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시민 정신 (벧전2:13-17)
본문
사람에게는 도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발휘해야 하는 정신이 있고 예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도리라고 말합니다. 사람에게 이 정신이 없으면 야만인이고 미개인이고 비문화인 취급을 받습니다. 제나라의 경공이라는 사람이 공자에게 “정치의 요체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군군, 신신, 부부, 자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공자는 이것을 “도리”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고귀한 가치는 바로 여기서 나온다고 볼 수 있ㅅ브니다. 오늘 읽은 성경을 보면 여기서 이 도리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시민 정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 글을 쓸 당시는 그리스도인들이 로마로부터 심한 핍박과 압제를 받고 있을 때입니다. 당시는 로마가 세계의 수도였고 정치적인 중심지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나라들이 한결같이 로마의 영향권 아래서 살았습니다. 유대인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압박을 받았고 박해를 받았고 고난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억압을 받는 약소 민족이 다 그렇듯이 유대인들도 로마로부터 압제뿐만 아니라 착취까지 당하면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당시 로마인들의 우월감은 대단했습니다. 세네카 같은 사람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짐승으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감사하고, 여자로 태어나지 않고 남자로 태어난 것이 감사하고, 야만인으로 태어나지 않고 로마인으로 태어난 것이 영광스럽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우월감에 빠져 있는 말입니까 사실은 유대인들도 우월감 하면 남보다 두지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히브리인이라는 우월감과 자신들만 선민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로마로부터 핍박과 압제를 받으며 차별을 받고 살아가고 있었으니 얼마나 울분이 많은 채 불만족 속에서 살았겠습니까 그래서 자꾸만 로마에 반기를 들고 붕기를 일으키고 극단적인 행동으로 소요를 자주 일으켰습니다. 그때마다 힘이 약한 유대인들은 수난을 당했고 핍박을 당했고 그렇다고 힘이 강한 로마를 향해서 어떻게 할 방법도 없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인으로서 그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삶의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이 본문에서 몇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1. 제도를 종중하라는 것입니다. “(벧전2: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질서를 존중하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질서를 존중해야 합니다. 법을 존중하고 질서를 소중히 여기고 제도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 정신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그 사회와 시대의 선도 그룹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법이 불합리하고 사회 제약이 많다고 할지라도 그 제도를 존중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의 법은 소수 민족에게는 매우 불리한 법이었습니다. 소수 민족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무시하고 마치 야만인 다루듯 했습니다. 그러니 누구보다도 자존심이 강한 유대인들은 그런 수모를 견디지 못하고 자주 폭력을 쓰고 반란과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에게는 항변일는지 모르지만 로마인들에게는 하나의 도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얻은 결과는 화를 자초하고 무참하게 짓밟히는 일이었습니다. 약소 민족들이 로마를 향해서 극단적인 행동을 해봐야 결국은 극심한 화만 자초했습니다. 그때마다 힘있는 로마는 그들을 잔인하게 다스렸고 극형으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것은 일제 때 우리 민족이 당해 봐서 너무나 잘 아는 일입니다. 우리 민족이 일제에 맞서서 싸우다 보니 힘으로는 역부족이어서 반란을 일으켰고 폭동을 일으키고 그랬습니다. 그때마다 얻은 것은 가혹한 박해와 피흘림과 죽음을 당하는 수난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서양의 선교사들이 보다 못해서 “너무 서두르지 말고 때를 기다리라, 지금은 무조건 폭력으로 저항할 때가 아니니 무저항으로 싸우라”고 중재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한때 한국기독교가 폭력을 자제하고 무저항으로 대항했던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열심히 부흥회를 했고 해벽 기도회를 했습니다. 그것도 그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의 지혜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그런 충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강조하기를 “좀 억울하지만 그렇다고 폭력을 쓰지 말고 지혜 없이 행동하지 말고 무저항으로 악을 이기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법이 좋아서가 아니고 지금은 폭력을 써서 문제가 해결되는 그런 시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여기서 왜 이렇게 질서를 강하게 당부하는가 하면 폭력은 반드시 또 다른 폭력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폭력의 속성입니다. 오늘의 폭력은 내일 더 큰 폭력을 불러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분하고 억울해도 폭력을 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겁 없이 칼을 빼드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칼을 집에 꽂으라고 했습니다.