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마5:1-12)
본문
어떤 날 영국 황제가 민정을 살피기 위하여 나라 안을 순시하고 있었답니다. 어느 조그마한 동리에 이르렀을 때, 동리 모퉁이에 있는 물레방앗간에서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듣고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물레방앗간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한 할머니가 혼자서 일하면서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너무 아름답게 여겨져서 한번 더 나를 위해서 불러달라고 간청을 했더니 부끄러워하면서 그는 다시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 하여도 나 역시 세상사람 부럽지 않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절로 나네" 이 찬송을 듣고 너무 임금님은 기뻐서 다시 부탁하기를 2절을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이 할머니 얘기가 "이 찬송은 내가 만든 거라서 2절은 없습니다. 1절뿐입니다." 임금님은 즉석에서 가슴에 우러나는 생각이 있어서 "내가 2절을 만들어 부르겠습니다. 지어 줄 터이니 앞으로 2절을 꼭 부르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세상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영국황제가 날 부러워하네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절로 나네" 2절 꼭 부르라고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행복이란 만족감으로 통하는 것이올시다. 아직도 못 다한 소원이 있으면 아직도 무언가 채워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사실 그것은 행복은 아닙니다. 저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굴까, 행복한 순간이 어느 순간일까, 생각할 때마다 사도바울이 고백한 빌립보 2장 18절을 늘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언젠가 여러분에게 설교말씀을 드릴 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그런 제목으로 그 본문으로 설교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너의 믿음의 재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 지라도 기뻐하리라." 관제라는 것은 피를 쏟아 붇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시간에 피를 쏟아 부어도 그래도 기뻐하리라 나와 함께 기뻐하자. 아 멋진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 단 한번만 경험하고 죽어도 그 사람 행복한 사람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 보아요. 늘 그런 생각으로 살긴 좀 어려울 거라고. 어쩌다 한 번만이라도 이대로 눈을 감고 여기서 죽어도 좋다. 얼마나 멋있는 시간입니까. 그와는 반대로 죽어도 눈을 못 감겠다니까 문제죠. 안 그렇습니까 다른 사람은 나를 부러워하는 것을 내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도 부럽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행복이요 그것이 진정한 기쁨이란 말입니다. 무신론적 철학자 니체는 사실로 많은 사람에게 악영향을 준 그러한 철학자로 대표됩니다. 그는 본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기독교 배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이런 무서운 폭탄선언을 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생활에서 기쁨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러분, 기쁨이 없는 그리스도인, 다음에 믿을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길을 가로막는다는 것이에요. 기쁨이 없는 전도인의 말이 오히려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신앙을 떠나게 만듭니다. 아프리카에서 한평생을 산 슈바이쳐 박사는 이런 비사를 써서 말합니다. 아프리카에는 비가 올 때가 있고 안 올 때가 있기 때문에 비가 올 때에 강이 생깁니다. 비가 안 오면 강이 말라버려서 물 없는 강이 많습니다. 물 없는 강처럼 기쁨 없는 그리스도인, 기쁨 없는 신앙, 기쁨이 없는 사랑이 세상을 피곤하게 만든다고요.
여러분 사랑이 뭡니까 내 마음에 기쁨이 없는 사랑은 절대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무척이나 자기도 괴롭고 남도 괴롭히고 이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올시다. 사랑은 생각하면서 기쁘고 만나서 기쁘고 그와 함께 있어서 무한히 기쁜 거예요. 더 바랄 것이 없어요.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떠나면 어떤 명목으로도 사랑은 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럽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이 기뻐하라는 말은 반가워한다는 말이요 어떤 일을 기쁘게 맞이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소극적 의미를 가졌어요. 좀 깊이 연구해 보면은 즐거워한다는 말은 '행복하게 여기고 그것에 마음을 둔다'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쁨이라는 것은 어떤데 대한 기뻐하는 반사요, 즐거워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기쁨으로 소화한다는 것이요 그래 적극적인 것이에요. 뭐 우리말이긴 하지만은 까다롭게 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잘 연구해 보면 그렇단 말입니다. 기뻐한다는 말과 즐거워한다는 말, 기뻐한다는 말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이고 즐거워한다는 말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에요. 즐거워하는 것이에요. 자 그래서 오늘 성경말씀은 둘 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탈무드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것을 통해서 배우는 사람이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요, 세상에서 가장 부한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가장 만족하게 여기고 기뻐하는 사람이라고요. 우리는 더 많은 것 있어야 되겠다고 전제합니다만은 그것은 아무상관도 없습니다. 소유에서 오는 기쁨, 그 다음엔 깨달음에서 오는 기쁨, 한 차원 높이, 또한 차원 높은 것은 믿음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못 가져도 좋아요. 다 몰라도 좋아요. 어머님 품에 안긴 어린아이는 마냥 행복합니다.
