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본질 (요14:6)
본문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성경 귀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길이라든가 진리 라든가 생명이라는 것에다 예수님 자신의 인격을 결부시키고 계시다는 사실이 특별 히 주목할 점입니다. 원래 길이니 진리니 생명이라는 것은 어떤 도(도)로서, 사람 이 깨우칠 수 있는 것이며 동시에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야 마땅할 텐데 여기서는 그런 식으로 나눠 가질수 없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 놀라운 점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이런 표현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나는 생명의 떡이라!', `나는 세상의 빛이라!',`나는 선한 목자라!' 등의 표현들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떡을 가져 오셔서 나눠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떡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름을 나눠 주셔서 불을 붙여 줌으로 빛을 주 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빛이신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중심으로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본론> 예수를 믿는 일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기독교가 하나의 도로서 이해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 문제만큼 어려운 문제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꾸만 스스로 를 괜챦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자신에게 `무엇을, 어떻게'라는 방법을 가르 쳐 주기만 하면 되는 사람이라는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중립 적인 위치에 서 있기 때문에 그 길과 방향과 방법을 알려 주기만 하면 나머지는 스 스스로 해 낼 수 있다는 생각만큼 신앙에 있어서 어려운 싸움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곧, 인간이란 어떤 수단이나 방법을 사용하여서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가 못된다는 것을 못박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왜 인간 스스로가 어떤 방법을 동원하여 구원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사람을 가리켜 죄인이라고 하는 이야기 만큼 인간이 알아듣기 힘들고 납득 하기 어려운 지적도 없습니다. 기독교 복음 많은 사람들에게 반대받는 가장 큰 이 유가 바로 죄인이라는 지적을 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복음은 언제나 인간이란 죄 인이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되기 때문에 누구에게서나 반발과 불쾌감을 주는 것 으로 시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미 신자가 된 우리들은 그러한 장애 들을 극복하고 뛰어넘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기적이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새롭게 태어나는 기적이 없이는 스스로 죄인됨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이용되어지기를 바라는 유혹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소개하는 것 중에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사랑과 공의입니다. 그래서 어떤 시대에서나 한 사회와 국가가 사회적인 정의 구현을 제대로 안하고 있을 때에 그 문제에 기독교가 동원되도록 요청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처럼 어려 운 문제도 없습니다. 한 때 민주화니 하여 신문지상에 대학 교수들이 시국 성명을 발표하고 대학생들은 데모에 열을 올리고 있고 또한 정부에서는 이에 대하여 설명 과 담화문을 발표하는 등 사태가 점점 어렵게 진전되어 가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더더욱 이 모든 일들 앞에서 혹은 교회들과 성직자들이 앞장 서는 모습을 보고있는 마당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성도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될 것인지에 관한 질문을 많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참으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며 이해 하기가 어 려운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기독교의 올바른 자세를 확립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을 보는 눈이 낙관적이지 않고 비관적입니다. 인간을 보는 눈도 비관적입니다. 인간은 다 저주 아래 있으며, 비참하며, 사망의 잠을 자다가 결국은 절망의 자리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선언합니다. 신자란 이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으로 마감되어질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 요한 세계관입니다. 다시말해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 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인이 이 세상을 살면서 사회적인 국민으로서 의 책임을 어떻게 감당해 나가야 하는 것인지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세상의 정치적인 싸움 앞에서 기독교는 늘 두 가지 위협 속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 하나는, 권세 잡은 자들이 종교적인 힘을 빌려서 자기네들의 이익과 평안을 얻 어 보려고 성직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에게 공갈과 압력을 넣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건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사건에서나 그러합니다. 또 하나의 위협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반대하는 세력들이 성직자들을 향하여 `당신네들은 이 세상의 명예와 목숨을 초월하며 살고 있는 자들이 아니냐 그러니 이 정당한 일에 앞장을 서야 되지 않겠느냐'는 요구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문제에 있어서 기독교의 한결같은 입장은 이것입니다. 즉, 이 세상 이 좋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예언입니다. 이 나라를 포함해서 미국이나 소련 등 전 세계 어느 나라, 어느 왕조, 어느 국가든지 선한 방향 으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의 모든 위정자들이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상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요17:14-18절에서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 하는 문제를 예수님 의 정확한 묘사가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니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 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 고"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신자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씀하 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의 원리나 세상의 목적과는 다른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요17장의 묘사된 말씀으로만 일단 말씀드리자면, 예수 그리스도 께서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아서 이 땅에 오신 것같이 우리 신자들도 예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로 와 있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만이 유일 하게 생명과 빛과 진리와 영원에 관한 증인으로 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뜯어 고 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영원한 나라와 영적인 세계를 증거하는 증인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살고 있는 환경 을 고치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고치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이 나라 를 민주화시키기 위해서 신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에 우리와 같이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과 생명과 영원을 증거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자 칫 잘못하면 사건을 위하여 기독교가 동원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사건을 위하여 있지 않고 사람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모든 사람들은 말하 자면 불쌍한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으로서 봅니다. 죄는 미워하 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입장에서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그런데 미국은 그렇지 않더라. 미 국 의회를 보라. 영국을 보라. 얼마나 공의를 위하여 의연하게 일어나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꼭 그럴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칼럼을 썼습니다. 해방 직후의 일입니다. 길가던 우리나라 사람 에게 소련군 병사가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러자 소련군 장교가 이 광경을 보고 그 병사들을 벌을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한번은 미국 병사가 느닷없이 길을 가 다가 친구들을 붙잡아서 패고 낄낄거리고 웃어서 그 병사를 파출소로 연행해 가자 그 병사는 파출소를 다 대려 부수고 말았습니다.