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보면 장소를 따지지 않고 폭력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이웃에서, 골목에서, 때로는 백주의 대로에서도 폭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정에서도, 교회에서까지도 폭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내들이 남편으로부터 매를 맞고 심지어 오늘은 남편들이 아내들로부터 폭력을 당하는 경우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 사회가 성숙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 폭력은 그 어떤 경우에라도 정당화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제도를 존중하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는 완벽한 제도라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뭇사람을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벧전2:17) 뭇 사람을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뭇사람”이라는 말은 극단의 두 부류를 가리킵니다. 하나는 로마인들입니다. 보기도 싫은데 베드로는 그 로마인들도 공경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한 부류는 노예들입니다. 베드로는 이 노예들까지도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발상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정신이 아니면 감히 생각지도 못할 엄청난 발상입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당시 로마에는 노예가 자그마치 6천만 명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농기구가 셋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말이 없는 농기구입니다. 그것은 삽과 곡괭이입니다 그리고 말할 줄 아는 농기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소와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말할 줄 모르는 농기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노예들입니다. 당시 노예는 농기구 취급을 받고 살았습니다. 결혼도 하지 못했고 오가다 만나면 짐승처럼 동거하다가 팔리면 그냥 해어졌습니다. 그리고 자식을 낳게 되면 돼지 새끼처럼 주인의 재산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무시당하며 살아가는 노예들까지도 멸시하거나 업신여기지 말고 존중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노예도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고 무시하고 학대하는 것은 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할 권리가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억압하고 자유를 박탈하는 권세자를 심판하셨습니다. 역사를 보십시오. 지독한 독재자는 모두 하늘이 심판했습니다. 백성을 억압한 독재자는 한결같이 하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인간을 억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어디나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간 곳이면 모두 이 평등의 진리가 적용되었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100년 전의 사회 환경이 어떠했습니까 양반 상놈의 계급이 얼마나 엄존했습니까 그리고 남녀 차별이 얼마나 심각했습니까
그런데 오늘 이만큼이라도 사회적인 제약이 사라지고 인간 차별의 장벽이 사라진 것도 알고 보면 복음이 이 땅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을 들고 온 사람들은 다행스럽게도 미국의 선교사들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청교도들에 의해서 세워진 나라입니다. 청교도들은 스토아 철학의 경건한 정신과 평등의 교리를 지닌 기독교 복음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청교도들의 경건한 신앙이 오늘 서구 세계의 평등 사회를 이룩해 놓은 것입니다. 이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복음을 들고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맨 먼저 한 것이 계급을 없애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청계천에 나가 백정들을 이끌고 교회 안으로 들어와 양반과 상놈이 한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가 하면 남녀가 한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편견의 파괴입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발상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평등의 복음인 기독교 신앙이 해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로마인들이 노예들을 무시한다고 해서 너희들도 무시하지 말고 그들을 존재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뭇사람을 공경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선 편견이라는 것부터 없애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마음을 열고 누구나 받아들인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 가슴을 가진 사람들에게 노예까지도 받아들이라고 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사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취약한 점이 바로 이 점입니다. 노예는 고사하고 보기 싫은 사람조차도 용납을 못하고 있습니다. 한 번 다투게 되면 화합이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들이 갈등을 겪고 서로 갈라지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가슴을 가지고 어떻게 로마인을 용납하고 노예들을 존중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신앙인은 무엇보다도 사해 동포적인 넓고 따뜻한 가슴을 지니고 살아가는 삶의 방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편견을 버리게 되고 이웃은 물론이고 세계까지도 가슴에 품고 기도하고 사랑하게 되는 기적을 낳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기적이고 능력입니다. 나는 불가능하지만 복음은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 복음에 나를 맡기고 나를 던져 버리면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당시 로마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로마인은 물론이고 노예들까지도 존중하라고 당부했습니다.
