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그리스도인의 행동강령 (눅6:27-38)

본문

주님은 때로 우리들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능력은 보잘것없는데 너무 과한 요구를 하실 때가 있습니다. 본문 말씀만 해도 그렇습니다. “(눅6: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눅6: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까 그 다음을 보면 더욱 힘든 일을 요구하십니다. “(눅6:29)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우리들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들이 아브라함입니까 사도 바울입니까 베드로입니까 어떻게 이런 일을 하라고 요구하실 수 있습니까 과연 이 유구는 정말 불가능한 일입니까 그러면 왜 이런 요구를 우리에게 하셨겠습니까 이것은 문자 그대로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정신을 가지고 세상을 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현대인들에게 주는 몇 가지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1. 세상을 좀 손해 보면서 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손해를 보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너무 약게 살면 정이 가지 않습니다. 너무 이재에 밝고 조금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하면 가까이하기가 싫습니다. 좀 어리숙한 부분도 있고 적당히 속아 줄 줄도 알고 손해도 볼 줄 아는 사람에게 정감이 가고 가까이하고 싶은 마음이 우러납니다. 남녀가 선을 볼 때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선을 보려고 나온 여성을 보니까 빈틈이라고는 없이 아주 야무지고 흠 하나 없이 보입니다. 그러면 남자들은 대부분 질려 버립니다. 그리고 부담스러워 합니다. 그 여자를 위해 할 일이 전혀 없을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면 여자가 싫어집니다. 좀 빈틈도 있어 보이고 순진해 보이고 내 역할이 필요할 것 같은 여성에게 남자들은 마음이 갑니다. 그리고 끌립니다. 남자들은 이런 여성들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여성들이 가는 목을 더 가늘게 보이려고 옷을 더 깊게 파서 입지 않습니까 가냘픈 팔을 더 보이려고 허리 부분을 몸에 맞게 만들어 입습니다. 가냘프게 보임으로써 “나는 당신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는 메시지를 주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그런 여성에게 기사도 정신을 발휘합니다.
“프란두스의 카니발”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계 대전 때 스페인 군대가 프랑스를 침공했습니다. 이 군대가 파죽지세로 진격해서 양민을 학살하고 마을마다 불을 지르며 악명을 떨쳤습니다. 프란두스 마을 사람들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불원간에 악명 높은 그 군대가 이 마을에도 쳐들어올 것이 분명한데 야단이었습니다. 그때 동네의 여인들이 꾀를 냈습니다. 동네의 남자들을 모두 피난 보내고 동네에는 여자들과 어린아이들만 남아 있게 했습니다. 드디어 스페인 군대가 쳐들어 왔습니다. 와 보니까 동네에 남자들은 하나도 없고 아이들과 여자들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자 이 스페인 군대는 기사도 정신을 발휘합니다. “세상에 남자들이 비겁하게 여자들만 남겨두고 도망을 갔다”고 욕을 하면서 전리품 중에서 좋은 물건을 여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밤에는 무도회까지 열어서 위로해 주고는 다음날 떠났다는 것입니다. 동네는 불바다가 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적군들로부터 선물까지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프란두스의 카니발”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남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첫인상이 먼지 하나 없어 보이는 남자들은 피곤합니다. 남자가 좀 어수룩한 부분이 있고 바보스럽기까지 해서 아저씨 같은 느낌이 있어야 정이 가고 가까이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살아갈 때 이런 여유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약간 바보스러워 보일 정도의 순진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 뺨을 때리거든 저 뺨도 돌려 대라.” 이것은 바보스럽기까지 한 천진스런 삶의 모습을 말합니다. 뺨을 한 대 맞으니까 쫓아가서 저 뺨도 때리고 발길질을 하고 거반 죽게 만들어 놓고는 고소까지 해서 보상금을 받아내는 사람, 정떨어지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런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이렇게 삭막한 것입니다. 무디가 전도길에서 산을 넘어가야 하는데 그만 도중에 폭설을 만났습니다. 눈이 쌓인 산길을 가고 있는데 사람 하나가 쓰러져 있습니다. 보니까 몸이 얼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냥 놓아두면 곧 죽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디는 그 사람을 들쳐 엎고 혼자 가기도 어려운 길을 갔습니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한 사람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도와 달라고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혼자 가기도 힘든데 죽을 사람을 왜 들쳐 메고 갑니까 당신도 정신 차리시오. 빨리 이 산길을 빠져 나가지 않으면 당신도 죽을 것이오.” 하고는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모습일 수 있습니다. 