이 두가지 경험을 하고서는 `도대 체 누가 우리 편이냐 오직 우리밖에 우리 편은 없다!'는 뼈아픈 체험을 이야기 했 던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눈을 떠야 합니다. 미국이 우리의 해방에 관여했고 공 산치하에서 구해 준 것에 대해서 깊이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나라는 국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폭력을 쓸 수 있는 나라입니다. 미국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나라라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미국도 자기네 배를 불리기 위하여 남을 언제 든지 죽일 수 있는 나라요, 그럴 수 있는 민족입니다. 그러면 또 이 사회 정의에 기독교가 침묵해서는 안된다는 사회적인 요청을 우리나라 과거의 역사를 들추어 내어 제시합니다. 예를 들어 3.1운동이나 항일 투쟁에 있 어서 기독교인이 늘 앞장서지 않았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날의 이 사회정의 구현을 위해 기독교가 가만히 있어서 되겠느냐고 반박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 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과거에 독립운동에 앞장 섰던 것은 기독교인이었지 기독교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그 앞장 섰던 선구자들이 기독교인이었던 것과 기독교라는 세력이 앞장서는 것과는 이야기가 다른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많 이 참여했던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가 앞장선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가 앞장서 보였던 것은 그 시대의 분위기가 그렇게 보였을 뿐입니다. 어느 나라나 자기 문화에 다른 문화인 이방 민족의 침입에 대해 거부감이 있는 법 입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나 민족주의라는 것이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를 침략한 나라가 일본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적은 서구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우리 나라는 서구와 친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서구가 믿는 종교에 대 하여 호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나라 기독교가 초창기에 호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인 원인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모든 역사에서 나타납니다. 예날에 대원군이 천주교를 배척한 것은 종교적인 이 유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서구가 동양의 여러 나라를 식 민주의로 침략할 때에 늘 그 앞에 사탕 발림으로 내세운 것이 기독교였습니다. 영 국도, 네들란드도, 스페인도 다 기독교를 앞세워 쳐들어 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 연히 원수같은 나라의 종교인 기독교를 좋아할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아시 아의 어느 국가도 기독교를 안 받아들였습니다. 인도는 영국이 그렇게 오랫동안 통 치했으나 기독교를 안 믿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네들란드가 통치했지만 여전히 이 슬람 교도들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까지 중국이 복음과 선교사들을 경계하는 것은 바로 옛날 식민통치의 수단으로 기독교가 쓰여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런 면에 서 우리나라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정치적 분위기 와 여건을 마련해 주셨던 것을 감사치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가 늘 걱정하고 우려하는 것 중의 하나는 이 복음의 생명과 진리가 사람들의 손에 의해 탐욕과 욕심을 이루는 수단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리를 던져 주셔서 그것으로 세상에서 자기 목적이나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하게 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주님은 늘 자신을 가리 켜 `내가 길이고, 내가 진리이고, 내가 생명이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인 문제이지, 예수 그리스도와 떨어진 진리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 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주님께서 나를 주장하시게 하는 싸움이지, 주님의 가르침을 내가 소유하여 그것을 내 필요를 따라 응용하는 싸움이 아닌 것입니다.
