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일꾼 (고전4:1-5)
본문
서구의 사람들은 '나'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나'를 무척 강조하는 데도 서로서로 협력해서 공동체의 삶을 잘 이루어 나가는 반면 ,우리는 '우리'라는 말 을 자주 사용하고 '우리'를 많이 내세우면서도 협동이 잘 되지 아니합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어느 정신과 의사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오랜 임상 생 할에서 환자들의 의식세계를 분석해 본 경험으로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우리' 의 개념은, 나와 상관이 없는 한 개체를 포함한 '우리'가 아니고 혈연, 지연, 학 연 관계로 맺어진 '우리'의 개념이기 때문에 이 범주에 들지 않는 이웃에 대해서는 철저히 배타적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나'보다 '우리'를 강조합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협동심이 '나'를 강조하는 서구인들보다 부족합니다. 정신과 의사의 지론에 따르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아해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먼저 '우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했습니다. 여기서 ' 우리'는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우리'의 개념이 아닙니다. 혈연, 지연, 학연 을 초월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생의 의미,목적, 희망을 가진 자들로서의 '우리' 개념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21세기를 바라 보며 사는 우리들도 역시 본문에 기록된 '우리'의 범주에 들어 가게 됩니다. 우리도 한 하나님, 한 주님, 한 성령님, 한 믿음, 같은 세례를 받고 같은 생의 목적과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것 을 전제로 한다면 오늘 본문이 지금 우리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인지 아닌지는 자명해 질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당연히 직접 적용될 수 있는 본문입니다. 본문 그대로 인용하면 우리는 일꾼입니다.
누구의 일꾼인가 하면, 그리스도 의 일꾼입니다. 또한 우리는 맡은 자입니다. 무엇을 맡은 자인가 하면 하나님 의 비밀을 맡은 자입니다. 여기서 '일꾼'이라는 말은 원어로 '휘페레타스'라는 말로 '배에서 노를 젖는 사람'이란 어원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일꾼이라함은 오직 그리스도께만 종속되어 그분의 시중을 드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맡은 자'란 흔히 청지기로 번역되는 '오 이코노모스'(-)로 전적으로 주인의 뜻을 받아 주인의 재산 과 사람들을 관리하는 직책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하수인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아 관할 하고 전하는 자들입니다. 성서 원문대 로 번역하면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심오한 진리를 맡은 관리인'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누가 나를 신임해서 책임을 맡길 때, 책임감으로 마음은 무거우면서도 상당 한 긍지와 기쁨을 느기게 됩니다. 우리는 누가 나를 신임하고, 중요한 일을 위 임해 주었을 때 뿌듯한 긍지를 느낍니다. 어떤 일을 맡아 하면서 조금 벅차고 힘이 들더라도 그 일을 맡긴 이가 나를 인정해 줄 때는 덜 힘이 들고 오히려 힘 이 솟아납니다. 다른 일보다 더 열심을 내게 됩니다. 그일을 나에게 믿고 맡겼 을 때 말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임하고 우리에게 비밀을 맡겨 주 셨다는 데 대하여 우리는 진정으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줄 압니다. 자, 그러 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비밀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비밀의 내용은 '복음'입니다. 이 비밀은 우리 의 죄를 씻어내고 자유케 하는 비밀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비밀로 되어 있지 아니합니다. 그 깊은 하나님의 지혜가 모두 알 려지게 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그 내용이 가리워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밀이 세상적으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겨 지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알려진다"(마 11:25)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세상 지혜로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게서 기뻐 나타내시고자 하는 자들에게만 알려집니다.
특별히 어린 아이와 같이 순결하고 겸손한 마음의 소유자들에게만 알려지는 비밀입니다. 복음 외에 비밀로 간주될 수 있는 것, 또한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소망에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가 되었다는 사실, 그 자 체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비밀입니다. 사회에서도 촉망을 받는 유망한 어떤 젊은이가 목사가 되기 위해서 신학교에 가겠다는 결심을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을 때, 그 젊은이의 아버지는 세상에 돈 벌어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이 하고 많은데 왜 하필이면 목사가 되려고 하느냐고 아들의 신학교 입학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 젊은이의 아버지에게는 아들 이 목사가 되고자 하는 일이 이해가 될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젊 은이에게는 아버지가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소명의 비밀이 있었습니다. 그 비 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밀을 맡은 자들, 즉 우리들에게 비밀을 맡겨 주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충성입니다.
