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능력 (벧전1:8-9)
본문
제가 사랑의 교회를 시작하고 나서 지난 20년 동안 만난 분들이 참 많습니다. 아마 수만 명이 될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서 아직도 제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는 강한 인상을 준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이수정이라는 자매입니다. 저는 교회가 한 30여명 모이던 어느 주일 날 뒤에 앉아 있는 그 자매의 모습을 보고 어렵게 그를 찾아간 일이 있었습니다. 대궐 같은 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자매는 부엌에서 일하는 가정부였습니다. 주인 내외는 교수 일로 나가고 없었습니다. 주인도 없는 집에서 젊은 목사가 가정부하고 둘이서 쇼파에 앉아 이야기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멋쩍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현관 신 벗는 곳에 쭈그리고 앉아서 한 30분 동안 그 자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우리>지에서 펴낸 <나누고 싶은 이야기>라는 책을 통해 그 자매에 대해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는 얼굴이 그렇게 예쁘게 생긴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몸매가 늘씬한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남자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여성다운 매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런 여자입니다. 그러나 한 30분 동안 그 자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말은 비관이 아니라 기쁨이 넘치는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나는 예수님 때문에 너무 좋아요." 그저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얼굴에서는 정말 광채가 났습니다. 저는 가끔 그 자매를 떠올릴 때면 천사를 보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는 한 1년 반 후에 제 품에 안겨 세상을 떠나면서도 제게 도전을 주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신비스러운 기쁨을 안고 살다가 갈까 명색이 목사라고 하면서 나는 과연 이런 기쁨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웃의 안 믿는 사람하고 비교할 때 다른 점을 들라면 무엇을 들 수 있습니까 믿는 것이요 물론 중요한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하는 그런 이야기 말고,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사람하고 나하고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특징이 있다면 무엇을 들겠느냐 그 말입니다. 저는 기쁨을 들고 싶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안 믿는 사람이 상상도 못하는 기쁨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만큼 이 기쁨을 분명하고 화려하게 표현한 성경구절은 없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베드로는 그 기쁨을 이중, 삼중으로 표현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차원을 추적하기가 어려울 정도의 최상의 표현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독특한 기쁨이 있습니다. 만일 그런 기쁨이 없다면 비정상입니다. 부모도 누군지 모르고, 형제도 없고, 자살하려고 하다가 식도를 다쳐 음식도 제대로 못 먹고, 남의 집 부엌에서 날마다 구정물에 손을 담가야 하고, 늘 쭈그리고 앉아서 밥을 먹는 비참한 인생이지만 조그마한 라디오를 통해 나오는 극동방송의 메시지만 들으면 예수님 때문에 날마다 기뻐하는 이수정 자매를 보십시오. 그렇게 가장 밑바닥 생활을 하는 사람도 천사를 만난 것처럼 느껴질 정도의 기쁨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비스러운 능력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 우리의 기쁨은 무엇보다 믿음에서 나오는 기쁨입니다.
8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보지 못하나 믿고." 이것은 예수를 믿으면서 시작되는 기쁨입니다. 믿음을 가진 자만이 소유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습니까 예수 때문에 기뻐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 반대로 기뻐합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를 보지 못하였지만 분명히 믿습니다.
