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기득권을 주장하는 요압 (삼하14:1-27)

본문

집을 뛰쳐 나가 도망간 이 압살롬에 대한 애정이 그 아버지의 마음에 더욱 더 고조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13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다윗이 그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오늘 14장에 와서 보면 다윗의 군대장관이었던, 측근 가운데 하나이었던 요압이 그 다윗의 마음을 간파하고 이제 한 여인을 동원해서, 여인이 왕에게 하소연하는 형식을 취해서 다윗이 현실을 직시하게끔 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압살롬을 왕궁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사건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면 이 요압이 드고아에 있는 한 지혜로운 여인을 불러서 이렇게 이렇게 이야기해라고 일러줍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왕 앞에 가서 상주처럼 하고 엎드려서 간청을 합니다. “왕이여 나의 억울함과 안타까움을 풀어주소서.”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 “사실 제가 과부입니다. 남편은 죽고 아들이 둘 있는데, 이 아들들이 들에 나가서 일을 하다가 다툼이 일어나 싸움을 하는데 말릴 사람이 없어서 싸우다가 형이 동생을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랬더니 동네 사람들이 그 살인자를 유대인의 율법에 따라 징벌해야 겠다고 그 형을 내놔라고난리를 피웁니다. 그 형을 죽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모인 내 입장에서 보면 형제 끼리 싸우다가 하나를 죽였다고 할지라도 이 형마저 죽여버리고 나면 우리 가문이 끊어져버리고 맙니다. 그러니 왕께서 이 일을 말려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청원을 합니다. 그 때 다윗왕이, “아, 그거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러면서 그 과부의 청을 들어줍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보면 종족이 끊어지는 것을 피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12지파를 부르셨는데, 그 12지파의 가문 가문마다 그 가문의 대가 끊기지 않도록 굉장히 노력을 합니다. 그래서 전쟁을 하면서도 지파 끼리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가문이 멸종 단계에 들어가면 전쟁을 떼어놓습니다. 멸종을 시키지 않아요. 그리고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형이 결혼을 해서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서 형의 아들로 먼저 입적시킵니다. 그리고난 다음에 낳은 아들이 자기 아들이에요. 유대인의 결혼제도가 그렇습니다. 그 만큼 혈통 보존을 굉장히 중요하게 보는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사건을 놓고도 이 여인이 그걸 주장하는 겁니다. “우리 가문이 끊기게 됐습니다.” 그러니다윗왕이 “역시 그럴 수는 없다. 이제 그 아들은 아무도 손을 못 대게 내가 처리하겠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때에 이 여인이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맹세하도록 유도를 합니다. 그런 다음 이 여인이 말합니다. “왕이여,
그런데 왕은 어찌하여 내쫓긴 아들은 돌아오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까 이미 죽은 자식은 죽은 자식인데, 왜 그 아들마저도 도망간 상태에서 죽게 내버려 두고 있습니까” 이렇게 다윗의 부정한 부분을 지적합니다. 다윗이 이야기를 듣고 이 여인에게 묻습니다. “너 솔직히 이야기하라. 그 생각이 네 생각이냐 요압이 네게 시킨 것이냐” 여인이 말합니다. “왕이여, 요압이 시켰습니다.” 요압을 불러다 놓고 다윗왕이 그냥 명령을 내립니다. “압살롬을 데리고 오너라.” 그래서 압살롬이 돌아옵니다.
