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응답 (요12:20-30)
본문
지난 주에는 성령님 안에서의 기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기도란 성령님 안에서 주님과 생명을 나누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성도는 성령님을 '따라서' 기도하게 되고 성령님을 '통해서' 기도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성령님을 통해서 주님과 교통하는 생명현상이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신자가 있을 수 없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자라고 하면 다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는 행위가 아니라 인격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인격은 기도하게 됩니다. 믿는 인격은 주님과 생명을 나누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여기서 이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기도가 믿는 인격이 주님과 생명을 나누는 것이라면 '기도만이 생명을 나누는 것입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말씀도 찬송도 예배도 헌금도 그렇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신자의 모든 삶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기도 하나만을 이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 하나만이 생명을 나누는 것이라면 또 기도한다고 야단일 것입니다. 밤 세워 기도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인격 자체가 주님과 생명을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 하나만을 특별하게 생각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기도만을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특별하게 기도한다고 야단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기도는 특별한 행위입니다. 특별한 행위가 되니 특별한 의미를 찾게 되고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움직이고 응답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되고 또 기도에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기도를 하지 않아서 되지 않는가 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인격이요 삶입니다. 믿는 자에게 있게 되는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하지 않으니 좀 많이 합시다'라고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 운동을 벌일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기도는 운동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생명현상이기 때문에 생명 있는 사람들이 기도하다가 모여서 하게 되면 그것이 기도회이지 조직하고 운동을 하여서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고싶은데 하나님이 기도할 마음을 주지 않아서 못한다고 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기도할 마음을 주지 않았다면 믿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도할 마음을 주지 않았다면 믿지 않는 것입니다. 믿는데 기도할 마음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있으면 그 믿음은 기도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있는데 기도하는 마음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믿음을 주셨으면 기도할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은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는 자의 마음속에는 기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새 생명이 그에게 있기 때문에 기도가 그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얼마나 길게 하고 또 잘 하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잘 하고 길게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 속에 하나님을 향한 말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하나님을 향해서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하는 마음이 그에게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이전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마음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하는 마음이 있거든 자기 속에 기도가 있다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그 마음속에 이미 기도가 있다는 것이요 따라서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이 있거든 '아버지'라고 불러 보십시오. 소리를 내어도 되고 내지 않아도 됩니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와 이야기를 해 보십시오.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다가 보면 이야기가 길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야기할 거리가 많아지기도 하고 또 자세히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자주 할수록 불어나는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할 말이 생깁니다. 그러나 어쨌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마음이 있거든 기도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도가 그 속에 있는 줄 알고 주저하지 말고 이야기하십시오. 길게 하지 않아도 되고 청산유수같이 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길게 청산유수같이 하는 것은 하다가 보면 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마음 즉 믿음이 있는 것이 기도가 있는 것이다라고 한 것에서 또 하나 생각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는 응답을 받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물론 기도할 때 응답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한 마음 되어서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아버지께서 응답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께서 응답하시는 사역의 일환으로 자기 자신이 그 응답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자는 응답하는 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을 다 응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마음이 아버지와 생명을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응답을 받는 것이 기도의 목적이 아니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저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목적을 이루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아버지께 아뢰고 아버지를 신뢰하며 기도한다는 자체가 이미 기도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응답을 받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그 자체에 있습니다. 기도하는 그 자체가 이미 아버지를 믿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한다는 그것만으로도 아버지와 교통을 나누고 있으며, 아버지께 문제를 맡기고 있으며 또 아버지께서 선하신 뜻대로 인도하실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생명을 나누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응답이 없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니 선하신 뜻대로 행하실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또 기도를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더 확신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응답에 집착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께 기도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족해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기도하는 그 자체가 이미 기도의 응답인 셈입니다. 따라서 그는 기도하는 그것으로써 이미 기도의 응답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또 하나 말할 수 있는 것은 기도는 실제적인 유익을 누리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교통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실제적으로 신령한 유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주와 함께 죽었음을 되새기게 되고 또 성령님의 능력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머리로만 생각하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닙니다. 