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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의 은혜 (고전15:9-10)

본문

한 생을 살면서 사람은 자신이 지나온 날을 회고할 수 있는 여러 번의 기회를 갖게 됩니다. 아마 이 점이 동물과 다른 인간다움의 일면 이 아닌가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 가 생일입니다. 더욱이 오십 세를 넘긴 분들이 맞는 생일의 의미는 젊은이들의 생일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지 나온 기나긴 날들을 되돌아보고, 앞날을 진지하게 내다보는 계기가 되어 줍니다. 또 하나, 해마다 맞게 되는 연말연시 역시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에 대한 반성과 평가, 그리고 계획의 지평이 되어 줍니다.
'그러나'의 은혜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당시 바울 의 나이는 40대 중반을 조금 넘었 을 것이라는 추측이 일반적입니다. 그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고부터의 10여 년의 세월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10절을 봅시다.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이 말씀에는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다'에서부터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는 강한 의미 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은 혜'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은혜는 하나님이 아무런 조건 없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은혜는 기독교의 대명사로서, 복음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를 은혜의 종교라고 부르는 것 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은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고 싶 어서 애를 쓰는 데도 결국 믿지 못 하고 세상 떠나는 사람이 우리 주 변에 많지 않습니까 그들에 비해 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공로도 없는 우리에게 영원히 사는 축복을 주시려고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 프리 패스를 주신 것,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 17절에서 이런 자들을 일컬어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 게 받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누 구 때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때 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 바울이 말 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가 받은 구원의 은혜와 더불어 구원받은 자 신의 삶을 통해서 체험한 은혜도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그러나'의 은혜라 고 부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9절 과 10절을 연결하는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바울 자신이 받은 은혜의 색깔을 선명하게 해 주고 있기 때 문입니다. 한 번 보세요. 9절에서 그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여기에서 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말한 '사도 중의 지극히 작 은 자'라는 인식은 정확합니다. 바울은 항상 자신에 대하여 사도 중 의 말째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요한과 비교하면 그가 자신을 과장하거나 겸손하게 보이 려고 일부러 꾸며서 한 말이 아니 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비록 학식은 없었 다고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아 3년 동안 그 곁을 떠난 적이 없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모습을 지 켜본 사람들입니다. 또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사십 일 동안 음식을 나누면서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했 을 뿐 아니라, 주님이 승천하시는 모습을 실제로 본 사도 중의 사도 입니다. 그에 비해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 외에는 예수님을 따라다닌 적도, 예수님께 배운 적도, 주님의 십자가를 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교회 를 핍박하였다고 말합니다. 그가 고백한 대로 그는 믿는 자들을 옥 에 가두고 고문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를 모독하는 말을 시켰으며, 심지어 그들을 죽이기까지 한 무서 운 핍박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일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면 바울의 자격지심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전과 만 보아도 그는 사도라는 영광스러 운 직분을 받을 만한 인물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10절이 무슨 말로 이어집니까 '그러나' 입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 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 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 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즉 바울은 자신 이 죄가 많아서 사도가 될 자격이 없으며 감히 사도의 일을 할 수 없 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아무 것도 문제로 삼지 않고 그를 사도 로 세우셨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 은 하나님의 파격적인 대우가 '그러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은혜에 빚진 마음
우리는 바울의 고백을 두 가지 측면에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파격적 인 은혜야말로 오늘의 그를 형성한 바탕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 의 연약과 잘못을 불문에 붙이며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자기가 어떻게 사도로서 쓰임 받을 수 있었겠느냐는 그의 고백에서 우리는 바울의 심정에 좀더 접근해 볼 필요를 느 낍니다. 그에게 죄책감이 남아 있 었던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비록 주님 앞에 모두 용서받았 지만, 예수를 핍박하고 사람까지 죽였던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를 위시하여 그가 기록한 성경들을 모 두 검토해 보면, 말로 다할 수 없는 사죄의 은총을 체험한 그가 죄 책감에 짓눌려 있었다고 보기는 어 렵습니다.
