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정체의식 (롬6:6-11)
본문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새끼 호랑이가 엄마와 풀밭에서 재롱을 떨며 장난을 하고 있었습니다. 새끼 호랑이가 그 어미 호랑이에게 물었습니다. "나 호랑이 맞아 달리기도 못하고 토끼 한 마리도 못 잡고 사냥도 못하는 내가 호랑이 맞아" 어미는 대답합니다. "그럼 내가 낳은 새끼니까 너는 틀림없는 호랑이다" 또 물어 봅니다. "강아지만도 못한데 나 호랑이 맞아 난 아무 것도 못하는데 내가 호랑이 맞아" 자꾸 물어보니까 화가 난 어미호랑이가 "야 이 개새끼야,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졸지에 개새끼가 되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아무 것도 못해도 호랑이는 호랑이요, 오늘은 보잘것없는 강아지만도 못한 거지만 이게 이제 며칠 안 돼서 수중 왕이요, 전 짐승을 호령하는 호랑이가 될 거예요. 지금 내가 뭔가 부족하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해서 자기 정체의식을 잊어버려서는 안되는 거예요. 한 마디 더 하겠습니다. 한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조용히 이야기를 하는 중에 좀 고통스러운 불평을 말했습니다 "애써서 음식을 마련하지만 제 남편이 늘상 밥투정을 해서 괴롭습니다. 아무리 정성을 들여 음식을 만들어 보아도 뭐 이래 맛이 없고 저래 맛이 없고 타박을 하는데 참 힘듭니다" 그랬어요. 했더니 시어머니가 그를 위로하노라고 "그거는 부전자전이다. 너의 시아버지도 어지간하단다. 내가 그런 어려운 시아버지를 지금까지 모시고 시중들고 있단다"그랬어요. 며느리가 마음이 좋았어요. 나를 이해해 주는구나. 기분이 좋아 가지고 이제 입을 열고 하고 싶었던 말을 하는 거예요. 남편의 흉을 계속 보았습니다. 늦잠 자고, 화를 잘 내고, 늦게 돌아오고, 뭐 어쩌고어쩌고……. 한참 흉을 보다 보니까 시어머니 눈이 점점 커지는 거예요. 깜짝 놀랐어요. 그때 혼자 생각했습니다 "나 이 집 며느리 맞아" 아니 며느리가 어찌 시어머니에게 그의 아들을 흉보고 있는 거예요 지금. 이거 정말 정신나간 여자지요. 가끔 우리는 이렇게 내 나됨을, 내 정체를 잊어버리고 생각하고, 잊어버리고 말하고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한 칼럼니스트가 훌륭한 석학들을 앞에 놓고 "딱 한 마디의 질문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현대인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석학은 대답했습니다. "현대인은 우주에 대하여 세계에 대하여 세상사에 대하여 정보 홍수를 만나서 아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모를 뿐만 아니라 점점 더 몰라가고 있습니다 무지해가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확실히 그런 거 같습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아는 게 많은데 나 자신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는 얘기예요. 이 정체의식이란 참으로 중요합니다. 나의 나됨으로의 존귀함. 이것을 모를 때에 자살합니다. 우울증에 빠집니다 허탈감에 빠집니다 실망합니다 비참합니다. 여러분 내가 나를 알려면은 먼저 정직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정직해야 합니다. 아는 건 아는 거 모르는 건 모르는 거. 여기에 거짓과 위선이 있어서는 안돼요. 순수하고 순진해야 합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모든 욕망, 끝없는 욕망 시기 질투 이런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해야 합니다. 깨끗한 마음이 되어져야 비로소 나 자신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아무리 내가 알려고 노력해도 나 혼자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눈이 밝은 사람도 빛이 없으면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밝은 빛 앞에 비추어 볼 때만이 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칼빈은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이 없다" 단정합니다. 그렇습니다. 깊이 생각을 해봅시오. 하나님을 모르면 나를 모릅니다, 하나님을 알고야 나를 압니다. 하나님 모르는 사람들 흔히 말하기를 뭐 크게나 도를 깨달은 것처럼 "인생무상" 그럽니다. 그럴 수밖에……. 하나님 없이 세상을 보니 '인생무상' 맞아요. 하나님을 모르니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 이 교만한 말도 하나님 모르기에 그럴 수 밖에요. 하나님을 모르고 나면 목적도 목표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인생 나그네 그야말로 무상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곧 나 자신을 아는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세 차원에서 인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로 "옛 사람" 그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을 기준으로 해서 옛날을 생각해 보세요. 