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내적 투쟁 (롬7:14-25)
본문
우리는 흔히 우리의 실수를 변명하기를 좋아합니다. '사람인지라.'하든가 '사람이지 신이 아닙니다!'하며 사람인 나로선 그 당시, 그 일을, 그렇게 처리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이유를 그런 식으로 정당화하려합니다. 또 사실 우리들은 약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본의는 아니지만 실수를하고 앗차! 하거나 '별수 없지' 합니다. 가정에서 식구들 사이에도 실수가 있습니다.본의 아니게 말이나 행동으로 실수를 저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소한 말다툼으로, 분을 냄으로, 오해로, 욕심 따위로,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조금 전에 말한 것 다시 곰곰히 삭여 생각해 봅시다. 본의 아니게의 반대는 본의로라든가, 본의에 맞게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의로는 그런 실수를 안할 것이란 말이 됩니다. ' 그땐 내 정신이 아니었나 봐.'라는 말도 있습니다. 내 정신이었다면 그런 실수를 안 저질렀을 거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이라나 저나 실수를 저지르고 싶어서 저지르진 않습니다. 저질러진 것입니다. 그러나 책임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님은 이 문제에 대하여 아주 정확하게 꼬집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도다." 원하기는 선을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행해지는 것은 악이라고 했습니다.나는 서울로 갈려고 하는데, 다리는 자꾸 부산으로 가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요. 이런 답답한노릇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들 인간은 이런 모습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모순된 사실 앞에서 바울 선생은 뭐라고 울부짖었는가 봅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 이 얼마나 안타까운 호소입니까! 모든 사람은 선과 악의 두가지 세력이 자기의 영혼을 서로 지백하려고 격렬히 투쟁하고 있음을 의식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투쟁에서 승리하는 건 번번히 악이라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옛 시에 이런 귀절이 있습니다. "나는 선을 보고 그것을 찬성하면서 아직도 악에 추종하노라." 철할자중 어떤 이는 "악을 행하는 자는, 자기가 할려고 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도대체 누가 나로 하여금 원하는 선보다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게 합니까 사도 바울 선생님의 진술을 봅시다. "내 지체 속에서 단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그렇습니다. 최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마음의 법이 있는데,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들어온 죄가 그 법을 눌러 이겨 하나님이 주신 내 마음의 법은 불쌍하게도 죄의 세력 앞에 사로잡혀 오는 몰골이 됨을 본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의 법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말합니다. 구약 시대에 주신규칙이요, 법칙이요, 벌칙을 말합니다. 뭐 뭐 하지 마라, 뭐뭐 하면무슨 벌을 주겠다하는 등등의 조문으로 된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지 말라]는 명령은 그로 하여금 금지된 일을 더욱 더 행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계명이 있기 전에는 죄는 죽은 것이었습니다. 그전에 죄는 잠복해 있었고, 비교적 활발치 않으며, 비활동적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계명이 온 이후로는 계명이 죄에게 충동을 주었습니다. 계명이 있으므로 해서 강한 유혹을 느끼고 죄를 짓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한 가지 예를 들어 봅시다. 도로법이 생기기 이전에 도로를 아무렇게나 활보를 하여도 죄가 안되고 벌도 받지 않습니다. 병역볍이 생기기 이전엔 병역을 마치고 안마치고 간에 죄가 되거나 벌을 받을 하등의 이유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을 받기 이전에는 무슨 일을 하든, 죄가 되거나 벌을받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율법 자체가 나쁘다거나 그것이 죄나 벌 자체와 동일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도로법은 어디까지나 인명의 안전도모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합니다. 그것의 목적은 인간을 성결되고 행복하고 평화스럽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인간을 성결되게 하고 행복되게 하고 평화스럽게 살게하려고 [.하라 ],[. 하지 마라]고 명하셨는데, 문제는 가련하고연약한 인간의 성격이 하라는 건 안하고, 하지 말라 한 건 해서 죄를끌어 들인 데에 있습니다. 선을 원하면서 악만 행하는 자가 모순에 남달리 가슴이 아플때 우리는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차라리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였다면 이런 고통은 안 받을 수도 있었을 걸공연히 믿어서 손해 아닌가!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법규만 지키면 되는데, 신자들은 세상의 법규도 법규지만 그 몇배나 실천키 어려운 율법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 법류로는 내가 마음으로 남의 물건을 탐냈다고 범행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네 이웃이 가진 집이나, 네 이웃의 아내나, 네 이웃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네 이웃에 있는 것을 무엇이든지 탐내지 말라!' 