그렇다면 열등감이었을 까요 물론 그런 감정도 없지는 않 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능치 못할 것이 없다 고 큰소리 쳤던 바울이 열등감 따 위에 끌려 다녔다고도 생각되지 않 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그러나'라고 외치는 바울의 심정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악하고 미천한 자기를 사도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압도당한 감격을 주체하지 못하는 마음, 곧 은혜에 크게 빚진 자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이 많 은 사람 가운데 어떻게 나 같은 자 를 하나님께서 복음의 증인으로 삼 으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을 까'라고 생각할 때마다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하나님 의 은혜에 빚진 마음이 숨쉬고 있 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바울처럼 하나님 앞에 전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흠 없이 완전 한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 대부분 은 예수를 믿기 전에 무슨 방법으 로든 그리스도인을 핍박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하늘 꼭 대기까지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향 해 주먹을 흔들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를 믿은 다음에도 이런 죄 저런 죄 지으면서 성령을 근심시키 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과거 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탓하지 않으시고, 죄도 죄대로 갚 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못남을 있는 그대로 다루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따 지기를 원하셨다면 오늘의 우리가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건강, 몸담고 있는 가정, 그리고 생업을 돌아보아 도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 이상으로 대우하셨지 결코 그 이하로 대우하 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 이상의 삶을 사는 것, 이것 이 바로 '그러나'의 파격적인 은혜 입니다. 바울이 받았던 그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현대 문 명의 속성인 과학주의 사고에 물들 어 있습니다. 무슨 일에나 그럴듯 한 이유를 둘러대기 잘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나라의 일 년간 자동차 사고 발생 건수는 어마어마합니다. 그 와중에 내가 아무 사고 없이 일 년을 보낸 것은 사실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합리주의 적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 십니까 그들은 무사고의 원인이 자신의 능숙한 운전 때문이라고 믿 습니다.
나는 운전 경험도 많고 예방 운전도 조심해서 하기 때문에 갑자기 튀어나오는 사람도 피할 수가 있다. 또한 절대로 음주 운전을 하지 않기 때문에 사고를 내지 않는 거야라고 말입니다. 건강에 대 해서도 비슷한말을 잘합니다.
내 가 이만큼 건강한 것은 규칙적인 생활을 할 뿐 아니라 음식도 골고 루 먹고 과식하지 않으며, 일주일 에 한 번씩은 맑은 공기 마시러 산 엘 다녀오기 때문이다.
또 이런 경우는 어떻습니까
우리 할아버 지가 과거에 밭뙈기 하나 있는 것 을 팔아서 교회에 헌금했다는 소리 를 들었다. 내가 이만큼 남부끄럽 지 않게 살고, 자식들을 제대로 키 우게 된 것은, 그 복을 자손인 내 가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말들은 인과응보의 원칙을 염두에 두고 하는 합리주의 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전적으로 잘 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잘된 것은 무엇이나 자신의 공로로 돌리 고 있다는 점에서는 위험한 요소를 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런 생각은 마치 한두 살 먹은 어린 애가
내가 우유도 잘 먹고, 오줌 과 똥도 잘 누고, 잠도 잘 자니까 이렇게 건강한 거야.
하고 으시대는 것과 비슷합니다. 얼마나 가소 롭습니까 하물며 온 우주를 창조 하신 하나님, 우주를 보존하고 지키는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 생사 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가관이라고 생각하시겠어 요 이 어린애의 말처럼 규칙적으 로 잘 먹고 소화를 잘 시켜야 건강 하게 자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생 리적인 활동이 아이를 성장시키는 전부는 아니지 않습니까 이와 같 은 생각들은 은혜를 거부하는 공로 주의에 속합니다. 은혜란 조건 없 이, 공로 없이 받아서 누리는 축복 인데, 자기 공로를 앞세운다는 것은 모든 복을 은혜로 보지 않고 보 상으로 보는 것이 됩니다.