눅9:18-2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가라사대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 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 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기로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묻는 질문도 이 말씀처럼 언제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무엇이냐'가 아닙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는 이 물음에 `나의 주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이 요구될 뿐입니다 기독교는 내가 무슨 도를 전하느냐 내가 무슨 봉사와 업적을 남기느냐 하기 이전 에, 예수 그리스도 자체에 대한 주인으로서의 고백과 그 분에 대한 만족과 행복이 있느냐 하는 싸움이 먼저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뭐 라고 요구하시는지 아십니까 눅9:23절을 보십시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입니다. 더 이상 자기 욕심을 위하여 살지 않습니다 자기의 탐욕과 이 세상 것을 목표로 삼아 살지 않는 사람입니다. 물론 우리가 내 생각과 고집과 욕심을 따라 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를 따라 오려거든'이란 말씀처럼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내 길을 위한 그리스도의 능력과 사랑과 축복들을 이용코자 하는 마음을 이미 포기한 자들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정치적인 문제 앞에서 기독교인들이 혼동하지 말아 야 할 중요한 핵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신자도 영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으면 서 기독교를 동원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상대방을 넘어뜨 리는 싸움밖에 없는데 기독교가 개입되는 것은 거절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성 당 쪽에서, 그리고 기장 교회를 중심으로 한 일부 장로교회가 정치와 사회 문제에 대한 시국 성명을 하고, 앞장 서서 대모도 합니다. 만일 그것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 진다면 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책임이요 개인적인 권리라 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그 일을 하는 사람이 기독교인인 것은 괜챦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거기다 이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많은 역자적인 뼈아픈 교훈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 중세에 성지 회복을 위하여 하나님을 모르는 이슬람 교도들이 그 전 성지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 화가나서 구라파 전체가 들고 일어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공했습니 까 망했습니까 실패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는 놀랍게도 그런 방식으로 일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지고 망하고 죽는 방법으로 기독교를 연결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러 했으며, 초대 교회의 복음의 확산이 그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그런식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대학 교수가 시국 선언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높이 평가할 정신으 로 볼 수 있습니다. 학문에 진력해야 할 교수가 오죽하면 시국 선언을 하게 되었겠 느냐 하는 점에 있어서 깊은 공감을 합니다. 불행한 일을 앞에 놓고 그렇게 용기 있게 시국선언을 하게 된 것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동일한 원리로 반대로 학자의 최선의 본분은 가르치는 것이지 정치하는 일 이 아니라 해서 시국 선언에 참여하지 않은 교수도 용기있고 잘한 일입니다. 거기 에 누가 누구에게 잘했다 잘못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모 대학교의 모 교 수가 양심선을 하고 교단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교수의 말에 의하면 '나는 학문을 가르치는 교수다' 그래서 학문만 했더니 그 시국 선언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어용학자로 몰더라는 것입니다. 그래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O,X밖에 업느냐 하면서 교수를 그만 두었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하는 말이 `거 봐라 그 교수도 시국 선언을 안하더니 결국은 그만 두면서 시위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네들 편으로 갖다 붙이는데 본인은 또 놀란 것입니다.
그런데 학교측에서 데모로 수업 일수도 모자라고 다른 교수를 구할 시간도 없고 하니 이번 학기만 채우고 그만 두시라고 하길래, 사정이 딱해 학자의 심정으로 학생들을 생각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러 나왔더니 이번에는 학 생들이 말합니다 `이렇게 번복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끝까지 사수하셔야지요' 그래서 그 교수는 할 수 없이 떠밀려 교단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아픔을 아시겠습니까 왜 그런 식으로 밖에 못 싸웁니까 학자의 최고의 본분 은 가르치는 것입니다. 모두가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비극과 부 작용을 우리는 지금껏 당해오고 있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군인이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구테타를 일으킨 것을 탓해 왔지만, 학생들 역시 학생의 본분인 공부를 뒤 로하고 데모에 앞장 선 것입니다. 학생들이 오죽했으면 공부를 그만두고 데모열에 뛰어 들었겠습니까 수긍이 가는 일입니다. 똑같이 군인들이 오죽했으면 군인의 사 명을 두고 정치에 관여했겠는가를 생각하면 공감 못할 것도 없습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이 한 번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나는 불행한 군인입니다.' 그 분이 쇼로 그런 말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또한번은 이런 말도 한 적이 있습니다 `봄 가뭄이 하도 심해지니까 밤잠을 못자고 비가 오나 밖을 내다보며 내가 무슨 죄 를 지었기에 비가 오질 않는가 이렇게 밤을 새워가며 걱정을 해야 되는가'고 말 입니다. 그러니 분명히 그 분은 행복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불행했던 분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누가 누구를 쉽게 뭐라고 그러겠습니까 그러니 구 테타를 일으킨 군인을 뭐라고 하겠습니까 데모하는 학생들을 뭐라고 하겠습니까 도대체 누가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사회 정의에 관한 일은 개인의 선택에 관한 문제라고 봅니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사회 정의를 위하여 여론을 펼치고 힘쓰는 것은 좋지만 기독교를 거기 걸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절대로 그러한 일에 걸리지 않는 것 입니다. 