라엘 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은 일백 달란트라는 돈을 삯으로 주고 용병 10만명을 빌린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부터 이제사건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의 사람이 등장을 해서 왕을 말렸습니다. “왕이시여 저 이스라엘 군대와 함께 전장터에 가지 마소서 하나님이 그 군대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냥 왕의 군대만 나가서 힘껏 싸우십시오 만일 고집 피우면 왕은 나가서 대적 앞에 엎드러집니다. 하나님은 능히 돕기도 하시고 능히 패하게도 하십니다.” (25:7-8)
그 말을 들은 아마샤왕은 갑자기 본전 생각이 났습니다. “내가 일백 달란트를 이스라엘 군대에게 주었으니 어찌 할꼬”(25:9) 이미 준 돈이 아깝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왕이시여. 여호와께서 능히 이보다 많은 것으로 왕에게 주실 수 있나이다.”(25:9) 이 말을 들은 아마샤왕은 이제 이스라엘 군대를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이 다 채워 주신다고 하니 그 말씀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에 나갔더니 북이스라엘 군대 10만 없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대승을 거두고 돌아옵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그 돌려보낸 그 이스라엘 군대 10만명이 화가 나서 돌아가면서 유다 성읍들을 습격하고 사람 삼천을 죽이고 물건을 많이 노략질해서 돌아간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아마샤는 이 사실을 알고는 분통이 터졌습니다. ‘괜히 하나님 말을 들어서 저들을 그냥 돌려보내었더니 오히려 손해가 더욱 막심하구나 하나님이 더 많은 것으로 채워 주신다고 오히려 더욱 손해만 보았다.’ 전에 주었던 은 일백 달란트에다가 또 사람 삼천이 궐이 났고 또 많은 물건까지 빼앗겨 버리는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에 빠진 아마샤는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가 정벌한 정벌한 에돔 족속의 우상에게 경배를 드려버렸습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아마샤가 에돔 사람을 도륙하고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우상들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 앞에 경배하며 분향 한지라”라고 쓰여있습니다. 아마샤는 하나님께 반항을 했던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을 믿어서 도움은커녕 손해만 봤다는 것입니다. 전쟁에 승리를 하고 돌아왔으면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용병 십만을 돌려보내고도 승리를 하였으면 이제 당연히 돌아와서 하나님께 감사의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게 순서입니다. 이게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 왕이 갑자기 우상에게 경배를 드려 버린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 반항하는 것입니다. 이제 분한 생각에 잠 못 이루던 아마샤왕은 이번에는 더 나아가서 그 북이스라엘을 공격해서 빼앗긴 물건들과 그리고 은 일백달란트까지 도로 찾아와야 하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아마샤왕은 엄밀히 말해서 손해난 것이 아닙니다. 전쟁에 승리를 하였지 않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도움이었습니다. 승리하지 않았으면 자기 목숨도 빼앗길 뻔했는데 전쟁에 승리했습니다. 삼천명의 자기 백성이 죽였다구요 삼십만명의 군대가 가서 적 2만명을 죽였지 않습니까 30만에서 자기 백성 3천명이 죽었다면 사실 1/100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도우심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오히려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설령 물질적으로는 좀 손해라 하더라도 분명히 하나님의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능히 나중에 이보다 더 많은 것으로 주실 수 있다”(25:9)고 했는데 아마샤는 지금 자기의 손실만을 보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우상을 경배해 버렸습니다.
