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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위치 (요12:25-26)

본문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썩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신 이후에 오늘 본문의 말씀같이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한다'는 말씀으로 연결하고 계십니다. 예수를 믿는 문제에 있어서 대부분의 신자들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모르는 부분이 더 많지 않는가 하는 느낌이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신자들이 신앙 생활의 핵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핵심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핵심을 핵심으로 소유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많은듯 싶습니다. 다시말해 이미 자기가 소유하고 알고 있는 것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왜 어디서 잘못되어져서 그러한가 하는 점들을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이해하게 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지적하는 것 중에서 가장 큰 싸움거리는, 원래 자연인이 가지고 있던 그 생각과 내용, 기초, 방법, 원리, 목표 그 어느 것이든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 영역과는 연결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지적입니다. 다시말해 세상에서 상식적으로 통하던 일들도 신앙의 세계에서는 맞지를 않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봉사를 하는 데 돈이 있는 쪽과 없는 쪽 중에서 둘다 똑같은 신앙이라면 어느 쪽이 봉사를 더 많이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당연히 돈이 있는 쪽이 봉사를 더 많이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같은 신앙이라도 돈을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면 이익이라는 생각이 우리를 실수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인 것입니다. '없는 신앙을 돈으로 떼워서는 안된다'는 사실은 철저하게 고수하면서도, 똑같은 바에야 있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다시 예를 들어, 세울대학교 뺏지를 달고 교회를 나오는 것과 지방 대학 뺏지를 달고 나오는 것중에서, 둘이 똑같은 신앙이라면 어느 쪽이 하나님께 이익입니까 모두가 서울대학교 뺏지를 달고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이제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십시다. 사도 바울이 건강한 쪽과 병든 쪽중에, 어느 쪽이 복음 전파에 이익이었습니까 뜻밖에 병든 쪽이 이익이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 자신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우리와 같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기왕에 동일한 복음의 열심을 가지고 있을 바에야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열심을 다 활용할 수 있는 건강과 조건을 주신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습니다.'하면서 3번씩이나 건강을 위하여 기도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같은 생각이 틀렸다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부분이 우리가 가장 잘 틀리는 상식이요, 생각입니다. 요한복음을 시작할 때 처음부터 자연인이 갖고 있었던 것과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사람의 상황을 얼마나 적대적으로 묘사하고 있는지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요한복음1:10-11절을 보십시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며 세상이 그를 알지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 '영접지 아니했다'는 말은 '배척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참 재미있는 것은 다른 문제에 있어서는 그렇게도 관대하던 가족들이 예수를 믿는 문제 앞에서는 이상하게도 칼을 들고 덤벼드는 경험을 불신 가정에서 믿으신 분들은 경험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토록 양순했던 남편이 신앙 문제 만큼은 양보가 없습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다른 문제에서는 그렇게 마음이 넓었던 사람이 순식간에 그렇게 적대적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성경의 지적과 절대 무관한 일이 아닙니다. 요3:19-20절을 보십시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빛을 미워한다, 어두움을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랑'이란 호기심을 갖고, 취미로 가끔 해본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좋아한다는 것을 뛰어넘어서 목숨을 걸고 붙잡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미워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러한 단어들을 통해서 신자들은 자기자신을 좀 평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에 가면 이것을 근거로 바울 사도가 신자들이 가져야 하는 신앙의 가장 중요한 내용들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빌3:5-8절을 보시면;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예수님게서 요한복음 12장에서 말씀하신 것같이 '자기 생명을 미워해라, 이 세상을 미워해라'하는 말씀들은 원래부터 우리가 갖고 있던 것이 이제부터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얻게 하시는 것과 얼마나 무관한 것이며 적대적인 것인가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3장5절 이하의 말씀은 바울이 세상적으로 도무지 꿀릴 것이 없었으며 도리어 자랑만이 가득한 그의 모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얼마나 해가 되었으며, 배설물과 같았는가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얼마나 많이 세상적인 것에다가 기독교적인 개념만을 끌어 와서 입히고 있는지 모릅니다. 동일한 열심을 갖고 있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부자와 가난한 자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봉사를 많이 할 것 같으냐고 물으면 우리는 으레히 '부자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똑똑한 자와 똑똑하지 않는 자 중에서 어느 쪽이 하나님을 위해서 더 할 일이 있을 것이냐 물으면, '똑똑한 자'라고 우리는 너무 쉽게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잘못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똑똑한 자를 쓰지 않는다고 여러 번 그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부러라도 못한 사람들을 쓰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갖고 있는 어떤 것이 기초가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쓰임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이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세상 것을 미워해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 일에 있어서 누가 제일 당황스러운 일을 당하는지 아십니까 세상에서 그 분야에 일가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를들어 성가대에서는 음악을 전공한 사람이 제일 골치아픕니다. 주일학교에서는 교편을 잡은 사람이 교육하는게 제일 골치 아프고, 돈 주무르는 사람이 교회 재정하는 게 제일 골치아픕니다.
