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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시민 정신 (벧전2:18-21)

본문

그리스도인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책임 있는 인생이고 동시에 하나의 공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인은 그 사회에서 “나타난 존대들”입니다. 이를테면 등경 위의 등불이고 산 위의 동네와도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연제나 책임이 뒤따릅니다. 사람들이 때로 교회를 향하여 욕을 하기도 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비난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구실을 해주고 기대치만큼 살아 달라는 요구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만한 값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고마운 주문이고 요구입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시민 정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편에서 베드로는 제도를 존중하고 뭇사라을 공경하고 형제를 하랑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사회를 살아가면서 제도가 좀 불합리하다고 해도 그 제도를 존중하고 사회에서 무시당하는 노예들조차도 다른 사람들처럼 무시하지 말고 존중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천국 시민으로서 가져야 할 그리스도인의 시민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서 또 다른 몇 가지의 정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왕을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벧전2:17) 왕을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롬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고 했습니다. 이 두 구절은 잘못 읽으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5공화국 시절 집권자들이 이 구절을 가지고 기독교를 향해서 비난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이 권세자에게 순복하라고 했는데 기독교가 순종하지 않고 데모만 한다고 해서 비난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됩니다. 이 구절은 어떤 권세자에게 무조건 순복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신뢰하라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13장을 보면 임금의 권세는 하늘로부터 왔다고 했습니다. 즉, 임금은 하늘이 세우고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백성이 임금에게 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임금에게 순종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임금에게는 두 가지 조건이 따릅니다. 하나는 합법성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임금은 가장 합법적으로 세우십니다. 하나님에게는 불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신명을 따르는 일입니다. 임금은 신명을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권세가 하늘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임금은 나라를 치리할 때 무엇보다도 하늘의 뜻을 따라서 치리하고 통치하여야 합니다. 그때 백성은 그런 임금에게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합리적인 관계입니다. 백성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깨고 부수고 불지르고 법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시민이 의사를 표시하고 의견을 표현할 수는 있지만 그 표시를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또 정부가 백성의 의사를 그렇게 일방적로 무시하고 정책을 밀어붙이는 것도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몇 사람의 정당한 의사 표시라도 존중할 수 있는 나라, 그리고 정당하게 법 아래서 의사를 표시할 수 있는 시민, 그 사회와 그 나라가 선진국이고 성숙한 나라입니다. 우리나라는 뭔가 잘못되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깨고 부수고 불지르고, 전쟁난 것처럼 치고 받고 피흘리는 그런 모습의 나라는 아무리 잘 살아도 성숙한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많은 장점이 있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전근대적인 인상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좋은 집에서 잘 살아도 부부와 아이들이 자주 치고 받고 싸우는 집안을 사람들이 어떤 눈으로 보겠습니까 앞으로는 그런 일도 없겠지만 임금이 잘못하고 신명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백성이 임금을 죽이고 제거하는 그런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 임금의 권세가 하늘로부터 왔고 그 임금이 신명을 따르지 않으면 사람이 제거하기 전에 하늘이 제거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이고 지금까지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셨다가 불필요하시면 하나님이 제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세우셨다가 신명을 어기니까 제거하셨습니다. 다윗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사울을 죽이자고 했지만 다윗은 끝까지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셨으니까 하나님이 제거하실 것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다윗은 그의 몸에 칼을 댈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끝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끝내는 하나님이 적당한 시기에 조금도 부작용이 없는 방법으로 그를 제거하셨습니다. 그래서 성숙한 시민 의식은 때로 기다릴 줄도 알고 하늘의 섭리를 믿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성급하게 깨고 부수고 죽이고 뒤집어엎고 하는 일들은 성숙한 시민 정신과는 동떨어진 행동들입니다. 그러기에 본문에서 베드로는 비록 로마라고 하는 남의 나라에서 살고 있고 박해와 핍박을 받고 있을지라도 왕에게 순복하라고 타이르고 있습니다.
2. 상전을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벧전2: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라”고 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셀러리맨들아 윗사람을 존경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질서요 도리입니다. 가정이나 사회나 회사나 국가는 이 정신과 도리가 있어야 합니다. 이 정신이 잘 세워진 나라와 사회가 성숙한 사회입니다. 오늘날은 이 정신들이 희박해져 가고 있습니다. 자꾸만 흐려져 가고 있습니다. 부모에게, 스승에게, 선배에게, 상사에게, 이 정신과 존중의식이 없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회가 자꾸만 삭막해지고 어지러워지고 관계가 복잡해져 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시대가 많이 달라지기도 했지만 그리스도인은 시대를 불문하고 그 사회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시민 정신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수난도 받고 환란과 핍박도 받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원망하고 탓만 하지 말고 너희 할 일을 다하라고 타이르고 있습니다. 그 할 일이 뭐냐하면 상전에게 순복하는 일입니다. 이를테면 자신이 하는 일에 충실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는 사회 의식이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실성”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성실성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불성실한 것처럼 보기 싫은 것이 없습니다. 요령을 부리고 눈가림을 하고 수단과 적당주의로 살아가는 사람은 신뢰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불성실하면 사회에서 인정받고 사랑받으며 성공하기가 어렵습니다. 성실성, 그것은 무형이지만 최고의 재산입니다. 누가 보거나 안 보거나 성실한 것은 재산입니다. 회사원은 누가 보거나 안 보거나 일찍 출근해서 성실하게 일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전념해서 일하면, 그런 사람은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언제나 기회를 주십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시민 정신입니다.