고 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명령을 복종치 않고 탐을 내면 죄가 되고 마니 이 얼마나 지키기 힘든것입니까! 우리들 신자는 이 지키기 힘든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즉 바로 믿기위하여 얼마나 피나는 노력과 희생을 하고 또 해야 합니까! 그러나 분명히 꼭 알아야 될 것은 우리가 아무리 피나는 노력과 희생을 한다 하여도 율법을 완전무결하게 지킬 도리가 없습니다. 따라서아무리 노력해 봤자 죄를 한 가지도 안 짓고 살 자신이 없단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죄의 값은 사망이라 했으니 우리는 다 죽을 수밖에없습니다.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분명히 의인은 없다니 곧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차피 죄를 질 수 밖에 없고, 그 때문에 망할 수밖에 없을 바에는 에에라, 예수 믿느라고 헛고생만 할 게 무어냐 이런 어리석은 장사가어디 있느냐!고 속단은 마십시요. 이런 속단은 예수님이 안오셨다면가져도 좋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오신 뒤로는 그런 속단은 오히려금물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인간은 제 아무리 노력하고 희생을 한다하여도 율법을 빠짐없이 다 지켜 낼 도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 인류의 이 약점을 너무도 잘 아셨고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율법을 가지고는 도저히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놀라운 방법으로 구원의 길을 터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주신 것입니다. 율법을 범하여 다 죽게 된 인류의 죄를 대신 예수님에게 짊어지게 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아 처단하셨습니다. 그 대신 율법의 속박에서 우리를 풀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율법을 다 지키거나 우리가 쌓은 공적으로 사망에서풀려나온게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영생을 얻을 길을 얻을 것입니다. "그의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심판이 이르지 아니하리라."예수님을 내 구주로 믿으면 구원해 주시마 했습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도 엄연히 존재하는 율법의 존재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율법을 범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이 마당에 율법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있을 수 있는 생각입니다. 해 볼 수 있는질문입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엔 또 이렇게 씌여 있으니 참 이상하지요! 법율의 일점 일획도 변경할 수 없다고! 그럼 율법의 존재 이유는과연 무엇입니까 여러분, 잠시 이것을 생각해 봅시다. 여기 현미경이 있다고 칩시다. 현미경이 좋으면 좋을수록 더 작은 병균까지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법규가 100배의 작은 병균까지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법규가 100배의 확대율을 가진 현미경이라면, 율법은 수천 억의 확대율을 가진 아주 정확한 현미경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현미경에 우리를 비추어 보면 세상 법규로는 보이지 않던 온갖 잡된 병균들이 환히 들여다 보입니다. 따라서'아아! 내 몸에 이토록 많은 병균이 우굴거리고 있다니!' 하고 놀라지않을 수 없습니다. 자, 여러분! 이러한 때 예수님께서 죄를 소멸하시는 특제약을 주셨는데, 내몸속에 있는 병균을 커다란 몇 가지만 보고 그 특제약을 받았을때와 자디 잔 아주 세미한 병균까지 다 들여다 보고 그 특제약을 받았을 때 중에서 어느 때 더 감사를 느끼겠습니까! 신약 시대에 있어서의 율법의 기능을 방금 이야기한 이 현미경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자기 속에서 많은 병균을 발견한 사람일수록 그병균을 죽일 약을 주신 분에게 더 큰 감사를 할 게 아닙니까 빚을 많이 탕감받은 자가 더 많이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많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 오해하면 안됩니다. 더 많이 감사하기 위해서 빚을 많이 져야 된단 말 아닙니다. 은혜 많이 받기 위해서 죄 많이 지으란 말 아닙니다. 우리의 영이 눈을 밝히 떠 율법이라는 현미경으로 우리를 아주 자혜히 살펴 우리 속에 있는 온갖 죄악을 샅샅이 뒤져 보고 '아, 나는 이 토록 추악한 인간인데 이 많은 죄악을 예수님께서 다 탕감해 주시고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니 이 얼마나 감격스런 일인가!' 하고 우리의 감사의 농도를 짙게 하고, 감사의 질과 양을 농피고 풍성히 하란말입니다. 우리 속의 죄를 많이 발견하여 이를 탕감해 주신 더 많이 감사하기위해 율법이 필요 있단 말입니다. 우리의 힘만으론 결코 율법을 지켜낼 재간이 없지만 주님께서 우릴 대신해 돌아 가셨고,우리의 죄 값을다 탕감해 주셨으니 이제부터의 우리의 투쟁은 감사의 투쟁이이 되어야 하는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의 흐생과 사랑에 감격하여 그의 사업에 헌신하게 되면 주시는 능력에 힘 입어 큰 일을 해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께 헌신하려 할 때, 악한 마귀가 가만히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읽어 보셨을 줄 압니다. 험한 길이오. 좋은 길이며, 가시밭길입니다. 피와 땀으로 점철된 고생의 길입니다.