이 어머니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기뻐함이란 것은 차원적으로 보면 어떤 사람들은 추억을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항상 과거에 '그때 좋았지' 하고 빙그레 웃어 봅니다. 옛날 일만 생각하는 사람, 이것은 다 지나간 일입니다. 또 현재만 생각하고 만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 급하게 또 다른 환경으로 바뀝니다. 문제는 미래적인 행복만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었어도 이것이 이 음식을 먹고 다시 같이 먹을 수 없는 이별하는 장소라고 한다면 이별하는 마지막 만찬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 입맛이 도는 겁니까 맛이 제대로 작용하는 겁니까 아무 소용이 없어요. 아무 맛도 없어요. 내일을 약속 받지 못한 오늘의 행복은 행복이 아니에요. 그것은 마치 이별 만찬과 같은 거예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소망이 없는 기쁨이란 자기 최면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어렵지만은 꼭 깨달아야 될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쁨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결혼 주례할 때마다 신랑 신부에게 꼭 이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말하면서 앞에 놓고 봐도 지금 두 사람이 황홀해 가지고 내가 하는 말을 못 알아 듣더라구요. 참 중요한 말을 하고 있는데 안타까워요. 그러나 할말은 해야지 어떡하겠습니까.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사랑이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절대적인 것이라고. 건강하다고 사랑하고 병들었다고 미워하는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더라구요. 부하다고 행복하고 가난하다고 불행한 것 아니라고 그렇게 얘기를 해도 못 알아듣더라니까요. 여러분 이제 이 만큼 살아 왔으니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은 절대적이요 행복도 절대적이요 기쁨도 환경과 관계없어요. 이것만 깨닫고 살아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행복이라고 하는 이름에 여건이 있는 게 아니고요 기쁨이라고 하는 이름에 환경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물질을 가졌든 지식이 있든 권세가 있든 지위가 있든 간에 보세요. 불행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항상 불행해요. 마음속에서부터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어떤 일에든지 행복해요. 난 요새 뭐 그런 얘기들이 좀 있더라구요. 그 영화 배우들 보니까 아주 예쁘게 생겼던데 남의 딸이지만 거 예쁘던데, 그만하면 충분한데 영화배우 치고 얼굴 뜯어고치지 않은 여자가 별로 없다며 그게 또 고장이 나가지고 재수리를 또 해야 된데요. 그래서 내가 생각할 때 "아 저만하면 충분한데 뭘 거기다가 또 칼을 댔나 싶어요." 안 그래요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아 그만하면 되잖아요, 거기다 뭐 더 예뻐지겠다고 그 노름을 하다가 다쳐가지고 고생을 하자나요. 왜 이래야 되느냐 결국은 행복한 사람은 행복하고 기뻐하는 사람은 언제나 기뻐하는 거지 불만한 사람은 끝도 없는 거요. 그걸 채울 수 있는 여건은 없어요. 그런고로 기쁨은 항상 절대적인 속성을 지녔고 내면에서부터 솟아오르는 것이다. 이점을 꼭 깨달아야 합니다. 유명한 악성 베토벤이 서른두살에 가장 슬픈 편지 한 장을 씁니다. 그것은 스스로 자기가 미리 써 놓은 유서입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6년 동안 나아질 거라고 희망 속에 살았다. 하루하루 절망의 연속이었다. 나는 귀머거리가 되었다. 잠시후면 나의 삶을 마감하게 될 것이나 불우한 존재여." 음악가가 귀머거리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자기가 작곡한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이처럼 절망적이고 답답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귀머거리 작곡가, 한 번 상상을 해 보세요. 이보다 더 불행한 인생이 있다는 겁니까 다시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나서 다시 이렇게 씁니다. "오 하나님이여 불우한 인생을 마치기 전에 온전한 기쁜 날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단 하루만이라도 기쁨을 만끽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영혼, 내가 작곡한 이 음악을 단 하루만이라도 깨끗한 귀로 들어볼 수 있게 해주세요." 