이 나라를 누가 장악하는가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 앞에 영원한 나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곧 예수님께서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 소리와 함께 오실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아무리 잘 살고 떳떳하게 재 고 있어도 죽으면 유황불이 타는 곳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을 어찌 그냥 놔둡니까 지금 잘 살고 못 살고의 문제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를 어찌 져쳐 놓을 수 있겠습니 까 이러면 세상 사람들은 곧잘 예수 믿는 사람들은 `현실 도피주의자요, 비겁하고 연 약한 사람들'이라고 비난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독재자에 대하여 죽음을 무릎쓰고 피를 흘리며 데모하는 것이 꼭 용기일까요 이 정권을 뒤집어 엎어야 더 잘 살길이 열린다고 강변하면서 이런 방법으로 저런 목표로 바꾸는 것만이 최선일까요 아닙니다! 이 세상이 가고 있는 길이 결코 좋은 방향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빨리 파악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죽고 나서야 비 로소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 생전에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빌3:17-20 절에서 세상 사람들의 삶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 니 여러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 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라"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은 자기 욕심을 채우는 길입니다. 미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 렇고 온 세상이 다 그렇습니다. 모두가 다 자기 잘 살고 남 고달프게 하는 것을 외 면하고 사는 법입니다. 우리의 신은 우리의 배라는 말입니다. 자기 욕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거기서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자기밖에 모르고 욕심으로 똘똘 뭉쳐져 있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며, 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으며, 생명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며, 영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남의 것을 뺏어야만이 내 몫이 생기는 가난한 것이 아닙니다. 주어도 주어 도 남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 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들을 얼마나 불쌍히 여기셨는가를 증명하는 자들 입니다.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목숨을 겁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히며, 불에 타 죽으며, 사자의 밥이 되며, 톱으로 켬을 당하며, 가죽을 벗기우는 일을 당하는 일들을 감수하면서 이 신앙을 지켜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난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조금만 잘못 생각하면 기독교는 그렇게 오해되어 지는 것입니다. 마치 살아 생전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기독교의 목표인 양 늘 오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렇 지 않습니다. 이러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반문합니다. `그럼 당신네들은 이 나라 와 이 땅이 아무리 혼동스럽고 부정이 판을 치고 처참해도 좋단 말이요' 아닙니다 가능한 우리는 편안한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바에 의 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우리에게 편안한 환경으로 주지 않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유토피아를 만들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당에서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 땅에 서 우리를 괴롭게 하심으로써 이 세상이 무엇이며, 이 세상이 우리를 유혹하는 그 중심이 무엇이며, 그 진면목이 무엇인가를 밝혀서 우리로 하여금 영원을 사모하게 만들며, 영원한 나라를 준비케 하며, 신앙의 깊은 잠을 자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목 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신자의 삶은 조금 고달픈 편이 낫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제일 어려웠던 시기가 일제 치하도 아니고, 공산주의도 아니었습니다. 제일 힘들고 어려운 시절은 80년대 후반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로 볼 수 있습니다. 지난 70년대는 이 나라 경제가 무시무시하게 성장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도 다 잘 살게 되었습니다. 십일조가 옛날에 비해 열배, 스무배씩 뛰었 습니다. 목사들도 다 좋은 차들을 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그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돈이 훨씬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돈으로 일이 되어집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돈 있는 자가 윗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돈으로 장로를 사기 시작하고, 목사도 배우자로 선택할 만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목사도 돈 맛을 보자 교인들에게 말을 함부로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돈으로 자기의 삶을 보장받기 시 작하자 교인들이 무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타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독교는 그만 그 진리와 생명을 놓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설 자리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가 절실히 필요해 지는 마음이 없 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이 이 나라의 헌법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정당이 정권을 잡느냐 에 우리의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으며, 우리의 소망은 진실된 성도가 이 땅에 얼마나 많이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소돔 과 고모라는 소돔 왕이 하나님을 안 믿어서 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모라 왕이 하나님을 배반해서 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거기에 의인 열명이 없어서 망했 습니다. 이 나라의 축복이 누가 정권을 잡느냐, 또 위정자가 얼마나 하나님을 두 려워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나라의 운명과 앞으로의 축복의 여부는 신자가 얼마나 신자다우냐에 달려 있습니다. `대통령 잘해라! 국무총리 잘해라!'고 그러면 다 잘됩니까 신자가 딴짓을 하고 있으면 아무리 대통령이 잘하고 국무총리 가 잘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예수 믿는 사람 같아야 합니다. 신자 가 신자로서 할 일은 안하고 왜 딴 짓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만큼 불행한 일도 없는 것입니다.