며칠 전에 저는 극동방송국에서 보내 온 팜프렛을 받아 읽었습니다. 소련 당국이 크리스챤을 어떻게 교묘하게 타락시키는가를 알려 주었습니다. 아주 독실한 신도을 마약이나 환각제로 흥분시키고 공산당원을시켜 유혹하여 넘어지면 그 광경을 사진으로 쩍어 다른 신도에게 공개한다는 것입니다. 모두의 칭찬과 존경을 받던 신자가 타락한 광경을 보고 다른 신자들이 그만 낙담하여 신앙을 버리는 예가 많다는 것입니다. 악한 마귀가얼마나 악랄한 궤계를 꾸며 대나 보십시요. 택한 자라도 할 수만 있으면 성난 사자가 먹이를 움키듯 덤빈다는 말명기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다고 겁만 집어 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을 보고 믿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 분을 보고 믿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너희와 세상 끝날까지 같이 있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너희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하겠다'고 약속하신분은 마귀를 이기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와 우리의 죄를 동과 서로 먼것 같이 떼어 놓겠다'고 장담하신분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희망을 버리지 말고,내적 옥장에서 승리를 얻도록 늘 경성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약하나 능력 주시는 분은 죄를 이기신 창조주십니다. 비록 우리가 내적 투쟁을 하면서 상처투성이가 되어도 싸매어 주시는 분이 계시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골짜기가 깊으면 산도 높지 않겠습니까!엄동설한이 지나면 양춘가절도 있지않습니까! 저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의 위로가 우리에게 베풀어지실 게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조금 전에 말한 것 다시 곰곰히 삭여 생각해 봅시다. 본의 아니게의 반대는 본의로라든가, 본의에 맞게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의로는 그런 실수를 안할 것이란 말이 됩니다. ' 그땐 내 정신이 아니었나 봐.'라는 말도 있습니다. 내 정신이었다면 그런 실수를 안 저질렀을 거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이라나 저나 실수를 저지르고 싶어서 저지르진 않습니다. 저질러진 것입니다. 그러나 책임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님은 이 문제에 대하여 아주 정확하게 꼬집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도다." 원하기는 선을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행해지는 것은 악이라고 했습니다.나는 서울로 갈려고 하는데, 다리는 자꾸 부산으로 가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요. 이런 답답한노릇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들 인간은 이런 모습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모순된 사실 앞에서 바울 선생은 뭐라고 울부짖었는가 봅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 이 얼마나 안타까운 호소입니까! 모든 사람은 선과 악의 두가지 세력이 자기의 영혼을 서로 지백하려고 격렬히 투쟁하고 있음을 의식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투쟁에서 승리하는 건 번번히 악이라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옛 시에 이런 귀절이 있습니다. "나는 선을 보고 그것을 찬성하면서 아직도 악에 추종하노라." 철할자중 어떤 이는 "악을 행하는 자는, 자기가 할려고 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도대체 누가 나로 하여금 원하는 선보다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게 합니까 사도 바울 선생님의 진술을 봅시다. "내 지체 속에서 단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그렇습니다. 최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마음의 법이 있는데,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들어온 죄가 그 법을 눌러 이겨 하나님이 주신 내 마음의 법은 불쌍하게도 죄의 세력 앞에 사로잡혀 오는 몰골이 됨을 본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의 법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말합니다. 구약 시대에 주신규칙이요, 법칙이요, 벌칙을 말합니다. 뭐 뭐 하지 마라, 뭐뭐 하면무슨 벌을 주겠다하는 등등의 조문으로 된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지 말라]는 명령은 그로 하여금 금지된 일을 더욱 더 행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계명이 있기 전에는 죄는 죽은 것이었습니다. 