이것이 그의 소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후 그는 24년 동안을 귀머거리로 살면서 계속 작곡 활동을 계속합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교향곡 제9번 그는 쉴러의 '기쁨의 송시', 아이러니 합니다. '기쁨의 송시' 라고 하는 시의 가사를 곡으로 작곡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교향곡 9번이 초연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박수 갈채를 하고, 기립박수를, 아우성을, 환호로 이렇게 박수를 할 때, 그는 저 뒷전에 앉아서 악보를 넘기며 빙그레 웃고 있었습니다. 환호성도 들리지 않고 노래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는 그 혼자서 듣는 노래가 따로 있습니다. 하늘의 노래를 혼자서 들으며 혼자서 즐기고 악보에 옮긴 겁니다. 그리고 그 악보를 넘기면서 마음에서부터 노래를 들었습니다. 내면에서 오는 기쁨, 신비로운 것이고 나만의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행복하게 이렇게 끝냈습니다. 여러분 기쁨이 밖에서 온다고 착각하지 맙시다. 예수께서 십자가 지시기 몇 시간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를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속에 엄청난 기쁨이 있었다 십자가를 앞에 놓고. 두 번째는 기쁨은 그리스도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내게 기쁨을 주셔야 내가 기쁠 수 있다. 셋째는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그것과 다르다. 차원이 달라요. 근본적으로 달라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이 높은 지혜, 이 기쁨을 즐길 줄 아는 사람만이 세상에서도 즐겁게 살 수 있는 것이올시다. 이것은 엄청난 생산적 능력입니다. 요샛말로 창조적 능력이 기쁨 속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그것과 다릅니다. 사도바울은 그의 편지 속에서 늘 기뻐하라, 기뻐하라 말합니다. 특별히 빌립보서에서 많이 말하기 때문에 흔히 빌립보서를 '희락의 복음' 이라고 합니다. 그는 다시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부모님이 자녀를 향한 뜻이 뭡니까 내가 자녀를 위해서 봉사하고 수고하면서 자녀에게 바라는 것이 뭡니까. 오직 기뻐하는 거예요. 오직 기뻐하는 것, 그거 아니겠습니다. 저는 요새 와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부모님들에 대한 생각을 좀 할 때가 있는데요. 제가 감기가 걸렸던가, 또 어디가 아프던가…… 뭐 옛날에 그 말라리아라고 하는게 있었지요. 이런 걸 좀 앓고 나던가 앓는 중에 우리 아버지가 참 무뚝뚝하고 저를 많이 때리기도 했는데 이상하게 제가 한 번 아프면 내 머리맡에다가 꼭 선물을 사다 놓습니다. 내가 늘 좋아하는 걸 딱 갔다 줘요. 제가 아플 때면 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기뻐하게 하기 위해서 선물을, 구하지도 않는 선물을 사다가 저를 주던 그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여러분, 부모님의 뜻은 자녀가 기뻐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기뻐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하겠지요. "좀 기뻐할 만한 환경을 만들어주고 기뻐하라고 하셔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는 대답합니다. 이사야 1장에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무엇을 더 해주랴" 충분히 기뻐할 만큼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기뻐하라"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받아서, 파송 받아서 사방에, 동네방네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그들은 보고를 하면서 신바람이 났습니다. "우리가 귀신을 명했더니 당장 나갑디다. 우리가 손을 얹고 기도했더니 병자가 났습디다. 온 동리가 깜짝깜짝 놀랐습니다 굉장했습니다." 하고 보고를 드립니다. 예수님 그 보고에 흥미가 없어요. "오직 너의 이름이 하늘나라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기쁨, 구속받은 기쁨, 그 위에 플러스 알파의 기쁨이 있습니다. 주의 복음 사역에 내가 고용되고 쓰여졌다고 하는 기쁨, 하나님의 나라 사업에 내가 쓰여진 그 자체가 기쁜 것이지 그 업적은 그건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이건 내가 한 게 아니거든요. 그런고로 쓰여졌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기뻐하라 그럽니다. 달란트 비유에 보면 다섯 달란트 받았던 사람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장사해서 이윤을 남겨 가지고 돌아왔을 때 주인은 기뻐했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거기 이어서 말씀하기를 "너희는 주인의 기쁨에 참예할지어다. 내가 너희들이 이렇게 잘 하니 내가 기쁘다. 이 기쁨에 너희가 참예할지어다. 주인과 더불어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그와 더불어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사람만이 참 기쁨을 소유할 수 있는 겁니다. 특별히 오늘 성경에 말씀합니다. "하늘의 상이 큼이니라."