목사로서 여러분에게 설교하기가 여러분이 잘 먹고 잘 살게 된것이 훨씬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시험을 당하는 것이 저는 겁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주일날 가족 들을 모두 차에 태워서 놀러 나갈 수 있게 된 것이 저에게는 훨씬 무섭습니다. 1부 예배를 6시나 7시에는 없습니까 하는 사람이 생겨서 저는 제일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를 오해하지 마십시오. 신자의 신자된 축복과 신자의 사명을 놓치 지 마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하여 부름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이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증거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자 입니까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늘의 신령한 비밀을 증거하기 위하여 아직도 이 땅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것을 증거하려하니 우리의 육적인 요소들을 제거시키지 않으면 안되겠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어서 신령한 것에 방해되는 육적 요소들을 제거시키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가지로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고통이라는 것이 꼭 국가적인 이유에서만 생깁니까 개인적으로는 더 많이 생 깁니다. 그러나 그 고통으로 인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날마다 확인시켜 주며, 하나님 앞에 날마다 항복케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이 축복인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모든 능력을 다 가지 신 주님께서 한 알의 밀알로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영혼들을 일깨 우고 죽음과 멸망 속에 있는 자들을 일으키시는 놀라운 기적과 은혜를 우리에게 주 실 수 있으셨습니다. 부름받은 우리들은 주님의 사역자로서 증인으로서 우리의 인 생이 펼쳐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사회와 직장 앞에서 한 시민으로서 정당한 결정을 하십시오. 그러나 신 자로서 이 세상이 어떻게 굴러 갈것인가 하는 것을 아셔야만 시험에 빠지지 않습니다. 또한 거기서 우리의 촛점은 우리가 만나는 사람, 부딪치는 사건을 통하여 어 떻게 이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복음을 전할 것인가에 더 많은 촛점을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이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정의를 부르짖으시되 먼저 정당한 신자가 되어야 함을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꾸만 스스로 를 괜챦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자신에게 `무엇을, 어떻게'라는 방법을 가르 쳐 주기만 하면 되는 사람이라는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중립 적인 위치에 서 있기 때문에 그 길과 방향과 방법을 알려 주기만 하면 나머지는 스 스스로 해 낼 수 있다는 생각만큼 신앙에 있어서 어려운 싸움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곧, 인간이란 어떤 수단이나 방법을 사용하여서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가 못된다는 것을 못박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왜 인간 스스로가 어떤 방법을 동원하여 구원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사람을 가리켜 죄인이라고 하는 이야기 만큼 인간이 알아듣기 힘들고 납득 하기 어려운 지적도 없습니다. 기독교 복음 많은 사람들에게 반대받는 가장 큰 이 유가 바로 죄인이라는 지적을 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복음은 언제나 인간이란 죄 인이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되기 때문에 누구에게서나 반발과 불쾌감을 주는 것 으로 시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미 신자가 된 우리들은 그러한 장애 들을 극복하고 뛰어넘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기적이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새롭게 태어나는 기적이 없이는 스스로 죄인됨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이용되어지기를 바라는 유혹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소개하는 것 중에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사랑과 공의입니다. 그래서 어떤 시대에서나 한 사회와 국가가 사회적인 정의 구현을 제대로 안하고 있을 때에 그 문제에 기독교가 동원되도록 요청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처럼 어려 운 문제도 없습니다. 한 때 민주화니 하여 신문지상에 대학 교수들이 시국 성명을 발표하고 대학생들은 데모에 열을 올리고 있고 또한 정부에서는 이에 대하여 설명 과 담화문을 발표하는 등 사태가 점점 어렵게 진전되어 가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더더욱 이 모든 일들 앞에서 혹은 교회들과 성직자들이 앞장 서는 모습을 보고있는 마당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성도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될 것인지에 관한 질문을 많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참으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며 이해 하기가 어 려운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기독교의 올바른 자세를 확립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을 보는 눈이 낙관적이지 않고 비관적입니다. 인간을 보는 눈도 비관적입니다. 인간은 다 저주 아래 있으며, 비참하며, 사망의 잠을 자다가 결국은 절망의 자리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선언합니다. 신자란 이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으로 마감되어질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 요한 세계관입니다. 다시말해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 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인이 이 세상을 살면서 사회적인 국민으로서 의 책임을 어떻게 감당해 나가야 하는 것인지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세상의 정치적인 싸움 앞에서 기독교는 늘 두 가지 위협 속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 하나는, 권세 잡은 자들이 종교적인 힘을 빌려서 자기네들의 이익과 평안을 얻 어 보려고 성직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에게 공갈과 압력을 넣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건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사건에서나 그러합니다. 또 하나의 위협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반대하는 세력들이 성직자들을 향하여 `당신네들은 이 세상의 명예와 목숨을 초월하며 살고 있는 자들이 아니냐 그러니 이 정당한 일에 앞장을 서야 되지 않겠느냐'는 요구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문제에 있어서 기독교의 한결같은 입장은 이것입니다. 즉, 이 세상 이 좋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예언입니다. 이 나라를 포함해서 미국이나 소련 등 전 세계 어느 나라, 어느 왕조, 어느 국가든지 선한 방향 으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의 모든 위정자들이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상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요17:14-18절에서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 하는 문제를 예수님 의 정확한 묘사가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니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 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 고"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신자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씀하 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의 원리나 세상의 목적과는 다른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요17장의 묘사된 말씀으로만 일단 말씀드리자면, 예수 그리스도 께서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아서 이 땅에 오신 것같이 우리 신자들도 예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로 와 있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만이 유일 하게 생명과 빛과 진리와 영원에 관한 증인으로 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뜯어 고 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영원한 나라와 영적인 세계를 증거하는 증인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살고 있는 환경 을 고치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고치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이 나라 를 민주화시키기 위해서 신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에 우리와 같이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과 생명과 영원을 증거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자 칫 잘못하면 사건을 위하여 기독교가 동원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사건을 위하여 있지 않고 사람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모든 사람들은 말하 자면 불쌍한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으로서 봅니다. 죄는 미워하 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입장에서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그런데 미국은 그렇지 않더라. 미 국 의회를 보라. 영국을 보라. 얼마나 공의를 위하여 의연하게 일어나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꼭 그럴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칼럼을 썼습니다. 해방 직후의 일입니다. 길가던 우리나라 사람 에게 소련군 병사가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러자 소련군 장교가 이 광경을 보고 그 병사들을 벌을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한번은 미국 병사가 느닷없이 길을 가 다가 친구들을 붙잡아서 패고 낄낄거리고 웃어서 그 병사를 파출소로 연행해 가자 그 병사는 파출소를 다 대려 부수고 말았습니다.