실제적인 유익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에 믿는 자는 기도의 유익함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기도의 유익함은 믿지 않는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비록 비슷한 기도 현상이 있을 수는 있겠지요. 불교나 무당을 찾는 사람들로 기도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통해서 마음의 힘과 위로를 얻을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이 아버지와 교통하면서 누리는 성령님의 임재와 진리에 대한 확신을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고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유익을 세상 사람들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만이 그 유익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기도의 유익을 알고 있겠지요 어떤 점이 유익합디까 기도 속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습니까 어떠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까 주님은 아버지께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때에 하늘에서 아버지께서 응답하였습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요12:27-28)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아버지로부터 어떤 응답을 듣습니까 이제 주님이 들으신 아버지의 응답이 어떤 뜻인지 봅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한 알의 밀알로서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죽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자기와 같이 생명을 잃을 각오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을 잃어야 아버지로부터 귀히 여김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분의 마음은 근심스럽고 불안했습니다. 이것을 '지금은 내 마음이 민망하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으로 오신 분으로서 자기의 십자가를 앞에 놓고 이러한 고뇌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가 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요한복음의 이 구절을 다른 복음서들에서 말하는 겟세마네의 고뇌라고 하기도 합니다. 겟세마네의 고뇌가 잡히실 그 한 순간의 일이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할 때 이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고뇌가 겟세마네의 고뇌와 같은 것이라는 것은 일리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걱정되고 불안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당황해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해 볼까라고도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어떤 성경 번역본은 '아버지여 이 때가 나에게서 지나가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말할까'라고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혼란스런 마음을 보여주는 번역입니다. 그러나 고뇌 속에서도 자기가 죽기 위하여 왔다는 것을 되새깁니다. 그래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는 한 알의 밀알로서 죽어서 열매 맺도록 하겠습니다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니 하늘에서 아버지께서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아들 예수님을 죽도록 하였고 또 죽도록 하여 그것을 통하여 열매를 맺도록 하겠다는 대답입니다. 이 대답처럼 아버지는 아들을 죽게 하였고 거기서 다시 살려서 새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 교회가 탄생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영광이란 주님이 죽는 것 없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과 성령님 오심을 통하여 교회가 형성됨으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죽게 하셔서 이 일을 하시려고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대답은 결국 아들에게 '네가 불안하고 걱정스럽지만 죽어야 한다 그래야 내 뜻을 이룰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대답입니다. 여러분도 기도 속에서 아버지의 이런 대답을 듣습니까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하신 이 대답은 예수님께만 주신 대답이 아닙니다. 모든 신자들에게 주신 대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신자들은 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누구든지 기도할 때마다 아버지로부터 이런 대답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즉 '너는 이미 죽었으니 죽어야 한다 그래야 내 영광이 나타날 것이 아니냐'고 하는 대답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대답을 듣습니까 저는 이런 대답을 듣습니다. '아버지 앞으로 제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돈도 없고 아무 가진 것이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무엇하기 위하여 저를 택하셨습니까'라고 물을 때마다 '죽는 길을 가게 하기 위하여 택했다'고 하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니 저의 기도는 핍박이 오고 어려움이 와도 이 길을 잘 따라가도록 기도하는 것이 저의 주된 기도입니다. 엉뚱하게 설교하지 않고 복음을 바르게 설교하고 가르치도록 기도하고 이렇게 하다가 어려움 속에서 죽어도 만족해 하도록 기도합니다.
제 설교를 듣고 좋아하면서 사람들이 떼거지로 몰려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돈 모으고 살기는 틀렸습니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시내의 목사들이 노후 대비하여 땅 사놓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만 저로서는 그럴 가능성이 전무할 것 같습니다. 제가 거룩하여서가 아니라 제가 땅 사도록 사람들이 많이 모여 와서 돈을 줄 가망이 전혀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어제 경기도 광명시에서 어떤 분이 전화를 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중에 교회가 몇 명이나 모이느냐고 물었습니다. 사오십 명 모이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째서 그렇게 많이 모이느냐 복음을 설교하면 한 이십 명 정도라면 모르겠는데 그렇게 많이 모일 수가 있느냐 자기는 수백 명의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이야기해 보았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더라'고 하면서 이해하지 못해 했습니다. 저도 당황했습니다. 많이 모인다고는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많이 모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앞으로도 더 적어질 가능은 많은데 많아질 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헌금이 줄어들었으면 줄어들었지 늘어날 가망은 별로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돈 모으기는 틀렸지요. 그래도 기도하면 아무 것도 없어도 진리에만 매진하다가 죽으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이런 말씀을 누구에게나 들려주십니다. 이러니 사실은 헛된 기도를 하는 수가 얼마나 많은 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 제목은 주님과 그 나라뿐인데 이것 외에 다른 것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은 모두가 헛된 기도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로 많은 사람들이 구할 필요도 없는 것을 구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잘 살기 위하여, 좋은 대학 입학을 위하여, 좋은 배필을 만나도록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기도할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기도한다고 해도 자기의 욕심을 따라 구하지 자기의 욕심을 버리도록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아예 네 좋은 대로 살고 네 실력 대로 대학 가고 좋아 보이는 사람을 따라서 결혼하라고 하십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이 신경 쓰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고 세상 문제는 기도할 거리가 아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문제에 욕심을 가지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응답은 이미 십자가에서 들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응답을 잊고 살기 때문에 또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하다가 보면 '내가 쓸 데 없는 기도를 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기도의 응답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응답이요 유익입니다. 