그렇다면 그 기쁨이 있어야 됩니다. 둘째는, 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말할 수 없는'이라는 말은 인간의 말로 설명하려고 하면 백 번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너무 차원이 높아서 우리의 언어로는 도무지 수식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말이 따라가지를 못하는 차원에 있는 최상의 기쁨인 것입니다. 셋째는, 영광스러운 기쁨입니다. '영광스러운 즐거움'은 하나님의 영광을 덧입음으로 오는 신적인 기쁨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세상의 기쁨이 아니라 천상의 기쁨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누리게 되는 기쁨은 믿음으로 가능한 기쁨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최상의 기쁨이요, 하나님 자신이 갖고 계신 천상의 기쁨인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모든 자에게 차별 없이 이 기쁨을 주십니다. 주님 앞에 나와서 무릎 꿇고 "나는 죄인입니다."하고 고백하기만 하면, 이수정 집사와 같이 천하게 한 생을 살다가 가는 사람이든, 화려한 저택과 별장에서 사는 사람이든, 실직을 당해 당장 먹고 살 것이 막막한 사람이든, 살아갈 걱정이 없을 만큼 여유 있는 사람이든, 똑같은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 기쁨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제 이야기를 들으면서 '딴 세상 이야기를 하는구나. 나하고는 거리가 멀다.'하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 지 모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기쁨은 날마다 미치광이처럼 웃고 다니는 기쁨이 아닙니다. 내 마음속에 조용히 간직된 기쁨입니다. 그 기쁨이 폭발할 때도 있지만 마음속에 가만히 숨어 있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가만히 여러분 스스로를 돌이켜 보십시오. 이 기쁨의 불씨가 마음속에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약간의 문제는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기쁨이 무엇인가에 짓눌려서 터지지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기쁨을 느끼기는 느끼는데 표현이 안 됩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 말씀을 들으면서 저와 여러분의 마음속에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이 기쁨이 다시금 회복되는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1. 예수 사랑의 샘 이 기쁨은 우리에게만 있는 기쁨입니다. 우리만이 알고 있는 기쁨입니다. 제가 이렇게 자신 있게 말씀드리는 분명한 근거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 기쁨이 계속 솟아오를 수 있는 샘이 2개가 있습니다. 우리가 높은 산에 올라가서 바위틈을 보면 거기서 퐁퐁 솟아나는 샘을 발견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 샘을 볼 때마다 얼마나 신선함을 느낍니까 퍼 마시고 또 마셔도 생수가 끝없이 솟아납니다. 그래서 그 샘물이 흐르고 흘러 나중에 강이 되지 않습니까 이와 같은 샘이 우리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첫째는, 예수 사랑이라는 샘입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그 사랑 때문에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사랑합니까 어느 정도로 사랑합니까 이 놀라운 예수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 사랑 때문에 예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다 희생해도 조금도 손해 보았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을 만큼 주님을 사랑합니까 사랑은 항상 기쁨이라는 시녀를 데리고 다닙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 치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랑하면 기뻐하게 되어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무엇이든지 다 주어도 좋을 만큼 사랑하는 대상을 발견했다고 합시다. 그 대상이 누구이든, 사랑은 틀림없이 우리에게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게 만듭니다. 이게 사랑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내가 알지도 못하던 때 이 세상에 오셔서 저 영문 밖으로 나가서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이 길을 가노라. 네 죄가 너무 커서 그대로 두었다가는 영원히 하나님 심판 받을 수밖에 없겠기에 내가 네 죄를 대신 지고 가노라." 그래서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하시어 아무 공로 없는 우리를 향해서 "믿기만 해라. 그러면 내가 영원한 나라로 인도해 주마."하고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 보여 주셨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주님, 사랑합니다. 내가 주님을 믿습니다."하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마음은 온통 예수를 향해서 달려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사람과 다른 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네 처자와 네 부모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며, 네 생명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우리가 온 맘을 다해 사랑할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겨워 예수님을 온 맘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주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 도다." 평생을 맹인으로 살았던 크로스비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샘에서 솟아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해서 지은 찬송입니다. "주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힌 기쁨입니까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성령님께서 우리 각자의 마음을 터치하셔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은혜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 사랑합니다.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만 생각하면 세상도, 나도 다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만 남습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구속해 주신 예수님만 남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하고 고백할 때 마음속에 솟아오르는 기쁨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구원의 샘
둘째는, 구원의 확신이 주는 샘입니다. 조금 줄여서 말한다면 구원의 샘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고 했습니까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그 구원을 생각하면 너무 좋아서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쉽게 말해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까 그곳에는 고통이 따라오지 못합니다. 죄나 유혹도 없습니다. 아픔이나 죽음도 없습니다. 영적 전투도 없습니다. "하나님, 주시옵소서."하고 땀 흘리며 기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와 같은 최상의 낙원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아들답게 광채를 발하면서 하나님과 더불어 천사들의 시종을 받으면서 영원히 사는 것이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신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거지 나사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구조조정으로 쫓겨나서 거지가 되었는지, 아니면 능력이 없어서 거지가 되었는지, 아니면 몸이 병들어 생활 능력이 없어지자 부인은 도망가고 자식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홀로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어떻게든 연명하고자 온갖 천대와 발길질을 당하고, 개한테 물리기까지 하면서도 부잣집 문간에서 살았습니다. 부자가 먹다가 내버린 음식 찌끼가 있으면 그것으로 연명하고, 그것도 없으면 몇 끼를 내리 굶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목욕인들 제대로 했겠습니까 못 먹는데다 더러운 몸을 하고 있으니 몸에 피부병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에 누가 그런 사람을 인간이라고 취급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을 주목했습니다. 그가 나사로라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그는 분명 실패자입니다. 우리가 그에게서 도대체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죽자마자 그는 천사의 손에 이끌리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 나라에서 어떤 영광을 누리고 있는가를 환히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위해서 이렇게 변호하셨습니다. "그가 세상에서 너무 고생만 하다가 왔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서는 영광을 누리고 그 모든 고생을 보상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정상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만 받으면 세상에서 어떤 모양으로 살든지 그것은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가난하건 부하건, 실패했건 성공했건, 남에게 천시를 받으며 고통스러운 생을 살았건 간에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구원입니까! 그 모든 것을 다 극복하고 우리를 가장 보람있게 세상을 살다가 온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았습니까 어떤 생을 살았든지 그는 성공자입니다.
