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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응답 (눅22:3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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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한 밤 칠흑같은 어둠,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블랙홀 보다도 더 캄캄한 어둠을 날카롭게 깨트리고 오장육부를 도려내는듯한 아픔과 처절한 울부짖음이 굉 장한 폭음과 함께 산산히 흩어지는 파편처럼 뿌려지고 있습니다. 33세 인생의 절정에 이제 갓 첫발을 디딘 젊은 청년 예수! 한걸음 한걸음 다 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어떤 방법으로든 피해가고 싶은 그 처절하고도 애절한 지 극히 인간적인 몸부림, 자신이 죽어야만 함을 알면서도, 자신이 죽지 않으면 안됨 을 알면서도 어쩔수 없이 삶을 향해 간절한 호소를 간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인간 예수의 모습이었습니다. 어찌나 간절했던지, 얼마나 뼈에 사무치는 애절함이 있었던지 몸의 모든 땀을 다 쏟아낸 땀구멍은 이제 생명을 향한 갈망이 겁붉게 녹아든 핏방울을 송글송글 뱉어내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만일 당신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 십자가가 아닌 다른 방법을 사용하시옵소서. 하나뿐인 당신의 아들이 이다지도 처절히 죽어야 한단 말입니까 아버지여! 이 잔을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이 간절한 바램은, 이 처절한 호소는 여지없이 묵살 당해 버리고 말았 습니다. 그리곤 오직 한마디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 소서] 이 말씀만이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냉정하고 비정하게 행해졌습니다. 청년예수의 이 간절한 기도는 과연 응답받은 것입니까 응답 못받은 것입니까 오늘제목을 보고 에구 또 기도하라는 설교구나, [맨날하는 소리 또 듣겠구먼]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방법, 기도의 자세, 기도의 형식 등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배웠고, 또 수없이 많은 기도를 지금도 해오고 있습니다. 바로 이 말씀을 듣기 직전에도 예배 순서를 통해 우태수 집사님의 감동 적인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때문에 기도하는 방법, 기도의 마음자세, 기도의 형식등은 다른 설교자들에게 맡겨버리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기도는 응답을 받아야 합니다. 응답을 받지 못하는 기도는 일방적인 연설이 나 하소연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호흡 이란 우리몸 외부의 신선한 공기를 들이키고 몸에서 만들어진 쓸모없는 탁한 공기 를 내뿜을 때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대화가 되기 위해서는 상호간의 의사 소통이 있어야만 합니다. 때문에 일단 드려진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때에 비로소 온전한 기도로 끝맺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기도가 응답을 받는 기도입니까 아니 응답을 받는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여기서 우리는 먼저 기도의 응답이 무엇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커다란 착각속에 빠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 기도에 대해 응답을 받고서도 자기가 응답받았다는 사실 조차 깨닫지 못하는 우매한 신앙생활 속에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나의 기도에 대하여서 즉각적으로 그리고 나의 뜻을 100%반영하여 일이 이루어 져야만 응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하나님께로부터 즉각적이고 100%나의 의견에 합당한 반응이 없으면 기도응답을 못 받았다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렇게 즉각적인 반응을 얻는 기도를 드리는 사람 만이 신령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몇가지 요건만 갖추어 기도한다면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응답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응답 중 지극히 작은 일부나 내가 생각하는 정답만을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생각한다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만한 자세로 기도드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진짜로하나님께서 응답하실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도응답에는 네가지가 있습니다. [그래 내가 즉시 시행하겠다], [시행은 해 주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시행은 해주겠지만 그 방법은 안된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로 안된다]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사지선다형 문제에 익숙해 왔던 우리는 1번 답만을 기도의 응답이라 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녀를 길러 보셨으니 익히 아실 것입니다. 만일 제 딸이 저에게 위인전을 보고 싶으니 책을 사달라고 하면 저는 즉시로 서점에 데려가 위인전을 사줄 것입니다. 하지만 위대한 수학자가 되겠다고 대학 수학교재를 사달라고 한다면 저는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벌써 그런 것 이 무슨 필요가 있니 나중에 네가 능력이 되면 사줄께] 또 제 딸이 유명한 디자 이너가 되겠다고 가위를 가지고 집에 있는 옷을 자르겠다고 한다면 저는 아마도 이렇게 말을 할 것입니다. [예야 그 방법은 잘못된 것 같구나, 서점에 가면 오리 기 책들이 많으니 우선 그것으로 열심히 오리고 그리는 것을 연습하도록 하자] 그리고 [아버지 이번주일날 친구들이랑 같이 학교에서 하는 캠프를 다녀오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저는 한마디로 [안돼]라고 말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아홉 살 배기 자녀가 똑같은 요구를 해 왔다면 어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첫 번째 대답만이 제 응답이고 나머지는 응답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모두가 응답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첫 번째의 대답만이 응답이라 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가지 신앙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기도의 응답을 구하는 자세와 동기가 올바로 서지 못하면 정 말로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작년 세간을 떠들석 하게 했던 가짜중 일력의 사건을 아실 것입니다. 