옛 사람은 죄와 사망과 정욕과 이 진노의 노예가 되었던 사람들이에요. 옛 사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치 애굽에서 노예 되었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 같이 우리도 옛 사람의 모습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간혹 그런 분들이 있더만요. 요즘은 퇴직을 하는 분들이 많이 있어서 서로 명함을 교환하고 이렇게 악수를 하고 인사를 하게 될 때, 내가 지금 뭘 하는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지는 못하고 대개 보면은 이렇게 말해요 "전(前) 무엇입니다전직 무엇입니다" 이렇게 말해요. 전직 회장, 전직 사장, 전직 교수, 전직 장관 이렇게 말해요. 그대로 듣습니다 만은 제 속은 그렇습니다. "So what", 그러니 어쩌란 얘기요 전직엔 내가 이랬는데 오늘 내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그것에 의해서 나를 평가해 달라는 거예요. 지금 내가 이렇게 초라하지만은 과거는 이랬다는 거지. 그래서 과거에 의해서 오늘을 생각하는 것처럼 비참한 게 없어요. 잘 됐던 못 됐던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입니다. 옛 사람! 이것은 깨끗이 떠나야 되요. 또 하나는 현재는 오직 '은혜 안에 있는 나'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은혜 안에 있는 자유인이요 사명을 받은 분이요 나라고 하는 존재는 나 볼 때는 쓸모 없지만은 하나님이 볼 때는 쓸모가 있어요. 나는 할 일이 없는 거 같으나 하나님이 나를 볼 때는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어요. 그리하여 내가 존재하는 거예요. 그런고로 현재는 기회요 사명입니다. 또 미래는 약속 된 미래가 있습니다. 어느 날 요단강을 건너갈 때 우리는 저 가나안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될 것이요. 잠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도바울은 늘 편지에서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날에, 그 날에 너희는 나의 자랑이 되고 나는 너의 자랑이 되리라. 위로 주시는 부름을 바라보며 푯대를 향해서 가노라. 내 앞에 생명의 면류관이 있다. 이렇게 환하게 결정적이고 약속된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에요. 그래 오늘 성경 말씀은 이 문제를 좀 더 확실하게 사실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 라고 말합니다. 죽었다! 여러분 얼마나 죽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박노해라고 하는 분을 여러분이 아마 아실 겁니다. 그의 에세이집이 요 근자에 나온 건데 "오늘은 다르게" 라고 하는 수필집이 있습니다. 얼굴 없는 노동자 시인으로 오랫동안 살다가 요새 와서 얼굴 있는 시인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고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에 815 때에 특사를 받아서 석방된 시인입니다. 그는 91년 무기징역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르고 있다가 이렇게 석방된 분입니다. 감옥에 있을 때 그는 분노와 고독, 절망과 탄식으로 단식투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 분노로 가득 찬 사람이었으나 동구라파가 무너지는 소식을 듣고 공산세계가 무너지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의 자신의 오랫동안 생각했던 모든 일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걸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아주 명료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마지막 남은 애착과 자존심까지 벗어야 한다. 나를 해체하고 정체성을 깨뜨리고 내가 내 안에서 적극적으로 빠져 나와야 한다"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빠져 나와야 되요. 나를 해체해 버리라 이거요. 내 과거, 내 신분, 내 업적 깨끗하게 포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이제 묻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내 스스로 나를 버릴 수 있으면 내가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느냐 이건데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만이 가능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그런고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랬어요. 