구원을 못 받았습니까 어떤 생을 살았든지 그는 실패자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의 의미와 질을 결정하는 지표가 된다는 점에서 구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요즈음 모 재벌의 명예 회장이 북한에 가서 누구를 만나고 왔다, 30년 동안 금강산 개발을 독점한다, 거기서 무엇을 한다하는 것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그만큼 성공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공부하느라고 고생도 안 했는데, 학, 박사를 몇 개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더 성공했으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리고 때를 잘 만나서 그런지 다른 사람은 평생 벌어도 손에 쥐어 볼까 말까 한 돈인데, 그는 그 돈의 몇 천 갑절을 쌓아 놓고 사니 얼마나 대단한 사람입니까 한 마디로 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구원받지 못했다면 모든 것이 헛것입니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있던 그 부잣집 주인이 죽어서 얼마나 처참한 모습으로 영벌을 당하고 있는지 주님이 설명하셨지 않습니까 구원받지 못한다면 세상에서 잘 살았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구원만큼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저는 비행기를 많이 타는 사람입니다. 한번 외국에 나가면 보통 열 번 내지 열 세 번 정도 비행기를 탑니다. 사실 비행기를 타는 것은 죽으려고 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아무리 산소 호흡기를 쓰고 구명 조끼를 입고난리법석을 떨어도 태평양 한 가운데 떨어지면 그야말로 끝장입니다. 태평양을 건너서 헤엄을 치겠습니까 그럴 수도 없거니와 그러다가는 상어한테 물려 죽기 십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가야 된다는 각오를 하고 비행기를 탑니다. 만약 비행기가 도중에 어떤 사고가 났다고 해 봅시다. 그때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방 안에 있는 사업 계획서가 남습니까 아니면 누구하고의 약속이 남습니까 집에 쌓아 놓은 재물이 남습니까 그 모든 것들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휴지조각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남는 것이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냐 못 들어갈 것이냐, 이것 하나는 분명히 남는다는 말입니다. 남녀노소나 빈부귀천이 차이가 없습니다. 그 비행기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한 명의 예외 없이 이 한 가지 문제에 직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받았느냐, 못 받았느냐에 따라 보람된 삶을 살았는지, 헛된 삶을 살았는지가 결판나는 것입니다. 흔히 구원을 멀리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은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 제가 설교를 하다가 쓰러져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구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구나. 영원한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구나. 주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구나'하는 것만 확신한다면 마음속에서 기쁨이 샘솟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베드로가 이 편지를 누구에게 보내는지가 나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여기에서 언급되는 도시들은 전부터키에 있는 지역들입니다. 로마에서 한참 박해가 일어났을 때 성도들이 집도 잃고, 지위도 잃고, 모든 것을 다 빼앗긴 후에 쫓기고 쫓겨서 다다른 곳이 바로 이 다섯 지역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갑바도기아는 성도들이 피난처로 삼았던 지하 동굴들로 유명한 관광명소가 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석회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조금만 파도 쉽게 동굴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핍박을 피해서 로마를 빠져 나온 그리스도인들은 전부 땅 속에 굴을 파고 거기에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어떤 굴은 그 길이가 100 미터가 넘는다고 합니다. 어디에서 먹을 것을 조금 얻으면 그들은 두더지처럼 지하 동굴 속에 들어가서 먹고 지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너무 사랑했습니다. "너희가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지금도 보지 못하나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그들은 앞으로 주님이 주실 구원을 바라보고 넘치는 기쁨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 사랑의 샘이 있었고, 구원의 샘이 있었습니다. 그 샘에서 그들은 말로 다 설명 할 수 없는 기쁨을 퍼 올리면서 살았습니다. 이 기쁨은 그들에게 엄청난 능력이 되었습니다. 가슴에 가득찬 기쁨이 워낙 크다보니 가난한 것도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당장 먹고 살 것이 없다는 그 자체도 큰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토굴 속에 사는 것도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잡히기라는 하는 날이면 맹수의 밥이 될 지도 모른다는 어떤 불안감도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기쁨 때문에 그 모든 문제를 언제든지 일소해 버릴 수 있는 능력을 덧입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그 모든 핍박에서 승리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를 믿으려면 바로 믿읍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놀라운 기쁨을 주셨는데, 평생 이 기쁨을 알지 못하고 예수를 믿는다면 얼마나 큰 손해입니까 요즈음 실직을 당하신 분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우들 중에도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불안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생활이 자꾸 쪼들려 오는 분들도 많습니다. 