이 두가지 경험을 하고서는 `도대 체 누가 우리 편이냐 오직 우리밖에 우리 편은 없다!'는 뼈아픈 체험을 이야기 했 던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눈을 떠야 합니다. 미국이 우리의 해방에 관여했고 공 산치하에서 구해 준 것에 대해서 깊이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나라는 국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폭력을 쓸 수 있는 나라입니다. 미국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나라라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미국도 자기네 배를 불리기 위하여 남을 언제 든지 죽일 수 있는 나라요, 그럴 수 있는 민족입니다. 그러면 또 이 사회 정의에 기독교가 침묵해서는 안된다는 사회적인 요청을 우리나라 과거의 역사를 들추어 내어 제시합니다. 예를 들어 3.1운동이나 항일 투쟁에 있 어서 기독교인이 늘 앞장서지 않았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날의 이 사회정의 구현을 위해 기독교가 가만히 있어서 되겠느냐고 반박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 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과거에 독립운동에 앞장 섰던 것은 기독교인이었지 기독교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그 앞장 섰던 선구자들이 기독교인이었던 것과 기독교라는 세력이 앞장서는 것과는 이야기가 다른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많 이 참여했던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가 앞장선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가 앞장서 보였던 것은 그 시대의 분위기가 그렇게 보였을 뿐입니다. 어느 나라나 자기 문화에 다른 문화인 이방 민족의 침입에 대해 거부감이 있는 법 입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나 민족주의라는 것이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를 침략한 나라가 일본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적은 서구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우리 나라는 서구와 친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서구가 믿는 종교에 대 하여 호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나라 기독교가 초창기에 호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인 원인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모든 역사에서 나타납니다. 예날에 대원군이 천주교를 배척한 것은 종교적인 이 유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서구가 동양의 여러 나라를 식 민주의로 침략할 때에 늘 그 앞에 사탕 발림으로 내세운 것이 기독교였습니다. 영 국도, 네들란드도, 스페인도 다 기독교를 앞세워 쳐들어 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 연히 원수같은 나라의 종교인 기독교를 좋아할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아시 아의 어느 국가도 기독교를 안 받아들였습니다. 인도는 영국이 그렇게 오랫동안 통 치했으나 기독교를 안 믿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네들란드가 통치했지만 여전히 이 슬람 교도들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까지 중국이 복음과 선교사들을 경계하는 것은 바로 옛날 식민통치의 수단으로 기독교가 쓰여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런 면에 서 우리나라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정치적 분위기 와 여건을 마련해 주셨던 것을 감사치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가 늘 걱정하고 우려하는 것 중의 하나는 이 복음의 생명과 진리가 사람들의 손에 의해 탐욕과 욕심을 이루는 수단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리를 던져 주셔서 그것으로 세상에서 자기 목적이나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하게 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주님은 늘 자신을 가리 켜 `내가 길이고, 내가 진리이고, 내가 생명이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인 문제이지, 예수 그리스도와 떨어진 진리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 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주님께서 나를 주장하시게 하는 싸움이지, 주님의 가르침을 내가 소유하여 그것을 내 필요를 따라 응용하는 싸움이 아닌 것입니다.
눅9:18-2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가라사대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 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 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기로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묻는 질문도 이 말씀처럼 언제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무엇이냐'가 아닙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는 이 물음에 `나의 주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이 요구될 뿐입니다 기독교는 내가 무슨 도를 전하느냐 내가 무슨 봉사와 업적을 남기느냐 하기 이전 에, 예수 그리스도 자체에 대한 주인으로서의 고백과 그 분에 대한 만족과 행복이 있느냐 하는 싸움이 먼저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뭐 라고 요구하시는지 아십니까 눅9:23절을 보십시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입니다. 더 이상 자기 욕심을 위하여 살지 않습니다 자기의 탐욕과 이 세상 것을 목표로 삼아 살지 않는 사람입니다. 물론 우리가 내 생각과 고집과 욕심을 따라 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를 따라 오려거든'이란 말씀처럼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내 길을 위한 그리스도의 능력과 사랑과 축복들을 이용코자 하는 마음을 이미 포기한 자들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정치적인 문제 앞에서 기독교인들이 혼동하지 말아 야 할 중요한 핵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신자도 영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으면 서 기독교를 동원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상대방을 넘어뜨 리는 싸움밖에 없는데 기독교가 개입되는 것은 거절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성 당 쪽에서, 그리고 기장 교회를 중심으로 한 일부 장로교회가 정치와 사회 문제에 대한 시국 성명을 하고, 앞장 서서 대모도 합니다. 만일 그것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 진다면 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책임이요 개인적인 권리라 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그 일을 하는 사람이 기독교인인 것은 괜챦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거기다 이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많은 역자적인 뼈아픈 교훈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 중세에 성지 회복을 위하여 하나님을 모르는 이슬람 교도들이 그 전 성지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 화가나서 구라파 전체가 들고 일어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공했습니 까 망했습니까 실패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는 놀랍게도 그런 방식으로 일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지고 망하고 죽는 방법으로 기독교를 연결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러 했으며, 초대 교회의 복음의 확산이 그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그런식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대학 교수가 시국 선언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높이 평가할 정신으 로 볼 수 있습니다. 학문에 진력해야 할 교수가 오죽하면 시국 선언을 하게 되었겠 느냐 하는 점에 있어서 깊은 공감을 합니다. 불행한 일을 앞에 놓고 그렇게 용기 있게 시국선언을 하게 된 것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동일한 원리로 반대로 학자의 최선의 본분은 가르치는 것이지 정치하는 일 이 아니라 해서 시국 선언에 참여하지 않은 교수도 용기있고 잘한 일입니다. 거기 에 누가 누구에게 잘했다 잘못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모 대학교의 모 교 수가 양심선을 하고 교단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교수의 말에 의하면 '나는 학문을 가르치는 교수다' 그래서 학문만 했더니 그 시국 선언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어용학자로 몰더라는 것입니다. 그래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O,X밖에 업느냐 하면서 교수를 그만 두었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하는 말이 `거 봐라 그 교수도 시국 선언을 안하더니 결국은 그만 두면서 시위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네들 편으로 갖다 붙이는데 본인은 또 놀란 것입니다.
