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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결혼관 2 (고전7:10-24)

본문

미국 유머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미국인이 6.25 전에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산길을 걷다가 이상 한 광경 하나를 보았습니다. 남자는 나귀를 타고 그 아내는 뒤에서 숨 을 헐떡이며 쫓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인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물었 습니다. <여보시오. 레이디 퍼스트의 예의도 모르시오 여자를 저렇게 학대하 다니.> 그러자 그 군자는 태연히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풍속이오.>
그런데 그 미국인이 6.25 사변 직후에 다시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는 그와 정반대의 광경을 목도했습니다. 똑같은 산길이었지만 이번에는 여 자가 앞에서 나귀를 타고 남자는 멀찌기 떨어져 조심성있게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그 미국인이 신기하게 생각했습니다. <여보시오. 그 동안에 풍속이 변했구료.> 그러자 그 군자는 옛날과 조금도 다름없는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전쟁통에 지뢰가 사방에 묻혀 있기 때문에 아 내를 이렇게 앞세우고 가는 거랍니다.> 이것은 한국인의 그 철저한 남 존여비의 풍속을 희화화(戱畵化)한 유머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한국은 <고개숙인 남자>라는 말 그대로 남존여비의 풍속이 고개숙인지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1. 결혼한 사람들이 가져야 할 이혼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본문 10절-16절은 바로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랍비 힐렐이 주도하는 힐렐 학파는 남자가 어떤 이유로 든 아내와 이혼해도 좋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밥을 태웠 다든가, 자기를 더 기쁘게 해주는 다른 애인을 만나게 됐을 경우 등은 충분한 이혼사유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랍비 샴마이로 대표되는 다른 학파는 아내와 이혼할 수 있는 유일한 이혼사유는 결혼의 부 정(不貞) 외에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이 논쟁 에 빠뜨리려고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마19:3)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러나 예수님은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않으시고 처음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19: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 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마19:5)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 을 읽지 못하였느냐 (마19:6)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영원한 "한 몸"의 실재가 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답변은 모세의 율법적 문제를 야기시켰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다 시 물었습니다. "(마19:7)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이에 대한 예수님을 답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마19:8)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모세는 여성들이 완악한 남자들로부터 보호받도록 하기 위하여 이혼 을 허락했다는 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벽에 머리를 쥐어 박히느니 차라리 이혼당하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본래는 이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혼 때문에 여자들이 당한 상처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이혼에 해당하는 용어는 정확하게 문자적 의미로는 "내어 버리 다"라는 뜻이며, 여자들은 아주 간략한 절차로써, 법정이나 회당에도 갈 것 없이 버려질 수 있었습니다. 또 이혼 사유란 자기 차례도 아닌데 말을 했다든지, 강아지를 발로 걷어찼다든가 하는 실로 어떤 이유라도 성립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19세기 유럽의 판화(版畵)에는 남녀의 사랑 그것을 풍자한 만화들이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첫장면에는 비오는 날 거만하게 걸어가는 여자에게 남자가 뒤따라오 면서 우산을 받쳐줍니다. 기사풍의 이 남성은 그 여인에게 빗방울 하나 떨어지지 않도록 우산을 씌워주고 있는 바람에 자기는 흠뻑 비에 젖고 있습니다.
둘째 장면은 우산으로 가리고 이 남녀는 열렬한 키스를 합니다. 이 때는 우산이 공평하게 두 사람을 다 덮고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두 사람이 다시 빗속을 걷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산이 처음과는 반대로 그것을 들고 있는 남자 쪽으로만 기울어져 있습니다. 여자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남자를 흘겨보면서 비에 젖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그는 기사가 아닙니다. 이것이 사랑의 과정입니다. 구애(求愛)를 할 때는 으레 남자가 저자 세이고 여자는 고자세입니다. 그러나 일단 사랑을 손에 넣으면 그 자세는 전도(顚倒)되고 맙니다. 사랑의 우산을 잡은 손은 여자가 아니라 남 자입니다.