스톰스(Storms) 박사가 은혜에 대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은혜 란 당신의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 도 아니요, 당신의 무공로로 잃어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만일 우리의 선함과 자랑할 만한 것을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그 것이 건강이든, 장수든, 부귀든 간 에 은혜일 수 없다. 또한 우리의 악하고 부끄러운 것을 따라서 주시 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 역시 은혜 일 수 없다. 은혜는 우리의 잘잘못 을 따지지 않고 주시는 선물이다. 이 놀라운 은혜주심을 감사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이 무조건 주신 파격적인 은 혜로 된 것이지 내 노력, 내 선함 과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더 많이 수고하게 하신 은혜
두 번째로 바울은 하나님의 파 격적인 은혜가 있었기에 주를 위해 더 많이 수고할 수 있었다고 고백 합니다. 10절을 다시 볼까요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 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 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 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은 예수님 을 알고 나서부터 전력을 다해 주 님을 위해서 일한 사람입니다. 마 치 하루종일 일거리를 찾지 못한 어느 일꾼이 오후 5시가 되어서야 마음씨 좋은 포도원 주인을 만나, 하루 일당을 받기로 하고 남은 한 시간동안 열심히 일을 하게 된 것 과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 일꾼이 감지덕지해서 물불을 가리 지 않고 포도원 일을 한 것처럼 바울 역시 너무 감격해서 베드로나 요한 보다 더 열심히 일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무엇 이라고 합니까 하나님께 충성하게 된 것은 자기의 적극적인 성격 때 문이거나 자기의 능력과 학식이 많 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파격적으로 대우하 신 '그러나'의 은혜 때문이라고 말 합니다. 바울의 말을 들으면 그가 퍽 겸손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고린도후서 11장 23절과 12장 10절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 으니,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 하노니.라고 실토합니다. 주님을 위해 이 정도의 헌신 을 한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떳 떳하게 자기 공로를 내세울 만도 한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아니요 오직 나 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라고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바울처럼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그러나'의 은혜로 돌려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 건강하고 힘이 있을 때,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수 고하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 니까 땀흘려 번 돈을 주님의 나라 를 위해서 헌금하는 일로부터 시작 하여 가정과 직장, 학원의 복음화 를 위해 수고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한 약한 자와 병든 자 그리고 가난한 자를 찾아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거나, 다음 세대를 말씀으로 양육하기 위해 교회의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수고하는 많은 지체들이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수고들은 모두가 주님을 섬기는 귀 한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십 시오. 그들은 평생을 밑빠진 독에 물 붓듯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허 망한 일에 모든 것을 털어 넣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작은 일조 차 하나님 나라의 곳간에 쌓여지는 알곡이요, 우리의 면류관에 달릴 보석들입니다. 비록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작은 일에 쓰임받을 지라도 그것은 영원히 남습니다. 이 모든 일을 '그러나'의 은혜로 설명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할 수 있습니까
바까스 박사라는 분이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습니다. 의사가 침통하 게 말합니다. '박사님, 당신의 생명 은 이제 30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불편한 몸을 의 자에서 일으키더니 무릎을 꿇고 앉 아서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 주님, 이 남은 30분을 아직도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데 바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까스 박사를 위대하다고 칭찬하 기 전에 그가 받은 '그러나'의 은 혜를 주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 죽이나 은혜가 벅차면 그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어떤 모양이든지 주를 위해서 산다는 것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은혜가 아니면 흉내조차 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를 위해 수 고를 많이 하는 자일수록 조심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내 믿음이 좋아 서, 내가 훈련을 잘 받아서, 내가 똑똑해서 이만큼 수고할 수 있었다 '고 말하기가 쉽습니다. 이것은 은 혜를 배척하고 내 공로를 앞세우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아무리 주님을 위해서 충성해도 주 님이 영광을 받지 못하고 자기가 영광을 받아 버립니다. 순장, 주일 학교 교사, 성가대원, 호스피스, 교 통 봉사, 그 외에도 교회 구석구석 에서 소리없이 섬기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도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이만큼 일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는 바울의 감 동을 가슴 가득히 소유할 수 있기 바랍니다.