그런데 학교측에서 데모로 수업 일수도 모자라고 다른 교수를 구할 시간도 없고 하니 이번 학기만 채우고 그만 두시라고 하길래, 사정이 딱해 학자의 심정으로 학생들을 생각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러 나왔더니 이번에는 학 생들이 말합니다 `이렇게 번복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끝까지 사수하셔야지요' 그래서 그 교수는 할 수 없이 떠밀려 교단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아픔을 아시겠습니까 왜 그런 식으로 밖에 못 싸웁니까 학자의 최고의 본분 은 가르치는 것입니다. 모두가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비극과 부 작용을 우리는 지금껏 당해오고 있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군인이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구테타를 일으킨 것을 탓해 왔지만, 학생들 역시 학생의 본분인 공부를 뒤 로하고 데모에 앞장 선 것입니다. 학생들이 오죽했으면 공부를 그만두고 데모열에 뛰어 들었겠습니까 수긍이 가는 일입니다. 똑같이 군인들이 오죽했으면 군인의 사 명을 두고 정치에 관여했겠는가를 생각하면 공감 못할 것도 없습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이 한 번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나는 불행한 군인입니다.' 그 분이 쇼로 그런 말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또한번은 이런 말도 한 적이 있습니다 `봄 가뭄이 하도 심해지니까 밤잠을 못자고 비가 오나 밖을 내다보며 내가 무슨 죄 를 지었기에 비가 오질 않는가 이렇게 밤을 새워가며 걱정을 해야 되는가'고 말 입니다. 그러니 분명히 그 분은 행복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불행했던 분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누가 누구를 쉽게 뭐라고 그러겠습니까 그러니 구 테타를 일으킨 군인을 뭐라고 하겠습니까 데모하는 학생들을 뭐라고 하겠습니까 도대체 누가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사회 정의에 관한 일은 개인의 선택에 관한 문제라고 봅니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사회 정의를 위하여 여론을 펼치고 힘쓰는 것은 좋지만 기독교를 거기 걸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절대로 그러한 일에 걸리지 않는 것 입니다. 이 나라를 누가 장악하는가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 앞에 영원한 나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곧 예수님께서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 소리와 함께 오실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아무리 잘 살고 떳떳하게 재 고 있어도 죽으면 유황불이 타는 곳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을 어찌 그냥 놔둡니까 지금 잘 살고 못 살고의 문제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를 어찌 져쳐 놓을 수 있겠습니 까 이러면 세상 사람들은 곧잘 예수 믿는 사람들은 `현실 도피주의자요, 비겁하고 연 약한 사람들'이라고 비난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독재자에 대하여 죽음을 무릎쓰고 피를 흘리며 데모하는 것이 꼭 용기일까요 이 정권을 뒤집어 엎어야 더 잘 살길이 열린다고 강변하면서 이런 방법으로 저런 목표로 바꾸는 것만이 최선일까요 아닙니다! 이 세상이 가고 있는 길이 결코 좋은 방향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빨리 파악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죽고 나서야 비 로소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 생전에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빌3:17-20 절에서 세상 사람들의 삶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 니 여러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 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라"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은 자기 욕심을 채우는 길입니다. 미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 렇고 온 세상이 다 그렇습니다. 모두가 다 자기 잘 살고 남 고달프게 하는 것을 외 면하고 사는 법입니다. 우리의 신은 우리의 배라는 말입니다. 자기 욕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거기서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자기밖에 모르고 욕심으로 똘똘 뭉쳐져 있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며, 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으며, 생명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며, 영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남의 것을 뺏어야만이 내 몫이 생기는 가난한 것이 아닙니다. 주어도 주어 도 남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 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들을 얼마나 불쌍히 여기셨는가를 증명하는 자들 입니다.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목숨을 겁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히며, 불에 타 죽으며, 사자의 밥이 되며, 톱으로 켬을 당하며, 가죽을 벗기우는 일을 당하는 일들을 감수하면서 이 신앙을 지켜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난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조금만 잘못 생각하면 기독교는 그렇게 오해되어 지는 것입니다. 마치 살아 생전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기독교의 목표인 양 늘 오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렇 지 않습니다. 