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소원 (고후5:8-10)
본문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인다운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사나 죽으나 분명한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그 소원에 전 삶을 투자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일시적인 소원이 있고, 평생의 소원이 있고, 영원한 소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갈 소원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최대 문제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소원과 목표를 세우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운명이 결정됩니다. 소원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소원을 가지고 일생을 살면서 생사의 문제를 분명하게 자신있게 해결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죽고 사는 것에 대한 소원에 있었습니다. 소원 때문에 살았고 그 소원 때문제 죽어야 했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그리스도인이요, 승리자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위대한 소원을 가졌기에 위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마음속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소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 주와 함께 거하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고후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사도 바울은 담대하게 원하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사모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과 함께 있고 싶어서 몸을 떠나고 싶은 사람이 과연 있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에 살기를 원하고 세상을 떠나는 것을 슬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의 “몸을 떠난다”는 말을 예의 주시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의 영의 몸을 입어야만 사는 것으로 보았고 주의 영이 몸을 떠나면 죽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6절에 보면 “(고후5:6)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몸으로 살 때에는 육신의 장막에 머물러 살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주님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살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바울은 개인적으로는 육체 가운데 사는 현재의 삶보다 죽어 육체를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을 더 원하였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성도들과 함께 거하시지만 주님과 온전히 함께 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는 괴로운 세상을 떠나 슬픔도, 탄식도 없는 곳에서 편히 쉬고 싶은 마음으로 죽기를 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살고 싶어서 죽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우리와는 분명히 달랐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느 곳을 더 좋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는 마음이 세상의 집을 사모하는 마음보다 큼니까 지금 우리는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지 우리의 중심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도 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은 죽어서 주님 곁으로 가고 싶은 마음은 더욱 없을 것입니다.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이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생활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찬양하고 기도하며 예배하는 신앙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그보다 더 원하시는 것은 바로 함께 살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주님은 우리 안에 영으로 살고 계십니다. 그러나 따로 거하십니다. 지금 교제는 하고 있지만 거처는 다르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주님께로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빌1: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빌1:24)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 주께서 물으실 것입니다. “어떻게 왔느냐” 그러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죽어서 갈 데는 없고 천당이 좋다고 해서 왔습니다.” 이렇게 대답한다면 주님은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을 사모하면서 이 세상 떠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무서운 것도 없고, 부러운 것도 없이 힘있게 살았습니다.
2.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소원”에서 “힘쓰노라”로 더욱 진전됩니다. “(고후5: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 사도 바울에게는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이것은 육의 몸으로 오래 사는 것보다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 더 소원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소원이 있었습니다.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힘쓴다”는 말은 “큰 야심”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그의 야망이요 큰 꿈이라는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쓴다는 의미입니다. “(빌1:20)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롬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 바울은 살아서의 소원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고, 죽어서의 소원도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데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 순간의 죽음으로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후에 주님과 함께 거하는 목적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 말에는 한없는 존경과 사랑을 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주님과 함께 거하기를 더 소원했던 바울의 마음은 참으로 위대하엿습니다. 주님을 조금이라도 더 기쁘시게 하려는 것이 그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나도 컷기 때문이었습니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 이것은 사는 것 전부가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를 원하는 삶의 고백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를 기쁘시게 하려는 사람은 살아 있는 순교자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전 생애를 순교자의 삶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위하여 살 대상이 분명했습니다. 바울은 살아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으로 충만했고, 죽어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으로 충만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환경과 위치에 있든, 부하든 가난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이 마음이 있으면 위대한 그리스도인입니다.