오랫동안 병을 가지고 씨름하다가 지쳐버린 분들도 많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이상 고통과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 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이 모든 문제와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자생력을 주셨습니다. 그 자생력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사랑하기 때문에 터져 나오는 기쁨, 내가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스며 나오는 기쁨, 이 기쁨이 자생력입니다. 이 기쁨이 능력입니다. 우리는 이 기쁨으로 그 모든 현실의 어려움을 녹여 버릴 수 있습니다. 현실의 벽이 높으면 높을수록 우리는 더 차원 높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설혹 거지 나사로처럼 초라한 생을 살다가 간다 해도 절대로 후회하지 아니하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은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8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보지 못하나 믿고." 이것은 예수를 믿으면서 시작되는 기쁨입니다. 믿음을 가진 자만이 소유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습니까 예수 때문에 기뻐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 반대로 기뻐합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를 보지 못하였지만 분명히 믿습니다.
그렇다면 그 기쁨이 있어야 됩니다. 둘째는, 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말할 수 없는'이라는 말은 인간의 말로 설명하려고 하면 백 번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너무 차원이 높아서 우리의 언어로는 도무지 수식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말이 따라가지를 못하는 차원에 있는 최상의 기쁨인 것입니다. 셋째는, 영광스러운 기쁨입니다. '영광스러운 즐거움'은 하나님의 영광을 덧입음으로 오는 신적인 기쁨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세상의 기쁨이 아니라 천상의 기쁨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누리게 되는 기쁨은 믿음으로 가능한 기쁨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최상의 기쁨이요, 하나님 자신이 갖고 계신 천상의 기쁨인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모든 자에게 차별 없이 이 기쁨을 주십니다. 주님 앞에 나와서 무릎 꿇고 "나는 죄인입니다."하고 고백하기만 하면, 이수정 집사와 같이 천하게 한 생을 살다가 가는 사람이든, 화려한 저택과 별장에서 사는 사람이든, 실직을 당해 당장 먹고 살 것이 막막한 사람이든, 살아갈 걱정이 없을 만큼 여유 있는 사람이든, 똑같은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 기쁨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제 이야기를 들으면서 '딴 세상 이야기를 하는구나. 나하고는 거리가 멀다.'하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 지 모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기쁨은 날마다 미치광이처럼 웃고 다니는 기쁨이 아닙니다. 내 마음속에 조용히 간직된 기쁨입니다. 그 기쁨이 폭발할 때도 있지만 마음속에 가만히 숨어 있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가만히 여러분 스스로를 돌이켜 보십시오. 이 기쁨의 불씨가 마음속에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약간의 문제는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기쁨이 무엇인가에 짓눌려서 터지지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기쁨을 느끼기는 느끼는데 표현이 안 됩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 말씀을 들으면서 저와 여러분의 마음속에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이 기쁨이 다시금 회복되는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1. 예수 사랑의 샘 이 기쁨은 우리에게만 있는 기쁨입니다. 우리만이 알고 있는 기쁨입니다. 제가 이렇게 자신 있게 말씀드리는 분명한 근거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 기쁨이 계속 솟아오를 수 있는 샘이 2개가 있습니다. 우리가 높은 산에 올라가서 바위틈을 보면 거기서 퐁퐁 솟아나는 샘을 발견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 샘을 볼 때마다 얼마나 신선함을 느낍니까 퍼 마시고 또 마셔도 생수가 끝없이 솟아납니다. 그래서 그 샘물이 흐르고 흘러 나중에 강이 되지 않습니까 이와 같은 샘이 우리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첫째는, 예수 사랑이라는 샘입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그 사랑 때문에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사랑합니까 어느 정도로 사랑합니까 이 놀라운 예수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 사랑 때문에 예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다 희생해도 조금도 손해 보았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을 만큼 주님을 사랑합니까 사랑은 항상 기쁨이라는 시녀를 데리고 다닙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 치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랑하면 기뻐하게 되어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무엇이든지 다 주어도 좋을 만큼 사랑하는 대상을 발견했다고 합시다. 