본문:2에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 이니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2:10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 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충성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것이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 탁하라"(딤후 2:2)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충성되지 못한 자들에게는 그 내용이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충성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충성을 ' 피스토스'라고 하는데 이말의 뜻은 '충성스러운', '믿음직하고 신뢰할 수 있는' 입니다. 즉, 충성된 사람이란 폴커너(Falconer)가 말했듯이 "이러한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믿으면 박해에도 실패에도 굴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 들의 심령은 그리스도께 확고히 이어져 있어서 어떠한 신변의 위험도 그를 그 충 성의 길로부터 유혹할 수가 없으며 또한 어떠한 거짓된 가르침의 유혹도 그리스도교 진리의 곧은 길로부터 그를 벗어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충성'은 신실성을 의미합니다. 이 신실성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나야 할 '삶 의 질'입니다. 먼저 우리의 신실성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이웃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우리를 비난할 수 있는 것들이 없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시인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시인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현실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삶을 몇가지 내용으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거짓과 불의가 있는 곳에서 참과 의를 드러내며 사는 삶 절망과 좌절이 있는 곳에서 희망과 위로를 주는 삶 분열과 다툼이 있는 곳에 화바과 화평을 심는 삶 상처와 아픔이 있는 곳에 치유의 은사를 나타내는 삶 가난과 질병이 있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현해 가는 삶 도덕적 타락과 횡포가 있는 곳에 삶의 빛을 던져 주는 삶 이러한 삶이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삶입니다.
본문:3에 사도 바울은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를 시인하면서 살아 갔습니다. 궁핍할 때, 옥에 갇혔을 때,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할 때, 어떤 상황 에서도 그는 그리스도를 시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형편에서도 굴하지 아 니하고 복음 전파의 기회로 삼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여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시인한 어느 선교사 부부의 신앙체험담 한 가지가 있습니다.
미국인 선교사 부부가 남미의 아우카라는 곳의 인디언들에 게 가서 선교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남미 인디언 지역에서 사역 을 하고는 있었지만 서로 떨어져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인 엘리자베 스는 매일 아침마다 인근 지역에서 전파로 소식을 받아서 종합하여 남편에게 소 식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엘리자베스는 남편으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받았습니다. 남 편이 선교하는 인디언 지역에 대홍수가 나서 그 지역은 물바다가 되었고, 1년동 안 온 힘을 다해서 거의 완성단계에 있던 선교교육 센터가 몽땅 홍수에 밀려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부인 엘리자베스는 그의 남편 엘리옷이 1년 동안 이 선교센 터를 짓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렸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제 그 모든 노력과 수고의 결실이 눈앞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즈음에 송 두리째 물에 휩쓸려 버렸던 것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이 소식을 접수하고는 망연자실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엘이옷이, 아니면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 까 하나님, 이해할 수 있게 가르쳐 주십시요." 얼마 후 엘리자베스는 남편으로부터 소식을 받았습니다. 그 소식에는 홍수 에 떠내려가는, 피나는 노력의 열매인 선교센터를 보면서 그가 얼마나 허탈에 빠 져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 엘리옷은 그 소식의 끝을 이렇게 맺고 있었습니다. "절망의 눈으로 도도히 흘러가는 홍수의 파괴를 보고 있을 때 흐르는 물결과 함께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엘리옷아, 이런 때에라도 나 를 믿을 수 있느냐' 그 때 내 심령이 열리며 나는 감격하여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절망의 순간에도 하나님 을 시인할 수 있고 어떤 증오의 순간에도 남을 용서할 수 있는 삶이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삶입니다. 그 다음으로 맡은 자들의 신실성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본문:3 하반절과:4 상반절에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웃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삶을 사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단절 가운데 있으면서, 내 자신과의 관계에서 신실해 진다는 것은 더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검토해 볼 때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의 분명한 자 기 의식과 그리고 그것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사소한 이익과 명예를 탐해서 그것에 예속되어 있지는 아니한지, 신앙적 차원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검토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인간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인간이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과는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와 가장 가까운 나를 잘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헬라의 기본적인 윤리법칙의 하나 가 "사람아, 네 자신을 알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맡은 자들의 신실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입증되야 합니다.
