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당신은 누구입니까? (요1:19-28)
본문
토끼 몇몇이 모여 자살하기로 했다. 이 맹수, 저 맹수에게 잡아 먹히는 약한 존재인데 살아서 무엇하겠느냐고 비관했다. 어디에서 죽을까를 숙의하다가 물에 빠져 죽기로 했다.
그런데 토끼들이 물가에 이르렀을 때 개구리들이 놀라서 물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생각을 달리했다. "아, 우리 보다 약한 존재가 있구나. 저렇게 약한 존재도 사는데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강한가. 그리고 살 길이 얼마나 많은가. 이렇게 죽지는 말자" 토 끼들은 자살하지 않기로 하고 다시 숲으로 뛰어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늘 우리가 처한 시대적 위기는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애착과 기대를 버리는데 있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인간을 호모 에스페 란스(Homo esperans)-"희망하는 인간"이라고 정의했다. 인간은 꿈과 희 망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희망이 사라지면 삶에 대한 의욕과 생에 대한 애착을 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은 삶을 풍성하게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꿈과 희망 을 스스로 가지는 존재라기 보다는 어떤 표상을 통하여 그것들을 구체화하 고, 실현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에게 희망의 표상이 필요하다. 그러면 누가 희망의 표상이 될 수 있을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그것을 찾아보자.
오늘 19절 말씀은 "유대인들이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세례를 주는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어 '당신은 누구입니 까' 라고 질문했다"고 한다. 유대인과 세례 요한, 이들은 어떤 관계인가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게하려하여 보냄받은 사람이다. 요 1:6-7은 세례 요한을 이렇게 알려주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 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 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 라." 여기에서 세례 요한을 규정하는 몇 개의 중요한 낱말이 있는데, 그것은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과 증거라는 말이다. "보낸다" 라는 말은 헬라 어로 "아포스텔로"이다. 이 말의 명사형이 "아포스톨로스" 이다. 아포스톨로 스의 번역이 사도이다. 사도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사람이다. 또 "증거하 다"라는 말은 "마르투레오" 이고, 이 말의 명사형이 "마르투레스", 즉 순교 자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 으로서, 그는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증언하되, 생명을 바쳐 증언하는 순교자 로 보냄을 받은 것이다. 실제로 세례 요한은 진리를 증언하다가 불의한 헤 롯에게 죽임을 당한 순교자가 되었다. 그러면 유대인은 누구인가 요한복음에는 유대인이라는 단어가 66번이나 쓰여지고 있다. 물론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에도 유대인이라는 이름이 쓰여 지고 있으나 각 책마다 다섯 번 정도밖에 쓰여지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요 한복음에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많이 쓰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요한복음에서 쓰여지고 있는 유대인이라는 말이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에 쓰여지고 있는 유대임이라는 말과 그 개념이 다르다는 것이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에 쓰여진 유대인이라는 말은 예수님과 관계있는 일, 즉 유 대인의 왕, 예수님에게 구원을 청했던 유대인들로서, 예수님에게 친근한 사람들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66번이나 유대인이라는 단어를 사 용하면서 철저하게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서 예수님과 적대적 관계에 있는 사람을 표현할 때 거의 사용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요한복음에서 유대인은 적그리스도로 묘사되고 있다. 세례 요한과 유대인의 관계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순교 자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방해하고, 탄압하고, 복음전파자들을 박해했던 적그리스도의 관계이다.
그런데 이 유대인이 요한에게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까 지 사람을 보냈다. 보낸 목적이 "당신이 누구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가 져오는데 있었다. 저들은 세례 요한에게서 무엇인가 한 마디 말을 듣고 싶 었던 것이다. 세례 요한은 당시 사람들에게 관심의 초점이었다. 세례 요한이 외치는 한마 디에 온 유대에서 사람들이 모여 왔다. 이렇게 모여온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하여 온 것도 아니고, 권력을 얻기 위하여 온 것도 아니고, 부자되기 위하여 온 것도 아니다. 오직 저들이 온 것은 세례 요한의 외치는 소리, 즉 "독 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는 외침을 듣고 구원의 길을 찾기 위해서 나왔다. 이 군중들은 하나같이 예수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더 나아가 철저한 반그리스도 적인 사람들, 예수를 모함하고, 비난하고, 음모를 꾸미고 붙잡아 죽인 사람 들인 유대인까지도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가 누구인지를 알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을 미루어 보면 당시 세례 요한이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 의 초점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세례 요한에 대한 유대인들의 관심은 "그가 메시야인가"에 있었다. 그래서 저들의 계속된 질문은 "당신이 메시야인가"이다.