겉으로는 엄청나게 정의롭고 대단한 일인 것처럼 포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 외모를 보고 속아 넘어가서 엄청난 돈을 기부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풍겨나는 인간의 냄새나고 더러운 흑심이 드러났을 때에 결국 커다란 배신 감과 함께 그 사기꾼을 법의 심판대 앞에 세웠습니다. 결국 사기꾼의 흑심을 채 우기 위해 전시물 노릇을 했던 많은 불쌍한 이들은 이제는 아예 기부도 완전히 끊 긴채 더욱 불쌍하고 고된 삶을 살아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은 겉으로 드러 난 그럴듯한 포장에 속아 넘어가지만 우리의 속까지도 완전히 살피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잘못된 생각과 동기를 가지고 구하면 절대로 속아넘어가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확히 깨달아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윌의 기도에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바로 느끼기 위해 다음과 같 은 몇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며 살아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항상 주님의 임재를 느끼면 살아가고 또한 기도해야 합니다. 흔히 우리는 성령님안에 산다든지 하나님의 뜻에 사로잡혀 산다든지 하는 일들 을 엄청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 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이미 우리는 성령님 안에서 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가 성령님의 임재를 깨닫느냐 못깨닫느냐는 그분께서 항상 내 안에서 나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살고있느냐, 깨닫지 못하고 살 고있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이라는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성령님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전 특히 제단 우리 교회로 말하면 강단을 엄청나게 신성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는 어쩐지 잘못된 생각이나 행동을 하면 큰일 날 것처럼 생각합니다. 왜입니까 성전에는 강단에는 성령님께서 임재하셨기 때문이 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성전이, 교회당이, 강단이, 목사가 신령하 고 거룩한 이유는 그 속에 성령님이 임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임재하시 지 않은 성전, 교회당은 단지 큰 강당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러시아의 수도 페테스부르크의 공산당 당사와, 국회의사당이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이었다는 사실 쯤은 다 아실 것입니다. 성령님이 임재하시지 않으면 성전 건물도 하루아침에 마귀 의 소굴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임재하시지 않은 강단은 단지 인간적인 감화 와 감동을 구걸하는 연설회의 단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임재가 없이 선포 되는 말씀은 도한 웅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족함이 많은 사람을 그래도 목사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은 그 안에 성령님의 위임이 살아 숨쉬기 때문이 아닙니까 교회당 그자체가 신령한 것이 아닙니다.
옛날 어떤 목사님은 강단에는 아무 도 못 올라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성한 교회당 안에는 딴따라에서 사용하는 기타나 드럼 키보드등은 절대로 들여 놓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배당이던 강단이던 목사던 간에 성령님이 임재 하실 때에 비로소 거룩한 것입니다. 한 개의 북이, 한벌의 심벌즈가 캬바레에서 두드려 지면 악의 도구가 되는 것이요, 성령님의 임재하심 속에서 찬송가의 반주로 쓰이면 그 자체로 거룩한 일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이 성전에 들어오시기 전에 성령님께서는 어디계셨습니까 불 교에서 말하는 구천을 떠돌고 계셨습니까 예배당 십자가 위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쉬고계셨습니까 아닙니다. 성령님은 항상 우리 안에서 우리와 동행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하루 24시간을 우리와 함께 지내십니다. 우리는 항상 그분과 함께 지낼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성도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마치 예배시간에만 그리고 예배당에 와서만 우리에게 임재하시는 성령님을 인식하고바라보고 갑니다. 그리고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속이기도하고, 속기도하고, 술도먹고, 담배도피고, 욕도하고,싸움도 하고,시기도 하고,남 의 마음을 아프게도 하고, 마치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살 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또다시 교회당 현관문만 들어서면 세상에 둘도없는 거룩한 사람이 되곤합니다. 그리곤 거룩하게 기도합니다. 