그 대상이 누구이든, 사랑은 틀림없이 우리에게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게 만듭니다. 이게 사랑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내가 알지도 못하던 때 이 세상에 오셔서 저 영문 밖으로 나가서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이 길을 가노라. 네 죄가 너무 커서 그대로 두었다가는 영원히 하나님 심판 받을 수밖에 없겠기에 내가 네 죄를 대신 지고 가노라." 그래서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하시어 아무 공로 없는 우리를 향해서 "믿기만 해라. 그러면 내가 영원한 나라로 인도해 주마."하고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 보여 주셨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주님, 사랑합니다. 내가 주님을 믿습니다."하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마음은 온통 예수를 향해서 달려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사람과 다른 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네 처자와 네 부모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며, 네 생명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우리가 온 맘을 다해 사랑할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겨워 예수님을 온 맘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주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 도다." 평생을 맹인으로 살았던 크로스비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샘에서 솟아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해서 지은 찬송입니다. "주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힌 기쁨입니까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성령님께서 우리 각자의 마음을 터치하셔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은혜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 사랑합니다.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만 생각하면 세상도, 나도 다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만 남습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구속해 주신 예수님만 남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하고 고백할 때 마음속에 솟아오르는 기쁨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구원의 샘
둘째는, 구원의 확신이 주는 샘입니다. 조금 줄여서 말한다면 구원의 샘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고 했습니까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그 구원을 생각하면 너무 좋아서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쉽게 말해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까 그곳에는 고통이 따라오지 못합니다. 죄나 유혹도 없습니다. 아픔이나 죽음도 없습니다. 영적 전투도 없습니다. "하나님, 주시옵소서."하고 땀 흘리며 기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와 같은 최상의 낙원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아들답게 광채를 발하면서 하나님과 더불어 천사들의 시종을 받으면서 영원히 사는 것이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신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거지 나사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구조조정으로 쫓겨나서 거지가 되었는지, 아니면 능력이 없어서 거지가 되었는지, 아니면 몸이 병들어 생활 능력이 없어지자 부인은 도망가고 자식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홀로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어떻게든 연명하고자 온갖 천대와 발길질을 당하고, 개한테 물리기까지 하면서도 부잣집 문간에서 살았습니다. 부자가 먹다가 내버린 음식 찌끼가 있으면 그것으로 연명하고, 그것도 없으면 몇 끼를 내리 굶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목욕인들 제대로 했겠습니까 못 먹는데다 더러운 몸을 하고 있으니 몸에 피부병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에 누가 그런 사람을 인간이라고 취급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을 주목했습니다. 그가 나사로라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그는 분명 실패자입니다. 우리가 그에게서 도대체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죽자마자 그는 천사의 손에 이끌리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 나라에서 어떤 영광을 누리고 있는가를 환히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위해서 이렇게 변호하셨습니다. "그가 세상에서 너무 고생만 하다가 왔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서는 영광을 누리고 그 모든 고생을 보상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정상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만 받으면 세상에서 어떤 모양으로 살든지 그것은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가난하건 부하건, 실패했건 성공했건, 남에게 천시를 받으며 고통스러운 생을 살았건 간에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구원입니까! 그 모든 것을 다 극복하고 우리를 가장 보람있게 세상을 살다가 온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았습니까 어떤 생을 살았든지 그는 성공자입니다.