3.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상 받는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 사도 바울에게는 거룩한 야망이 있었습니다. 하늘을 치솟는 야심이 그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리를 심판대로 보았습니다. 주님의 심판대에서 주님께 드릴 기쁨을 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판대 앞에 서서 자기 한 일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사나 죽으나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심판대는 헬라어로 “베마”입니다. 로마의 경기장에는 심판석이 있습니다. 심판관은 누가 잘하나를 살펴 그에게 상을 주기 위해서 심판석에 앉아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경주자들입니다. 심판관은 누가 잘 뛰고 있나, 누가 잘 믿고 있나, 누가 충성하는가를 심판하고 상을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상급의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심판에는 두려움이 있고, 사모하는 것이 있습니다. 심판결과 상 받을 일이 있는 사람은 사모하는 마음이 있고, 상이 없는 사람은 두려움을 갖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5:10)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 선악은 의미가 다릅니다. 정죄 심판에서는 믿음은 선이요. 불신은 악입니다. 그러나 상급 심판에서는 착하고 충성된 종은 선이요. 악하고 게으른 종은 악입니다. 상급 심판을 받는 선악은 윤리적인 도덕 개념이 아닙니다. 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일이요. 악은 무가치하고 천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 헛되게 살아온 것을 악으로 여겼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벌은 형벌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벌은 헛되게 산 것이요. 심판대에서는 부끄러움을 면치 못합니다 인생의 살아온 과정에서 헛되게 산 것 자체가 악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답게 살지 못한 것이 악이요. 벌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빌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했습니다. “해”라는 것은 손해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적으로 좋은 것을 손해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고전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전3:12) 만일 누구든지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고전3:13)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고전3: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고전3:15)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 “공력”은 일한 대로를 말하며, “해를 받는다”는 말은 손상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상을 잃는 것이 곧 손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늘나라 상을 잃지 않기 위해서 세상에서 해를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불에 소멸되지 않는 것이요. 나무나 풀이나 짚은 불에 없어지는 것들입니다. 일생 동안 쌓은 공력이 심판대 앞에서 헛되게 될 때 해를 입는데, 불타 없어지면서 자기 몸만 겨우 구원받는 것처럼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롯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따라 행한 일이 주님을 기쁘시게 한 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롯은 소돔 성에 들어가 불타 없어지는 헛된 일에 그의 생을 투자하였는데 결국 그는 불 가운데서 겨우 자기만 살아남는 부끄러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자기 아내도 잃어버리는 해를 입었습니다. 심판대에서 육신적으로 살았던 그리스도인은 과거에 그가 쌓은 많은 업적으로 인하여 해를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의 심판은 기쁨과 슬픔이며, 영광과 부끄러움이 될 것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한 삶에 대한 감격이요. 잘했다고 칭찬을 받는 영광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에는 상이 준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상이 없는 자는 부끄러움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계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 “(마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4. 성도는 하늘의 상을 사모해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믿음은 상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상을 바라지 않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막연하게 믿는 것이 아니라 좋으신 하나님을 믿는 것인데 상을 바라지 않는다면 그는 좋으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하늘나라 상을 사모하지 않고 어떻게 천국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하늘나라 상을 바라보지 않는 성도는 하늘나라 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주실 상을 알아야 하고, 자기 받을 상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받는 상이 중요한 것은 상급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에게 영광이 돌려진다는 사실입니다. 만약에 내가 주님으로부터 상 받을 일이 없다면 주님에게 아무런 영광을 드릴 것이 없다는데 슬픔이 있고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바로 상입니다. 주님이 상 주시는 그 기쁜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기뻐하시며 “내 너를 기다렸노라”고 하시는 그 칭찬이 바로 상이 될 것입니다. “(히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히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히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 믿음은 분명한 가치관을 가지고 나아가는 확신입니다. 막연하게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의 최고의 영광이요. 기쁨이요. 자랑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늘나라의 상을 사모하여야 합니다. 하늘의 상을 사모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거룩한 야심에 불타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려는 마음이요.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이요. 심판대 앞에서 주님의 기뻐하시는 상 주님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늘 이런 마음으로 주님의 상주심을 바라보며,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1. 주와 함께 거하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고후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사도 바울은 담대하게 원하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사모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과 함께 있고 싶어서 몸을 떠나고 싶은 사람이 과연 있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에 살기를 원하고 세상을 떠나는 것을 슬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의 “몸을 떠난다”는 말을 예의 주시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의 영의 몸을 입어야만 사는 것으로 보았고 주의 영이 몸을 떠나면 죽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6절에 보면 “(고후5:6)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몸으로 살 때에는 육신의 장막에 머물러 살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주님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살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바울은 개인적으로는 육체 가운데 사는 현재의 삶보다 죽어 육체를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을 더 원하였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성도들과 함께 거하시지만 주님과 온전히 함께 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는 괴로운 세상을 떠나 슬픔도, 탄식도 없는 곳에서 편히 쉬고 싶은 마음으로 죽기를 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살고 싶어서 죽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우리와는 분명히 달랐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느 곳을 더 좋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는 마음이 세상의 집을 사모하는 마음보다 큼니까 지금 우리는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지 우리의 중심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도 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은 죽어서 주님 곁으로 가고 싶은 마음은 더욱 없을 것입니다.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이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생활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찬양하고 기도하며 예배하는 신앙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그보다 더 원하시는 것은 바로 함께 살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주님은 우리 안에 영으로 살고 계십니다. 그러나 따로 거하십니다. 지금 교제는 하고 있지만 거처는 다르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주님께로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빌1: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빌1:24)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 주께서 물으실 것입니다. “어떻게 왔느냐” 그러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죽어서 갈 데는 없고 천당이 좋다고 해서 왔습니다.” 이렇게 대답한다면 주님은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을 사모하면서 이 세상 떠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무서운 것도 없고, 부러운 것도 없이 힘있게 살았습니다.
