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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결혼관 1 (고전7:1-24)

본문

우리는 음란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 음란한 시대에 우리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올바른 결혼관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여성대표가 조물주를 찾아가 불평을 했습니다. <어째서 아이를 낳을 때 여자만이 혼자서 그 고통을 겪게 만들었습 니까. 이 불평들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아이를 갖게 한 남자측에 서도 그 진통을 나누어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산모(産母)의 고통을 반 으로 덜어주고 나머지 반은 남자에게 주어야 옳은 일이 아니겠습니 까> 여성의 어러한 호소를 조물주는 그 자리에서 쾌히 받아들였습니다. 조금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정당한 불평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커다란 혼란이 벌어졌습니다. 세상에는 깨끗하게 정절(貞節)을 지키고 사는 여성들만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내 가 아이를 낳을 때 막상 진통을 해야 할 남편은 멀쩡한데 엉뚱하게 이 웃집 남자가 갑작스레 배를 움켜쥐고 소리를 지르는 해괴한 광경이 벌 어지기도 합니다. 또 아내가 아이를 낳지도 않는데 남편 혼자서 진통을 하느라고 땀을 흘리는 수도 있습니다. 어느 여인이 그의 아이를 낳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진통으로 도처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가 정이 깨어져나갑니다. 조물주가 한숨을 짓고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 을 때 여성 대표가 다시 찾아옵니다. 산고(産苦)보다도 몇 배나 더 괴로 움을 당하고 있으니 빨리 원상복귀를 해달라는 애원이었습니다. 부정 (不貞)이 양성화될 때 남성보다 여성이 당하는 벌이 몇 배나 컸을 것이 기 때문입니다. 결혼생활에 있어 여자에게 주어진 가장 큰 의무는 바로 정조(貞操)의 문제입니다. 오늘날처럼 프리섹스의 시대가 아니라도 유럽의 경우, 이 미 혼전 성관계가 로코코 시대 때부터 성행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인공적으로 처녀성을 만드는 장사가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가를 보면 됩니다. 훅스의 조사에 따르면 그 당시의 약제사나 약종상(藥種商)은 수 렴성(收斂性) 연고와 약으로 몇번이고 처녀성을 만들어주는 이른바 <처 녀부활약>이라는 것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그리고 주문이 쇄도하는 바 람에 그들은 한결같이 거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감기약이 아니라 <처 녀부활약>으로 약제사들이 치부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혼전 성관계가 그만큼 많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혼인의 순결성이 그다지 문제시 되지 않고 있 다는 도덕적 윤리적 심각성에 봉착해 있음을 부인할 길이 없습니다. 인류학자 언윈은 "인류가 겪어온 88개 문명의 흥망사에서 재미있는 공통점을 지적할 수 있다. 어느 문명이나 그것이 일어나는 시대에는 성도덕이 건전했고 그것이 쇠망하는 시대에는 성도덕이 문란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동의 10%가 13세에 섹스를 경험하고, 해마다 10대 소녀 의 10%가 임신하며, 대학생의 66%가 혼전 성관계를 체험했고, 80%가 혼전정사를 부도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미국의 성문제는 개인이나 가 정문제를 넘어 문명의 존폐 위기에 관계된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미국의 문화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우리 한국의 성적 타락의 현상 도 미국에 못지 않게 나라의 존망을 위태롭게 할 만큼 심각한 상태에 있음을 주시해야 할 것입니다.
2. 이 음란한 시대에 금욕적인 독신생활이 신앙생활에 바람직한 것인 가 본문 1절이 제기하고 있는 바는 바로 그런 문제였습니다. "(고전7:1)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문의한 내용 중의 하나는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결혼하는 것보다 더 신령한 것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오해했던 것은 '보다 깊은 신앙의 차원에 이르려면 결혼을 안하는 것이 좋다.' 다시말해 독신생활이 결혼생활보다 더 신령하고 <고급신앙>이며, 결혼생활은 저급한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또는 독신생활이 신앙의 성숙에 있어서 결혼생활보다 낫다는 오해를 가졌던 것입니다. 제삼자가 볼 때 목사보다는 천주교 신부가, 개신교의 권사보다는 천 주교의 수녀들이 더 신앙적이고 신령한 느낌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혼을 안했거나 금욕적인 것이 더 신령하고 더 신앙적이라고 오해했 던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에 천주교 신부와 기독교 목사 중 어느 쪽 신 앙이 더 좋아 보입니까 대부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다 천주 교가 더 종교적인 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부와 수녀들이 결혼 을 안 하니까 금욕적인 것으로 일단 더 점수를 줍니다. 그러나 만나서 얘기를 해보면 개신교 목사를 이길 만한 신앙을 가진 천주교 신부는 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부가 언제 마누라 때문에 속을 썩어봤겠습니까 그가 언제 애 때문에 밤잠을 설쳐 봤습니까 그런 것을 안해 보면 죽었다 깨도 모르는 것입니다.