왜냐하면 교회란 나타나는 사업을 위해서 존재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육이라고 할 때에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인지 선생인 나를 교육하는 것인지 모를 곳이 교회입니다. 교육은 선생님이 잘 가르친반이 잘 되는 것이 아니라 눈물로 기도한 반이 잘 되도록 되어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재정은 주판을 잘 놓고 계산을 잘 하는 사람이 잘 하는 것이 아니라 늘 기도하는 사람에 의해서 움직여 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몇 사람이 돈을 내서 일이 되개 하는 것을 거절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일이란 교회를 짓거나 옮기거나 하는, 어떤 문제나 사건을 처리해 내는 것만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일로 말미암아 사람들 자신들이 갖고 있는 생각과 능력과 방법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간섭을 배우는 기회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 일이 몇몇 사람에 의해서 행해지면 나머지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일에서 제외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하나님의 손길을 본 것이 아니라 있는 돈을 낸 것을 보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교회란 언제나 기도하고, 안 되어서 끙끙거리고, 안타가와하고, 그래서 그냥 고민하고 하는 데서 어떤 일이 주어지고 그 일로 말미암아 신앙이 자라게 되는 것이지, 그 일이 꼭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는 것입니다. 일은 안 되어도 별 상관이 없습니다. 그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크느냐 마느냐 하는 싸움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에스더 식으로 이야기 하자면 모르드개가 '네가 왕비가 된 것이 이 일을 위한 것인 줄을 생각해 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네가 안 한다고 하나님 일이 안되는 것이 아니다. 네가 안 해도 하나님 일은 되려니와 그럼 그때 너는 뭐라고 네 책임을 변명하겠느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교회 일에서 우리가 뿌리부터 고쳐야 되는 것이 세상의 방법으로 처리하려는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제일 경계해야할 것은 세상 생각입니다. 교회만큼 기적을 요구되는 곳도 없습니다. 도무지 못 할 것같고 안 될것 같은 일이 교회 안에서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일이 내 손에 쥔 것이나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가장 큰 병이 무엇입니까 내가 알고 내가 이해하고 있는 범주 속에 것을 훨신 더 신뢰하는 병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의 일마저도 늘 내 손과 내 능력과 내 이해의 범주로 끌어내려서 처리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상식을 벗어던지며, 가장 간단한 생각조차 하지말자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는 상식의 범주를 넘는 것임을 이해하고 계셔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빌3:9절을 보십시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바울 사도가 갖고 있는 생각 중에 놀라운 생각은 이것입니다. 바울이 갖고 있었던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든지, 이스라엘 민족이라거나, 베냐민 지파와 바리새인이라는 것 때문에 생겨난 의가 아니라, 이런 것들과는 전혀 단절되고 동떨어진 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율법을 등장시켜 이야기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율법은 기준이나 규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방법적 법칙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율법으로가 아니라'고 말할 때에는 인과율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 원인을 만들어야 되는 것과 같은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의'가 나의 경험과 지식과 능력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내게 해가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받은 '의'입니까 믿음으로 받은 '의' 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이란 이러한 의미에서 볼때에 믿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원인을 만들거나, 거기에 대해서 무슨 조작을 하거나 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생겨난 것을 성경은 '은혜요, 선물' '하나님께로선 난 의'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예를들면, 목사가 '신앙 생활을 이렇게 저렇게 하셔야 됩니다.'하고 이야기 하면, 요즘 교인들은 참 약아서 앞에서는 다 그럴 듯한 감동스런 얼굴을 하고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딱 돌아서기만 하면 마음에 이미 판정을 내립니다. '목사님 목사님이나 그렇게 사십시오. 제가 그래서 목사님을 좋아하고 목사님 교회에 나갑니다. 