그러면 유대인들에게 메 시야는 어떤 존재인가 유대인에게 있어서 메시야는 저들의 궁극적 희망이다. 메시야는 저들을 정치적 질고로부터 구해줄 하나님의 은총이다. 지금 유 대인들이 처한 상황은 로마의 식민지 체제에서 온갖 억압을 당하며 민족 전 체가 고난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메시야가 오시면 지금의 고난과 압제도 끝나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새로운 세계,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시작된다 고 믿었다. 그래서 저들의 관심은 언제나 메시야에 있었다. 이것을 메시야 대망이라고 한다. 메시야 대망은 유대사회에서는 신분과 귀천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었다. 이런 이유로 요단강 건너편 광야에는 이스라엘 에 임하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기 위하여 무리들이 몰려 나왔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있었다. 여기에는 서민 대중 뿐만 아니라 공무원, 관료, 권력자, 심지어는 예루살렘의 제사장과 레위인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적그리스도 집단이 유대인들까지도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오도록 사람을 보낸 것이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증상은 혼돈이다. 무엇이 진리이 고 무엇이 비 진리인지, 또 어떤 것이 진짜이고 가짜인지에 대한 판단의 기 준이나, 또는 선과 악의 가치규준이 뒤바뀌거나 혼미하게 되어버린 복잡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리고 관심이 있다면 어떻게 하면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더 많이 즐길 것인가에만 관심을 두는 지극히 세속적 가치에 메어 사는 시대이다. 이러한 혼돈 속에서 사람들은 생기를 잃고, 희망을 버 리고 있다. 누군가가 이 사람들에게 희망의 불꽃을 당겨주어야 한다.
그것은 물질의 풍요만이 아니다. 출세에 대한 약속도 아니다. 쾌락에 대한 약속도 아니다. 이제사람들은 이런 것들에는 지쳐있다. 저들은 이제 새로운 대답을 듣기 원하고 있다. 물질의 풍요와 출세에만 관 심을 두고 살았던 저들이 이제 영적인 풍요와 영원한 가치에 대해 설명듣기 를 원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사는 길이요,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대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그들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시대의 사람들 은 자신들이 스스로는 일어설 수 없을 만큼 지쳐 있으면서도 우리 그리스도 인들을 향하여 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던졌던 질문, "당신은 누구입니 까"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나치게 세속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이 살던 시대의 민중들은 외모를 꾸미는 일에 지나치게 사치하고, 먹고 마시는 일에 지나치게 낭비하는 생활에 젖어 있었다(눅3:10-11).
세리로 상징되는 공무원들은 부당한 방법으로 뇌물을 챙기는데 혈안이 되어 있 었다(눅3:12-13). 군인들로 상징된 권력자들은 부정과 부패의 구조 속에서 자기 이익을 극대화시키는데 권력을 사적인 도구로 만들고 있었다.(눅 3:13-14) 이렇게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향락과 퇴폐와 부정과 부패, 그 리고 지나친 이기주의가 만연한 상황에서 세례 요한은 살았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이런 타락한 세상에서 자기를 더럽히지 않았다. 마 3:4절은 당시 세례 요한의 삶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세속적 가치와는 초연하게 거룩한 사명자로서 하나님이 맡 기신 사명을 수행하는데 흔들림없이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오늘 이 시대의 사람들은 세례 요한과 같은 그리스도인을 기다리고 있다. 비록 저들이 기독교를 반대하고, 심지어 적대감을 가진 자들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인, 당신 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들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당신들이 우리의 희망인가 당신들이 우리의 고난을 이겨내는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가" 라는 질문을 들고, 우리에게 그런 대답듣기를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다. 따라서 세속화 물결이 거센 물살을 이루며, 우리의 삶과 영혼을 혼탁하 게 오염시키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례 요한처럼 하나님 앞에서는 더욱 경건하고, 세상에서는 더욱 거룩한 생활을 지켜가야 한다. 세상은 지금 이런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들의 기대에 대답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우리 남원지역에서는 우리 남 원교회에 성도들이다. 다음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진리를 위해 생명을 바칠 자세가 보이지 않 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헤롯에게 부당하게 체포되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공의를 말했기 때문이다. 