얼마 전에 <타임>지에 빌리 그 래함 목사에 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아마도 올해 75세를 맞은 그 분을 기념하기 위한 특집이었던 것 같습니다. 파킨슨병에 걸린 그의 몸은 나날이 여위어가고, 입 속의 침도 말라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년 1월에 일본의 전도 집회를 계획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그가 뭐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왜 나 같은 것으로 하여금 수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빌리 그래함 목사만 큼 탁월한 전도자를 또 찾을 수 있 습니까 아마 수적으로 따져서 그 만큼 많은 사람을 구원한 이가 없 을 것입니다. 그처럼 엄청난 일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하나님, 왜 저 같은 사람을 불렀습 니까라고 질문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가 사생활에서조차 흠이 잡힐 만한 행위를 하지 아니한 사람이라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든다 면, 그는 자기 부인 외에는 어떤 여자와도 단둘이 식사를 하지 않겠 다는 철칙을 평생 지킨 사람입니다. 클린턴이 주지사로 있을 때 그 부부가 빌리 그래함 목사의 집회에 참석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것 을 계기로 한번은 힐러리 여사가 빌리 그래함을 점심 식사에 초대하 였다고 합니다. 주지사 부인이 식 사를 함께 하자는 데 거절할 이유 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는
나는 당신 같은 미인과 단둘이 앉 아서 식사할 수 없습니다라고 분 명히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여러 면에서
내가 이 정도로 신실하니까 하나님이 대우하셔서 지금껏 날 사용하신 것이다라고 말할 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왜 저 같은 자를 불렀습니까
하고 일평생 질문하고 있다는 사실 입니다. 이것이 '그러나'의 은혜에 빚진 자의 심정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배우고 따라야 할 자세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 혜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주 님을 위해서 수고할 수 있었던 것 도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바울의 고백은 하나의 중요한 진리를 내포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 라면 내일의 나 되는 것도 하나님 의 은혜로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실패하지 않는 다
하나님의 은혜에는 놀라운 능력 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다시 한 번 10절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여기에 서 '헛되지 아니하다'는 말은 '유 효했다, 실패가 없었다. 능력이 있 었다' 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성령 을 통해서 바울에게 역사 한 하나님의 은혜는 얼마나 능력이 있었던 지 십 년 혹은 이십 년이 흐른 뒤 에도 유효했습니다. 어느 때는 바울도 과거의 죄를 돌이켜보고 죄책 감으로 인해 두려움을 가지기도 했 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성령은 그 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의 공로를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가 병이 났을 때 고쳐 주시고, 선교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을 극복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앞 길이 보이지 않고 소망이 없을 때 에도 성령은 바울에게 오셔서 주님 의 음성을 듣게 하셨습니다. 이것 이 하나님의 은혜가 바울에게 헛되 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바울이 받은 '그러나'의 은혜는 성령을 통해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 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성령을 받고 성령의 사람이 되면 어떤 환 경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실패하 지 않습니다. 그 파격적인 은혜에 붙들려 있으면 누구나 소망의 사람 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남편 을 보세요. 나이들어 가면서 직장 생활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고 건 강도 걱정이 됩니다. 사람을 놓고 보면 답답하지만, '그러나'의 은혜 를 놓고 보면 남편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서 절대로 헛되지 않을 것이기 때 문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믿음의 사람, 성령의 사람이 되도록 부인 들은 정성을 다해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남편이 사는 길 이며, 남편의 생이 축복받은 유일 한 길입니다. 또한 여러분의 자녀 를 보세요. 예측을 불허하는 치열 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갈 그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얼마나 답답합니 까 더욱이
3,40년 후 우리가 세상 떠난 후를 상상해 보세요. 그러나 하나님의 '그러나'의 은혜로써 우리는 자녀에게 소망을 갖게 됩니다. 그 자녀가 믿음을 갖고 성령의 사람이 되기만 하면, 절대로 헛되 지 않을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장 래를 보장할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나'의 은혜를 붙듭시다. 성령을 사모합시다. 우리를 파격적으로 대 우해 주실 뿐만 아니라, 평생 동안 그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바울처럼 은 혜에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지고 세상을 사는 독특한 천국의 시민임을 한시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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