그전에 죄는 잠복해 있었고, 비교적 활발치 않으며, 비활동적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계명이 온 이후로는 계명이 죄에게 충동을 주었습니다. 계명이 있으므로 해서 강한 유혹을 느끼고 죄를 짓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한 가지 예를 들어 봅시다. 도로법이 생기기 이전에 도로를 아무렇게나 활보를 하여도 죄가 안되고 벌도 받지 않습니다. 병역볍이 생기기 이전엔 병역을 마치고 안마치고 간에 죄가 되거나 벌을 받을 하등의 이유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을 받기 이전에는 무슨 일을 하든, 죄가 되거나 벌을받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율법 자체가 나쁘다거나 그것이 죄나 벌 자체와 동일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도로법은 어디까지나 인명의 안전도모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합니다. 그것의 목적은 인간을 성결되고 행복하고 평화스럽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인간을 성결되게 하고 행복되게 하고 평화스럽게 살게하려고 [.하라 ],[. 하지 마라]고 명하셨는데, 문제는 가련하고연약한 인간의 성격이 하라는 건 안하고, 하지 말라 한 건 해서 죄를끌어 들인 데에 있습니다. 선을 원하면서 악만 행하는 자가 모순에 남달리 가슴이 아플때 우리는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차라리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였다면 이런 고통은 안 받을 수도 있었을 걸공연히 믿어서 손해 아닌가!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법규만 지키면 되는데, 신자들은 세상의 법규도 법규지만 그 몇배나 실천키 어려운 율법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 법류로는 내가 마음으로 남의 물건을 탐냈다고 범행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네 이웃이 가진 집이나, 네 이웃의 아내나, 네 이웃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네 이웃에 있는 것을 무엇이든지 탐내지 말라!' 고 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명령을 복종치 않고 탐을 내면 죄가 되고 마니 이 얼마나 지키기 힘든것입니까! 우리들 신자는 이 지키기 힘든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즉 바로 믿기위하여 얼마나 피나는 노력과 희생을 하고 또 해야 합니까! 그러나 분명히 꼭 알아야 될 것은 우리가 아무리 피나는 노력과 희생을 한다 하여도 율법을 완전무결하게 지킬 도리가 없습니다. 따라서아무리 노력해 봤자 죄를 한 가지도 안 짓고 살 자신이 없단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죄의 값은 사망이라 했으니 우리는 다 죽을 수밖에없습니다.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분명히 의인은 없다니 곧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차피 죄를 질 수 밖에 없고, 그 때문에 망할 수밖에 없을 바에는 에에라, 예수 믿느라고 헛고생만 할 게 무어냐 이런 어리석은 장사가어디 있느냐!고 속단은 마십시요. 이런 속단은 예수님이 안오셨다면가져도 좋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오신 뒤로는 그런 속단은 오히려금물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인간은 제 아무리 노력하고 희생을 한다하여도 율법을 빠짐없이 다 지켜 낼 도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 인류의 이 약점을 너무도 잘 아셨고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율법을 가지고는 도저히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놀라운 방법으로 구원의 길을 터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주신 것입니다. 율법을 범하여 다 죽게 된 인류의 죄를 대신 예수님에게 짊어지게 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아 처단하셨습니다. 그 대신 율법의 속박에서 우리를 풀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율법을 다 지키거나 우리가 쌓은 공적으로 사망에서풀려나온게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영생을 얻을 길을 얻을 것입니다. "그의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심판이 이르지 아니하리라."예수님을 내 구주로 믿으면 구원해 주시마 했습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도 엄연히 존재하는 율법의 존재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율법을 범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이 마당에 율법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있을 수 있는 생각입니다. 