여러분 하늘의 상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요, 하늘의 상을 보장받고 오늘을 사는 사람 하늘의 상을 위하여 오늘 현실이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요. 이것은 미래적인 것이요 신령한 것이요 영원한 것이요 약속된 것입니다. 그래서 돌에 맞아 죽는 스데반은 천사의 얼굴로 죽을 수 있었고 그 기쁨으로 원수를 사랑할 수 있었고……. 디모데후서 4장에 보면 사도바울은 달려갈 길은 다 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내 앞에 생명의 면류관이 있다. 생명의 면류관을 환히 바라보면서 그는 오늘을 감옥에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 41절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감옥에 들어가서 매를 많이 맞고 죽을 지경이 되가지고 석방되면서 이 거룩한 일에 자기들이 합당한 자로 여김 받은 것을 기뻐했어요. 매맞고 기뻐하고 재산은 몰수당하고 기뻐하고 죽음을 당하면서 기뻐하고…… 자 보세요 능욕을 당하면서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은 내가 당하는 이 고난의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것이 너무나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요, 또한 그 일에 합당한 자로 역임 받았다는 것이 너무너무 소중해서 그들은 기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 된 기쁨이요 하나님의 쓰여지는 기쁨이요 또한 제자 된 기쁨이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기쁨이요 또한 저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있는 주님을 바라보는 기쁨이요. 그러기에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욕을 당할 때, 예수의 제자라는 이름으로 고난 당할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는 하늘의 상을 보장받을 수 있는 그런 선에서 오늘도 기쁨으로 충만한 그런 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여러분에게 설교말씀을 드릴 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그런 제목으로 그 본문으로 설교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너의 믿음의 재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 지라도 기뻐하리라." 관제라는 것은 피를 쏟아 붇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시간에 피를 쏟아 부어도 그래도 기뻐하리라 나와 함께 기뻐하자. 아 멋진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 단 한번만 경험하고 죽어도 그 사람 행복한 사람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 보아요. 늘 그런 생각으로 살긴 좀 어려울 거라고. 어쩌다 한 번만이라도 이대로 눈을 감고 여기서 죽어도 좋다. 얼마나 멋있는 시간입니까. 그와는 반대로 죽어도 눈을 못 감겠다니까 문제죠. 안 그렇습니까 다른 사람은 나를 부러워하는 것을 내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도 부럽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행복이요 그것이 진정한 기쁨이란 말입니다. 무신론적 철학자 니체는 사실로 많은 사람에게 악영향을 준 그러한 철학자로 대표됩니다. 그는 본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기독교 배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이런 무서운 폭탄선언을 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생활에서 기쁨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러분, 기쁨이 없는 그리스도인, 다음에 믿을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길을 가로막는다는 것이에요. 기쁨이 없는 전도인의 말이 오히려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신앙을 떠나게 만듭니다. 아프리카에서 한평생을 산 슈바이쳐 박사는 이런 비사를 써서 말합니다. 아프리카에는 비가 올 때가 있고 안 올 때가 있기 때문에 비가 올 때에 강이 생깁니다. 비가 안 오면 강이 말라버려서 물 없는 강이 많습니다. 물 없는 강처럼 기쁨 없는 그리스도인, 기쁨 없는 신앙, 기쁨이 없는 사랑이 세상을 피곤하게 만든다고요.