3.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벧전2:17) 형제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형제의 개념은 굉장히 넓습니다. 피를 나눈 형제도 물론 형제입니다. 이웃에 사는 친구도 형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형제는 주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형제라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가 여기서 특별히 형제사랑을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로마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너무 많이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일의 삶이 불안했고 두려웠고 힘겨웠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포 자기했고 신앙을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따뜻한 위로와 격려였습니다. 믿음이 약한 형제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이 위로와 격려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형제를 사랑하라고 한 것입니다. 사람은 강한 것 같아도 어떻게 보면 그렇게 약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때로 따뜻한 말 한마디에 큰 힘을 얻고 용기를 얻습니다. 그리고 하찮은 말 한마디에 낙심하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또 말 한마디에 따라서 죽어 가던 사람이 살아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소망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 한마디에 사람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살리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격려자가 되어야 하고 소망을 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특히 오늘같이 불화가 많고 갈등이 많은 시대에는 지혜 있는 혀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조화롭게 가꾸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를 보면 위로와 소망을 주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잔잔하던 마음에 불화를 일으켜 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 지혜 없는 사람입니다. 입만 열면 불만이 터져나오고 원망이 나오고 좋지 않은 모습들만 들추어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병입니다. 이런 상태로는 세상에 아무 유익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형제를 사랑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4.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벧전2:17)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반법의 근원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래야 노예를 사랑할 수 있고, 질서를 지킬 수 있고, 모두를 형제로 대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은 무법천지로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공산주의를 보십시오. 그곳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마음대로 죽이고 도구로 사용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인간의 속성까지도 무시합니다. 대학 교수인간첩이 붙잡힌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간첩은 위장하기 위해서 아랍인의 행세를 했는데 10여 년을 함께 산 부인도 자기 남편이 간첩인 줄을 몰랐다고 합니다. 자다가 잠꼬대도 아랍말로 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공산주의를 위해서는 한 사람의 인생도, 한 가정의 파괴도, 한 생명의 존재조차도 완전히 무시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만법의 근원입니다. 모든 질서의 목적입니다. 어느 민족이나 하나님을 믿고 하늘을 두려워하는 민족에게는 유혈 혁명이라든가 피비린내 나는 반란의 역사가 없습니다. 그런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사람이 하늘을 두려워한다면 어떻게 사람을 죽여서 산 속에 갖다 버립니까 사람이 하늘을 두려워한다면 어떻게 사람이 먹는 음식에 독소를 넣어 팔아 먹습니까 그것은 모두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이것이 무서운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시대의 양심입니다. 그리고 등불이며 소금이며 책임이며 질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양심이 있어야 하고 의식이 있어야 하고 이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시대에서 양식 잇는 철학을 지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로마로부터 압제를 받고 핍박을 받으며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조하기를, 그리스도인으로서 품위를 잃지 말고 제도를 존중하고 노예까지도 사랑하며 특히 고난받는 형제들끼리 서로 격려하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정신을 가지고 살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 시민 정신이고 신앙인의 마음인 것입니다.