오늘 14장 마지막 절까지 보면 압살롬이 돌아오는데, 다윗왕이 압살롬을 한 번 딱 대면하고는, “너 집에 가 있어라.” 하고는 만나 주질 않습니다. 이 압살롬이 나중에는 화를 내면서 왕을 다시 만나 따집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서 우리가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시간이 되는 범위 안에서 앞에서부터 문제를 하나 하나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절에서 3절에 보면 요압의 계략이 나옵니다. 요압은 왕의 마음을 간파하고는 왕의 마음을 충족시키기 위해 압살롬을 돌아오게 하는 계략을 세웁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 계략이 성공을 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계속 이어지는 과정을 놓고 볼 때, 15장에 넘어가서 보면 이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서 다윗왕이 도망을 가게 되고 이스라엘 왕권이 흔들리게 됩니다. 그 결과 나중에 반란이 제압되는 과정에서 압살롬이 죽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나타난 요압의 계략은 왜 숨기게 되는가 우리가 앞으로 진행될 과정을 놓고 보면, 요압이라는 사람은 상당히 간교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군사로는 굉장히 용맹한 사람이었으며, 또한 다윗이 왕국을 건설하는 데 있어서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전쟁에는 아주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자기의 지위와 자기 출세를 위해서는 아주 간교한 사람이었고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원래 다윗은 남쪽 유다왕조의 왕이었을 뿐이고, 북쪽 열 지파는 왕이 따로 있었잖아요 사울왕의 아들이 왕이었잖아요 그러나 다윗에 의해 온 이스라엘이 하나되는 과정에서, 사울왕의 군대장관이 다윗에게 항복을 하고 돌아왔을 때, 요압이 만나가지고 어떻게 합니까 왕이 너 만나고 싶어 한다고 속여서 끌어내서는 칼로 죽여 버립니다. 자기의 막강한 경쟁자가 나타났을 때 서슴없이 죽여버렸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윗왕은 그것을 굉장히 슬퍼하면서도 이 요압이 군부의 세력자이었기에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어서 그냥 묵과합니다. 언제나 군부의 세력이 문제가 있습니다. 그 다윗왕도 그렇게 막강한 왕권을 회복해 놓은 상태에서도 이 요압을 제거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몬에 나타난 요압은 또 무슨 일을 합니까 다윗왕의 마음을 간파해 보니깐 다음 차기 왕권이 누구에게 넘어가게 생겼어요 서열상으로 보면 첫째 아들 암논이 죽어버렸으니 이제 다윗의 아들들 가운데 최고의 큰아들이 누구냐 하면 압살롬이에요. 그러니까 왕권이 자연적으로 압살롬한테로 넘어갈 것을 내다보면서 압살롬을 다시 세우는 데 앞장섭니다. 그래서 압살롬에게 반말을 할 정도에요. 그 만큼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압살롬을 등극을 시킵니다. 그러면 지금 그 요압이 이렇게 압살롬을 회복시키는 데 있어서 그 목적이 무엇이었는가 그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와 이스라엘의 왕권과 나라와 민족을 위한 일이 아니었고, 자기 자신의 일신상의 영화를 위한 것이었으며, 자기가 현재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일에 지나지 않았던, 아첨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요압이라는 사람, 나중에 압살롬이 죽고난 다음에 큰아들이 된 아도니아가 또 반란을 일으킬 때, 그 때 또 아도니아 편을 들어 버립니다. 이 요압이라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에요. 결국은 다윗이 죽을 때까지 이 요압을 제거하지 못해요. 죽으면서 솔로몬에게 왕권을 주면서 말합니다. “요압을 제거하라.” 그래서 솔로몬이 요압을 제거합니다. 그러니까 다윗도 평생 이 요압을 제거하고 싶어도 제거하지 못하고 있다가 아들에게 유언을 남겨요. 요압이 그런 사람이에요. 오늘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오늘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요압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부분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자신의 부귀와 자기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다시 말씀 드리면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자기의 안전과 지위를 확보하려고 하는 삶의 모습들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것입니다. 이 요압의 행위로 말미암아서 다윗의 왕권은 계속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다윗의 왕권은 확고하게 섰습니다. 구약에서 다윗의 왕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했었어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했고,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를 상징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교회가 견고하게 서 가고 교회가 확장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이 요압이라는 사람 때문에 그 견고하게 서 가던 이스라엘의 왕권이 무너지기 시작해요. 오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의 교회에 왜 혼란이 찾아오고 분쟁이 찾아오고 교회내에 말썽들이 일어납니까 오늘날 한국의 교회에서도 왜 많은 교회들이 분쟁이 있습니까 목사파 장로파 권사파 집사파가 왜 나오고, 싸움이 왜 생깁니까 그 이유들이 다 무엇입니까 전부 다 다 자기들의 기득권 자기들의 발언권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데서 생겨난 것 아닙니까 목사는 목사 대로 자기의 권리를 많이 주장해요. 장로는 장로 대로 자기의 권리를 행사하려고만 합니다. 권사는 권사 대로 자기의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거기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야만 돼요.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는가를 물어야만 돼요. 다윗이 아무리 압살롬을 사랑한다 할지라도, 요압은 먼저 물어야만 했습니다. 그 다음에 보면 다윗도 실수하고 있습니다. 어쨓든 요압도 물어야 했습니다. 압살롬을 회복시키는 게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솔로몬을 차기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겠다고 솔로몬이 태어나기 전부터 예언을 했습니다.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이미 하나님의 뜻은 공포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공개적으로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차기 이스라엘의 왕은 솔로몬이라고 이미 선포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압은 다윗의 마음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압살롬의 편을 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름답게 세워져 갈 때 우리 모두는 우리의 위치를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척을 하면서 개척 초기부터 이 부분을 강조했습니다. 개척교회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꼭 문제가 되는 것이 누구냐 창립 멤버든 개척 멤버든, 그들은 수고를 많이 했습니다. 다른 성도들보다 더 많은 희생과 봉사를 했습니다. 초창기의 성도들은 한 사람이 직분을 네 가지 다섯 가지를 감당했습니다. 왜요 일꾼이 없으니까. 몇 사람이 모든 교회 일을 해야 됩니다. 