예수그리스도를 바라 볼 때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율법을 향하여 죽었고 죄를 향하여 죽었고 정욕을 향하여 죽었고 나의 증오와 시기 욕심 다 십자가 밑에 묻어버렸어요. 사실상 십자가를 쳐다보고 그를 믿는 순간 그가 나를 죽여서 내가 죽을 수 있는 것이지, 그가 나를 자유케 함으로 내가 자유한 것이지 내 스스로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 그랬어요. 이것은 부활의 아침을 말합니다. 이것은 오메가 포인트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영광된 형체! 그와 같이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추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은 우리가 육체의 몸을 벗는 순간 그리스도의 영화로운 부활하신 몸과 같은 자유한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것이 앞에 있는 약속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 줄을 믿는다. 그리고 오늘을 삽니다. 그래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이올시다. 그리스도 안에…….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는 게 뭡니까 예수를 믿는다 할 때 우리는 예수가 나와 함께 하시고 예수가 내 소원을 들어주시고 내 기도를 들어주시고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만은 이것은 옅은 믿음입니다. 참 신앙이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하나님은 왜 나를 이렇게 내버리셨나 싶지요 그러나 어느 순간에 내가 믿음을 갖게 될 때 거기에 하나님이 계셨어요. 내가 울고 있을 때 하나님이 함께 하셨어요. 내가 절망하고 있을 때 벌써 하나님이 돌보고 계셨어요. 나는 완전히 사막에 버려진 존재인 줄 알았는데 거기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장소였어요. 여러분 하나님 안에 내가 있고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음을 깨닫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에요. 그런고로 십자가를 쳐다 볼 때마다 우린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더블 이미지(Double Image)가 그 십자가 안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나 자신의 죄인됨을 계시해 줍니다. 너는 죄가 십자가에 죽을 만큼 죄요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거죠. 계속 우리의 죄를 십자가를 통해서 심판하십니다. 십자가에 죽어 마땅할만큼 큰 죄인이라는 거죠. 여지없이 죄인이요. 십자가를 쳐다 볼 때마다. 또 하나는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십자가의 엄청난 값을 지불해서 구원할 만한 존재라는 거예요. 내가 소중한 것이에요. 그리스도를 사랑하십니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나머지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사랑하는 것이요. 내가 소중한 것이요. 주는 나를 위하여 죽으셨어요, 주는 저를 위해 죽으셨어요. 여기서부터 내 정체감을 생각합니다. 여러분 쳐다보세요. 혹 어머니가 여러분을 위해서 수고 많이 하십니까 저는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늘 그렇습니다. 한 평생 저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시는 어머니, 그 때마다 나는 내 자신이 소중함을 생각합니다. 한 평생 눈물로 기도하시는 어머니를 생각할 때 정신이 번쩍 납니다. 얼마나 소중합니까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내가 너를 이와 같이 사랑한다" 그 사랑 안에서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다시 오늘 이 문제를 성경에서는 자세하게 말씀합니다. 이것은 주어진 것입니다. 은혜 안에 있는 정체의식이란첫째, 주어진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선택한게 아니에요. 그런게 너무 많지 않습니까. 세상에 태어난 거, 내가 부모 선택했습니까 낳아 주어서 낳지. 왜 한국 땅에 태어났습니까 낳아 주어서 낳지. 주어진 여건이요. 또한 이 신분도 이 지식도 이 재능도 내가 사는 이 영역 이 한계라는 것이 하나님이 내게 은혜로 주신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불만이 많습니까 다시 한번 생각하세요, 십자가를 쳐다보세요. 내 선택이나 노력과는 관계없이 주어진 모든 일들이 너무나도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요. 그런가 하면 얻어진 것이 또한 은혜입니다. 나로 하여금 공부할 수 있게 했지요 지능이 있어서. 또 건강 주어서 일하게 했지 밝은총명을 주고 기회를 주었고 모든 일이……. 