만약 눈이 더 오면 자신도 산을 빠져 나가지 못하고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디는 우직한 사람입니다. 무디는 그런 꾀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들쳐 엎고 갑니다. 얼마를 가다 보니까 앞서가던 사람이 그만 넘어져 있습니다. 다리에 냉기가 올라와서 얼어붙는 바람에 더 이상 가지를 못하고 쓰러져 죽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우직한 무디는 그 사람을 엎고 가다가 엎어지기도 하고 뒹굴기도 하는 동안 온 몸에서 열이 나고 땀이 나서 무사히 그 산길을 탈출했다고 합니다. 오늘 사람들은 저마다 약게 살겠다고 발더둥이를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속옷도 금하지 마라.” 얼핏 생각하면 미련한 사람같이 생각되고 우매한 사람같이 생각되고 그렇게 살면 오늘 같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하는 생각마저 들지만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마디 항의가 없습니다. 죄 많은 강도는 억울하다고 분노하고 항의하고 야단을 떨었지만 예수님은 침묵뿐입니다. 제자들이 생각을 해도 무슨 말이 있을 법한데 끝까지 말이 없습니다.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 본 제사장이 고백합니다. “저 사람은 과연 하님의 아들이었도다.” 오늘 현대인들은 이 모습을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 창조 정신을 가지고 살라는 뜻입니다. “겉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고 5리를 가자고 하는 사람은 10리를 가 주라.” 이 말은 꼭 그렇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창조 정신을 가지고 살라”는 뜻이고 “만들어 가면서 살라”는 뜻입니다. “5리를 가자고 하는 사람은 10리를 가 주어라.”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요구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왜 5리뿐이겠습니까 하루종일 같이 가자 해도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상대가 싫은 사람이니 문제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상대는 원수를 가리킵니다. 죽도록 싫은 사람이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 주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같이 갈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요구하십니다. 그러면 왜 이토록 집요하게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질서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깊은 마음과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싫다고 해서 다 멀리하고 헤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남편과 아내가 싫다고 해서 모두 헤어지면 이 세상의 가정이 어떻게 존속될 수 있겠습니까 친구가 싫다고 해서 모두 헤어지고 멀리하면 이 세상에서 인간관계가 어떻게 형성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웃이 싫다고 해서 서로 담을 쌓고 살면 어떻게 더물어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이런 비극을 없애기 위해서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강한 요구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한 가지 삶의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를 피하지 말고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자연 종교에서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피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팔자로 받아들였고 아무런 생각 없이 숙명으로 수용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적어도 우리 민족은 이렇게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데 잘 훈련이 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기독교에서는 문제를 피하거나 운명적으로 수용하는 것보다 적극적으로 극복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렇게 좋은 방향으로 만들어 가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이 세상에는 한 사람도 내 마음과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내 마음과 꼭 맞는 것이 한 가지도 없습니다. 부부라고 해서 마음이 다 맞는 것은 아닙니다. 형제도 부모도 자식도 마음이 맞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 다투기도 하고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러면서 서로 수정하고 맞추어 가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싸움은 필요악일 수 있습니다. 가끔씩 싸우는 것도 정신 건강에 좋다고 합니다. 싸울 때는 서로의 의견을 모두 표현할 수 있도록 후련하게 싸우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의 일들은 가능하면 참고 넘기는 것도 좋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미완성으로 지으셨습니다. 