1. 제도를 종중하라는 것입니다. “(벧전2: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질서를 존중하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질서를 존중해야 합니다. 법을 존중하고 질서를 소중히 여기고 제도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 정신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그 사회와 시대의 선도 그룹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법이 불합리하고 사회 제약이 많다고 할지라도 그 제도를 존중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의 법은 소수 민족에게는 매우 불리한 법이었습니다. 소수 민족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무시하고 마치 야만인 다루듯 했습니다. 그러니 누구보다도 자존심이 강한 유대인들은 그런 수모를 견디지 못하고 자주 폭력을 쓰고 반란과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에게는 항변일는지 모르지만 로마인들에게는 하나의 도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얻은 결과는 화를 자초하고 무참하게 짓밟히는 일이었습니다. 약소 민족들이 로마를 향해서 극단적인 행동을 해봐야 결국은 극심한 화만 자초했습니다. 그때마다 힘있는 로마는 그들을 잔인하게 다스렸고 극형으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것은 일제 때 우리 민족이 당해 봐서 너무나 잘 아는 일입니다. 우리 민족이 일제에 맞서서 싸우다 보니 힘으로는 역부족이어서 반란을 일으켰고 폭동을 일으키고 그랬습니다. 그때마다 얻은 것은 가혹한 박해와 피흘림과 죽음을 당하는 수난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서양의 선교사들이 보다 못해서 “너무 서두르지 말고 때를 기다리라, 지금은 무조건 폭력으로 저항할 때가 아니니 무저항으로 싸우라”고 중재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한때 한국기독교가 폭력을 자제하고 무저항으로 대항했던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열심히 부흥회를 했고 해벽 기도회를 했습니다. 그것도 그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의 지혜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그런 충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강조하기를 “좀 억울하지만 그렇다고 폭력을 쓰지 말고 지혜 없이 행동하지 말고 무저항으로 악을 이기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법이 좋아서가 아니고 지금은 폭력을 써서 문제가 해결되는 그런 시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여기서 왜 이렇게 질서를 강하게 당부하는가 하면 폭력은 반드시 또 다른 폭력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폭력의 속성입니다. 오늘의 폭력은 내일 더 큰 폭력을 불러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분하고 억울해도 폭력을 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겁 없이 칼을 빼드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칼을 집에 꽂으라고 했습니다.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보면 장소를 따지지 않고 폭력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이웃에서, 골목에서, 때로는 백주의 대로에서도 폭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정에서도, 교회에서까지도 폭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내들이 남편으로부터 매를 맞고 심지어 오늘은 남편들이 아내들로부터 폭력을 당하는 경우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 사회가 성숙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 폭력은 그 어떤 경우에라도 정당화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제도를 존중하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는 완벽한 제도라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뭇사람을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벧전2:17) 뭇 사람을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뭇사람”이라는 말은 극단의 두 부류를 가리킵니다. 하나는 로마인들입니다. 보기도 싫은데 베드로는 그 로마인들도 공경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한 부류는 노예들입니다. 베드로는 이 노예들까지도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발상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정신이 아니면 감히 생각지도 못할 엄청난 발상입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당시 로마에는 노예가 자그마치 6천만 명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농기구가 셋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말이 없는 농기구입니다. 그것은 삽과 곡괭이입니다 그리고 말할 줄 아는 농기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소와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말할 줄 모르는 농기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노예들입니다. 당시 노예는 농기구 취급을 받고 살았습니다. 결혼도 하지 못했고 오가다 만나면 짐승처럼 동거하다가 팔리면 그냥 해어졌습니다. 그리고 자식을 낳게 되면 돼지 새끼처럼 주인의 재산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무시당하며 살아가는 노예들까지도 멸시하거나 업신여기지 말고 존중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노예도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고 무시하고 학대하는 것은 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할 권리가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억압하고 자유를 박탈하는 권세자를 심판하셨습니다. 역사를 보십시오. 지독한 독재자는 모두 하늘이 심판했습니다. 백성을 억압한 독재자는 한결같이 하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인간을 억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어디나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간 곳이면 모두 이 평등의 진리가 적용되었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100년 전의 사회 환경이 어떠했습니까 양반 상놈의 계급이 얼마나 엄존했습니까 그리고 남녀 차별이 얼마나 심각했습니까
그런데 오늘 이만큼이라도 사회적인 제약이 사라지고 인간 차별의 장벽이 사라진 것도 알고 보면 복음이 이 땅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을 들고 온 사람들은 다행스럽게도 미국의 선교사들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청교도들에 의해서 세워진 나라입니다. 청교도들은 스토아 철학의 경건한 정신과 평등의 교리를 지닌 기독교 복음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청교도들의 경건한 신앙이 오늘 서구 세계의 평등 사회를 이룩해 놓은 것입니다. 이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복음을 들고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맨 먼저 한 것이 계급을 없애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청계천에 나가 백정들을 이끌고 교회 안으로 들어와 양반과 상놈이 한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가 하면 남녀가 한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편견의 파괴입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발상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평등의 복음인 기독교 신앙이 해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로마인들이 노예들을 무시한다고 해서 너희들도 무시하지 말고 그들을 존재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뭇사람을 공경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선 편견이라는 것부터 없애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마음을 열고 누구나 받아들인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 가슴을 가진 사람들에게 노예까지도 받아들이라고 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사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취약한 점이 바로 이 점입니다. 노예는 고사하고 보기 싫은 사람조차도 용납을 못하고 있습니다. 한 번 다투게 되면 화합이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들이 갈등을 겪고 서로 갈라지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가슴을 가지고 어떻게 로마인을 용납하고 노예들을 존중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신앙인은 무엇보다도 사해 동포적인 넓고 따뜻한 가슴을 지니고 살아가는 삶의 방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편견을 버리게 되고 이웃은 물론이고 세계까지도 가슴에 품고 기도하고 사랑하게 되는 기적을 낳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기적이고 능력입니다. 나는 불가능하지만 복음은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 복음에 나를 맡기고 나를 던져 버리면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당시 로마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로마인은 물론이고 노예들까지도 존중하라고 당부했습니다.