또 “존경심”입니다. 상전은 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존대할 만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도저히 존대할 수 없을 만큼 불의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도 존대하라고 했습니다. “(벧전2:18)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참 힘든 일입니다. “비합리적이고 괴팍하고 까다로운 상전을 존대하라”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또한 어렵지 않으면 성경에서 말씀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 일이 어렵기 때문에 베드로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당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오늘 현대의 샐러리맨들에게 주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형대의 샐러리맨들은 상전에게 불만이 많습니다. 그래서 존대하지도 않습니다. 비난하고 욕하고 뒤에서 불평 불만 그룹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불평 불만은 건설적이지 못합니다. 자신을 위해서도 조직을 위해서도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게 회사가 불합리하고 부조리가 많으면 뒤에서 불평하지 말고 다른 일터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마음에 맞는 이상적인 일자리로 옮겨가서 일하는 것이 좋습니다. 불평 불만은 자신의 발전과 향상을 위해서도 결코 좋은 태도가 아닙니다. 또 하나는 “근면성”입니다. 현대의 샐러리맨들은 자신이 몸담고 일하는 회사에 대해 애사심이 있어야 합니다. 남보다 먼저 출근해서 준비하고 일하는 근면한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생활은 회사뿐 아니고 함께 일하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좋은 것은 자신에게 유익이 주어진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일하고 살아가면 삶에 맛이 나고 일하는 보람이 있고 성취하는 기쁨이 주어집니다. 그것이 일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이고 축복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시민 정신입니다. 이것은 애사심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보면 언제나 출근 시간이 5분 늦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참 불성실한 태도입니다. 이것은 아주 좋지 않은 습관입니다. 이런 사람은 발전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사람이 뒤에서 제일 말이 많습니다. 불평이 많습니다. 이것은 결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이런 정신 가지고는 오늘 같은 세상에서 인정받기 어렵고 입신하기 어렵습니다. 우선 정신에 문제가 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 팔려가서 종살이를 하면서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하여 요셉은 그 집의 일을 모두 맡아서 관리하는 가정총무가 됩니다. 감옥에 가서도 근면 성실해서 간수장으로 행세했습니다. 애굽의 재상이 되어서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의 국사를 모두 맡아서 치리했습니다. 그것이 종의 신분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그런데도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그만한 근면 성실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식사하는데 개가 옆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 개가 눈을 똑바로 뜨고 앉아서는 주인의 손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루터의 손이 입으로 가면 개의 눈도 입으로 가고 손이 반찬을 집으러 가면 개의 눈도 따라갑니다. 잠시도 한눈을 팔지 않습니다. 그래서 루터가 고기 한점을 던져 주니까 이 개가 정신 없이 먹어 치웁니다. 그러고는 다시 주인의 손을 뚫어져라 바라봅니다. 그때 루터가 그 개의 모습을 보고 감동해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이 개가 지금 한 가지 마음으로 내 손만 쳐다보고 있는 것처럼 내가 하나님만 쳐다보고 산다면 하나님도 그런 내 모습에 감탄하실 것이다.” 가끔 어려운 입지에서 성공했다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한 가지 공통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요행이나 우연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세계적인 부자 록펠러는 성공 이유를 “첫째도 근면,둘째도 근면”이라고 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성공 이유를 “첫째도 겸손,둘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그런 사람에게 기회를 주고 하늘도 그런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기회가 주어지니까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시민 정신입니다.
3.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고 했습니다. “(벧전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시대나 수고하고 희생할 사명이 주어진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운명일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소금이라고 했습니다. 소금은 희생과 양심의 상징입니다. 그리스도인을 소금이라고 표현한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행동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소금은 행동의 원형입니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 넣어야 짜다고 했습니다. 그냥 놔두면 아무리 양질의 소금이라고 해도 구실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무리 신앙이 좋고 지혜가 있고 힘이 있어도 행동하지 않으면 별로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 한가운데서 사람들과 함께 할아가는 그리스도인은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소금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가치입니다. 소금은 방지하고 촉진시키는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소금이 부패하는 곳에 들어가면 부패를 막고 원형을 보전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뻣뻣한 곳에 들어가면 부드럽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뻣뻣한 배추 속에 소금이 들어가면 순식간에 그 배추를 부드럽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이 소금의 역할입니다. 또 소금은 화약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금을 화약을 만드는데 원료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김을 구울 때 소금을 뿌리면 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폭탄을 만드는 데 원료로 쓰인다고 합니다. 소금은 이렇게 빛도 없고 아름다운 모양도 아니지만 자기의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금을 그리스도인에 비유한 가장 적절한 이유는 보편적이라는 점일 것입니다. 시장에 가 보면 제일 값이 싼 것이 소금입니다. 가장 흔한 것이 소금입니다. 집집마다 가 보면 먹을 양식은 없어도 소금 없는 집은 없습니다. 그만큼 소금은 보편적입니다. 이 말은 소금이 세상에서 누구나 필요로 하면서도 쉽게 구입할 수 있으며 값이 싸고 흔하다는 것입니다.
소금은 이 세상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소금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귀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높은 신분자도 아닙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실 때 귀족의 신분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소금처럼 아주 흔한 자세로 빛도 없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말하자면 세상의 그리스도인은 귀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와도 어울릴 수 있고 누구와도 함께 이웃이 되고 어디서나 적응하고 좋은 동료가 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을 가리켜서 주님은 소금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시대의 “나타난 존재들”입니다 산위의 동네입니다. 우리는 숨길 수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책임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시민 정신을 말하는 이유도 그런 뜻에서입니다. 늘 뒤에서 불평이나 하고 문제나 일으키는 사람은 그 사회에서 소금과 같이 나타난 존재로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하나의 생활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생활 태도가 건전한 사람은 세상에서 사랑받고 인정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로부터도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오늘 우리들에게 주어진 시민 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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