이런 이중적인 삶을 우리 삶속에서 바라보고 계신 성령님께서 어찌 우리의 기도 를 기뻐 받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진정 응답받는 기도를 드리기 원한다면 항상 주님이 함께계시다는 사실을 깨 달으면서 성령님께서 바라시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항상 예수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성도라면 어떻게 살고, 생각하여야 할것인가를 깨달으면서 그에 합당하게 살아가고 기도할 때에 비로소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바로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항상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일에나 해당된다는 사실을 또한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되 무슨 특별한 사실이나 일들에 대해서만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도 항상 우리와 함께 하 십니다. 우리한번 자신의 하루일과를 살펴 봅시다. 아침에 일어나면 주님은 아마도 이렇게 인사하실 것입니다. [예 혁문아 잘잤니 어서 일어나 이부자리를 개렴]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건 아내 몫인데요]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맞다 하지만 네가 그일을 하면 너는 훌륭한 남편이 되지 않겠니.] 여러분은 혹시 이런 음성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출근을 합니다. 출근길에 아름다운 여인이 장미꽃한다발을 들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 저 꽃과 그 꽃을 든 여인이 매우 아름답죠] 주님은 말씀하실것입니다. [꽃은 아름답다 하지만 여인은 아름답다고 생각하 지 말아라] 그러면 아마도 이렇게 말할것입니다. [아름다운 여인을 어떻게 아름 답지 않다고 합니까] 그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 여인은 너를 위한 것이 아니잖니 아름다워도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훌륭한 가장이 되는 길이다.] 그리고 회사에서 거래처 사람을 만납니다. 일이 잘 안풀립니다.
상사에게 호되게 꾸중을 듣습니다. 욱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밉니다. 그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야 참아라] 항변합니다. 이걸 참으란 말입니 까 [그래도 참아라 나는 너를 위해 목숨을 버리도록 참지 않았니 이것이 참된 인격자가 되는 길이란다] 퇴근길에 생각합니다. [에이 열받아 소주라도 한잔 하 고 가야지]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야 집에서 너만 바라보며 맛있게 저녁상 차 려놓고 기다리는 아내와 자녀들을 생각해야지] 이런 음성을 들어보신적이 있습니까 이 얼마나 자애로우시고 고마우신 주님 입니까 주님은 우리의 삶의 현장 한 가운데 계십니다. 그분은 나의 모든 생각과 행 동을 보시면 또한 아시고 계십니다. 때문에 주님은 우리가 옳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또한 기도할 수 있도록 항상 우리와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야 말로 참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순간 순간 깨닫는 삶이 아닙니가 우리들의 삶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는 주님과 대화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 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지냅니다. 그리고 주님앞에 나오기만 하면 눈물 콧물 다 짜며 회개합니다.
주님은 어떻게 대답하실까요. [네가 잘못하는 그곳에 내가 항상 있지 않았니, 내가 그렇게도 하지 말라고 말릴 때에 너는 거들떠 보지도 않더니 이제야 나랑 대 화를 하자고 하는 구나 그 때 그 때 내 음성을 듣고 대화할 수 없었니 우리가 일상 속에서 주님과 대화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항상 기도하는 삶이 될 수 있고 항상 응답받는 삶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 때, 그 때 우리에게 가장 알맞고 적절한 응답을 해 주실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중 누가 일주일 동안 저랑 여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분은 처신을 매우 신중하게 할 것입니다. 저역시 마찬가지 일것이고요.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항상 주님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깨달으며 살아가는 것이 응답받는 기도의 첩경입니다. 그렇다고 특별히 시간내어 기도하는 것이 필요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특별히 드리는 기도는 외식혹은 특식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옛날 없던 시절에 명절을 매우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매 끼니 마다 항상 거의 똑같은 메뉴 즉 보리밥에 짠지의 식사를 해야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곤밥에 괴기국이 나오는 명절이 너무나도 기다려 졌을 것입니다. 마 찬가지로 항상 기도하며 매 사에 주님을 인식하며 사는 삶이 매끼 식사라면 특별 히 하는 기도들이야말로 항상 기다려지는 특별한 식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회는 일상생활에 찌들었던 우리의 신앙에 새 활력을 찾아주는 참으로 기다 려 져야할 시간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무엇이 참 하나님의 응답인가를 올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주장에 깊이 빠져 있으면 사물에 대한 판단이 흐려지게 마련입니다.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하게되는 경우가 많고 또한 깊은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마귀들은 오히려 이런 순간을 기회삼아 우리의 믿음을 파괴하려고 갖은 노 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참된 하나님의 응답을 올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응답을 올바로 깨달을 수 있을까요