오늘날의 시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신자들은 일주일에 최소한 한번 이상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주일밤, 수요일밤, 금요일밤, 구역 예배 더욱이 매일 새벽기도까지 드려야 하니 어떻게 보면 엄청난 시간 손해를 본다는 것입니다. 한 번 교회에 나왔다가 예배 드리고 가는 시간, 준비하는 시간까지 합해서 모든 예배에 참석하는 자는 일주일에 23시간 근 일주일에 하루를 드리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굉장한 시간의 손해입니다. 또 그것뿐입니까 헌금도 드립니다. 물질 손해도 본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뿐만 아니라 감사 헌금도 때로 드리고 주일 헌금, 선교 헌금 또 교회 나오려면 차비도 필요하고요, 심방 오면 과일도 대접해야 하고. 여전도회, 남전도회 회비도 내야 합니다. 이것저것 다 합친다면 물질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1/7 가량 됩니다. 시간도 잘 믿으려면 1/7, 물질도 잘 믿으려면 1/7을 내 입장에서 보면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계산한 사람들중에 교회 나오기를 꺼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 믿는 것 자체는 별로 나무랄 것이 없는데 그 아까운 시간을 많이 뺏기고 물질도 손해보는 것이 안 좋아서 예수 믿기를 꺼리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예수 잘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믿어도 적당히 믿어야지 너무 믿으면 내 시간은 없지 않은가 내 시간을 교회에 다 빼앗겨 버리면 그럼 나는 뭐란 말인가’ 아내가 너무 열심히면 주일날 교회에 아내를 빼앗겨 버리는 느낌이 든다는 말입니다. 또 오랜만의 휴일날 가족끼리 나들이도 하고 싶고 못 가본데도 가보고 싶고 또 친척들도 찾아 뵙고 싶은데 주일날 주님 앞에 나가서 예배드려야 되니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 손해가 막심한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솔직히 그런 생각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어떤 목사 부인이 쓴 글에도 그런 말이 나옵니다. “내 남편을 교회에 빼앗겨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맞는 말입니다. 아들이 너무 열심히 교회 봉사하는 경우 자식을 주님께 빼앗겨 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요즘 하루 일당이 얼마인데 교회 봉사로 그 귀한 시간을 너무 빼앗기는 것 같고 그렇다고 뭐 교회에서 돈 나오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때론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 믿으려면 시간과 봉사의 땀과 물질까지도 드려야 합니다. 바쁜 세상에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잠시로 끝나야지 늘 그런 생각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아마샤왕과 같이 온전치 못한 마음의 사람이 됩니다. 그러다가 자기 인생에서 결정적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이 되는 어떤 기회가 오면 마음속에 온전치 못한 것이 터지고 마는 것입니다. 아마샤는 어떻게 터뜨렸습니까 와 보니 백성중 삼천명이 궐이 났고 또 많은 물건까지 빼앗겨 버렸습니다. 일백 달란트도 아까운 생각이 마음속에 있었는데 결정적 순간이 온 것입니다. 승리를 얻은 것보다 손해본 것이 먼저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에게 절해 버렸습니다. 또한 아마샤는 자기 손으로 이익을 회복하겠다고 생각하고 북이스라엘을 공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자꾸 말립니다. 북이스라엘의 왕도 말립니다. 그러나 끝까지 자기 손으로 손해를 회복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론 전쟁에 이기게 되었으면 회복도 가능했을 것입니다만은 전쟁에 저 버렸으니 어떡합니까 이름하여 “벧세메스 전투” 역대하 25장 23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벧세메스에서 여호아하스의 손자 요아스의 아들 유다 왕 아마샤를 사로잡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벽을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사백 규빗을 헐고 또 하나님의 전 안에 오벧에돔의 지키는 모든 금은과 기명과 왕궁의 재물을 취하고 또 사람을 볼모로 잡아가지고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 이익은커녕 군대는 패하여 도망가고 자신은 사로잡히고 예루살렘 성벽이 헐리고 성전의 모든 금은과 기명을 빼앗기고 왕궁의 재물을 빼앗기고 사람까지도 볼모로 빼앗기고 모조리 다 날라갔습니다. 아마샤 왕은 사로잡혔다고 했는데 그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25절입니다. “이스라엘 왕 요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죽은 후에도 유다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십오 년을 생존하였더라” 이것은 아마샤가 북 이스라엘로 잡혀가서 감옥에서 지냈는데 자기를 가둔 북 이스라엘왕 요아스가 죽은 후에도 그곳에서 15년을 다행스럽게 더 생존했다고 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생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임금에게는 생존이라는 단어를 잘 안 씁니다. “…몇 년을 군림했다. 통치했다. 다스렸다.” 라고 씁니다. 생존이라는 것은 더 살기는 살았으나 왕으로서 군림하며 산 것이 아니라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왕위를 잃고 완전히 빈 몸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27절에 보면 “아마샤가 돌이켜 여호와를 버린 후부터 예루살렘에 그를 모반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북 이스라엘에서 그쪽 왕이 죽은 후에도 빨리 남 유다로 오지 못하고 15년을 더 머물러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아마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라기스라는 곳으로 도망가서 그곳에서 모반한 무리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결국은 나중에 자기 생명까지도 빼앗겼습니다. 완전히 빈 몸으로 왕위도 잃어버리고 나라도 잃어버리고 재산도 잃어버리고 자식들도 잃어버리고 명예도 잃고 권력도 잃고 간신히 생존한 아마샤. 하나님의 도움이 떠나시니까 완전히 벌거벗은 몸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실 그 전에 아마샤에게 하나님이 왕위도 주셨고 재산도 주셨고 나라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다가 그 온전치 못한 마음때문에 하나님을 버리고 결국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네게 있는 것이 실은 다 누가 준 것이냐” 하나님이 한 번 깨달아 보라고 도로 다 빼앗으신 것입니다. 완전히 아마샤는 다 빼앗기고 가까스로 생존했습니다. 오늘날 내게 시간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내게 물질을 주신 분도 하나님. 내게 아내를 주신 분도 하나님. 내게 자식을 주신 분도 하나님. 내게 건강을 주신 분도 하나님. 내게 있는 모든 것은 사실 하나님이 다 주신 것 아닙니까 그 중에서 나는 일부를 하나님께 감사의 뜻으로 되돌려 드리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시면 마음이 편안합니다. 원래부터 내 것인데 교회 다니며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하면 아까운 마음이 드는데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요, 주신 것 중에서 일부를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하면 드리면서도 감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참 대조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믿어서 손해본다고 생각한 아마샤. 온전치 못했던 아마샤. 그는 결국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도움이 떠나자 완전히 벌거벗은 모습이 되었다는 것을 성경이 보여줍니다만은 성경에 이렇게 실패한 모습만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한 모습만 있으면 성경 읽을 때 늘 우울할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반대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서 하나님이 엄청나게 축복하사 은혜 받은 그런 사람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그 다음장. 26장 아마샤왕의 아들 웃시야왕의 경우입니다.