여러분 사랑이 뭡니까 내 마음에 기쁨이 없는 사랑은 절대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무척이나 자기도 괴롭고 남도 괴롭히고 이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올시다. 사랑은 생각하면서 기쁘고 만나서 기쁘고 그와 함께 있어서 무한히 기쁜 거예요. 더 바랄 것이 없어요.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떠나면 어떤 명목으로도 사랑은 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럽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이 기뻐하라는 말은 반가워한다는 말이요 어떤 일을 기쁘게 맞이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소극적 의미를 가졌어요. 좀 깊이 연구해 보면은 즐거워한다는 말은 '행복하게 여기고 그것에 마음을 둔다'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쁨이라는 것은 어떤데 대한 기뻐하는 반사요, 즐거워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기쁨으로 소화한다는 것이요 그래 적극적인 것이에요. 뭐 우리말이긴 하지만은 까다롭게 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잘 연구해 보면 그렇단 말입니다. 기뻐한다는 말과 즐거워한다는 말, 기뻐한다는 말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이고 즐거워한다는 말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에요. 즐거워하는 것이에요. 자 그래서 오늘 성경말씀은 둘 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탈무드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것을 통해서 배우는 사람이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요, 세상에서 가장 부한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가장 만족하게 여기고 기뻐하는 사람이라고요. 우리는 더 많은 것 있어야 되겠다고 전제합니다만은 그것은 아무상관도 없습니다. 소유에서 오는 기쁨, 그 다음엔 깨달음에서 오는 기쁨, 한 차원 높이, 또한 차원 높은 것은 믿음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못 가져도 좋아요. 다 몰라도 좋아요. 어머님 품에 안긴 어린아이는 마냥 행복합니다.
이 어머니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기뻐함이란 것은 차원적으로 보면 어떤 사람들은 추억을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항상 과거에 '그때 좋았지' 하고 빙그레 웃어 봅니다. 옛날 일만 생각하는 사람, 이것은 다 지나간 일입니다. 또 현재만 생각하고 만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 급하게 또 다른 환경으로 바뀝니다. 문제는 미래적인 행복만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었어도 이것이 이 음식을 먹고 다시 같이 먹을 수 없는 이별하는 장소라고 한다면 이별하는 마지막 만찬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 입맛이 도는 겁니까 맛이 제대로 작용하는 겁니까 아무 소용이 없어요. 아무 맛도 없어요. 내일을 약속 받지 못한 오늘의 행복은 행복이 아니에요. 그것은 마치 이별 만찬과 같은 거예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소망이 없는 기쁨이란 자기 최면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어렵지만은 꼭 깨달아야 될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쁨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결혼 주례할 때마다 신랑 신부에게 꼭 이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말하면서 앞에 놓고 봐도 지금 두 사람이 황홀해 가지고 내가 하는 말을 못 알아 듣더라구요. 참 중요한 말을 하고 있는데 안타까워요. 그러나 할말은 해야지 어떡하겠습니까.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사랑이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절대적인 것이라고. 건강하다고 사랑하고 병들었다고 미워하는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더라구요. 부하다고 행복하고 가난하다고 불행한 것 아니라고 그렇게 얘기를 해도 못 알아듣더라니까요. 여러분 이제 이 만큼 살아 왔으니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은 절대적이요 행복도 절대적이요 기쁨도 환경과 관계없어요. 이것만 깨닫고 살아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행복이라고 하는 이름에 여건이 있는 게 아니고요 기쁨이라고 하는 이름에 환경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물질을 가졌든 지식이 있든 권세가 있든 지위가 있든 간에 보세요. 