이러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반문합니다. `그럼 당신네들은 이 나라 와 이 땅이 아무리 혼동스럽고 부정이 판을 치고 처참해도 좋단 말이요' 아닙니다 가능한 우리는 편안한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바에 의 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우리에게 편안한 환경으로 주지 않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유토피아를 만들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당에서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 땅에 서 우리를 괴롭게 하심으로써 이 세상이 무엇이며, 이 세상이 우리를 유혹하는 그 중심이 무엇이며, 그 진면목이 무엇인가를 밝혀서 우리로 하여금 영원을 사모하게 만들며, 영원한 나라를 준비케 하며, 신앙의 깊은 잠을 자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목 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신자의 삶은 조금 고달픈 편이 낫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제일 어려웠던 시기가 일제 치하도 아니고, 공산주의도 아니었습니다. 제일 힘들고 어려운 시절은 80년대 후반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로 볼 수 있습니다. 지난 70년대는 이 나라 경제가 무시무시하게 성장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도 다 잘 살게 되었습니다. 십일조가 옛날에 비해 열배, 스무배씩 뛰었 습니다. 목사들도 다 좋은 차들을 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그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돈이 훨씬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돈으로 일이 되어집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돈 있는 자가 윗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돈으로 장로를 사기 시작하고, 목사도 배우자로 선택할 만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목사도 돈 맛을 보자 교인들에게 말을 함부로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돈으로 자기의 삶을 보장받기 시 작하자 교인들이 무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타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독교는 그만 그 진리와 생명을 놓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설 자리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가 절실히 필요해 지는 마음이 없 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이 이 나라의 헌법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정당이 정권을 잡느냐 에 우리의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으며, 우리의 소망은 진실된 성도가 이 땅에 얼마나 많이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소돔 과 고모라는 소돔 왕이 하나님을 안 믿어서 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모라 왕이 하나님을 배반해서 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거기에 의인 열명이 없어서 망했 습니다. 이 나라의 축복이 누가 정권을 잡느냐, 또 위정자가 얼마나 하나님을 두 려워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나라의 운명과 앞으로의 축복의 여부는 신자가 얼마나 신자다우냐에 달려 있습니다. `대통령 잘해라! 국무총리 잘해라!'고 그러면 다 잘됩니까 신자가 딴짓을 하고 있으면 아무리 대통령이 잘하고 국무총리 가 잘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예수 믿는 사람 같아야 합니다. 신자 가 신자로서 할 일은 안하고 왜 딴 짓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만큼 불행한 일도 없는 것입니다.
목사로서 여러분에게 설교하기가 여러분이 잘 먹고 잘 살게 된것이 훨씬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시험을 당하는 것이 저는 겁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주일날 가족 들을 모두 차에 태워서 놀러 나갈 수 있게 된 것이 저에게는 훨씬 무섭습니다. 1부 예배를 6시나 7시에는 없습니까 하는 사람이 생겨서 저는 제일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를 오해하지 마십시오. 신자의 신자된 축복과 신자의 사명을 놓치 지 마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하여 부름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이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증거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자 입니까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늘의 신령한 비밀을 증거하기 위하여 아직도 이 땅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것을 증거하려하니 우리의 육적인 요소들을 제거시키지 않으면 안되겠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어서 신령한 것에 방해되는 육적 요소들을 제거시키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가지로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고통이라는 것이 꼭 국가적인 이유에서만 생깁니까 개인적으로는 더 많이 생 깁니다. 그러나 그 고통으로 인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날마다 확인시켜 주며, 하나님 앞에 날마다 항복케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이 축복인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모든 능력을 다 가지 신 주님께서 한 알의 밀알로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영혼들을 일깨 우고 죽음과 멸망 속에 있는 자들을 일으키시는 놀라운 기적과 은혜를 우리에게 주 실 수 있으셨습니다. 부름받은 우리들은 주님의 사역자로서 증인으로서 우리의 인 생이 펼쳐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사회와 직장 앞에서 한 시민으로서 정당한 결정을 하십시오. 그러나 신 자로서 이 세상이 어떻게 굴러 갈것인가 하는 것을 아셔야만 시험에 빠지지 않습니다. 또한 거기서 우리의 촛점은 우리가 만나는 사람, 부딪치는 사건을 통하여 어 떻게 이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복음을 전할 것인가에 더 많은 촛점을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이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정의를 부르짖으시되 먼저 정당한 신자가 되어야 함을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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