천주교 신부가 무슨 애국심을 가지고 민주화 투쟁 으로, 무슨 인권 운동에 목숨을 걸고 그의 전 생애를 바쳤어도 속상하는 아내와 일주일 산 것보다 훈련되는 양이 적은 법입니다. 결혼을 하 고 일주일 살다 죽으면 참 복받은 것입니다. 그것을 30년 이상씩 산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안 훌륭해지겠습니까 훌륭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독신으로 있는 것이 좀 더 센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로하자면 독신으로 60세를 산 사람보다 결혼해서 6년 산 사람 이 더 센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우리보고 결혼해서 속상하는 아내를 만나고 속상한 남편을 만나고 속상한 부모와 속상한 자식을 기 르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못 고친 병 남편이 고치고, 남편이 못 고친 병 자식이 고쳐서 결국 훌륭해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를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정한 법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훌륭해지느냐 하면 지지고 볶는 사람입니다. 누가 더 많이 지지고 볶느냐가 그 사람의 신앙의 결국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부부란 "원수끼리 만난 사이가 부부다."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애를 낳으면 좀 나을 줄 알았더니 혹 떼려다 혹 붙인 게 자식입니다. 교회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늘 필 요한 만큼 문제가 있어서 속을 썩어야 되고 그래서 기도해야 되고 서 로가 서로에게 훈련 도구가 되고 또 위로자가 되고 해결책이 되고 어떤 때는 매달리고 어떤 때는 업어주고 그렇게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금욕과 세상에서의 질서를 벗는 것이 신령한 것이 아닙니다. 지지고 볶는 그 속에서 신령한 것이 만들어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참 뜻이며 정말 센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부부의 성에 관한 문제도 결국 우리가 이해해야 될 것은 금욕적인 것이 거룩으로 가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 결혼을 하는 것이 완성으로 가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독신으로 부름받아 하나님이 그를 거룩으로 끌고 가는 경우가 있기도 하지만 더 많은 대 부분의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은 결혼을 해서 지지고 볶는 속에 서 거룩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견해는 남자나 여자나 독신의 은사를 받는 것은 좋지 만, 독신 상태가 결혼한 것보다 월등히 나은 것은 아니며 더욱 어느 누 구에게도 독신생활이 최상의 생활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독신이나 결혼 중 어느 하나를 절대시해서는 안되는 것이지만 바울이 독신을 좋게 여 긴 것은 그것이 창조 질서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근본 목적이기 때 문이 아니라 최선의 방법으로 복음을 전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고자 하는 그의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실 구약성경에는 독신생활을 인정하는 성(性)의 신학이 없습니다. 실제로 유대교는 독신주의를 이상한 것으로 경멸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거세된 남자들은 제사장이 되는 것을 금한 것 등입니다.(레21:20)
그렇다고 바울이 결혼을 반대한 것이 아니며 실제로 8,9절에서도 독신 으로 인해 성적 욕망으로 타락하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것이 낫다고 선 언하고 있습니다. 독신 생활은 은사에 따라 허용되기는 하지만 명령은 아닌 것입니다. 또한 독신은 일종의 은사이며 아무나 이 은사를 소유한 것은 아닙니다. "(고전7:6)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 (고전7: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창2:18) ….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이유로 인해 독 신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고 안 하고는 모두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 속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것입니다. "남편 때문에 나는 신앙이 나빠졌습니다.아내 때문에 내 신앙은 자라지 않습니다.애들 때문에 나는 짐이 무거워서 신앙이 깊어지지 않습니다.부부생활 때문에 내 신앙생활이 더 신령해지지 않습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사기이고 오리발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의 신앙에 방해될 것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결혼은 오히려 여러분의 신앙을 깊이 있게 하고 세상과 인생의 거짓된 것을 보게 하기 위해서 준 처지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입니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귀하신 주여, 결혼은하나님의 선물이옵니다. 그것은 가장 감 미롭고 값진 것이옵니다. 최고로 순전한 삶이옵니다." 노만 로벤츠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정(不貞)을 막는 데는 생기있고 흥미로운 결혼생활이 특효다." 결혼생활 가운데서 우리가 신비와 흥분 그리고 모든 매력을 유지하 려고 하는 자리는 역시 성적인 친밀함의 자리입니다.