2.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소원”에서 “힘쓰노라”로 더욱 진전됩니다. “(고후5: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 사도 바울에게는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이것은 육의 몸으로 오래 사는 것보다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 더 소원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소원이 있었습니다.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힘쓴다”는 말은 “큰 야심”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그의 야망이요 큰 꿈이라는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쓴다는 의미입니다. “(빌1:20)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롬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 바울은 살아서의 소원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고, 죽어서의 소원도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데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 순간의 죽음으로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후에 주님과 함께 거하는 목적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 말에는 한없는 존경과 사랑을 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주님과 함께 거하기를 더 소원했던 바울의 마음은 참으로 위대하엿습니다. 주님을 조금이라도 더 기쁘시게 하려는 것이 그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나도 컷기 때문이었습니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 이것은 사는 것 전부가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를 원하는 삶의 고백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를 기쁘시게 하려는 사람은 살아 있는 순교자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전 생애를 순교자의 삶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위하여 살 대상이 분명했습니다. 바울은 살아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으로 충만했고, 죽어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으로 충만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환경과 위치에 있든, 부하든 가난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이 마음이 있으면 위대한 그리스도인입니다.
3.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상 받는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 사도 바울에게는 거룩한 야망이 있었습니다. 하늘을 치솟는 야심이 그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리를 심판대로 보았습니다. 주님의 심판대에서 주님께 드릴 기쁨을 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판대 앞에 서서 자기 한 일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사나 죽으나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심판대는 헬라어로 “베마”입니다. 로마의 경기장에는 심판석이 있습니다. 심판관은 누가 잘하나를 살펴 그에게 상을 주기 위해서 심판석에 앉아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경주자들입니다. 심판관은 누가 잘 뛰고 있나, 누가 잘 믿고 있나, 누가 충성하는가를 심판하고 상을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상급의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심판에는 두려움이 있고, 사모하는 것이 있습니다. 심판결과 상 받을 일이 있는 사람은 사모하는 마음이 있고, 상이 없는 사람은 두려움을 갖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5:10)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 선악은 의미가 다릅니다. 정죄 심판에서는 믿음은 선이요. 불신은 악입니다. 그러나 상급 심판에서는 착하고 충성된 종은 선이요. 악하고 게으른 종은 악입니다. 상급 심판을 받는 선악은 윤리적인 도덕 개념이 아닙니다. 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일이요. 악은 무가치하고 천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 헛되게 살아온 것을 악으로 여겼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벌은 형벌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벌은 헛되게 산 것이요. 심판대에서는 부끄러움을 면치 못합니다 인생의 살아온 과정에서 헛되게 산 것 자체가 악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답게 살지 못한 것이 악이요. 벌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빌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했습니다. “해”라는 것은 손해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적으로 좋은 것을 손해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고전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전3:12) 만일 누구든지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고전3:13)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고전3: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고전3:15)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 “공력”은 일한 대로를 말하며, “해를 받는다”는 말은 손상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상을 잃는 것이 곧 손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늘나라 상을 잃지 않기 위해서 세상에서 해를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불에 소멸되지 않는 것이요. 나무나 풀이나 짚은 불에 없어지는 것들입니다. 일생 동안 쌓은 공력이 심판대 앞에서 헛되게 될 때 해를 입는데, 불타 없어지면서 자기 몸만 겨우 구원받는 것처럼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롯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따라 행한 일이 주님을 기쁘시게 한 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롯은 소돔 성에 들어가 불타 없어지는 헛된 일에 그의 생을 투자하였는데 결국 그는 불 가운데서 겨우 자기만 살아남는 부끄러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자기 아내도 잃어버리는 해를 입었습니다. 심판대에서 육신적으로 살았던 그리스도인은 과거에 그가 쌓은 많은 업적으로 인하여 해를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의 심판은 기쁨과 슬픔이며, 영광과 부끄러움이 될 것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한 삶에 대한 감격이요. 잘했다고 칭찬을 받는 영광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에는 상이 준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상이 없는 자는 부끄러움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계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 “(마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4. 성도는 하늘의 상을 사모해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믿음은 상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상을 바라지 않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막연하게 믿는 것이 아니라 좋으신 하나님을 믿는 것인데 상을 바라지 않는다면 그는 좋으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하늘나라 상을 사모하지 않고 어떻게 천국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하늘나라 상을 바라보지 않는 성도는 하늘나라 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주실 상을 알아야 하고, 자기 받을 상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받는 상이 중요한 것은 상급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에게 영광이 돌려진다는 사실입니다. 만약에 내가 주님으로부터 상 받을 일이 없다면 주님에게 아무런 영광을 드릴 것이 없다는데 슬픔이 있고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바로 상입니다. 주님이 상 주시는 그 기쁜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기뻐하시며 “내 너를 기다렸노라”고 하시는 그 칭찬이 바로 상이 될 것입니다. “(히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히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히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 믿음은 분명한 가치관을 가지고 나아가는 확신입니다. 막연하게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의 최고의 영광이요. 기쁨이요. 자랑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늘나라의 상을 사모하여야 합니다. 하늘의 상을 사모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거룩한 야심에 불타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려는 마음이요.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이요. 심판대 앞에서 주님의 기뻐하시는 상 주님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늘 이런 마음으로 주님의 상주심을 바라보며,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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