왜냐하면 남자에겐 동정(童貞)이란 것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 지만 여자에게 처녀성이란 것이 하나의 신화처럼 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사랑의 완성이 여자에게는 <몸을 버린다>는 말로 표현되고 있는 것 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을 하는 것이 남자의 경우에는 <정복> 이라고 말해지며 여자의 입장에선 <상실>이 되는 셈입니다 <사랑의 장부>를 보면 남자는 언제나 흑자이고, 여자의 것에는 적자 로 기록됩니다. 두 번째, 세 번째의 여성을 만나게 될 수록 남성은 유 리한 게임을 벌이게 됩니다. 여성의 심리를 환히 바라보고 있는 경험 때문에 사랑의 작전에서는 언제나 유리한 고지(高地)를 점령할 수가 있습니다. 여성은 반대로 경험이 많을수록 그 값어치가 하락합니다.(이어 령) 여자는 1세기의 가부장적 사회에 있어서 하나의 희생물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여자를 희생시키는 그러한 악습을 반대하신 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아내를 버린 남자는 그녀를 "간음하게" 하는 자라 고 질타를 하셨습니다. "(마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셨던 바는 거리로 쫓겨나게 된 여인이 살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녀는 밖에 나가서 직업을 구할 데라고는 아무 데도 없었습니다. 딱 하나 팔 수 있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 몸을 파는 매춘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 로 1세기경에 매춘이 판을 치게 된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이유를 불문하고 이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고전7: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 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이혼은 "화평 중에 부르신한 몸"의 연합을 깨뜨리는 분열로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혼을 가능한 모든 은총의 수단과 방법을 다 써 본 후 최종적인 해결책으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단지 결혼생활 중에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든지, 아니 면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든지" 하는 이유로 이혼을 선택하는 것은 정면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챨스 스윈돌은 "결코 성급하게 서두르지 말아야 할 것 두 가지가 있는데 곧 장례식과 이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쉽사리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글자 그대로 용서받고 구속된 관계의 소망과 사랑으로 가 득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결혼에서 성공하기를 열렬히 바라 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온갖 노력에 도 불구하고 결혼생활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때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수단을 다 강구해 보았습니다.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으며, 안해본 일이 없을 지 경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결혼생활은 절망과 고통의 늪으로 빠져 갑니다. 이런 경우라면 사랑의 법은 이혼해야 할 것을 명령합니다. 원수 를 사랑하라는 사랑의 대원칙을 그대로 결혼 생활에 적용한다면 대부 분의 이혼의 현장에 나타나는 악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혼이란 거의 발생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혼이란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혼을 했거든 혼자 지내든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바는 부부가 살면서 무슨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혼이라는 방법을 사용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혼이라는 방법으로 부부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을 아예 머리속에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헤어진다는 가능성과 생각은 신자의 마음 속에서 없애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졌거든 다른 사람과 재혼하지 말고 할 수 있으면 다시 결합하라는 것입니다. 갈라지려는 마음이 있거든 그 마음을 가지고 오 히려 참고 견디고 용서하고 화해하여 같이 살라는 것입니다. 이혼을 할 만큼 복잡한 관계, 참을 수 없는 것이 이 화해의 마음으로 삼켜져서 너희의 결혼이 이혼으로 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신자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헤어질 수밖에 없는 상대를 용서하고 함께 묶여져 있는 것을 감수하고 화해하는 마음으로 견뎌 나가는 것이 신자로서 더 멋진 신령한 결혼 생활의 모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청산 유수로 멋진 기도를 하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 이 있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고 이런 것이 신자의 가장 높은 경 지의 모습이 아니고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그 일, 그래서 지지고 볶고 그래서 늘 울고 불고 가는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감수하는 것이 신자 가 나타내야 될 가장 신령한 신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 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 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을 부부끼리는 적용하지 않고 있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할 때 무엇보다도 자기 남 편, 자기 아내, 자기 자식, 자기 부모에게 먼저 적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는 부부가 만날 때 혹은 부 모와 자식간에 모두가 상대방이 내 짐을 덜어주고 나를 이해해 주고 나를 편하게 해 주리라고 기대합니다. 이 사람이라면 내 짐을 덜어주고 나를 이해하며 사랑하며 나를 편하게 행복하게 해주리라. 그래서 서로 가 만납니다. 서로가 만나서 짐을 덜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는 둘이 만나면 짐이 두 배로 늘어납니다. 내 짐은 물론 내가 져야 할 뿐 만 아니라 상대방의 짐도 내가 져야되는 것입니다. 짐을 더는 것이 아 니라 짐을 갖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해서 이렇게 권 면합니다. "(롬15:1)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 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의 연약한 것을 비판하지 말고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 당해야 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않고 남을 기쁘게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롬15: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 우도록 할지니라 (롬15:3)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 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 으니라." 부부간의 화해는 상대방도 한걸음 양보하고 나도 한걸음 양보하는 화해가 아닙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감당하는 화해, 내가 나 의 기쁨을 위하여 살지않고 상대방의 기쁨을 위하여 나를 양보하고 나 의 기쁨을 유보하는 것이 화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혼이란 결국 내가 감당해야 할 어떤 문제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며, 내가 져야 할 짐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렸거든 혼 자 지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이라면 어떤 경우에라도 이혼을 하게 될 때에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변호사와 재판관으로 삼아 사랑의 법에 순종하도록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결혼생활을 계속하는 것이 이혼하는 것보다 현저히 파괴적이라는 판단이 분명히 서면 그때는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최종적으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이혼을 택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도 정죄하신 바 와 같이 냉정하게 "내어 버려서는" 안됩니다. 적절한 재산의 분배를 통 하여 살 방도를 만들어 주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 양자가 모두 빈궁 에 처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어느 편도 상대방을 감정적 으로 "내어 버려서는" 안되며 가능한한 성심을 다하여 고통을 최소화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충성하려고 잘못된 결혼생활이라 해도 그를 포기하 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결정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극도로 험난한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성도들의 뜨거운 기도와 협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들이 나중에는 결국 이혼을 결정하게 될 것 이라고 해도 그들은 결코 실패하였다거나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너그러운 사랑으로 받아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다음으로 불신자와 결혼 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본 문 12절 이하는 그 문제에 대한 명쾌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결혼한 한 편이 불신자인 경우에 불신자 편에서 이혼을 원한다면 원 하는대로 그가 떠나게 내버려 두라는 것이고, 불신자가 결혼생활을 계 속 원한다면 이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배우자를 통 해서 불신 배우자가 깨끗해질 수가 있기 때문이며, 또한 그 자녀들까지 도 깨끗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불신 배우자에게도 회심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가 결혼생활을 원한다면 그 생활을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아내나 믿지 않는 남편이 있을 때 갈라서는 것이 원칙이냐 아니냐를 물으면,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갈라 서야 한다."라고 대답합니다. 아마도 다음의 성구에 근거해서 그럴 것 입니다.