한 사람이 재정도 보고 부장도 맡아야 되고 집사 직분도 맡아야 되고 성가대에도 앉아야 되고 교사도 해야 되고, 하는 일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직분을 다 갖고 일을 했습니다. 왜 일꾼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교회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점점 일꾼이 많이 생깁니다. 그래서 일들이 자꾸 분담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보면 마음에 허전함이 와요. 옛날에는 날마다 일 주일에 대여섯 번씩 목사를 만났는데, 이제는 반 년이 지나도 목사 한번 만나기 힘듭니다. 마음에 섭섭함이 생깁니다. “이제는 교인이 많아지니까 나 같은 것은 목사님 안중에도 없구나.” 옛날에는 교회 일을 하는 데서 이 일 저 일 다 참견을 했는데 이제는 참여하는 부분들이 점점 적어집니다. 그래서 소외감을 느낍니다. “아, 나는 이 교회에서 별로 필요가 없는 사람이구나. 옛날에는 내가 이 교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었고 필요한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 되었구나.” 이런 소외감을 갖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반응을 일으킵니다. 하나는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아, 나는 이 교회에서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구나.” 그래서 그 사람은 또 다른 개척교회를 찾아 갑니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그 성도는 평생 신앙의 성숙을 맛보기 어렵습니다. 개척교회만 계속 돌면요, 신앙이 꼭 그 수준에 머물고 말아요. 항상 자기가 앞장서서 일해야만 만족하는 스타일로 변해 버립니다. 그래서 누차 말씀 드리지 않습니까 초창기에 수고하신 분들, 교회 건축할 때 피땀 흘렸던 분들, 여러분들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셔야만 합니다. 내 권리가 주장될 때 이미 나는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물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까 물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나타날 때 그 사람에게 일을 맡길 줄 아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큰 일꾼입니다. 교회는 권리를 주장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교회는 섬기는 장소입니다. 다른 연약한 성도를 위해서 내가 희생하는 장소가 바로 교회입니다. 주님을 섬기듯이 사랑해야 합니다. 요압의 실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자기의 권리와 자기의 입장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방법 대로 인간적인 방법 대로 일을 처리하다가 결과적으론 자기도 희생을 당하고 압살롬도 희생을 당하고, 또한 이스라엘의 왕권이 붕괴되기 시작하는 그런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비극의 뿌리가 되었다는 사실. 오늘 우리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권리와 주장을 포기할 줄 알아야만 됩니다. 주님께서 하나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질 때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썩어질 때 죽어질 때 거기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겁니다. 너희가 낮아지면 높아지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진리의 방법입니다. 교회는 낮아질 때 하나님이 높여 주십니다. 그래서 나를 포기할 때 성도들이 나를 인정해 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 수고 많이 하신 것 저도 인정합니다. 저도 사람이기 때문에 그 분들에 대한 애착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는 한 그 분들은 잊을 수가 없을 겁니다. 저는 지금도 우리 다솜이 엄마랑 가끔 그런 얘기를 해요. 지금도 제 침대에는 전기 담요가 깔려 있어요. 그것은 아주 누렇게 떴습니다. 색깔이 아주 누렇게 변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사용하며 옛날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상가 교회에서 베니아판으로 막아놓고 거기에서 잠을 잘 때 보일러도 돌아가지 않고 실내 온도가 영하로 떨어지는 그 추울 때, 거기서 잠을 잘 때, 어떤 성도 한 분이 그 전기 장판을 사다 주셨어요. 저희는 그것을 잊지 않고 있어요.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서 그것을 계속 쓰는 것도 아닙니다. 그 몇 만원 짜리, 없애려면 벌써 없앴겠지요. 이제 다 낡았고 지저분해 졌습니다. 벌써 몇 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것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옛날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마음을 아프게 하여도, 그런 것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목사의 마음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기득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그렇게 했기 때문에 지금도 그렇게 해야 되고, 옛날에 그 만큼 했기 때문에 지금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이 교회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오늘도 물으며 믿음으로 정진하셔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이 요압의 사건을 통해서 받아야 할 교훈은, 오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내 방법 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삶인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압은 세상적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고 아주 지혜롭게 처신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 피차가 망하는 비극적 결론을 내고 맙니다. 오늘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극적 종말을 맞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잠언 3장에도 말씀하시기를 너의 지혜와 명철을 의지하지 말고 여호와를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의 길을 지도하시리라.” 여러분, 인생을 살아오신 경험이 있을 겁니다. 나름대로 일가견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인생을 창조하시고 여러분들의 인생을 주관하시고 여러분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계시는 그 분에게 여러분의 인생을 맡기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연륜이나 경륜은 존중합니다. 그러나 그 연륜이나 경륜도 하나님 앞에서는 보잘것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 세상 살아가시면서 지혜롭게 사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그 지혜는 요압처럼 인간적인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께 뜻을 묻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지혜로움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자면 여러분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시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심으로 여러분의 삶을 결정하시길 바랍니다.