본문:4의 하반절에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판단에 직면하지 않으면 아니됩니다. 궁극적으로는 이것이야말로 유일한 참된 판단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결정적인 판단입니다. 해리 애머슨 포스딕 (Harry Emerson Fosdick)이라고 하는 영성이 뛰어난 목사는 충성의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의 내면의 충성을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어떠한 위치에 있든지 당신의 비밀한 헌신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리고 즐겁게 생활하십시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은, 어느 체제나 이념, 정치 지도자, 개인에게 충 성을 바쳐서는 아니됩니다. 오직 하나님께 충성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 기에 부끄러움 없이 정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가운 데서도 소자 한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줄 수 있고, 이웃에게 손해가 되고 삶의 질서를 파괴하는 일이면, 이웃이 보지 않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결단하고 그러한 일에서 떠날 수 있어야 하는 그러한 삶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삶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람의 일꾼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일꾼이며,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입니다. 맡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신실입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와의 관계에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끝까지 신실해야 합니다.
누구의 일꾼인가 하면, 그리스도 의 일꾼입니다. 또한 우리는 맡은 자입니다. 무엇을 맡은 자인가 하면 하나님 의 비밀을 맡은 자입니다. 여기서 '일꾼'이라는 말은 원어로 '휘페레타스'라는 말로 '배에서 노를 젖는 사람'이란 어원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일꾼이라함은 오직 그리스도께만 종속되어 그분의 시중을 드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맡은 자'란 흔히 청지기로 번역되는 '오 이코노모스'(-)로 전적으로 주인의 뜻을 받아 주인의 재산 과 사람들을 관리하는 직책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하수인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아 관할 하고 전하는 자들입니다. 성서 원문대 로 번역하면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심오한 진리를 맡은 관리인'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누가 나를 신임해서 책임을 맡길 때, 책임감으로 마음은 무거우면서도 상당 한 긍지와 기쁨을 느기게 됩니다. 우리는 누가 나를 신임하고, 중요한 일을 위 임해 주었을 때 뿌듯한 긍지를 느낍니다. 어떤 일을 맡아 하면서 조금 벅차고 힘이 들더라도 그 일을 맡긴 이가 나를 인정해 줄 때는 덜 힘이 들고 오히려 힘 이 솟아납니다. 다른 일보다 더 열심을 내게 됩니다. 그일을 나에게 믿고 맡겼 을 때 말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임하고 우리에게 비밀을 맡겨 주 셨다는 데 대하여 우리는 진정으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줄 압니다. 자, 그러 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비밀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비밀의 내용은 '복음'입니다. 이 비밀은 우리 의 죄를 씻어내고 자유케 하는 비밀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비밀로 되어 있지 아니합니다. 그 깊은 하나님의 지혜가 모두 알 려지게 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그 내용이 가리워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밀이 세상적으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겨 지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알려진다"(마 11:25)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세상 지혜로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게서 기뻐 나타내시고자 하는 자들에게만 알려집니다.
특별히 어린 아이와 같이 순결하고 겸손한 마음의 소유자들에게만 알려지는 비밀입니다. 복음 외에 비밀로 간주될 수 있는 것, 또한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소망에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가 되었다는 사실, 그 자 체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비밀입니다. 사회에서도 촉망을 받는 유망한 어떤 젊은이가 목사가 되기 위해서 신학교에 가겠다는 결심을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을 때, 그 젊은이의 아버지는 세상에 돈 벌어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이 하고 많은데 왜 하필이면 목사가 되려고 하느냐고 아들의 신학교 입학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 젊은이의 아버지에게는 아들 이 목사가 되고자 하는 일이 이해가 될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젊 은이에게는 아버지가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소명의 비밀이 있었습니다. 그 비 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밀을 맡은 자들, 즉 우리들에게 비밀을 맡겨 주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충성입니다.
본문:2에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 이니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2:10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 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충성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것이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 탁하라"(딤후 2:2)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충성되지 못한 자들에게는 그 내용이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충성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충성을 ' 피스토스'라고 하는데 이말의 뜻은 '충성스러운', '믿음직하고 신뢰할 수 있는' 입니다. 즉, 충성된 사람이란 폴커너(Falconer)가 말했듯이 "이러한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믿으면 박해에도 실패에도 굴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 들의 심령은 그리스도께 확고히 이어져 있어서 어떠한 신변의 위험도 그를 그 충 성의 길로부터 유혹할 수가 없으며 또한 어떠한 거짓된 가르침의 유혹도 그리스도교 진리의 곧은 길로부터 그를 벗어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충성'은 신실성을 의미합니다. 이 신실성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나야 할 '삶 의 질'입니다. 먼저 우리의 신실성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이웃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우리를 비난할 수 있는 것들이 없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시인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시인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현실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삶을 몇가지 내용으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거짓과 불의가 있는 곳에서 참과 의를 드러내며 사는 삶 절망과 좌절이 있는 곳에서 희망과 위로를 주는 삶 분열과 다툼이 있는 곳에 화바과 화평을 심는 삶 상처와 아픔이 있는 곳에 치유의 은사를 나타내는 삶 가난과 질병이 있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현해 가는 삶 도덕적 타락과 횡포가 있는 곳에 삶의 빛을 던져 주는 삶 이러한 삶이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삶입니다.