"(고후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 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고후6: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고 후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 리라 하셨느니라 (고후6:17)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 하여 (고후6: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 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분명히 "(고후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고후6: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 관하며 (고후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라는 원칙에 의하면 믿지 않는 사람과 부부로서 같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강한 원리가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고전7:12)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 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 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같이 살기를 원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가 그 신앙을 이유로 해서 갈라서겠 다면 갈라서라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의 신앙을 핑계삼아서 갈라설 것 을 요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분명히 다음에 나옵니다. "(고전7:16)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현재의 결혼 자체가 하나님의 뜻과 비교할 때 하나님의 뜻에 우리가 동의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은 일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역사가 있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한국의 대부분의 여성운동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 게 주장합니다. 매맞고 울고 짜면서 사느니, 무능하고 무기력한 남편과 힘들게 사느니 일찌감치 헤어져서 자기 삶을 찾으라고 아우성입니다. 이들 똑똑하고 소위 많이 배웠다고 하는 대부분의 여성운동가들은 이 혼해서 결손가정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바보 온달과 평 강공주>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천민 출신의 바보 온달이었지만 평강 공주의 온갖 시련을 극복한 사랑으로 나라의 훌륭한 장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평강 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모두가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성공적인, 그리고 행복한 가정을 이룩하시는 <평강 공주>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불행하며 실패했다고 생각되는 가정들을 성공시키며 행복하게 변화시키는 사랑의 역사가 여러분 가정 에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대부분 자식들을 결혼시킬 때 보면, 신앙있는 집에 보내는 것보다 돈 많은 집, 가문 좋은 집, 장래가 보장된 집에 자식을 보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그것을 우리의 못난 대로 갚으시지 않으시고 믿 지 않은 사돈까지 다 믿게 하는 결과를 많이 이루시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앙이 별볼일 없어 보여 믿 지 않는 사람과 사돈을 맺고 돈 보고 세상의 지위를 보고 여러분의 딸 을 주고 아들을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하고 결혼해서 피눈물을 흘리는 것을 여러분 이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경험하셨고 여러분 친구가 경험하고 있고 여러분 주변에서 상당한 사람들이 그같은 경험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을 버리시지 않고 긍휼을 베푸사 그 사돈 맺 은 집을 구원하시는 은혜를 베푸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용서와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지위가 없고 돈 없는 집에 순전히 믿음만을 보고 사돈을 맺으면 그 은혜말고 승리 와 영광과 기쁨과 감사가 가득찬 생활을 살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가장 어려운 것이 가정입니다. 부부란 참으로 어려운 관계입니다. 가장 큰 힘이 되기도 하고, 가장 큰 짐이 되기도 하고, 가 장 큰 위로를 받기도 하고, 가장 큰 절망을 맛보기도 하는 것이 부부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짐을 덜어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감당하시고 십자가에 희생하신 것을 기억하며 가정생활에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가정의 모든 문제들을 넉넉히 극 복하고 승리하며 행복한 가정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떤 마음씨 좋은 남편 얘기가 있습니다. 악한 마누라가 늘 꼬집고 뜯고 그래도 늘 남편이 웃기만 하니까 한 번은 팔을 꺽더랍니다. 남편이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여보, 그러지마, 그럼 부러져," 그러자 딱 부러졌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말하길 "거봐 부러졌잖아요." 이러면 싸움이 없는 것입니다. 부부란 누가 이기고 지는 싸움의 대상 이 아니라 서로 짐을 져주고 용서하며 이해하며 희생하는 사랑의 관계 입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희생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생활에 충만하시므로 실패한 가정은 성공적인 가정으로, 믿음의 가 정은 영광과 기쁨이 가득한 가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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