3.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벧전2:17) 형제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형제의 개념은 굉장히 넓습니다. 피를 나눈 형제도 물론 형제입니다. 이웃에 사는 친구도 형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형제는 주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형제라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가 여기서 특별히 형제사랑을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로마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너무 많이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일의 삶이 불안했고 두려웠고 힘겨웠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포 자기했고 신앙을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따뜻한 위로와 격려였습니다. 믿음이 약한 형제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이 위로와 격려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형제를 사랑하라고 한 것입니다. 사람은 강한 것 같아도 어떻게 보면 그렇게 약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때로 따뜻한 말 한마디에 큰 힘을 얻고 용기를 얻습니다. 그리고 하찮은 말 한마디에 낙심하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또 말 한마디에 따라서 죽어 가던 사람이 살아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소망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 한마디에 사람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살리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격려자가 되어야 하고 소망을 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특히 오늘같이 불화가 많고 갈등이 많은 시대에는 지혜 있는 혀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조화롭게 가꾸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를 보면 위로와 소망을 주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잔잔하던 마음에 불화를 일으켜 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 지혜 없는 사람입니다. 입만 열면 불만이 터져나오고 원망이 나오고 좋지 않은 모습들만 들추어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병입니다. 이런 상태로는 세상에 아무 유익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형제를 사랑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4.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벧전2:17)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반법의 근원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래야 노예를 사랑할 수 있고, 질서를 지킬 수 있고, 모두를 형제로 대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은 무법천지로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공산주의를 보십시오. 그곳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마음대로 죽이고 도구로 사용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인간의 속성까지도 무시합니다. 대학 교수인간첩이 붙잡힌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간첩은 위장하기 위해서 아랍인의 행세를 했는데 10여 년을 함께 산 부인도 자기 남편이 간첩인 줄을 몰랐다고 합니다. 자다가 잠꼬대도 아랍말로 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공산주의를 위해서는 한 사람의 인생도, 한 가정의 파괴도, 한 생명의 존재조차도 완전히 무시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만법의 근원입니다. 모든 질서의 목적입니다. 어느 민족이나 하나님을 믿고 하늘을 두려워하는 민족에게는 유혈 혁명이라든가 피비린내 나는 반란의 역사가 없습니다. 그런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사람이 하늘을 두려워한다면 어떻게 사람을 죽여서 산 속에 갖다 버립니까 사람이 하늘을 두려워한다면 어떻게 사람이 먹는 음식에 독소를 넣어 팔아 먹습니까 그것은 모두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이것이 무서운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시대의 양심입니다. 그리고 등불이며 소금이며 책임이며 질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양심이 있어야 하고 의식이 있어야 하고 이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시대에서 양식 잇는 철학을 지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로마로부터 압제를 받고 핍박을 받으며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조하기를, 그리스도인으로서 품위를 잃지 말고 제도를 존중하고 노예까지도 사랑하며 특히 고난받는 형제들끼리 서로 격려하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정신을 가지고 살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 시민 정신이고 신앙인의 마음인 것입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