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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 됨의 증거 (요1: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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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말씀은 예수님 보다 6 개월전 먼저 와서 메시야를 바로 증거한 세례요한 에 관한 말씀입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300년간 이스라엘 민족 앞에는 이렇다할 선지자들이 나타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 오 기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세례요한의 우렁찬 외침에 많은 사람들이 고 대하던 메시야가 드디어 나타난 줄 알고 모두 그에게 몰려 나아왔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 그 수많은 세월동안 기다림 속에 고대하던 그 메시아가 이제 저들 앞에 나타난줄 알고 구름 떼와 같이 요단강가로 나와 회개와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영적 기갈 속에 암울했던 시대를 살아가던 저들에게 세례요한의 출현은 곧 메시야왕국이 도래하는줄로 만 알았습니다. 지금껏 자기들을 압제하던 불의한 로 마세력을 꺾어 버리고 예언자들이 수 없이 예언했던 정의가 강같이 흐르는 새 세대가 도래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저들이 바라던 메시아 왕국은 정치적으로 땅위에 임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 앞으로 몰려 들었습니다. 더욱이 당시의 지도층이라고 자처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나아오는 것을 보 고 "독사의 새끼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고 독설 을 퍼 부었습니다(눅3:7). 참으로 눌리며 살던 저들에게는 쾌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그래서 일반대중들은 그가 바로 메시야인줄 그렇게 알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지 도층은 예루살렘으로 부터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보내서 그가 진정 메시야인지 아닌지 를 확인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때 세례요한은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자신은 너희들이 기대하는 메시아가 아니라,[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웨치는자의 소리]라고 했 습니다 우리는 이 세례요한의 증거를 통하여 오늘의 우리들의 현실의 삶속에서 그리스도인 됨의 증거를 어떻게 하여야 할까 함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매우 중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고 봅니다. 3월의 계절이 주는 교훈처럼 지금껏 깊은 동면의 잠에서 깨어나야 할 새로운 한국창조라는 역사적 당위 앞에 함께 그리스도인으로 모인 우리들입니다. 더욱이 이번 새 정부의 주역들이 크리스천들이란 면에서 더욱 더 무거운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가 뭐라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국정을 집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어느 때보다 믿지 않는 사람들로 부터 주시하는 대상이 되었고, 또한편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중차대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기독교인 됨의 증거>를 바르게 하며 살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1. [믿는다]는 것은 하나의 [증거]입니다. [신앙한다] 하는 것은 바로 그 [믿는바]를 생활 속에서 들어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생활 속에서 예수를 증거 한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나의 생활 속에 예수가 보이지 아니하면, 그것은 옳바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가령 내가 누구를 안다고 할 때, 나의 생활 속에서 그를 알고 있다는 증거 가 들어나지 아니한다면 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누구 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 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하였습니다(마10:33). 또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 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 느니라"고 하였습니다(마5:15-15). 이렇게 빛은 들어날 수 밖에 없듯이 믿음은 들어나 게 마련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주님께로 부터 직접 명령을 받았습니다. "땅끝 까지 나가서 내 증인이 되라"고. 이러한 분부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예수의 이름은 항상 따라 다닙니다. 좋든 싫 든 예수님의 이름이 붙어 다닙니다. 대통령이 되어도 예수 믿는 대통령이고, 장관이 되어도 예수 믿는 장관이요, 국회위원이 되어도 예수 믿는 국회위원이라고 예수의 이름이 따라 다닙니다. 이것은 장사를 해도, 사업을 해도, 공무원이 되어도 항상 따라 다닙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예수님이 욕을 먹고, 우리의 선한 행위로 예수님이 영광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백하기를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 가 존귀히 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빌1:20)
2.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아니오]가 분명해야 합니다. 세례요한이 바로 우리의 모범입니다. 그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자기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 했습니다. 자기를 보고 메시야인줄 알고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아니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되는 행위입니다. "나는 메시아가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었던 것은 정직한 용기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범할 수 있는 가장 흔한 약점과 부정이 [아니오] 할 때 그것을 바 로 [아니오]라고 하지 못하고 적당하게 우물우물 해 버리는 바로 그것입니다. 더욱이 자기가 바로 메시아인 양 그렇게 거짓으로 향하는 타락한 양심들이 있기에 교회가 조롱을 받고 세상 사람들로 부터 멸시를 당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오늘날 새 정부가 내건 윗물말기 운동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 전체가 [아니오] 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운동으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잘못된 관행 들, 나만 편하면 된다는 극단적 이기주의, 그리고 우리라는 개념의 집단 이기주의, 남 들이 다 하는데 나라고 별수 있는가 라는 패배주의, 이러한데서 아니오 할 수 있어 야 하겠습니다. 사실 이것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오!] 할 수 있기란 매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먼데 있는 것이 아니고 가장 가까운데서 일어납니다. 너무나 익숙하게 잘 아는 관계에서 일어날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 가정에서, 우리 교회 안에서 부터 일어날수 있는 문제란 말입니다. 교회도 행정을 하다보면 제일 어려 운 것이 [아니오] 라고 말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면 적당하게타협하는 것 보다 얼마 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기독교인 됨의 증거는 이렇게 [아니 오!]할 수 있는 그것이라고 봅니다.