마치 농사는 내가 했습니다 만은 농사하게 하신 하나님, 추수하게 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 감사해요. 내가 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어요. 얻어진 것 지식, 경험, 재산 모든 일들이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내가 할 수 있도록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셨고 나와 함께 하셔서 오늘의 내가 있어요. 또는 이보다 더 훨씬 큰 은혜가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여겨지는 것'이올시다. 이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는 그 말에서 나옵니다. 의롭다 함입니다. 의로운게 아니예요. 의롭게 되는 것도 아니예요. 그래서 의롭다 함은 뭐라고 해야 좋은가 우리말로 순수하게 표현하면은 의롭다고 보아주는 거예요. 어떻게 보아주느냐가 문제예요.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보아줘요. 여러분 어린애들을 보세요. 아주 어린애들을 보면 자 이제 애들이 실수를 해요. 울어요, 우는 것도 예뻐요. 걸어가다가 넘어지는 건 더 예뻐요. 노래 부르다가 좀 틀리면 그게 더 좋아 큰소리 쳐요. 왜요 사랑의 눈으로 보니까,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니까 그가 하는 모든 일들이 다 예쁜 거예요. 자는 것도 예쁘고 깨는 것도 예쁘고 먹는 것도 예쁘고……. 자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를 의롭다 하신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에요. 나는 때때로 실수한다고 괴로워했어지만, 실패한 줄 알았는데 합동하여 선을 이루었어요. 엄청난 역사를 이루는 것 순간순간 깨달아 가면서 하나님이 허물 많은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고 귀하게 보아주시고 귀하게 쓰시고 소중하게 이렇게 사랑의 사람으로 여겨 주신다는 거죠. 그런고로 우리는 이 사랑 안에 사는 것이에요. 나는 김익두 목사님 살아 생전에 몇 번 뵌 것을 나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분은 신촌장에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예수를 믿고 신촌 서부교회에서 목회 할 때 제가 그 교회 나가서 목사님으로부터 친히 들은 얘기입니다. 너무 재미있는 얘기가 되어서 제가 잊어버리지 않을 만큼 자주 말씀을 드립니다.
어느 날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서 교통수단이 좋지 않을 때 여름에 보따리를 걸머 쥐고 산을 넘어 가는데 너무 덥고 외롭지만은 빨리 올라가서 산정에서 바람을 좀 쏘이고 쉬고 갈 것이다 생각하고 참고참고 올라가서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때라 윗통을 다 벗어제치고 저기서 불어오는 바람을 이렇게 쏘이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술취한 친구하나가 비틀비틀 올라오더니 딱 쳐다보면서 "너 왜 나보다 먼저 올라왔냐" 그리고 딱 하고 때리는 거예요. 그냥 맞습니다. 목사님 표현대로 할까요 이거 사투리입니다. 이사 나간 집 굴뚝 부시듯이 그냥 부수는 거예요 그냥 들여 부시는 거예요. 한참을 때리더니 대항을 하지 않으니까 숨을 몰아 쉬면서 씩씩하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 말씀이 "형님 다 때렸소" 그리고 악수를 했는데 그 김익두 목사님 손이 아주 억셉니다, 딱 붙들고 악수하는데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 유명한 말입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으니까 "내가 김익두야" 깜짝 놀랐죠. "아이쿠 죽었구나" 벌벌 떱니다. "그래 내가 뭐라고 그랬나, 예수 믿기 전에 이런 일 당했으면 자네는 여기서 장례식까지 끝나는 거다.
그런데 내가 예수 믿는 덕에 네가 살았지 않았느냐아이구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뭘 어떡해 따라와" 데리고 가서 부흥회 참석하게 하고 예수를 믿고 그가 뒤에 장로가 됐다고 싱글싱글 웃으면서 말씀하시던 거 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이예요. 예수 안에 사는 사람이요.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나의 나 됨은 오직 은혜라고, 사무엘하 9장 8절에 보면 다윗 왕이 나라를 평정한 다음에 자기의 사랑하는 친구, 그는 요나단을 생각합니다. 요나단의 핏줄기가 하나 어디 없나 살펴보았더니 므비보셋이라고 하는 절름발이 하나가 붙들려왔습니다. 사울의 손자라 벌벌 떨고 두려워합니다. 족보를 따지면 그는 분명히 절름발이니 쓸모없고 사울의 후손이니 원수입니다. 그러나 관계가 묘합니다. 요나단을 생각하면 사랑하는 친구 요나단의 아들입니다. 사울의 손자가 아니라 요나단의 아들입니다. "너는 왕자와 같이 궁궐에서 먹을 것이다" 후대하게 됩니다. 그때에 므비보셋이 한 말은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이 종이 무엇이관데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십니까 죽은 개 같은 나를……" 죽은 개만도 못하지. 