26장 4절입니다. “웃시야가 그 부친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며” 그도 정직히 행합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 구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마샤처럼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나에게 도움을 주시는 분으로 알고서 도움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형통케 해 주시는 모습이 6절부터 15절까지 자세하게 나와있습니다. “…블레셋 사람과 싸우고 가드 성과 야브네 성과 아스돗 성을 헐고 아스돗 땅과 블레셋 사람 가운데 성읍들을 건축하매” 아마샤때는 성읍이 무너졌는데 웃시야때는 성읍이 건축됩니다. “하나님이 도우사 블레셋 사람과 구르바알에 거한 아라비아 사람과 마온 사람을 치게 하신지라 암몬 사람이 웃시야에게 조공을 바치매… ”갈수록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점점 풍성해 집니다. “…문과 성 굽이에 망대를 세워 견고하게 하고 …물웅덩이를 많이 팠으니 평야와 평지에 육축을 많이 기름이며 …산과 좋은 밭에 농부와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를 두었으니 … ” 농사와 목축업이 잘되어 경제적으로도 풍성합니다. “…군사가 있으니 … 족장의 총수가 이천육백 명이니 모두 큰 용사요 그 수하의 군대가 삼십만 칠천오백 명이라” 군사도 강성해 졌습니다. “ … 방패와 창과 투구와 갑옷과 활과 물매 돌을 예비하고” 군수 물자도 준비되었습니다. “ … 공교한 공장으로 기계를 창작하여 … 그 이름이 원방에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더라” 기이한 도우심. 바로 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공장도 설립하고 이상한 무기도 만들어 냅니다. 군수 물자도 넉넉합니다. 군대 숫자도 넉넉합니다. 농사도 잘 됩니다. 육축 축산업도 잘됩니다. 망대와 성도 많이 쌓았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조공까지 바칩니다. 여기서 아마샤와 웃시야의 모습이 정 반대로 비교가 되지 않으십니까 성경이 비교해서 독자들에게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 알로 심으면 오히려 30배 60배 100배로 갚아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기이한 도우심입니다. 아마샤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끊쳐졌습니다. 하나님을 믿어 도움을 얻기는커녕 하나님을 믿어 손해만 본다고 하여 하나님을 버린 아마샤. 자기 스스로 해 보겠다고 나섰으나 하나님께서 도우심을 거두시자 어디 한가지라도 얻은 것이 있습니까 있는 것까지 다 빼앗겨 버린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웃시야는 살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고 그래서 그는 모든 면에 있어서 넘치는 형통함을 얻는 기이한 도우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것을 빼앗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 믿어서 손해가 막심합니까 예수 믿어서 내 마음에 큰 의지함이 생겼습니다. 천국의 소망 바라보고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예수 믿어 때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건강도 꾸준히 지켜 주시고 소망도 생기고 기쁨이 있고 주님이 우리 가정을 사고로부터 지켜 주십니다.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나중에 영생의 복까지 얻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복을 주십니다. 손해보는 것이 아닙니다. 잠깐 시간과 물질의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나중에 이보다 더 많은 것으로 주실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121편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인생에게 도움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믿어 손해날 것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중에 다 갚아 주시고 채워 주신다고 했습니다. 기이한 도우심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하면서 웃시야처럼 살아가면서 내 인생에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기이한 처음 보는 이상한 도움이 온다는 것입니다. 성도님 여러분. 성경이 보여주는 아마샤가 되지 마시고 예수 믿어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드리면 우리 하나님이 더 많은 것으로 채워 주신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시간과 정성과 마음까지 드리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셔서 인생이 지금까지 보지 못한 웃시야의 기이한 도우심을 여러분의 인생에도 체험하시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웃시야와 같은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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