3. 그러면 결혼한 사람의 생활은 어떻해야 하는 것인가 "(고전7:3)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 에게 그렇게 할지라 (고전7:4)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고전7: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 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 "몸을 주장한다"는 말의 뜻은 무슨 뜻인가 남편과 아내의 몸 에 완전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서로 상대방에게 속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이 아담스 교수는 상대방의 "몸을 주장하는 일"은 아내 나 남편이 상대방에게 성생활을 통한 만족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 주 장을 포함한다고 해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이란 그의 책에서 아담스 교수는 아내나 남편이 요구하는 성생활을 정당한 근거 없이 상대방이 거절하거나 오랫동안 거부하는 행위는 이기적이요 비성경적인 행위라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생활의 울타리 안에서 부부 사이에 건전한 성생활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건전한 성생활이 존재하지 않는 결혼생활이란 것은 진정 으로 행복한 결혼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결혼제 도를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결코 결혼의 울타리 안에서 건전하고 건강한 성생활을 무시하거나 평가절하지 않습니다. 가정생활 이 불신의 늪을 헤매이거나 깨어지게 되는 원인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 으신 성경적 원칙을 부부 중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깨뜨리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바울은 5절에서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7: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 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 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 "분방하다"는 말의 헬라어는 "속이다. 착취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 동사를 사용한 배경을 볼 때 정당한 근거없이 자 기 몸을 상대방에 주기를 거절하는 행위를 분명히 "사기"요 "착취"라 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런 남편이나 아내는 도둑질하는 사람이요 사기질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인정하는 정당한 근거는 본문에서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해 "잠시 동안", 그것 도 "합의상" 떨어져 사는 것 같은 일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신앙생활이라는 미명아래 아내나 남편이 상대방에게 절제를 강요해도 된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합의상" 그리고 "얼마 동안"이 라는 명백한 제한을 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의 인격적인 합의에 의해서만 그것도 잠시 동 안만 떨어져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부부 모두에게 동등한 결혼의 의무와 권리를 주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내나 남편이 집을 비울 때는 반드시 서로의 동의를 얻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도둑질하는 사람이요 사기질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합의상" 떨어져 있는 것도 "잠시 동안"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혼 생활은 부부가 함께 살기 위해 제정된 것입니다. 돈을 번다는 명분에서 나 기도생활이라는 명분에서 부부가 오랫동안 떨어져 사는 것은 그만 큼 성경적 원칙을 어기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결혼한 사람들이 가져야 할 이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 은 무엇인가 본문 10절-16절은 바로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랍비 힐렐이 주도하는 힐렐 학파는 남자가 어떤 이유로 든 아내와 이혼해도 좋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밥을 태웠 다든가, 자기를 더 기쁘게 해주는 다른 애인을 만나게 됐을 경우 등은 충분한 이혼사유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랍비 샴마이로 대표되는 다른 학파는 아내와 이혼할 수 있는 유일한 이혼사유는 결혼의 부 정 외에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이 논쟁에 빠 뜨리려고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마19:3)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러나 예수님은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않으시고 처음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19: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 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마19:5)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마19:6)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영원한 "한 몸"의 실재가 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답변은 모세의 율법적 문제를 야기시켰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다시 물었습니다. "(마19:7)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마19:8)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모세는 여성들이 완악한 남자들로부터 보호받도록 하기 위하여 이혼 을 허락했다는 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벽에 머리를 쥐어 박히느니 차라리 이혼당하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본래는 이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혼 때문에 여자들이 당한 상처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이혼에 해당하는 용어는 정확하게 문자적 의미로는 "내어 버리 다"라는 뜻이며, 여자들은 아주 간략한 절차로써, 법정이나 회당에도 갈 것 없이 버려질 수 있었습니다. 