눅 3:18-20은 세례 요한의 마 지막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또 기타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이렇게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공의를,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세례 요한을 증언하기 위해 보내어진 사람이라고 한다. 증언하는 사람, 마르투레스, 즉 순교자라는 말이다.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들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키기 위 해 목숨을 건다면, 아니 내 이름 석자만 걸어도 세상은 우리를 주목할 것이 고, 세상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고 질문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희망으로 가득한 말한마디를 들으려 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지방선거전이 과열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경건하고, 세상에서는 거룩한 자리를 이 탈하지 말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모습으로, 어떤 유혹과 손짓에도 흔들 림없이 그리스도인의 자리를 지키자. 그리고 그리스도의 진리를 증언하는 일에 몸과 마음과 생명을 다바쳐 헌신하고 충성하자. 그러면 저들은 지금은 협조해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할 것이지만, 그들마져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게 기대를 걸고, 자신들의 장래에 관한 희망의 대답을 들으려 할 것이다. 하나님은 세례 요한을 사랑하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 대하 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 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11:11)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 즉 여자 가 낳은 사람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은 세례 요한이었다. 그가 위대한 인 물이 된 것은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높은 권력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머리가 뛰어나서 고시를 패스한 관료집단에 속해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세 속의 탁류에 휩쓸려 살지 않는 경건함과 거룩함,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자기 생명을 다바쳐 증언할 수 있는 진리에 대한 충성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 이다. 이런 이유로 세례 요한은 적대자들까지도 사람을 보내어 자신들의 궁 극적 관심에 대한 대답을 듣기 원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장차 하나님 나라 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지위에 비교하면 보잘 것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빛을 증언하는 삶이 아니라 빛으로 사는 사람 이고, 진리를 증언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 안에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모두는 세상에서 빛에 관하여 설명할 필요없이 빛을 비추기만 하면 된다. 세상에서 진리를 가르칠 필요없이 진리로 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우리를 적대하는 사람들까지도 우리에게서 희망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당신은 누구입니까" 하는 질문을 할 것이다.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15-16)
그런데 토끼들이 물가에 이르렀을 때 개구리들이 놀라서 물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생각을 달리했다. "아, 우리 보다 약한 존재가 있구나. 저렇게 약한 존재도 사는데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강한가. 그리고 살 길이 얼마나 많은가. 이렇게 죽지는 말자" 토 끼들은 자살하지 않기로 하고 다시 숲으로 뛰어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늘 우리가 처한 시대적 위기는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애착과 기대를 버리는데 있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인간을 호모 에스페 란스(Homo esperans)-"희망하는 인간"이라고 정의했다. 인간은 꿈과 희 망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희망이 사라지면 삶에 대한 의욕과 생에 대한 애착을 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은 삶을 풍성하게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꿈과 희망 을 스스로 가지는 존재라기 보다는 어떤 표상을 통하여 그것들을 구체화하 고, 실현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에게 희망의 표상이 필요하다. 그러면 누가 희망의 표상이 될 수 있을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그것을 찾아보자.
