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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막7:3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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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7:24-30에 보면, 예수께서는 여행 범위를 이방인 지 역까지 확대하셔서 그 곳에서 수로보니게 족속의 어느 한 여인의 딸을 괴롭히는 귀신을 쫓아내셨다. 이제 그는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데가볼리는 팔레스틴 북부와 요단 동편 지역에 걸친 희랍의 열 도시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임) 우회하여 갈릴리로 돌아오셨다. 마가복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접속사 "그리고"(kai, 카이. 한글 개역엔 생략되어 있음-역주)는 각 단 락의 첫 절 앞머리에 놓여 사건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고, 또한 긴박감과 속도감을 느끼게 해 주려고 애쓴다.
귀먹고 동시에 어눌한(mogilalos 모길라로스, "언어 장애 증세 가 있는") 어느 사람이 고침을 받고자 예수님께 인도된다. 그 사람의 양귀와 혀에 닿으시는 예수님의 행위를 통해 병이 낳는다.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시고(참조:6:41, 마 6:9), 탄식 하시고(불쌍한 마음에서 혹은 치유의 한 과정으로서), 그리고 나 서 아랍어로 "에바다"("열려라")하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풀려 "분명하게"(orthos, 오르도스) 말을 하였다(35절).
마가가 이 설화를 이사야 35:5-6의 예언의 성취로 보았을 가능 성은 매우 다분하다.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mogilalos, 모길랄로스, 70인역)의 혀는 노래하리니.
마가복음의 다른 곳에는 예수께서 소경(8:22-26, 10:46-52)과 중풍병자(2:3-12)를 고치신 기사가 나와 있다. 아마, 마가는 이러한 에피소드들을 오랫동안 대망(待望)하던 구원의 때를 위한 증거로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예비와 준비이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를 의미했 을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행위들은 귀신들의 괴롭힘으로부터 해방되어 고침을 받은 자들에게 구원(온전함)을 가져다 준다.
마가와 기타 다른 공관복음 저자들은 그러한 치류를 "표적"이 나 "기적"으로 보지 않는다. 비록 메시야가 병을 고친다는 내용 의 유대 전승은 없지만, 베드로가 예수께서는 "그리스도"라고 놀 라운 선언을 한 것은 바로 예수께서 벱새다의 소경을 고치신 직 후였던 것이다(8:22-29).
36절은 소위 "메시야 비밀"(messianic secret)이라고 하는 매 우 문제가 되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 병고친 사건 을 목도한 자들에게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고 경계하신다.
그런데 무엇을 말하지 말라는 것일까 그가 메시야라는 것을(참 조:8:29-30) 아니면, 병고치신 일에 대해서(참조:1:44) 실제적 인 치료는 은밀히 수행되었다(7:33).
그런데 다른 곳에서도 그렇 지만 여기에서도 경계해 보아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경계하실 수록 저희 더욱 널리(열심히) 전파"하였다(7:36 하반절. 참 조:1:28, 4
5). 그렇지만, 비록 그 치유 사건의 간증이 감명을 끼 치긴 했으나(37절. 참조:1:27,2:12), 예수께서 메시야라든지 혹 은 예언된 구원의 시기가 시작 내지는 임박했다고 그들이 생각한 것은 결코 아니다.
설교를 위한 해석
복음서 주제:마가복음 7:31-37 현재의 사건을 해석하기 위해 과거의 사건들(혹은 경험들이나 공식화된 진술들)에 손을 뻗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한 반추 과정에서 과거의 사건들과 현재의 사건들이 상호 조명하며 서로를 성취시킨다("완성한다"). 어떤 사람을 과거를 언뜻 일별 (一瞥)한 다음에 우리는 자주 이렇게 외친다. "아! 이제서야 그 가 왜 그렇게 했는지(또는 말했는지) 알겠군." 이와 마찬가지로 신약 시대의 교회도 예수님의 의미와 취지를 간파하고 전달하려 고 노력하는 중에 끊임없이 구약으로 되돌아 가곤 했다. 그렇게 하는 중에 그들은 예수님의 의미를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구약의 내용의 의미의 깊이도 이해하게 되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반추 작용" 두 가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 가지는 자기 백성을 돌아보시고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찬란 한 모습을 지닌 이사야서 35장("구약" 본문)과의 관련이요, 또한 가지는 불순응적(不順應的)이고 말없는 혼돈(chaos)의 상태가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으로 빛과 창조력에로 길들여지고 열려진 창조 설화에 관련된 것이다("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 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 1:31).
그러므로, 예수님은 압 제의 굴레(desmos, 데스모스, "굴레", "차꼬", 35절. 참조:눅 13:16)를 풀어버리시는, 구원하시기 위해 임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취지는 재창조다. 역(逆)으로, 구원과 생명의 창조 가 있는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해 "개방"되어 있 을 것이며, 기꺼이 그 분을 찬양할 것이다.
거의 언제나 우리의 믿음은 다만 회고적으로만 작용한다. 오직 돌이켜 볼 때에만 우리는 "개방"될 수 있다. 그 때, 우리는 섭리 적인 인도나 가슴아픈 경험의 재창조력이나 혹은 영향력있는 말씀의 형성력(形成力)을 깨닫게 된다. 너무 늦어서 찬양이나 인정 (認定)의 말을 할 수 없다는 법은 없다. 오히려, 우리의 마음이 너무 둔해서 보다 일찍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자책감을 느낀다.
그러나, 열림과 풀림의 사건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어쩌면 이토 록 지겹고 괴로운 과정을 참고 견디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무리를 떠나 은밀히 따로 데려감을 당하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귀먹음과 벙어리됨과 그리고 몸서리 치는 우리의 고독의 실체를 온전히 경험하는 과정을 견뎌야 하는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우리가 "밑바닥까지 가라앉을 때", 그때에 비로소 우리는 "들을"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마침내는 이렇게 얼버무릴 것이다.
"나는 분해되어 가고 있었지만, 그러나 지금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군.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할레루야-역주)!" 이 때, 다시금 믿음은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또한 앞으로 지향될 수 있을까 유대인들의 지 도자들과 벌인 어느 한 논쟁에서 예수님은 사실상 다음과 같은 취지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너희가 모세와 선지자들에 관한 것을 알았더라면, 나에 관한 모든 것도 알았으리라." 마찬가지로 마가도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너희가 이사야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35장), 여기서 일어 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도 알것이다." 과거를 현재를 해석해 주 고 또한 우리들을 미래에로 지향하게 한다. 과거의 신앙의 전승 들의 보양을 받을 때, 우리의 신앙도 그렇게 할 수 있으며, 또한 현재의 압제와 미래의 암담함 속에서도 담대하게 찬양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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