이렇게 하다가 보면 후에는 쓸 데 없는 기도를 하지 않게 됩니다. 정작 신자가 기도할 것은 예수님이 '내가 이 때를 위해서 왔사오니'라고 한 것처럼 '제가 죽기 위해서 부름 받았사오니 진리를 따라 살다가 죽게 하옵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기도가 생명인 줄 아는 사람이시기를 바랍니다. 신자는 이런 기도를 생명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하나만을 이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 하나만이 생명을 나누는 것이라면 또 기도한다고 야단일 것입니다. 밤 세워 기도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인격 자체가 주님과 생명을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 하나만을 특별하게 생각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기도만을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특별하게 기도한다고 야단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기도는 특별한 행위입니다. 특별한 행위가 되니 특별한 의미를 찾게 되고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움직이고 응답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되고 또 기도에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기도를 하지 않아서 되지 않는가 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인격이요 삶입니다. 믿는 자에게 있게 되는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하지 않으니 좀 많이 합시다'라고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 운동을 벌일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기도는 운동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생명현상이기 때문에 생명 있는 사람들이 기도하다가 모여서 하게 되면 그것이 기도회이지 조직하고 운동을 하여서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고싶은데 하나님이 기도할 마음을 주지 않아서 못한다고 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기도할 마음을 주지 않았다면 믿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도할 마음을 주지 않았다면 믿지 않는 것입니다. 믿는데 기도할 마음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있으면 그 믿음은 기도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있는데 기도하는 마음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믿음을 주셨으면 기도할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은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는 자의 마음속에는 기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새 생명이 그에게 있기 때문에 기도가 그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얼마나 길게 하고 또 잘 하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잘 하고 길게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 속에 하나님을 향한 말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하나님을 향해서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하는 마음이 그에게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이전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마음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하는 마음이 있거든 자기 속에 기도가 있다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그 마음속에 이미 기도가 있다는 것이요 따라서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이 있거든 '아버지'라고 불러 보십시오. 소리를 내어도 되고 내지 않아도 됩니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와 이야기를 해 보십시오.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다가 보면 이야기가 길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야기할 거리가 많아지기도 하고 또 자세히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자주 할수록 불어나는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할 말이 생깁니다. 그러나 어쨌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마음이 있거든 기도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도가 그 속에 있는 줄 알고 주저하지 말고 이야기하십시오. 길게 하지 않아도 되고 청산유수같이 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길게 청산유수같이 하는 것은 하다가 보면 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마음 즉 믿음이 있는 것이 기도가 있는 것이다라고 한 것에서 또 하나 생각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는 응답을 받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물론 기도할 때 응답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한 마음 되어서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아버지께서 응답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께서 응답하시는 사역의 일환으로 자기 자신이 그 응답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자는 응답하는 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을 다 응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마음이 아버지와 생명을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응답을 받는 것이 기도의 목적이 아니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저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목적을 이루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아버지께 아뢰고 아버지를 신뢰하며 기도한다는 자체가 이미 기도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응답을 받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그 자체에 있습니다. 기도하는 그 자체가 이미 아버지를 믿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한다는 그것만으로도 아버지와 교통을 나누고 있으며, 아버지께 문제를 맡기고 있으며 또 아버지께서 선하신 뜻대로 인도하실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생명을 나누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응답이 없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니 선하신 뜻대로 행하실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또 기도를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더 확신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응답에 집착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께 기도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족해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기도하는 그 자체가 이미 기도의 응답인 셈입니다. 따라서 그는 기도하는 그것으로써 이미 기도의 응답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또 하나 말할 수 있는 것은 기도는 실제적인 유익을 누리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교통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실제적으로 신령한 유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주와 함께 죽었음을 되새기게 되고 또 성령님의 능력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머리로만 생각하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닙니다. 실제적인 유익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에 믿는 자는 기도의 유익함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기도의 유익함은 믿지 않는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비록 비슷한 기도 현상이 있을 수는 있겠지요. 