불행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항상 불행해요. 마음속에서부터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어떤 일에든지 행복해요. 난 요새 뭐 그런 얘기들이 좀 있더라구요. 그 영화 배우들 보니까 아주 예쁘게 생겼던데 남의 딸이지만 거 예쁘던데, 그만하면 충분한데 영화배우 치고 얼굴 뜯어고치지 않은 여자가 별로 없다며 그게 또 고장이 나가지고 재수리를 또 해야 된데요. 그래서 내가 생각할 때 "아 저만하면 충분한데 뭘 거기다가 또 칼을 댔나 싶어요." 안 그래요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아 그만하면 되잖아요, 거기다 뭐 더 예뻐지겠다고 그 노름을 하다가 다쳐가지고 고생을 하자나요. 왜 이래야 되느냐 결국은 행복한 사람은 행복하고 기뻐하는 사람은 언제나 기뻐하는 거지 불만한 사람은 끝도 없는 거요. 그걸 채울 수 있는 여건은 없어요. 그런고로 기쁨은 항상 절대적인 속성을 지녔고 내면에서부터 솟아오르는 것이다. 이점을 꼭 깨달아야 합니다. 유명한 악성 베토벤이 서른두살에 가장 슬픈 편지 한 장을 씁니다. 그것은 스스로 자기가 미리 써 놓은 유서입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6년 동안 나아질 거라고 희망 속에 살았다. 하루하루 절망의 연속이었다. 나는 귀머거리가 되었다. 잠시후면 나의 삶을 마감하게 될 것이나 불우한 존재여." 음악가가 귀머거리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자기가 작곡한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이처럼 절망적이고 답답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귀머거리 작곡가, 한 번 상상을 해 보세요. 이보다 더 불행한 인생이 있다는 겁니까 다시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나서 다시 이렇게 씁니다. "오 하나님이여 불우한 인생을 마치기 전에 온전한 기쁜 날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단 하루만이라도 기쁨을 만끽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영혼, 내가 작곡한 이 음악을 단 하루만이라도 깨끗한 귀로 들어볼 수 있게 해주세요." 이것이 그의 소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후 그는 24년 동안을 귀머거리로 살면서 계속 작곡 활동을 계속합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교향곡 제9번 그는 쉴러의 '기쁨의 송시', 아이러니 합니다. '기쁨의 송시' 라고 하는 시의 가사를 곡으로 작곡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교향곡 9번이 초연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박수 갈채를 하고, 기립박수를, 아우성을, 환호로 이렇게 박수를 할 때, 그는 저 뒷전에 앉아서 악보를 넘기며 빙그레 웃고 있었습니다. 환호성도 들리지 않고 노래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는 그 혼자서 듣는 노래가 따로 있습니다. 하늘의 노래를 혼자서 들으며 혼자서 즐기고 악보에 옮긴 겁니다. 그리고 그 악보를 넘기면서 마음에서부터 노래를 들었습니다. 내면에서 오는 기쁨, 신비로운 것이고 나만의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행복하게 이렇게 끝냈습니다. 여러분 기쁨이 밖에서 온다고 착각하지 맙시다. 예수께서 십자가 지시기 몇 시간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를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속에 엄청난 기쁨이 있었다 십자가를 앞에 놓고. 두 번째는 기쁨은 그리스도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내게 기쁨을 주셔야 내가 기쁠 수 있다. 셋째는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그것과 다르다. 차원이 달라요. 근본적으로 달라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이 높은 지혜, 이 기쁨을 즐길 줄 아는 사람만이 세상에서도 즐겁게 살 수 있는 것이올시다. 이것은 엄청난 생산적 능력입니다. 요샛말로 창조적 능력이 기쁨 속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그것과 다릅니다. 사도바울은 그의 편지 속에서 늘 기뻐하라, 기뻐하라 말합니다. 특별히 빌립보서에서 많이 말하기 때문에 흔히 빌립보서를 '희락의 복음' 이라고 합니다. 그는 다시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부모님이 자녀를 향한 뜻이 뭡니까 내가 자녀를 위해서 봉사하고 수고하면서 자녀에게 바라는 것이 뭡니까. 오직 기뻐하는 거예요. 오직 기뻐하는 것, 그거 아니겠습니다. 저는 요새 와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부모님들에 대한 생각을 좀 할 때가 있는데요. 제가 감기가 걸렸던가, 또 어디가 아프던가…… 뭐 옛날에 그 말라리아라고 하는게 있었지요. 