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용서하라 (눅17:1-4)
본문
남매가 사소한 일로 다투다가 격한 감정으로 대립하는 상태에 까지 이르렀다. 어머니가 이 모습을 보고 뛰어왔다. 오빠가 먼저 싸움을 걸었어요.누이동생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아니예요. 쟤가 먼저 시작했어요.오빠도 큰 소리로 말했다. 두 아이의 말을 다 들은 어머니는 손을 잡고 이렇게 달랬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알고 싶지 않단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누가 먼저 그만두려 하는가, 누가 먼저 화평한 사람이 되는가하는 점이란다. 노동법 개정으로 인한 노동계 파업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노동계와 정부가 제각기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극한 대립양상을 보여 국민생활에도 큰 불편을 주었고 국가경계에도 엄청난 손실을 입혔습니다. 관용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바로 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은 죄 짓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 짓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부모에게 공손하지 않고 친구에게 신실하지 않으며 윗사람에게 순종하지 않고 권위에 대항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온갖 법이 있지만 법이 잘 지켜지지 않습니다. 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엄히 경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불신자들은 말할 것도 신자들 중에서도 교회에서 죄에 대해서 너무 많이 이야기한다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상 죄를 언급하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해야 합니다. 죄가 없는 세상이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우리가 평화로운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죄를 지적하고 죄를 멀리하도록 권해야 합니다. 죄는 쾌락이 아니라 고통을 줍니다. 처음에는 죄를 지으면서 쾌락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고통으로 끝납니다. 죄는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손해를 끼칩니다. 처음에는 유익을 주는 것 같이 여겨질지라도 결국 손해를 입힙니다.
예화)경마도박으로 신세 망친 사람 기사, 도적질 죄는 장난 삼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그 사람의 인격을 파괴합니다. 죄는 다른 사람에게 전염됩니다. 죄는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줍니다. 죄는 사람들이 평화롭게 사는 것을 깨뜨립니다. 죄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손상시키며 하나님의 진노를 부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 범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우리 자신이 죄 범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특별히 1절과 2절은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죄입니다. 여기서 “실족케 한다”는 말은 “걸려 넘어지게 한다,” “죄를 짓게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친히 죄를 짓기도 하지만 행동이나 말로 인해 다른 사람으로 죄를 짓게 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이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2절) 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마가복음 9장 42-45절에도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막9:42-45) 이와 같이 엄청난 형벌이 암시되었다고 해서 이 실족케 하는 죄가 세상적인 관점에서 중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제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교묘한 말로 친구를 꾀어 범행에 가담시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창녀가 되어 요염한 모습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유인하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포르노 잡지를 가져와서 옆 사람이 음탕한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 9-12절에 이 죄가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한 가지 예가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니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전8:9-12) 당사자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유함으로 우상제물을 먹은 것이 그 자리에 있는 다른 형제의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실족케 하는 죄입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야외에 식구들과 함께 나가 준비해 온 고기를 상추에 싸서 아주 맛 있게 먹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 곁을 동냥하는 소년이 지나가면서 자기의 비참한 처지를 한탄하며 삶을 비관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우 당신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 소년으로 하여금 실족케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런 죄에서 면죄될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1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하고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씀이 죄에 대해서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죄로 여기지도 않을 행동을 죄로 지적하시면서 계속해서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게 될 수 있음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아무리 작은 죄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고 멀리해야 할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아무리 작은 죄 하나라도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기에 충분합니다. 아무리 하찮은 죄라도 그 죄를 씻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엄격할 것을 교훈하십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죄를 짓고 회개하는 것이 하루에 일곱 번이나 행해지더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의미는 같지만 마태복음 18장 21,22절에서는 약간 다르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 랍비들은 범죄자를 세 번은 용서해야 하지만 네 번째로 범죄한다면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일곱 번을 언급한 것은 자기 딴에는 큰 마음을 먹고 사랑을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부족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거듭 반복되는 죄에 대해서도 용서하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용서하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용서하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까
첫째는 우리도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고 실족케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쓴 뿌리가 되어 우리의 삶을 황폐시키고 영적인 성장에 걸림이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죄에 대한 궁극적인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손실을 입힌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기분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우리가 실제로 하고 싶지 않을 때에도 해야 하는 일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요즘 같이 추운 겨울 날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금을 꼬박꼬박 지불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일 용서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린다면 그렇게 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릴 것이며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 주님께서 당장 우리를 실족케 한 사람에 대해서 따뜻한 감정을 느끼기를 기대하신다고는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분께서는 우리의 감정과 상반된다 할지라도 옳은 일을 행하라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에는 옳은 일이라면 그 일이 싫더라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본문의 가르침을 요약한다면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엄격해야 하지만 타인의 죄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관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힘 입을 때에만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히12:15)
첫째로, 그리스도인은 죄 짓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 짓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부모에게 공손하지 않고 친구에게 신실하지 않으며 윗사람에게 순종하지 않고 권위에 대항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온갖 법이 있지만 법이 잘 지켜지지 않습니다. 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엄히 경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불신자들은 말할 것도 신자들 중에서도 교회에서 죄에 대해서 너무 많이 이야기한다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상 죄를 언급하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해야 합니다. 죄가 없는 세상이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우리가 평화로운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죄를 지적하고 죄를 멀리하도록 권해야 합니다. 죄는 쾌락이 아니라 고통을 줍니다. 처음에는 죄를 지으면서 쾌락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고통으로 끝납니다. 죄는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손해를 끼칩니다. 처음에는 유익을 주는 것 같이 여겨질지라도 결국 손해를 입힙니다.