오늘 19절 말씀은 "유대인들이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세례를 주는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어 '당신은 누구입니 까' 라고 질문했다"고 한다. 유대인과 세례 요한, 이들은 어떤 관계인가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게하려하여 보냄받은 사람이다. 요 1:6-7은 세례 요한을 이렇게 알려주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 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 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 라." 여기에서 세례 요한을 규정하는 몇 개의 중요한 낱말이 있는데, 그것은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과 증거라는 말이다. "보낸다" 라는 말은 헬라 어로 "아포스텔로"이다. 이 말의 명사형이 "아포스톨로스" 이다. 아포스톨로 스의 번역이 사도이다. 사도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사람이다. 또 "증거하 다"라는 말은 "마르투레오" 이고, 이 말의 명사형이 "마르투레스", 즉 순교 자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 으로서, 그는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증언하되, 생명을 바쳐 증언하는 순교자 로 보냄을 받은 것이다. 실제로 세례 요한은 진리를 증언하다가 불의한 헤 롯에게 죽임을 당한 순교자가 되었다. 그러면 유대인은 누구인가 요한복음에는 유대인이라는 단어가 66번이나 쓰여지고 있다. 물론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에도 유대인이라는 이름이 쓰여 지고 있으나 각 책마다 다섯 번 정도밖에 쓰여지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요 한복음에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많이 쓰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요한복음에서 쓰여지고 있는 유대인이라는 말이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에 쓰여지고 있는 유대임이라는 말과 그 개념이 다르다는 것이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에 쓰여진 유대인이라는 말은 예수님과 관계있는 일, 즉 유 대인의 왕, 예수님에게 구원을 청했던 유대인들로서, 예수님에게 친근한 사람들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66번이나 유대인이라는 단어를 사 용하면서 철저하게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서 예수님과 적대적 관계에 있는 사람을 표현할 때 거의 사용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요한복음에서 유대인은 적그리스도로 묘사되고 있다. 세례 요한과 유대인의 관계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순교 자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방해하고, 탄압하고, 복음전파자들을 박해했던 적그리스도의 관계이다.
그런데 이 유대인이 요한에게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까 지 사람을 보냈다. 보낸 목적이 "당신이 누구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가 져오는데 있었다. 저들은 세례 요한에게서 무엇인가 한 마디 말을 듣고 싶 었던 것이다. 세례 요한은 당시 사람들에게 관심의 초점이었다. 세례 요한이 외치는 한마 디에 온 유대에서 사람들이 모여 왔다. 이렇게 모여온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하여 온 것도 아니고, 권력을 얻기 위하여 온 것도 아니고, 부자되기 위하여 온 것도 아니다. 오직 저들이 온 것은 세례 요한의 외치는 소리, 즉 "독 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는 외침을 듣고 구원의 길을 찾기 위해서 나왔다. 이 군중들은 하나같이 예수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더 나아가 철저한 반그리스도 적인 사람들, 예수를 모함하고, 비난하고, 음모를 꾸미고 붙잡아 죽인 사람 들인 유대인까지도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가 누구인지를 알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을 미루어 보면 당시 세례 요한이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 의 초점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세례 요한에 대한 유대인들의 관심은 "그가 메시야인가"에 있었다. 그래서 저들의 계속된 질문은 "당신이 메시야인가"이다.
그러면 유대인들에게 메 시야는 어떤 존재인가 유대인에게 있어서 메시야는 저들의 궁극적 희망이다. 메시야는 저들을 정치적 질고로부터 구해줄 하나님의 은총이다. 지금 유 대인들이 처한 상황은 로마의 식민지 체제에서 온갖 억압을 당하며 민족 전 체가 고난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메시야가 오시면 지금의 고난과 압제도 끝나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새로운 세계,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시작된다 고 믿었다. 그래서 저들의 관심은 언제나 메시야에 있었다. 이것을 메시야 대망이라고 한다. 메시야 대망은 유대사회에서는 신분과 귀천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었다. 이런 이유로 요단강 건너편 광야에는 이스라엘 에 임하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기 위하여 무리들이 몰려 나왔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있었다. 여기에는 서민 대중 뿐만 아니라 공무원, 관료, 권력자, 심지어는 예루살렘의 제사장과 레위인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적그리스도 집단이 유대인들까지도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오도록 사람을 보낸 것이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증상은 혼돈이다. 무엇이 진리이 고 무엇이 비 진리인지, 또 어떤 것이 진짜이고 가짜인지에 대한 판단의 기 준이나, 또는 선과 악의 가치규준이 뒤바뀌거나 혼미하게 되어버린 복잡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리고 관심이 있다면 어떻게 하면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더 많이 즐길 것인가에만 관심을 두는 지극히 세속적 가치에 메어 사는 시대이다. 이러한 혼돈 속에서 사람들은 생기를 잃고, 희망을 버 리고 있다. 누군가가 이 사람들에게 희망의 불꽃을 당겨주어야 한다.