그러나 목사님 말대로 산다면 사흘도 못 가서 굶어 죽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느 것이 어느 것에 해가 된단 말입니까 성경은 우리와 달리 현실 생활이 해가 된다고 판정을 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떻게 판정을 내린다고요 현실 생활이 더 주가 되어 있으므로 신앙생활이 해가 된다고 말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힘든 신앙 생활은 목사님께서 좀 대표로 살아 주시고 우리는 여기서 살기로 결정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80% 쯤은 현실에다 발을 디디고 있고, 20%만 신앙에다 발을 낳고 있을 뿐입니다. 왜 20%는 그래도 넣고 있을까요 죽으면 내세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때 심각해지니까 천국은 가야겠고 그래서 예금 20%를해 놓고 현실 80%는 여기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싸워야 하는 신앙 생활이 현실 생활에 해가 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꺼꾸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 생활에 훨씬 더 큰 목적을 두고 있고,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신앙 생활을 살지 않기로 결심하고 대강대강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똑똑한 것입니까 두려운 일입니다.
빌3:10-11절을 보시면 좀 더 진전된 설명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니라" 바로 이 말씀입니다. 뭐라고 말씀합니까 신앙 생활의 진전과 성숙은 오직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서 가능해진다고 합니다. 여기서 죽음이란 무엇에 대한 죽음입니까 내가 갖고 있던 세상 법칙, 세상에 목적을 둔 것, 내가 알고 있는 지식, 능력 등 내것에 관한 모든 것을 죽인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 모든 것을 죽인 거기서부터 어린아이로서 새로운 출생을 하며 새로운 출발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무엇을 버릴 수없다고 우기고 있다고 했습니까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이것들을 못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도무지 뭐가 되지를 않습니다. 신앙 생활이 부활에 이르는 자리에 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죽음을 본받아 죽은 자리에까지 도달해야 되는데, 언제나 이 자리에 가려고 하면 할수록 자꾸만 가로막고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너 그렇게 하다가는 사 흘도 못간다. 네 친구들이 너를 뭐라고 그러겠느냐 너 그렇게 하고서도 어떻게 만수무강하갰느냐' 하면서 시시 때때로 복병이 달겨듭니다. 바로 이 복병 앞에서 무력화 되어버린 신자들 때문에 교회는 대강 살자는 사람들의 집단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저도 목사님을 알아서 대접해 드릴 테니까 목사님도 그저 성경에 있는 좋은 소리로 저를 위안해 주십시오' 이렇게 서로 연봉 계약을 맺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런 면에서 다 악당들입니다. 고쳐야 됩니다. 이것이 물론 하루 아침에 고쳐질 것이라고 쉽게 믿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훨씬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어려운 그 말을 안하게 되었고, 그 말을 안 듣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러면 안되는 것입니다. 들을 것을 들으셔야 됩니다. 분명히 내가 잘못했다는 확인을 가지고 가셔야 됩니다. 아마 각자가 알아서 돌이킬 날이 있을 것입니다. 맞아서 돌이키든지, 말씀을 따라 돌이키든지, 기도하다 어느 날 정말 기적 속에서 돌이키든지 하시겠습니다마는 '그렇게 사시면 안되고 이렇게 살아야 됩니다!'라고 말도 안하는 풍토가 되어버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민주주의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대강 사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들에게 편한 사람을 부르고, 편한 사람의 말을 듣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 다수의 힘으로 정당하게 사는 사람을 밀어내어 버린 교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심각한 병입니다. 고치셔야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통과하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이 자연인이라서 예수를 믿을까 말까 하기 때문에 이것은 믿는 것이고, 저것은 안믿는 것이며, 믿고 나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미 돌이킨 자요, 초대받은 자요, 거듭난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 개 같고 돼지 같았지만 이제사람으로 새롭게 만들어 졌습니다. 사람으로 되자 겨울이 되어 추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야! 