이렇게 미완성으로 지어진 인간끼리 모여 서로 보완하고 서로 맞추어 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살아가다가 앞길에 장애가 생기면 서로 힘을 합해서 제거하거나 극복하고 앞길이 좋지 않으면 함께 아스팔트 길을 만들고 환경이 삭막하면 서로 지혜를 모아 꽃밭을 만들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만들어 가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창조해 가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과정에서 때로 수고가 필요하면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희생이 필요하면 기꺼이 희생도 하고 손해를 보게 될 때에는 손해도 감수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인도의 신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이 와르미키라는 미남 청년을 창조하고 연못에 있는 연꽃을 꺾어 예쁜 소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녀를 청년에게 이끌어다 주고는 함께 살라고 했습니다. 이 소녀는 좋아라 하고 청년에게 다가가서 가슴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더니 깜짝 놀라서 뒷걸음을 칩니다. 이 청년의 가슴 속에 늑대들이 가득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소녀는 이 청년하고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신이 소녀를 밝은 광야로 데려갔습니다. 이 소녀가 밝은 광야로 나가니 좋아했습니다. 넓고 시원하고 푸른 잔디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광풍이 모래바람을 일으켜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이 소녀는 울면서 말합니다. “이곳도 제가 살 고이 못 됩니다.” 그래서 신은 이 소녀를 고요한 연못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이 소녀는 깊은 물 속에서 한가로이 놀고 있는 물고기들을 보고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들어가 보니까 물 속에는 온갖 요물들과 뱀들이 우글거렸습니다. 이 소녀는 소리를 지르면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신은 그 소녀를 조용한 언덕 위의 벤치에 앉혔습니다. 그곳은 온갖 꽃들이 만발해 있었습니다. 아지랑이와 나비들과 벌들이 이 꽃 저 꽃을 찾아 다니는 모습이 아주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 햇빛이 내리 쪼이자 얼굴에서 땀이 흐르고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소녀는 여기서는 하루도 살 수가 없다고 투정을 부렸습니다. 그때 신은 이 소녀를 조용히 타일렀습니다. “네 앞에 캄캄한 암흑이 있거든 너는 태양이 되어 밝은 빛을 비추어 주어라. 네 앞에 광풍이 있거든 너는 한 송이 백합이 되어 향기를 풍겨 주어라. 네 앞에 뱀과 요물들이 득실거리거든 너는 썩어 가는 물을 정화하는 생수가 되어 주어라. 햇빛이 내리 쪼이거든 너는 구름이 되어 이 땅을 시원하게 해주는 그늘이 되어 주어라.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란다.” “5리를 가자고 하거든 10리를 가 주어라.” 이 말씀은 맞추어 가면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극복하면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내 마음에 맞게 꽃밭을 만들어 놓고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3. 어떻게 하여야 이렇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거기에는 한 가지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이 36절에 나온 말씀입니다. “(눅6:36)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 이 말씀이 비결입니다. 이 마음을 품고 살아가면 이 문제도 가능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능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내 가슴 속에 이 마음을 품고 살아가면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어느 동네에 유명한 두 분이 살고 있습니다. 바로 어느 초라한 노부부인데 자녀가 넷이 있음에도 다섯명의 아이들을 입양해서 모두 아홉 아이를 양육하며 살았습니다. 그 다섯 아이는 모두 고아원에서 입양한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기막힌 것은 그 아이들 중 한 여자아이는 다른 집에서 먼저 입양을 했었는데 기르다 보니 이 아이가 저능하여서 버린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를 이 노부부가 다시 입양하여 양육한 것입니다. 그 아이가 지금 36세입니다. 나이는 어른인데 지능은 아이이기 때문에 지금도 어린아이처럼 행동합니다. 이 노부부가 이제는 늙고 힘이 드니까 아이를 노부부의 딸이 대신해서 기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노부부는 그 누구보다도 지금 행복해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해 못할 일입니다. 자기 아이도 아닌 남의 아이들을 그것도 불구아를 데려다가 평생을 뒷바라지 하고 자신들의 삶을 희생하며 살면서도 기뻐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신이 낳은 아이도 버리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런데 가능하단 말입니다.
바로 이 36절의 말씀을 가슴 속에 묻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나는 불가능한데 주님이 마음속에 계시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본문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세상에 얼마나 이해 관계가 가득합니까 그래서 이 세상이 재미가 없고 즐거움이 없고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줄기차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라. 겉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5리를 가자는 사람에게 10리를 가 주어라.” 이것도 주님의 말씀을 품고 살아가면 가능한 일입니다. 그때 우리는 진정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316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