첫째로 상식이 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상식이 통하시는 하나님 입니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문제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 오늘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고 설쳐대는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응답을 받아서 사회를 어지럽히지 않습니까 작년 10 월 11 일 그러니까 오병태집사님 만년 노총각의 딱지를 떼시던 날이었 습니다. 예식준비를 위해 빠쁘게 일하는 도중 한 아주머니가 들어오셨습니다. 그 리고는 바쁜 저를 앉혀놓고 손질 발짓을 하는 거였습니다. 직감적으로 구걸하러 오신 분인줄은 깨달았습니다. 그분은 제 앞에 흰종이를 내밀더니 거기다 이렇게 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 들어가서 2만원을 구제비로 받으라고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무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제게는 그분께 2만 원을 구제비로 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까요 한 노총각 청년이 자기가 평소 흠모하던 처녀에게 불쑥 찾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제 기도중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당신과 결혼하라고 하셨어요.] 처녀가 무어라고 대답했을까요 [어! 이상하네 어제밤에 제가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어떤 미친남자가 와서 내가 너랑 결혼하라고 했다고 할테니 절대로 속아넘어가지 말라고 하던데요.]라고 했답니다.
어던 목사님께서 홀아비 집사님과, 과부 집사님 을 맺어주기 위해서 두분을 모셔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분이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제가 기도하는 중에 응답을 들었습니다.] 두분 은 목사님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니까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 결혼한 이 두분은 결혼 2년만에 이혼하고 말았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이렇게 황당무계한게 아닙니다. 기도의 응답은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항상 상식이 통하는 방법 으로 이루어 주십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후의 보루인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응 답을 주십니다. 양심에 꺼리끼지 않을 그런 응답이 바른 응답입니다. 오늘날 자신의 양심을 팔아먹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 양심에 관해서는 성도들보다도 목회자가 더 심한경우를 많이보게 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겨대서, 3년동안 엘란트 라, 소나타, 그리고 그렌져로 차를 바꾸는 그런 목사님도 본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의 양심을 통해 우리로 올바른 판 단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해야 합니다. 아무리 이성적인 판단 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말씀에 합당하지 않다면 그런 판단은 자기 합리화적인 판단 일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성경 속에는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행동기준이 제시되어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기도에 대한 모든 응답을 성경의 범위 안에서 베풀어 주십니다. 때문에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항상 임의대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의문나는 성구들이 있으면 반드시 교역자들에게 그 뜻을 물어야 합니다. 성경을 임의대로 해석하다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하여 성경은 여러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담/어떤 기도 많이하는 사업가가 부도를 내고는 기도원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를 하고나서 하나님 제가 이제 성경을 딱 피고나서 가장 먼저 보이는 성구가 하나님의 뜻으로 알겠습니다. 라고 말한후 성경을 펼쳤습니다. 그 때 마태복음 27장5절이 첫눈에 들어왔습니다.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넣고 물 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이 사업가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시한번 기도를 한후 하나님 이번이 정말입니다. 하고 말한 후 또 성경을 펼쳐 읽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번에는 요한복음 2장5절 [그 어머니가 하 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하는 문장이 첫눈에 들어왔습니다.
사업가는 [주님 정말 죽어야 합니까] 라고 말하고는 그래 한국사람은 삼세번인데 마지막 한 번더 하기로 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또 성경을 펴들었습니다. 아뿔싸 요번엔 요한복음 13장27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 니]라는 성구가 가장먼저 눈에 띄었습니다. 과연 이 사업가는 목매달아 자살을 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스스로 신령하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은사를 많이 받았다고 자부하는 소경 들이 성경을 엉뚱하게 해석하고 아전인수격으로 적용해서 많은 사람들을 실족케하 고 상처받게 하는일을 많이 보게 됩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그 속에서 삶의 열쇠와 하나님의 응답을 찾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응답받는 기도를 쉬지않고 드리는 그런 교우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항상 우리의 모든 세밀한 일상에 까지도 항상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주님을 인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그분께 모든 것을 아 뢰며 살아갑시다. 그리고는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이 올 때 항상 그것이 올바른 응 답인가를 상식에, 그리고 양심에,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 올바 로 깨닫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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