구원을 못 받았습니까 어떤 생을 살았든지 그는 실패자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의 의미와 질을 결정하는 지표가 된다는 점에서 구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요즈음 모 재벌의 명예 회장이 북한에 가서 누구를 만나고 왔다, 30년 동안 금강산 개발을 독점한다, 거기서 무엇을 한다하는 것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그만큼 성공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공부하느라고 고생도 안 했는데, 학, 박사를 몇 개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더 성공했으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리고 때를 잘 만나서 그런지 다른 사람은 평생 벌어도 손에 쥐어 볼까 말까 한 돈인데, 그는 그 돈의 몇 천 갑절을 쌓아 놓고 사니 얼마나 대단한 사람입니까 한 마디로 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구원받지 못했다면 모든 것이 헛것입니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있던 그 부잣집 주인이 죽어서 얼마나 처참한 모습으로 영벌을 당하고 있는지 주님이 설명하셨지 않습니까 구원받지 못한다면 세상에서 잘 살았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구원만큼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저는 비행기를 많이 타는 사람입니다. 한번 외국에 나가면 보통 열 번 내지 열 세 번 정도 비행기를 탑니다. 사실 비행기를 타는 것은 죽으려고 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아무리 산소 호흡기를 쓰고 구명 조끼를 입고난리법석을 떨어도 태평양 한 가운데 떨어지면 그야말로 끝장입니다. 태평양을 건너서 헤엄을 치겠습니까 그럴 수도 없거니와 그러다가는 상어한테 물려 죽기 십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가야 된다는 각오를 하고 비행기를 탑니다. 만약 비행기가 도중에 어떤 사고가 났다고 해 봅시다. 그때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방 안에 있는 사업 계획서가 남습니까 아니면 누구하고의 약속이 남습니까 집에 쌓아 놓은 재물이 남습니까 그 모든 것들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휴지조각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남는 것이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냐 못 들어갈 것이냐, 이것 하나는 분명히 남는다는 말입니다. 남녀노소나 빈부귀천이 차이가 없습니다. 그 비행기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한 명의 예외 없이 이 한 가지 문제에 직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받았느냐, 못 받았느냐에 따라 보람된 삶을 살았는지, 헛된 삶을 살았는지가 결판나는 것입니다. 흔히 구원을 멀리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은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 제가 설교를 하다가 쓰러져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구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구나. 영원한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구나. 주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구나'하는 것만 확신한다면 마음속에서 기쁨이 샘솟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베드로가 이 편지를 누구에게 보내는지가 나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여기에서 언급되는 도시들은 전부터키에 있는 지역들입니다. 로마에서 한참 박해가 일어났을 때 성도들이 집도 잃고, 지위도 잃고, 모든 것을 다 빼앗긴 후에 쫓기고 쫓겨서 다다른 곳이 바로 이 다섯 지역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갑바도기아는 성도들이 피난처로 삼았던 지하 동굴들로 유명한 관광명소가 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석회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조금만 파도 쉽게 동굴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핍박을 피해서 로마를 빠져 나온 그리스도인들은 전부 땅 속에 굴을 파고 거기에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어떤 굴은 그 길이가 100 미터가 넘는다고 합니다. 어디에서 먹을 것을 조금 얻으면 그들은 두더지처럼 지하 동굴 속에 들어가서 먹고 지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너무 사랑했습니다. "너희가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지금도 보지 못하나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그들은 앞으로 주님이 주실 구원을 바라보고 넘치는 기쁨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 사랑의 샘이 있었고, 구원의 샘이 있었습니다. 그 샘에서 그들은 말로 다 설명 할 수 없는 기쁨을 퍼 올리면서 살았습니다. 이 기쁨은 그들에게 엄청난 능력이 되었습니다. 가슴에 가득찬 기쁨이 워낙 크다보니 가난한 것도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당장 먹고 살 것이 없다는 그 자체도 큰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토굴 속에 사는 것도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잡히기라는 하는 날이면 맹수의 밥이 될 지도 모른다는 어떤 불안감도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기쁨 때문에 그 모든 문제를 언제든지 일소해 버릴 수 있는 능력을 덧입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그 모든 핍박에서 승리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를 믿으려면 바로 믿읍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놀라운 기쁨을 주셨는데, 평생 이 기쁨을 알지 못하고 예수를 믿는다면 얼마나 큰 손해입니까 요즈음 실직을 당하신 분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우들 중에도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불안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생활이 자꾸 쪼들려 오는 분들도 많습니다. 오랫동안 병을 가지고 씨름하다가 지쳐버린 분들도 많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이상 고통과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 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이 모든 문제와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자생력을 주셨습니다. 그 자생력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사랑하기 때문에 터져 나오는 기쁨, 내가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스며 나오는 기쁨, 이 기쁨이 자생력입니다. 이 기쁨이 능력입니다. 우리는 이 기쁨으로 그 모든 현실의 어려움을 녹여 버릴 수 있습니다. 현실의 벽이 높으면 높을수록 우리는 더 차원 높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설혹 거지 나사로처럼 초라한 생을 살다가 간다 해도 절대로 후회하지 아니하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은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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