해 볼 수 있는질문입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엔 또 이렇게 씌여 있으니 참 이상하지요! 법율의 일점 일획도 변경할 수 없다고! 그럼 율법의 존재 이유는과연 무엇입니까 여러분, 잠시 이것을 생각해 봅시다. 여기 현미경이 있다고 칩시다. 현미경이 좋으면 좋을수록 더 작은 병균까지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법규가 100배의 작은 병균까지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법규가 100배의 확대율을 가진 현미경이라면, 율법은 수천 억의 확대율을 가진 아주 정확한 현미경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현미경에 우리를 비추어 보면 세상 법규로는 보이지 않던 온갖 잡된 병균들이 환히 들여다 보입니다. 따라서'아아! 내 몸에 이토록 많은 병균이 우굴거리고 있다니!' 하고 놀라지않을 수 없습니다. 자, 여러분! 이러한 때 예수님께서 죄를 소멸하시는 특제약을 주셨는데, 내몸속에 있는 병균을 커다란 몇 가지만 보고 그 특제약을 받았을때와 자디 잔 아주 세미한 병균까지 다 들여다 보고 그 특제약을 받았을 때 중에서 어느 때 더 감사를 느끼겠습니까! 신약 시대에 있어서의 율법의 기능을 방금 이야기한 이 현미경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자기 속에서 많은 병균을 발견한 사람일수록 그병균을 죽일 약을 주신 분에게 더 큰 감사를 할 게 아닙니까 빚을 많이 탕감받은 자가 더 많이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많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 오해하면 안됩니다. 더 많이 감사하기 위해서 빚을 많이 져야 된단 말 아닙니다. 은혜 많이 받기 위해서 죄 많이 지으란 말 아닙니다. 우리의 영이 눈을 밝히 떠 율법이라는 현미경으로 우리를 아주 자혜히 살펴 우리 속에 있는 온갖 죄악을 샅샅이 뒤져 보고 '아, 나는 이 토록 추악한 인간인데 이 많은 죄악을 예수님께서 다 탕감해 주시고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니 이 얼마나 감격스런 일인가!' 하고 우리의 감사의 농도를 짙게 하고, 감사의 질과 양을 농피고 풍성히 하란말입니다. 우리 속의 죄를 많이 발견하여 이를 탕감해 주신 더 많이 감사하기위해 율법이 필요 있단 말입니다. 우리의 힘만으론 결코 율법을 지켜낼 재간이 없지만 주님께서 우릴 대신해 돌아 가셨고,우리의 죄 값을다 탕감해 주셨으니 이제부터의 우리의 투쟁은 감사의 투쟁이이 되어야 하는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의 흐생과 사랑에 감격하여 그의 사업에 헌신하게 되면 주시는 능력에 힘 입어 큰 일을 해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께 헌신하려 할 때, 악한 마귀가 가만히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읽어 보셨을 줄 압니다. 험한 길이오. 좋은 길이며, 가시밭길입니다. 피와 땀으로 점철된 고생의 길입니다.
며칠 전에 저는 극동방송국에서 보내 온 팜프렛을 받아 읽었습니다. 소련 당국이 크리스챤을 어떻게 교묘하게 타락시키는가를 알려 주었습니다. 아주 독실한 신도을 마약이나 환각제로 흥분시키고 공산당원을시켜 유혹하여 넘어지면 그 광경을 사진으로 쩍어 다른 신도에게 공개한다는 것입니다. 모두의 칭찬과 존경을 받던 신자가 타락한 광경을 보고 다른 신자들이 그만 낙담하여 신앙을 버리는 예가 많다는 것입니다. 악한 마귀가얼마나 악랄한 궤계를 꾸며 대나 보십시요. 택한 자라도 할 수만 있으면 성난 사자가 먹이를 움키듯 덤빈다는 말명기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다고 겁만 집어 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을 보고 믿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 분을 보고 믿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너희와 세상 끝날까지 같이 있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너희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하겠다'고 약속하신분은 마귀를 이기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와 우리의 죄를 동과 서로 먼것 같이 떼어 놓겠다'고 장담하신분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희망을 버리지 말고,내적 옥장에서 승리를 얻도록 늘 경성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약하나 능력 주시는 분은 죄를 이기신 창조주십니다. 비록 우리가 내적 투쟁을 하면서 상처투성이가 되어도 싸매어 주시는 분이 계시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골짜기가 깊으면 산도 높지 않겠습니까!엄동설한이 지나면 양춘가절도 있지않습니까! 저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의 위로가 우리에게 베풀어지실 게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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