오로지 요나단을 보고 요나단의 아들이니까 너는 내 아들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감입니다. 그 마음으로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졸지에 개새끼가 되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아무 것도 못해도 호랑이는 호랑이요, 오늘은 보잘것없는 강아지만도 못한 거지만 이게 이제 며칠 안 돼서 수중 왕이요, 전 짐승을 호령하는 호랑이가 될 거예요. 지금 내가 뭔가 부족하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해서 자기 정체의식을 잊어버려서는 안되는 거예요. 한 마디 더 하겠습니다. 한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조용히 이야기를 하는 중에 좀 고통스러운 불평을 말했습니다 "애써서 음식을 마련하지만 제 남편이 늘상 밥투정을 해서 괴롭습니다. 아무리 정성을 들여 음식을 만들어 보아도 뭐 이래 맛이 없고 저래 맛이 없고 타박을 하는데 참 힘듭니다" 그랬어요. 했더니 시어머니가 그를 위로하노라고 "그거는 부전자전이다. 너의 시아버지도 어지간하단다. 내가 그런 어려운 시아버지를 지금까지 모시고 시중들고 있단다"그랬어요. 며느리가 마음이 좋았어요. 나를 이해해 주는구나. 기분이 좋아 가지고 이제 입을 열고 하고 싶었던 말을 하는 거예요. 남편의 흉을 계속 보았습니다. 늦잠 자고, 화를 잘 내고, 늦게 돌아오고, 뭐 어쩌고어쩌고……. 한참 흉을 보다 보니까 시어머니 눈이 점점 커지는 거예요. 깜짝 놀랐어요. 그때 혼자 생각했습니다 "나 이 집 며느리 맞아" 아니 며느리가 어찌 시어머니에게 그의 아들을 흉보고 있는 거예요 지금. 이거 정말 정신나간 여자지요. 가끔 우리는 이렇게 내 나됨을, 내 정체를 잊어버리고 생각하고, 잊어버리고 말하고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한 칼럼니스트가 훌륭한 석학들을 앞에 놓고 "딱 한 마디의 질문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현대인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석학은 대답했습니다. "현대인은 우주에 대하여 세계에 대하여 세상사에 대하여 정보 홍수를 만나서 아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모를 뿐만 아니라 점점 더 몰라가고 있습니다 무지해가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확실히 그런 거 같습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아는 게 많은데 나 자신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는 얘기예요. 이 정체의식이란 참으로 중요합니다. 나의 나됨으로의 존귀함. 이것을 모를 때에 자살합니다. 우울증에 빠집니다 허탈감에 빠집니다 실망합니다 비참합니다. 여러분 내가 나를 알려면은 먼저 정직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정직해야 합니다. 아는 건 아는 거 모르는 건 모르는 거. 여기에 거짓과 위선이 있어서는 안돼요. 순수하고 순진해야 합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모든 욕망, 끝없는 욕망 시기 질투 이런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해야 합니다. 깨끗한 마음이 되어져야 비로소 나 자신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아무리 내가 알려고 노력해도 나 혼자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눈이 밝은 사람도 빛이 없으면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밝은 빛 앞에 비추어 볼 때만이 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칼빈은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이 없다" 단정합니다. 그렇습니다. 깊이 생각을 해봅시오. 하나님을 모르면 나를 모릅니다, 하나님을 알고야 나를 압니다. 하나님 모르는 사람들 흔히 말하기를 뭐 크게나 도를 깨달은 것처럼 "인생무상" 그럽니다. 그럴 수밖에……. 하나님 없이 세상을 보니 '인생무상' 맞아요. 하나님을 모르니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 이 교만한 말도 하나님 모르기에 그럴 수 밖에요. 하나님을 모르고 나면 목적도 목표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인생 나그네 그야말로 무상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곧 나 자신을 아는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세 차원에서 인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로 "옛 사람" 그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을 기준으로 해서 옛날을 생각해 보세요. 옛 사람은 죄와 사망과 정욕과 이 진노의 노예가 되었던 사람들이에요. 