이런 걸 좀 앓고 나던가 앓는 중에 우리 아버지가 참 무뚝뚝하고 저를 많이 때리기도 했는데 이상하게 제가 한 번 아프면 내 머리맡에다가 꼭 선물을 사다 놓습니다. 내가 늘 좋아하는 걸 딱 갔다 줘요. 제가 아플 때면 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기뻐하게 하기 위해서 선물을, 구하지도 않는 선물을 사다가 저를 주던 그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여러분, 부모님의 뜻은 자녀가 기뻐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기뻐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하겠지요. "좀 기뻐할 만한 환경을 만들어주고 기뻐하라고 하셔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는 대답합니다. 이사야 1장에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무엇을 더 해주랴" 충분히 기뻐할 만큼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기뻐하라"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받아서, 파송 받아서 사방에, 동네방네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그들은 보고를 하면서 신바람이 났습니다. "우리가 귀신을 명했더니 당장 나갑디다. 우리가 손을 얹고 기도했더니 병자가 났습디다. 온 동리가 깜짝깜짝 놀랐습니다 굉장했습니다." 하고 보고를 드립니다. 예수님 그 보고에 흥미가 없어요. "오직 너의 이름이 하늘나라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기쁨, 구속받은 기쁨, 그 위에 플러스 알파의 기쁨이 있습니다. 주의 복음 사역에 내가 고용되고 쓰여졌다고 하는 기쁨, 하나님의 나라 사업에 내가 쓰여진 그 자체가 기쁜 것이지 그 업적은 그건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이건 내가 한 게 아니거든요. 그런고로 쓰여졌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기뻐하라 그럽니다. 달란트 비유에 보면 다섯 달란트 받았던 사람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장사해서 이윤을 남겨 가지고 돌아왔을 때 주인은 기뻐했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거기 이어서 말씀하기를 "너희는 주인의 기쁨에 참예할지어다. 내가 너희들이 이렇게 잘 하니 내가 기쁘다. 이 기쁨에 너희가 참예할지어다. 주인과 더불어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그와 더불어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사람만이 참 기쁨을 소유할 수 있는 겁니다. 특별히 오늘 성경에 말씀합니다. "하늘의 상이 큼이니라."
여러분 하늘의 상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요, 하늘의 상을 보장받고 오늘을 사는 사람 하늘의 상을 위하여 오늘 현실이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요. 이것은 미래적인 것이요 신령한 것이요 영원한 것이요 약속된 것입니다. 그래서 돌에 맞아 죽는 스데반은 천사의 얼굴로 죽을 수 있었고 그 기쁨으로 원수를 사랑할 수 있었고……. 디모데후서 4장에 보면 사도바울은 달려갈 길은 다 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내 앞에 생명의 면류관이 있다. 생명의 면류관을 환히 바라보면서 그는 오늘을 감옥에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 41절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감옥에 들어가서 매를 많이 맞고 죽을 지경이 되가지고 석방되면서 이 거룩한 일에 자기들이 합당한 자로 여김 받은 것을 기뻐했어요. 매맞고 기뻐하고 재산은 몰수당하고 기뻐하고 죽음을 당하면서 기뻐하고…… 자 보세요 능욕을 당하면서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은 내가 당하는 이 고난의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것이 너무나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요, 또한 그 일에 합당한 자로 역임 받았다는 것이 너무너무 소중해서 그들은 기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 된 기쁨이요 하나님의 쓰여지는 기쁨이요 또한 제자 된 기쁨이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기쁨이요 또한 저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있는 주님을 바라보는 기쁨이요. 그러기에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욕을 당할 때, 예수의 제자라는 이름으로 고난 당할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는 하늘의 상을 보장받을 수 있는 그런 선에서 오늘도 기쁨으로 충만한 그런 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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