불교나 무당을 찾는 사람들로 기도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통해서 마음의 힘과 위로를 얻을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이 아버지와 교통하면서 누리는 성령님의 임재와 진리에 대한 확신을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고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유익을 세상 사람들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만이 그 유익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기도의 유익을 알고 있겠지요 어떤 점이 유익합디까 기도 속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습니까 어떠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까 주님은 아버지께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때에 하늘에서 아버지께서 응답하였습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요12:27-28)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아버지로부터 어떤 응답을 듣습니까 이제 주님이 들으신 아버지의 응답이 어떤 뜻인지 봅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한 알의 밀알로서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죽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자기와 같이 생명을 잃을 각오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을 잃어야 아버지로부터 귀히 여김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분의 마음은 근심스럽고 불안했습니다. 이것을 '지금은 내 마음이 민망하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으로 오신 분으로서 자기의 십자가를 앞에 놓고 이러한 고뇌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가 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요한복음의 이 구절을 다른 복음서들에서 말하는 겟세마네의 고뇌라고 하기도 합니다. 겟세마네의 고뇌가 잡히실 그 한 순간의 일이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할 때 이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고뇌가 겟세마네의 고뇌와 같은 것이라는 것은 일리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걱정되고 불안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당황해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해 볼까라고도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어떤 성경 번역본은 '아버지여 이 때가 나에게서 지나가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말할까'라고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혼란스런 마음을 보여주는 번역입니다. 그러나 고뇌 속에서도 자기가 죽기 위하여 왔다는 것을 되새깁니다. 그래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는 한 알의 밀알로서 죽어서 열매 맺도록 하겠습니다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니 하늘에서 아버지께서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아들 예수님을 죽도록 하였고 또 죽도록 하여 그것을 통하여 열매를 맺도록 하겠다는 대답입니다. 이 대답처럼 아버지는 아들을 죽게 하였고 거기서 다시 살려서 새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 교회가 탄생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영광이란 주님이 죽는 것 없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과 성령님 오심을 통하여 교회가 형성됨으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죽게 하셔서 이 일을 하시려고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대답은 결국 아들에게 '네가 불안하고 걱정스럽지만 죽어야 한다 그래야 내 뜻을 이룰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대답입니다. 여러분도 기도 속에서 아버지의 이런 대답을 듣습니까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하신 이 대답은 예수님께만 주신 대답이 아닙니다. 모든 신자들에게 주신 대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신자들은 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누구든지 기도할 때마다 아버지로부터 이런 대답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즉 '너는 이미 죽었으니 죽어야 한다 그래야 내 영광이 나타날 것이 아니냐'고 하는 대답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대답을 듣습니까 저는 이런 대답을 듣습니다. '아버지 앞으로 제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돈도 없고 아무 가진 것이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무엇하기 위하여 저를 택하셨습니까'라고 물을 때마다 '죽는 길을 가게 하기 위하여 택했다'고 하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니 저의 기도는 핍박이 오고 어려움이 와도 이 길을 잘 따라가도록 기도하는 것이 저의 주된 기도입니다. 엉뚱하게 설교하지 않고 복음을 바르게 설교하고 가르치도록 기도하고 이렇게 하다가 어려움 속에서 죽어도 만족해 하도록 기도합니다.
제 설교를 듣고 좋아하면서 사람들이 떼거지로 몰려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돈 모으고 살기는 틀렸습니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시내의 목사들이 노후 대비하여 땅 사놓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만 저로서는 그럴 가능성이 전무할 것 같습니다. 제가 거룩하여서가 아니라 제가 땅 사도록 사람들이 많이 모여 와서 돈을 줄 가망이 전혀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어제 경기도 광명시에서 어떤 분이 전화를 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중에 교회가 몇 명이나 모이느냐고 물었습니다. 사오십 명 모이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째서 그렇게 많이 모이느냐 복음을 설교하면 한 이십 명 정도라면 모르겠는데 그렇게 많이 모일 수가 있느냐 자기는 수백 명의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이야기해 보았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더라'고 하면서 이해하지 못해 했습니다. 저도 당황했습니다. 많이 모인다고는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많이 모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앞으로도 더 적어질 가능은 많은데 많아질 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헌금이 줄어들었으면 줄어들었지 늘어날 가망은 별로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돈 모으기는 틀렸지요. 그래도 기도하면 아무 것도 없어도 진리에만 매진하다가 죽으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이런 말씀을 누구에게나 들려주십니다. 이러니 사실은 헛된 기도를 하는 수가 얼마나 많은 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 제목은 주님과 그 나라뿐인데 이것 외에 다른 것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은 모두가 헛된 기도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로 많은 사람들이 구할 필요도 없는 것을 구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잘 살기 위하여, 좋은 대학 입학을 위하여, 좋은 배필을 만나도록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기도할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기도한다고 해도 자기의 욕심을 따라 구하지 자기의 욕심을 버리도록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아예 네 좋은 대로 살고 네 실력 대로 대학 가고 좋아 보이는 사람을 따라서 결혼하라고 하십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이 신경 쓰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고 세상 문제는 기도할 거리가 아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문제에 욕심을 가지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응답은 이미 십자가에서 들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응답을 잊고 살기 때문에 또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하다가 보면 '내가 쓸 데 없는 기도를 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기도의 응답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응답이요 유익입니다. 이렇게 하다가 보면 후에는 쓸 데 없는 기도를 하지 않게 됩니다. 정작 신자가 기도할 것은 예수님이 '내가 이 때를 위해서 왔사오니'라고 한 것처럼 '제가 죽기 위해서 부름 받았사오니 진리를 따라 살다가 죽게 하옵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기도가 생명인 줄 아는 사람이시기를 바랍니다. 신자는 이런 기도를 생명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