새로운 대통령도, 새로운 장관들도, 기독교인들이 많이 들어갔습니다. 저들을 위시해서 기금까지의 모든 부정한 관행에서 [아니오!]라고 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할 때인줄 압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적은데서 부터 [아니오]라고 하 면 굉장히 불편합니다. 가령 차를 몰고 가다가도 빨강 불이 나오면 무조건 서야 하겠는데 남들이 지나가는 것을 볼 때, 아니다, 나만은 지켜야지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부터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정의로운 사회기강과 정의로운 공법일 진대 우리 그리스도인 들이 [아니오] 라는 일에 앞장 서야 합니다. 그럴 때 손해도 옵니다. 세례요한이 자신을 부정하고 예수를 증거 했더니 그 결과 자신에게 온 것은 투 옥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이었습니다. 이것이 상징하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역사는 [아니오] 하는 사람들의 희생적 삶속에서 이만큼 이끌어 오고 있습니다. 반대로 예 예 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얼마나 부정과 타락과 무질서가 자행되었는가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뼈앞은 교훈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목사들 부터 [아니오] 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세례요한은 인기 앞에 단호하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기에게 몰려드는 군중들 앞 에서 나는 메시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그분이 메시아로서 나는 그분의 신을 들기 에도 부족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직접 가리키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라고 분명하게 증거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뿌리치기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오늘 조금 교회가 커지고, 교인들이 많이 모이면 모두 제가 잘해서 되는줄 알고 교만해 지기 쉽 습니다. 그래서 차도 큰차를 타야하고, 심지어 보디가드 까지 두고있다는 말까지 듣는 다면 이것은 분명히 [아니오]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영계도 많이 혼탁해 졌습니다. 은사의 자랑, 방언의 강조, 치유의 능력남 용, 기도원의 속화,등등 말할 수 없이 [아니오]가 요청되는 현실입니다. 한동안 유행 처럼 번졌던 가짜학위, 쉽게 얻는 졸업장, 부정입학, 학교운영을 위한 신학생모집, 등 등 아직도 [아니오] 라고 외쳐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런 모든 것에서 우리는 이제 세례요한 처럼 [아니오]라고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3. 그리스도인 됨의 참 모습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모든 시선을 주님께 향하도록 하고 자신은 소리 없이 물러섰습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 됨의 본을 보여준 행동이라고 봅니다. 사명을 다한후 깨끗이 물러설 줄 아는 것! 그것이 기독교인 됨의 참 모습입니다. 대부분 자리들 때문에 연연하다가 시험에 듭니다. 교회생활에서도 맡은 자리들 때문에, 그리고 자기라는 자존심들 때문에 시험 드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랫 동안 한 사람들이라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신앙의 경력이 오래된 사람일쑤록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할 수 없는 경우들이 많 습니다. 하나님께 받친 헌금을 언제나 기억하면, 내가 세운 교회라든지, 아니면, 내가 받친 것이 얼마인데하는 식으로 항상 연연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독교인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모범은 겸손의 본입니다. 자기는 숨겨지고, 오직 주님만 들어나게 하는 그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직을 맡았든지, 어떠한 위치에 있든 지, 주님만을 들어낼수 있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 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음으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내게 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자에게니라"(딤후4:8)고 자신 있게 말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생활 속에 들어나야 합니다. 들어나되, 아니오 와 예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자신을 포기하고 숨기면, 의로우신 심판관 되신 주님께서 그를 알아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뛰어 가십시다. 끝까지 달 려 갑시다. 의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자는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늘에 상이 크다 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내세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세례요한의 증 거를 교훈 삼아 이 땅위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모두 함께 달려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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