또 이혼 사유란 자기 차례도 아닌데 말을 했다든지, 강아지를 발로 걷어찼다든가 하는 실로 어떤 이유라도 성립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여자는 1세기의 가부장적 사회에 있어서 하나의 희생물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여자를 희생시키는 그러한 악습을 반대하신 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아내를 버린 남자는 그녀를 "간음하게" 하는 자라 고 질타를 하셨습니다. "(마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셨던 바는 거리로 쫓겨나게 된 여인이 살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녀는 밖에 나가서 직업을 구할 데라고는 아무 데도 없었습니다. 딱 하나 팔 수 있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 몸을 파는 매춘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 로 1세기경에 매춘이 판을 치게 된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이유를 불문하고 이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고전7: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 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이혼은 "화평 중에 부르신한 몸"의 연합을 깨뜨리는 분열로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혼을 가능한 모든 은총의 수단과 방법을 다 써 본 후 최종적인 해결책으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단지 결혼생활 중에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든지" 하는 이유로 이혼을 선택하는 것은 정면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챨스 스윈돌은 "결코 성급하게 서두르지 말아야 할 것 두 가지가 있는데 곧 장례식과 이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쉽사리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글자 그대로 용서받고 구속된 관계의 소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결혼에서 성공하기를 열렬히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온갖 노력에 도 불구하고 결혼생활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때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수단을 다 강구해 보았습니다.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으며, 안해본 일이 없을 지 경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결혼생활은 절망과 고통의 늪으로 빠져 갑니다. 이런 경우라면 사랑의 법은 이혼해야 할 것을 명령합니다. 진실 로 이혼만이 사랑의 법이 처방한 최종의 해결책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라면 대부분의 이혼의 현장에 나타나는 악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혼이란 거의 발생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이라면 어떤 경우에라도 이혼을 하게 될 때에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변호사와 재판관으로 삼아 사랑의 법에 순종하도록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결혼생활을 계속하는 것이 이혼하는 것보다 현저히 파괴적이라는 판단이 분명히 서면 그때는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최종적으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 황이어서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이혼을 택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예수님 께서도 정죄하신 바와 같이 냉정하게 "내어 버려서는" 안됩니다. 적절 한 재산의 분배를 통하여 살 방도를 만들어 주어야 하며, 그렇게 함으 로 양자가 모두 빈궁에 처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어느 편 도 상대방을 감정적으로 "내어 버려서는" 안되며 가능한한 성심을 다 하여 고통을 최소화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충성하려고 잘못된 결혼생활이라 해도 그를 포기하 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결정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극도로 험난한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성도들의 뜨거운 기도와 협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들이 나중에는 결국 이혼을 결정하게 될 것 이라고 해도 그들은 결코 실패하였다거나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너그러운 사랑으로 받아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혼한 한 편이 불신자인 경우에 불신자 편에서 이혼을 원한다면 원 하는대로 그가 떠나게 내버려 두라는 것이고, 불신자가 결혼생활을 계 속 원한다면 이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배우자를 통 해서 불신 배우자가 깨끗해질 수가 있기 때문이며, 또한 그 자녀들까지 도 깨끗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불신 배우자에게도 회심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가 결혼생활을 원한다면 그 생활을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가정의 분열 문제를 다룬 어그스버그(David Augsburg) 박사의 저서 <사랑의 대결>은 부부 싸움의 세 가지 형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이기고 네가 졌다(I win, You lose)"로써 가장 바람직 하지 못한 부부 싸움입니다.
둘째 형태는 "네가 이겼다. 나는 포기한다(You win,I give up)"로써 역시 바람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포기는 실상 증오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형태는 "신발 흙털개(doormat)"입니다. "나를 밟고 가라. 그러나 진흙까지 집안에 들여 놓지는 말라."는 사랑의 정신으로서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희생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생활에 충만하시므로 이 음란한 시대에 성결한 가정, 행복한 가정 생활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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