옛 사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치 애굽에서 노예 되었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 같이 우리도 옛 사람의 모습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간혹 그런 분들이 있더만요. 요즘은 퇴직을 하는 분들이 많이 있어서 서로 명함을 교환하고 이렇게 악수를 하고 인사를 하게 될 때, 내가 지금 뭘 하는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지는 못하고 대개 보면은 이렇게 말해요 "전(前) 무엇입니다전직 무엇입니다" 이렇게 말해요. 전직 회장, 전직 사장, 전직 교수, 전직 장관 이렇게 말해요. 그대로 듣습니다 만은 제 속은 그렇습니다. "So what", 그러니 어쩌란 얘기요 전직엔 내가 이랬는데 오늘 내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그것에 의해서 나를 평가해 달라는 거예요. 지금 내가 이렇게 초라하지만은 과거는 이랬다는 거지. 그래서 과거에 의해서 오늘을 생각하는 것처럼 비참한 게 없어요. 잘 됐던 못 됐던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입니다. 옛 사람! 이것은 깨끗이 떠나야 되요. 또 하나는 현재는 오직 '은혜 안에 있는 나'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은혜 안에 있는 자유인이요 사명을 받은 분이요 나라고 하는 존재는 나 볼 때는 쓸모 없지만은 하나님이 볼 때는 쓸모가 있어요. 나는 할 일이 없는 거 같으나 하나님이 나를 볼 때는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어요. 그리하여 내가 존재하는 거예요. 그런고로 현재는 기회요 사명입니다. 또 미래는 약속 된 미래가 있습니다. 어느 날 요단강을 건너갈 때 우리는 저 가나안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될 것이요. 잠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도바울은 늘 편지에서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날에, 그 날에 너희는 나의 자랑이 되고 나는 너의 자랑이 되리라. 위로 주시는 부름을 바라보며 푯대를 향해서 가노라. 내 앞에 생명의 면류관이 있다. 이렇게 환하게 결정적이고 약속된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에요. 그래 오늘 성경 말씀은 이 문제를 좀 더 확실하게 사실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 라고 말합니다. 죽었다! 여러분 얼마나 죽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박노해라고 하는 분을 여러분이 아마 아실 겁니다. 그의 에세이집이 요 근자에 나온 건데 "오늘은 다르게" 라고 하는 수필집이 있습니다. 얼굴 없는 노동자 시인으로 오랫동안 살다가 요새 와서 얼굴 있는 시인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고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에 815 때에 특사를 받아서 석방된 시인입니다. 그는 91년 무기징역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르고 있다가 이렇게 석방된 분입니다. 감옥에 있을 때 그는 분노와 고독, 절망과 탄식으로 단식투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 분노로 가득 찬 사람이었으나 동구라파가 무너지는 소식을 듣고 공산세계가 무너지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의 자신의 오랫동안 생각했던 모든 일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걸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아주 명료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마지막 남은 애착과 자존심까지 벗어야 한다. 나를 해체하고 정체성을 깨뜨리고 내가 내 안에서 적극적으로 빠져 나와야 한다"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빠져 나와야 되요. 나를 해체해 버리라 이거요. 내 과거, 내 신분, 내 업적 깨끗하게 포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이제 묻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내 스스로 나를 버릴 수 있으면 내가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느냐 이건데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만이 가능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그런고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랬어요. 예수그리스도를 바라 볼 때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율법을 향하여 죽었고 죄를 향하여 죽었고 정욕을 향하여 죽었고 나의 증오와 시기 욕심 다 십자가 밑에 묻어버렸어요. 사실상 십자가를 쳐다보고 그를 믿는 순간 그가 나를 죽여서 내가 죽을 수 있는 것이지, 그가 나를 자유케 함으로 내가 자유한 것이지 내 스스로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 그랬어요. 