예화)경마도박으로 신세 망친 사람 기사, 도적질 죄는 장난 삼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그 사람의 인격을 파괴합니다. 죄는 다른 사람에게 전염됩니다. 죄는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줍니다. 죄는 사람들이 평화롭게 사는 것을 깨뜨립니다. 죄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손상시키며 하나님의 진노를 부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 범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우리 자신이 죄 범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특별히 1절과 2절은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죄입니다. 여기서 “실족케 한다”는 말은 “걸려 넘어지게 한다,” “죄를 짓게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친히 죄를 짓기도 하지만 행동이나 말로 인해 다른 사람으로 죄를 짓게 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이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2절) 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마가복음 9장 42-45절에도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막9:42-45) 이와 같이 엄청난 형벌이 암시되었다고 해서 이 실족케 하는 죄가 세상적인 관점에서 중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제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교묘한 말로 친구를 꾀어 범행에 가담시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창녀가 되어 요염한 모습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유인하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포르노 잡지를 가져와서 옆 사람이 음탕한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 9-12절에 이 죄가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한 가지 예가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니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전8:9-12) 당사자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유함으로 우상제물을 먹은 것이 그 자리에 있는 다른 형제의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실족케 하는 죄입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야외에 식구들과 함께 나가 준비해 온 고기를 상추에 싸서 아주 맛 있게 먹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 곁을 동냥하는 소년이 지나가면서 자기의 비참한 처지를 한탄하며 삶을 비관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우 당신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 소년으로 하여금 실족케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런 죄에서 면죄될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1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하고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씀이 죄에 대해서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죄로 여기지도 않을 행동을 죄로 지적하시면서 계속해서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게 될 수 있음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아무리 작은 죄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고 멀리해야 할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아무리 작은 죄 하나라도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기에 충분합니다. 아무리 하찮은 죄라도 그 죄를 씻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엄격할 것을 교훈하십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죄를 짓고 회개하는 것이 하루에 일곱 번이나 행해지더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의미는 같지만 마태복음 18장 21,22절에서는 약간 다르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 랍비들은 범죄자를 세 번은 용서해야 하지만 네 번째로 범죄한다면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일곱 번을 언급한 것은 자기 딴에는 큰 마음을 먹고 사랑을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부족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거듭 반복되는 죄에 대해서도 용서하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용서하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용서하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까
첫째는 우리도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고 실족케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쓴 뿌리가 되어 우리의 삶을 황폐시키고 영적인 성장에 걸림이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죄에 대한 궁극적인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손실을 입힌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기분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우리가 실제로 하고 싶지 않을 때에도 해야 하는 일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요즘 같이 추운 겨울 날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금을 꼬박꼬박 지불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일 용서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린다면 그렇게 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릴 것이며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 주님께서 당장 우리를 실족케 한 사람에 대해서 따뜻한 감정을 느끼기를 기대하신다고는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분께서는 우리의 감정과 상반된다 할지라도 옳은 일을 행하라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에는 옳은 일이라면 그 일이 싫더라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본문의 가르침을 요약한다면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엄격해야 하지만 타인의 죄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관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힘 입을 때에만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히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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