본문:3에 사도 바울은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를 시인하면서 살아 갔습니다. 궁핍할 때, 옥에 갇혔을 때,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할 때, 어떤 상황 에서도 그는 그리스도를 시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형편에서도 굴하지 아 니하고 복음 전파의 기회로 삼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여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시인한 어느 선교사 부부의 신앙체험담 한 가지가 있습니다.
미국인 선교사 부부가 남미의 아우카라는 곳의 인디언들에 게 가서 선교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남미 인디언 지역에서 사역 을 하고는 있었지만 서로 떨어져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인 엘리자베 스는 매일 아침마다 인근 지역에서 전파로 소식을 받아서 종합하여 남편에게 소 식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엘리자베스는 남편으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받았습니다. 남 편이 선교하는 인디언 지역에 대홍수가 나서 그 지역은 물바다가 되었고, 1년동 안 온 힘을 다해서 거의 완성단계에 있던 선교교육 센터가 몽땅 홍수에 밀려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부인 엘리자베스는 그의 남편 엘리옷이 1년 동안 이 선교센 터를 짓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렸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제 그 모든 노력과 수고의 결실이 눈앞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즈음에 송 두리째 물에 휩쓸려 버렸던 것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이 소식을 접수하고는 망연자실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엘이옷이, 아니면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 까 하나님, 이해할 수 있게 가르쳐 주십시요." 얼마 후 엘리자베스는 남편으로부터 소식을 받았습니다. 그 소식에는 홍수 에 떠내려가는, 피나는 노력의 열매인 선교센터를 보면서 그가 얼마나 허탈에 빠 져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 엘리옷은 그 소식의 끝을 이렇게 맺고 있었습니다. "절망의 눈으로 도도히 흘러가는 홍수의 파괴를 보고 있을 때 흐르는 물결과 함께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엘리옷아, 이런 때에라도 나 를 믿을 수 있느냐' 그 때 내 심령이 열리며 나는 감격하여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절망의 순간에도 하나님 을 시인할 수 있고 어떤 증오의 순간에도 남을 용서할 수 있는 삶이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삶입니다. 그 다음으로 맡은 자들의 신실성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본문:3 하반절과:4 상반절에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웃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삶을 사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단절 가운데 있으면서, 내 자신과의 관계에서 신실해 진다는 것은 더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검토해 볼 때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의 분명한 자 기 의식과 그리고 그것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사소한 이익과 명예를 탐해서 그것에 예속되어 있지는 아니한지, 신앙적 차원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검토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인간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인간이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과는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와 가장 가까운 나를 잘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헬라의 기본적인 윤리법칙의 하나 가 "사람아, 네 자신을 알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맡은 자들의 신실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입증되야 합니다.
본문:4의 하반절에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판단에 직면하지 않으면 아니됩니다. 궁극적으로는 이것이야말로 유일한 참된 판단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결정적인 판단입니다. 해리 애머슨 포스딕 (Harry Emerson Fosdick)이라고 하는 영성이 뛰어난 목사는 충성의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의 내면의 충성을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어떠한 위치에 있든지 당신의 비밀한 헌신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리고 즐겁게 생활하십시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은, 어느 체제나 이념, 정치 지도자, 개인에게 충 성을 바쳐서는 아니됩니다. 오직 하나님께 충성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 기에 부끄러움 없이 정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가운 데서도 소자 한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줄 수 있고, 이웃에게 손해가 되고 삶의 질서를 파괴하는 일이면, 이웃이 보지 않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결단하고 그러한 일에서 떠날 수 있어야 하는 그러한 삶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삶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람의 일꾼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일꾼이며,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입니다. 맡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신실입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와의 관계에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끝까지 신실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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