이것은 부활의 아침을 말합니다. 이것은 오메가 포인트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영광된 형체! 그와 같이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추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은 우리가 육체의 몸을 벗는 순간 그리스도의 영화로운 부활하신 몸과 같은 자유한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것이 앞에 있는 약속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 줄을 믿는다. 그리고 오늘을 삽니다. 그래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이올시다. 그리스도 안에…….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는 게 뭡니까 예수를 믿는다 할 때 우리는 예수가 나와 함께 하시고 예수가 내 소원을 들어주시고 내 기도를 들어주시고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만은 이것은 옅은 믿음입니다. 참 신앙이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하나님은 왜 나를 이렇게 내버리셨나 싶지요 그러나 어느 순간에 내가 믿음을 갖게 될 때 거기에 하나님이 계셨어요. 내가 울고 있을 때 하나님이 함께 하셨어요. 내가 절망하고 있을 때 벌써 하나님이 돌보고 계셨어요. 나는 완전히 사막에 버려진 존재인 줄 알았는데 거기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장소였어요. 여러분 하나님 안에 내가 있고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음을 깨닫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에요. 그런고로 십자가를 쳐다 볼 때마다 우린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더블 이미지(Double Image)가 그 십자가 안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나 자신의 죄인됨을 계시해 줍니다. 너는 죄가 십자가에 죽을 만큼 죄요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거죠. 계속 우리의 죄를 십자가를 통해서 심판하십니다. 십자가에 죽어 마땅할만큼 큰 죄인이라는 거죠. 여지없이 죄인이요. 십자가를 쳐다 볼 때마다. 또 하나는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십자가의 엄청난 값을 지불해서 구원할 만한 존재라는 거예요. 내가 소중한 것이에요. 그리스도를 사랑하십니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나머지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사랑하는 것이요. 내가 소중한 것이요. 주는 나를 위하여 죽으셨어요, 주는 저를 위해 죽으셨어요. 여기서부터 내 정체감을 생각합니다. 여러분 쳐다보세요. 혹 어머니가 여러분을 위해서 수고 많이 하십니까 저는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늘 그렇습니다. 한 평생 저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시는 어머니, 그 때마다 나는 내 자신이 소중함을 생각합니다. 한 평생 눈물로 기도하시는 어머니를 생각할 때 정신이 번쩍 납니다. 얼마나 소중합니까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내가 너를 이와 같이 사랑한다" 그 사랑 안에서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다시 오늘 이 문제를 성경에서는 자세하게 말씀합니다. 이것은 주어진 것입니다. 은혜 안에 있는 정체의식이란첫째, 주어진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선택한게 아니에요. 그런게 너무 많지 않습니까. 세상에 태어난 거, 내가 부모 선택했습니까 낳아 주어서 낳지. 왜 한국 땅에 태어났습니까 낳아 주어서 낳지. 주어진 여건이요. 또한 이 신분도 이 지식도 이 재능도 내가 사는 이 영역 이 한계라는 것이 하나님이 내게 은혜로 주신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불만이 많습니까 다시 한번 생각하세요, 십자가를 쳐다보세요. 내 선택이나 노력과는 관계없이 주어진 모든 일들이 너무나도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요. 그런가 하면 얻어진 것이 또한 은혜입니다. 나로 하여금 공부할 수 있게 했지요 지능이 있어서. 또 건강 주어서 일하게 했지 밝은총명을 주고 기회를 주었고 모든 일이……. 마치 농사는 내가 했습니다 만은 농사하게 하신 하나님, 추수하게 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 감사해요. 내가 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어요. 얻어진 것 지식, 경험, 재산 모든 일들이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내가 할 수 있도록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셨고 나와 함께 하셔서 오늘의 내가 있어요. 