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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빌1:12-24)

본문

흔히 빌립보서를 가르처서 성경학자들은 “기쁨의 서신”이다 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이 짧은 서신가운데 “기쁨”이라는 단어가 19번이나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2장18절에“이와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3장1절에“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4장4절에“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상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은 기뻐했고 모든 성도들이 자신과 같이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할것을 강조하고 잇습니다. 그러나 이 기쁨을 강조하고 있는 바울의 상황은 결코 기뻐할수만 있는 상황은 아닌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의 상황은 도저히 기뻐할수 없는 상황 일뿐 아니라 오히려 있는 기쁨도 상실할수 밖에 없는 상황임을 말씀을 통해 살펴볼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안에서 마땅히 기쁨을 누리고 있고,또한 기뻐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이것이 성도의 모습이 되어야 할것을 말씀은 말합니다. 성도는 어떤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요 영광이요 은혜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바울의 기쁨에 있어서 오히려 그의 기쁨을 위협하는 세가지 위기가 있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바울의 기쁨을 위협했던 첫번째 위기는 환경의 위기 였습니다. 두번째는 인간관계의 위기였습니다. 세번째는 죽음의 불안이 가져다 주는 위협이 였습니다. 우리성도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기쁨을 상실하는 이유가 있다면첫째:좋지않은 환경가운데 잇다든가둘째:원만하지 못한 인간관계라든가 세째;질병이나 죽음에 대한 불안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환경과 위기앞에서 기쁨을 잃지않은 참으로 풍성한 삶을 누릴수 있었는데 오늘 말씀을 통해 그 비결을 말씀하고 있입니다.
첫째:기뻐할수 없는 상황가운데서 기뻐할수 있는 바울의 모습을 보십시다.
12절에 보면“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바울이 지금 당하고 있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13절에서는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바울에게 당한 일이 있습니다,그것은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의 감옥에 죄수로 갇히게 된일입니다. 감옥이란 자유가 완전히 속박된 곳입니다. 감옥이란 환경은 도무지 미래를 볼수없는 앞길이 캄캄한 곳입니다. 순간순간 절망감이 엄습하며,모든 꿈과 희망을 포기하게 만드는 환경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12절에“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자신이 갇힌 절망적 상황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13절에“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안에서 온 시위대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이 시위대는 로마 황제를 지키고 있었던 경호원들입니다.오늘날로 말하면 청화대 경호실과 같은 것입니다. 바로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타날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 상황속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놀라운 계기를 갖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시각과 관점을 볼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감옥이라는 환경을 보기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봅니다. 바울은 절망의 감옥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의 손길이 역사하고 계신것을 보고 있습니다. 비록 감옥이 바울의 손과 발을 묶을 수 있었지만 바울의 자유와 영혼과 기도는 묶을수 없었습니다.감옥은 바울을 전혀 부자유 스럽게 할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 감옥에 들어온 것이 우연이 된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된 것임을 인정하는 믿음이 잇었습니다. 일찌기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여러분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요,제가 세계의 수도인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 세계를 향하여 선포되는 광경을 보고 싶습니다.,로마에 갈수 있는 길이 열리도록 기도해 주십시요.“이렇게 기도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나 로마로 갈수 있는 길이 쉽게 열리지 않앗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여러번 가기를 원했지만 그길이 막혔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바울사도는 체포를 당합니다.그리고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호송되어 갑니다. 성도여러분! 바울이 체포당한 사건이 우연한 사건입니까돌발적인 사건으로 돌릴수 있을까요아닙니다. ”하나님 저를 로마로 보내 주십시요!“했던 바울의 기도를 응답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에 들어가서도 이환경은 자신의 기도의 응답이요 이환경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허용하신 환경임을 알았습니다.하나님의 역사는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방법과 다릅니다.하나님의 생각은 우리보다 더 높고 지혜롭다고 말씀하십니다. 말슴은 참새한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떨어질수 없다고 말씀합니다.또한 우리의 머리털 하나까지도 세고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특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환경은 하나님의 주권아래 허용되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삶이 전개되고 있는 환경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내게 주워진 그 환경이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세상에 많은 패배자나 실패자들은 자신들의 패배를 환경의 탓으로 돌리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그 어떠한 환경가운데서도 절망할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성도들의 처해있는 모든 환경은 모든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성도에게 일어나는 일은 우연이 아니라 거기에는 엄청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감옥에서도 이와같은 편지를 씁니다”주안에서 항상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두번째 기뻐할수 없는 인간관계임에도 기뻐하는 바울의 모습입니다. 사실 기쁨을 빼앗아가는 것은 환경의 어려움도 있지만은 그것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깨어진 인간관계가 더욱 못견디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어떠한 어려운 상황이나 고난은 이기겠는데 인간관계가 한번 디틀리기 시작할때 참을 수가 없다고들 이야기 합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관계가 뒤틀리고 깨어짐은 우리 마음의 기쁨을 빼앗아 갈수 잇습니다. 더군다나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나를 당연히 이해해주오야 할 사람이 나를 이해 못하고,나를 따돌리고 오해를 할 때 우리는 죽고싶을 만큼 아픔에 빠지기도 합니다. 현대인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문제로 시달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15절-17절에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라게 할 줄을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6절의 ”이들은-바울을 이해ㅘ는 사람이요 17절의 저들은-바울을 미워하고 중상모략하는 자들입니다. 바울의 삶에 인간관계가 뒤틀린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기뻐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18절“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참으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바울은 누구와의 인간관계보다도 그리스도께 받은 사명을 우선 했습니다. 바울은 인간관계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지 않고 인각관계가 내뜻대로 잘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울은 아픈 인간관계 임에도 불구하고 기뻐할수 있었던 것은 자신에게 주워진 전도와 사명을 우선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것은 초대 사도들의 자세입니다. 예루살렘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부활을 전파하지 말기를 요구할 때 사도들은 단호히 “우리가 사람을 기뻐게하라 하나님을 기뻐게 하라!‘ 사람을 기뻐게 하기보다는 하나님을 기뻐게 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세째:죽음의 불안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는 바울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지막으로 기쁨을 빼앗아 가는 것은 죽음의 위협입니다. 죽음은 인간 존재자체를 위협하기 때문에 모든 살아있는 사람은 두려워 합니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단어자체를 입에 올리기를 꺼려합니다. 바울에게도 이 죽음에 대한 불안이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감옥에서 사형 선고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20절에”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고백을 합니다. 23절에서는”내가 이 두 사이에 끼어있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이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이 두사이란 삶과 죽음의 사이를 말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이전에 무엇이 더욱 그리스도와 성도들을 위한 유익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있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죽음을 생각했습니다.바울은 이 죽음을 바를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라고 고백함니다. 바울의 자세는 나는 삶도 환영하고 죽음도 환영할수 있다는 자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느냐 죽느냐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바울은 오직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기를 원한다고 고백합니다.죽음까지도 초월한 바울의 믿음을 볼수 잇습니다. 죽음조차도 바울이 소유한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말씀을 맻겠습니다. 신학자 폴틸리히는 신앙이란 ”무엇 무엇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햇습니다“. 즉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수 없음에도 믿는 것이 신앙이요. 감사할수 없는 조건에도 감사하는 것이 신앙이요. 기뻐할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기뻐하는 것이요. 순종할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순종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가 이같은 믿음만 소유 한다면 우리의 환경이나 인간관계 심지어 죽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복음을 전파하는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이 될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으로 인한, 우리 성도들의 자유요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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