그것은 물질의 풍요만이 아니다. 출세에 대한 약속도 아니다. 쾌락에 대한 약속도 아니다. 이제사람들은 이런 것들에는 지쳐있다. 저들은 이제 새로운 대답을 듣기 원하고 있다. 물질의 풍요와 출세에만 관 심을 두고 살았던 저들이 이제 영적인 풍요와 영원한 가치에 대해 설명듣기 를 원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사는 길이요,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대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그들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시대의 사람들 은 자신들이 스스로는 일어설 수 없을 만큼 지쳐 있으면서도 우리 그리스도 인들을 향하여 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던졌던 질문, "당신은 누구입니 까"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나치게 세속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이 살던 시대의 민중들은 외모를 꾸미는 일에 지나치게 사치하고, 먹고 마시는 일에 지나치게 낭비하는 생활에 젖어 있었다(눅3:10-11).
세리로 상징되는 공무원들은 부당한 방법으로 뇌물을 챙기는데 혈안이 되어 있 었다(눅3:12-13). 군인들로 상징된 권력자들은 부정과 부패의 구조 속에서 자기 이익을 극대화시키는데 권력을 사적인 도구로 만들고 있었다.(눅 3:13-14) 이렇게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향락과 퇴폐와 부정과 부패, 그 리고 지나친 이기주의가 만연한 상황에서 세례 요한은 살았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이런 타락한 세상에서 자기를 더럽히지 않았다. 마 3:4절은 당시 세례 요한의 삶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세속적 가치와는 초연하게 거룩한 사명자로서 하나님이 맡 기신 사명을 수행하는데 흔들림없이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오늘 이 시대의 사람들은 세례 요한과 같은 그리스도인을 기다리고 있다. 비록 저들이 기독교를 반대하고, 심지어 적대감을 가진 자들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인, 당신 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들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당신들이 우리의 희망인가 당신들이 우리의 고난을 이겨내는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가" 라는 질문을 들고, 우리에게 그런 대답듣기를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다. 따라서 세속화 물결이 거센 물살을 이루며, 우리의 삶과 영혼을 혼탁하 게 오염시키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례 요한처럼 하나님 앞에서는 더욱 경건하고, 세상에서는 더욱 거룩한 생활을 지켜가야 한다. 세상은 지금 이런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들의 기대에 대답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우리 남원지역에서는 우리 남 원교회에 성도들이다. 다음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진리를 위해 생명을 바칠 자세가 보이지 않 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헤롯에게 부당하게 체포되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공의를 말했기 때문이다. 눅 3:18-20은 세례 요한의 마 지막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또 기타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이렇게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공의를,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세례 요한을 증언하기 위해 보내어진 사람이라고 한다. 증언하는 사람, 마르투레스, 즉 순교자라는 말이다.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들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키기 위 해 목숨을 건다면, 아니 내 이름 석자만 걸어도 세상은 우리를 주목할 것이 고, 세상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고 질문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희망으로 가득한 말한마디를 들으려 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지방선거전이 과열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경건하고, 세상에서는 거룩한 자리를 이 탈하지 말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모습으로, 어떤 유혹과 손짓에도 흔들 림없이 그리스도인의 자리를 지키자. 그리고 그리스도의 진리를 증언하는 일에 몸과 마음과 생명을 다바쳐 헌신하고 충성하자. 그러면 저들은 지금은 협조해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할 것이지만, 그들마져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게 기대를 걸고, 자신들의 장래에 관한 희망의 대답을 들으려 할 것이다. 하나님은 세례 요한을 사랑하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 대하 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 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11:11)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 즉 여자 가 낳은 사람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은 세례 요한이었다. 그가 위대한 인 물이 된 것은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높은 권력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머리가 뛰어나서 고시를 패스한 관료집단에 속해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세 속의 탁류에 휩쓸려 살지 않는 경건함과 거룩함,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자기 생명을 다바쳐 증언할 수 있는 진리에 대한 충성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 이다. 이런 이유로 세례 요한은 적대자들까지도 사람을 보내어 자신들의 궁 극적 관심에 대한 대답을 듣기 원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장차 하나님 나라 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지위에 비교하면 보잘 것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빛을 증언하는 삶이 아니라 빛으로 사는 사람 이고, 진리를 증언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 안에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모두는 세상에서 빛에 관하여 설명할 필요없이 빛을 비추기만 하면 된다. 세상에서 진리를 가르칠 필요없이 진리로 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우리를 적대하는 사람들까지도 우리에게서 희망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당신은 누구입니까" 하는 질문을 할 것이다.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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