또는 이보다 더 훨씬 큰 은혜가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여겨지는 것'이올시다. 이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는 그 말에서 나옵니다. 의롭다 함입니다. 의로운게 아니예요. 의롭게 되는 것도 아니예요. 그래서 의롭다 함은 뭐라고 해야 좋은가 우리말로 순수하게 표현하면은 의롭다고 보아주는 거예요. 어떻게 보아주느냐가 문제예요.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보아줘요. 여러분 어린애들을 보세요. 아주 어린애들을 보면 자 이제 애들이 실수를 해요. 울어요, 우는 것도 예뻐요. 걸어가다가 넘어지는 건 더 예뻐요. 노래 부르다가 좀 틀리면 그게 더 좋아 큰소리 쳐요. 왜요 사랑의 눈으로 보니까,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니까 그가 하는 모든 일들이 다 예쁜 거예요. 자는 것도 예쁘고 깨는 것도 예쁘고 먹는 것도 예쁘고……. 자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를 의롭다 하신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에요. 나는 때때로 실수한다고 괴로워했어지만, 실패한 줄 알았는데 합동하여 선을 이루었어요. 엄청난 역사를 이루는 것 순간순간 깨달아 가면서 하나님이 허물 많은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고 귀하게 보아주시고 귀하게 쓰시고 소중하게 이렇게 사랑의 사람으로 여겨 주신다는 거죠. 그런고로 우리는 이 사랑 안에 사는 것이에요. 나는 김익두 목사님 살아 생전에 몇 번 뵌 것을 나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분은 신촌장에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예수를 믿고 신촌 서부교회에서 목회 할 때 제가 그 교회 나가서 목사님으로부터 친히 들은 얘기입니다. 너무 재미있는 얘기가 되어서 제가 잊어버리지 않을 만큼 자주 말씀을 드립니다.
어느 날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서 교통수단이 좋지 않을 때 여름에 보따리를 걸머 쥐고 산을 넘어 가는데 너무 덥고 외롭지만은 빨리 올라가서 산정에서 바람을 좀 쏘이고 쉬고 갈 것이다 생각하고 참고참고 올라가서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때라 윗통을 다 벗어제치고 저기서 불어오는 바람을 이렇게 쏘이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술취한 친구하나가 비틀비틀 올라오더니 딱 쳐다보면서 "너 왜 나보다 먼저 올라왔냐" 그리고 딱 하고 때리는 거예요. 그냥 맞습니다. 목사님 표현대로 할까요 이거 사투리입니다. 이사 나간 집 굴뚝 부시듯이 그냥 부수는 거예요 그냥 들여 부시는 거예요. 한참을 때리더니 대항을 하지 않으니까 숨을 몰아 쉬면서 씩씩하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 말씀이 "형님 다 때렸소" 그리고 악수를 했는데 그 김익두 목사님 손이 아주 억셉니다, 딱 붙들고 악수하는데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 유명한 말입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으니까 "내가 김익두야" 깜짝 놀랐죠. "아이쿠 죽었구나" 벌벌 떱니다. "그래 내가 뭐라고 그랬나, 예수 믿기 전에 이런 일 당했으면 자네는 여기서 장례식까지 끝나는 거다.
그런데 내가 예수 믿는 덕에 네가 살았지 않았느냐아이구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뭘 어떡해 따라와" 데리고 가서 부흥회 참석하게 하고 예수를 믿고 그가 뒤에 장로가 됐다고 싱글싱글 웃으면서 말씀하시던 거 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이예요. 예수 안에 사는 사람이요.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나의 나 됨은 오직 은혜라고, 사무엘하 9장 8절에 보면 다윗 왕이 나라를 평정한 다음에 자기의 사랑하는 친구, 그는 요나단을 생각합니다. 요나단의 핏줄기가 하나 어디 없나 살펴보았더니 므비보셋이라고 하는 절름발이 하나가 붙들려왔습니다. 사울의 손자라 벌벌 떨고 두려워합니다. 족보를 따지면 그는 분명히 절름발이니 쓸모없고 사울의 후손이니 원수입니다. 그러나 관계가 묘합니다. 요나단을 생각하면 사랑하는 친구 요나단의 아들입니다. 사울의 손자가 아니라 요나단의 아들입니다. "너는 왕자와 같이 궁궐에서 먹을 것이다" 후대하게 됩니다. 그때에 므비보셋이 한 말은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이 종이 무엇이관데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십니까 죽은 개 같은 나를……" 죽은 개만도 못하지. 오로지 요나단을 보고 요나단의 아들이니까 너는 내 아들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감입니다. 그 마음으로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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