사업을 하시면서도 직장생활을 하시면서도 가정의 일을 처리하시면서도 항상 하나님의 뜻을 물으시길 바랍니다. 이 정도 일이야 눈치껏 경험적으로 처리해서 될 것 같은데 되지 않는 게 인간사 아닙니까 잠언 3장에 있는 말씀처럼 너의 지혜와 명철을 의지하지 말고 여호와를 의지하라.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모든 일에 그를 인정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모든 일을 할 때마다 그를 기억하고 물어라는 말 아닙니까 그리하면 너의 길을 지도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인도하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성공적인 삶을 사는 비결이 아니겠습니까 잠언에서 계속 말씀하시기를, 뭐라고 하시지요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지만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이시다.” 우리 마음에 계획을 내가 세우고 있지만, 그 계획이 되고 안 되고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요압은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인간적인 지혜를 동원해서 자기의 출세를 도모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비극으로 끝났다는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다시한번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통해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오늘 우리가 요압을 통해서 한 가지 기억하여야 할 것은 인정과 열심도 문제가 될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요압과 다윗. 다윗이 하나님의 뜻보다는 인정에 이끌리어 부모 자식간의 정에 이끌리어 이것이 당연하다고 봅니다. 부모 자식간에는 당연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사로운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치리하는 지도자입니다. 지도자가 사사로운 정에 이끌렸을 때 그것이 얼마나 큰 비극을 초래하는가 반란이 계속 일어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국민이 피해를 봅니다. 백성들이 피해를 봐요. 오늘 우리가 여기서 기억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정에 이끌리어서도 안 된다는 사실.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는 인정을 앞세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피차 사랑을 해야 합니다. 서로 용납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피차를 용서해 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인정에 치우쳐서 일을 처리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그 뒷 부분에 있는 말씀은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1절에서 3절에 있는 요압의 계략에 대해서 오늘 두 가지만 지적하려고 합니다.
첫째 가장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인간적인 수단으로 일을 처리했던 그 결과,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묻지 않고 자기의 권리와 자기의 지위를 지키려고 했던 그 도모가 결과적으로는 비극이었다는 사실을 통해서,첫째는 하나님이 교회를 세워나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무리 크게 쓰임 받았다 할지라도 그 크게 쓰임 받은 것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도외시할 때 그것은 비극이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강성교회에서 아무리 중요한 일을 감당했다 할지라도 그래서 내가 이 강성교회에서 목사로서 기득권을 끝까지 주장한다고 하면 그것은 저한테도 비극이고 우리 교회에도 비극입니다. 만에 하나 하나님께서 이 강성교회에서 수고했던 그 모든 것을 이제 마감하라고 하시면 저는 언제라도 이 교회를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 교회를 어떻게 개척했고, 이 교회를 신축하면서 내가 어떻게 고생을 했는데, 내가 이 교회를 떠나느냐 내가 여기서 끝까지 지키겠다. 하나님이, 너 강성교회에서 끝까지 목숨 다할 때까지 봉사하라 그러시면 끝까지 저는 여기 있을 거에요. 하나님께서 끝까지 너 여기서 지켜라 그러시면 여러분이 다 이철호 목사 나가시오 해도 저는 안 나가고 버틸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네 사명 끝났다 그러실 때에는 제가 저의 기득권을 주장하면 그건 비극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님들도, 여러분들이 아무리 중요한 직분을 맡았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중요하게 일하는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그 직분에 끝까지 쓰임 받는 방법은 하나님의 뜻을 계속 묻고 하나님 앞에 계속적인 헌신과 봉사와 충성의 삶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단을 쌓고 무리를 모으고 인기를 얻고 그래서 여러분의 지위를 지키려고 하시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훼손하고 개인적으로도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둘째,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인간적인 지혜와 경험으로 세상 살아가다가는 실패하는 겁니다.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순간 순간 무릎을 꿇고 물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찾으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그리고 도움을 청하시는 여러분들의 삶이 성공적인 삶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302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