내가 개였을 때는 겨울에도 옷 안 입어도 뜨뜻했는데 이거 괜히 사람이 돼서 추워졌다' 이런 식으로 불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사람으로 초대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겨울에는 컹컹 짖고, 여름에는 꽥꽥거리는 이상한 사람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새삼스레 사람이 되라든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선택과 결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새사람이 되어있는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문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과 똑같이 가서 같이 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는 이 사실을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드디어 여기에 대한 아픔도 없는 경지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얻어 놓고 초대받은 지위로부터 스스로를 낮추고 있고 스스로를 더럽히고 있으며, 자기의 아름다움과 자기의 거룩과 지위를 스스로 놓친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안에 들어온 자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사실 그 자신에게 축복된 일일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물질을 가지셨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쓰여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물질이 없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쓰여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됩니다. 여러분이 똑똑하십니까 그것이 하나님께 맡은 일입니다. 또한 여러분들이 무식하십니까 그것이 똑똑한 것과 똑같이 하나님 앞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얼마나 신나는 삶입니까
그런데 왜 이 신나는 삶 속에 들어오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축구 선수에게 팔이 필요합니까 안 필요합니까 필요하기도 하고, 필요하지 않기도 합니다. 뛰는데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필요하고 공찰 때는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송구 선수가 팔이 없으면 심각합니다. 이렇게 신자는 그 개념이 전혀 다릅니다. 언제나 하나로만 생각하는 법칙에서 벗어나셔야 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 중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며, 우리에게 권면하신 것으로 쌓아 놓은 것이 무엇이냐를 자꾸 점검하셔야 됩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 있습니까 죽어버렸어야 되고 파묻혔어야 되는 곳에 앉아 있어야 될자들이지만 그 자리에서 어떻게 자신이 불리어질 이며, 어떻게 치장할 것인가를 위해서 모든 종교적인 행사와 어휘를 다 동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신앙이 10년을 믿었든 20년을 믿었든 밤낮 제자리인 것입니다. 기껏 생각한다는 것이 자신이 자리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느냐 하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감히 겁도 없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보다'라고 외치는 실수의 연속인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그 결론으로 바로 그와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12:42-43절;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기가 막힌 기록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모두 이 말씀 앞에서 오늘 죄인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이것이 오늘 이 순간 모두 다 회개하므로 고쳐질 문제는 아닙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전 인생을 걸어놓고 걸어가야 할 싸움거리입니다. 그러기에 침착하고도 냉정해야 되는 긴 싸움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고치므로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되는 길입니다. 절대로 중간에 포기되어 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를 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히는 희생의 대가를 감수하셨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한 사람도 그냥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이같은 사실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그것은 사실 무의미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그 사랑과 집념이 여러분을 향해서 절대로 끄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당신의 자녀로 부른 이상 절대로 여러분의 욕심대로 게으르게, 나태하게 지내는 것을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언제나 축복입니다. 성경은 여러분의 인생이 축복받으며, 기적과 감사와 승리 속에 있으며, 열매를 맺는 인생이 될 것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울고 불고 짜고 터지고 기어서 와 있는데 그저 성처뿐인 영광이 될 것이라 그럽니다. 하나님이 지극한 사랑과 무궁한 사랑으로 그의 피로 값주고 사신 자녀들을 향하여 오늘 권면하는 사랑의 말씀이요, 축복된 약속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마음을 변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찾고 애원하고 간구하는 기도를 내며,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여 찬송과 감사가 울려 퍼지도록 만들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진심입니다. 여러분의 축복을 위하여 이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지 마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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