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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엡2:11-22)

본문

1. 이방인으로 살아가기

수년 전에 '에일리언'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인간이 우주에 나갔다가 끔찍하게 생긴 외계인들에게 붙잡혀 죽기도 하고 싸워 도망치기도 하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 외계인들을 영어로 Alien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alien이라면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외계인 정도로 생각을 했지요.

저희가 영국에 가서 얼마간 머문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는 외국인들이 경찰서에 가서 등록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외국인 등록하는 곳에 가보니까 '에일리언 등록'이라고 쓰여 있었어요. 그걸 보니까 굉장히 기분이 나쁘더군요. 마치 그 끔찍하고 징그러운 외계인 취급을 받는 기분이었어요. 물론 alien이라는 말이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저 단순히 외국인, 또는 외부인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처럼 고달프고 또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여기 뉴질랜드에 와서도 아직은 이방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문화가 다르고 언어도 달라서 겪어야 하는 애로사항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어려움은 이방인이라는 인식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아도 이 사회에서 이방인입니다. 하물며 본토인들이 볼 때는 얼마나 우리를 이방인으로 보겠어요?

어느 사회나 이방인들을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상 유대인들만큼 이방인들을 차별시했던 집단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종교적인 선민의식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었고 오로지 한분이신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들이라는 자아의식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배척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유대인들의 가장 큰 실수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것은 그들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자신들의 우월감의 근거로 사용했던 것이지요.

어쨌든 그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이방인은 함께 식사도 하지 못할 더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우상을 섬기는 무지몽매한 인간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개 같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우월감과 자만의식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 바로 할례였습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시를 육체에 새기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다른 나라를 여행하거나 체류해야 할 경우에 비자를 받는 것이 필수적이지요. 특히 선교사들에게는 이 비자 문제가 얼마나 큰 걱정거리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귀신은 비자귀신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여권에 그 스탬프 하나 찍어주는 것도 그렇게 감지덕지하고 안정감을 주는데, 하물며 몸에다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시를 새겨 놓았으니 얼마나 우쭐하고 당당하겠어요? 세상에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지요.
그런데 그만 이 사람들은 자기들처럼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겼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키위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것과는 아주 다른 일이겠지요. 비록 이 에베소 사람들이 유대인 사회 속에서 이방인으로 살았던 것은 아니지만, 유대인들이 상대할 수 없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만약 그 유대인들이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의 이방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무시해 버릴 수 있고 오히려 그런 유대인들을 이상한 집단으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구원이 그 유대인들을 통해서 오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아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차별과 멸시는 넘어야 할 커다란 산이었습니다. 어쨌든 에베소 사람들은 유대인 보기에 그런 이방인이었고 할례도 받지 못한 가치없는 인간들이었습니다.

2. 그리스도 밖에서 살아가기

이러한 이방인에 대한 대우가 부당한 것이었고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무시해도 좋을 것이라고 합시다. 문제는 그들이 결국 그리스도 밖에 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밖에 있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 밖에 있다는 사실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지요. 그래서 소망도 없이 하나님도 없이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오로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에 따라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 외에는 어떠한 시도나 방법으로도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그것들로는 인간의 구원이 결코 가능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하고 있는 사상계에서는 이러한 종교들을 상호 존중하고 용납해야 된다는 주장이 큰 설득력을 가지고 많은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종교가 달라서 지금도 많은 곳에서 분쟁과 충돌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주만 해도 인도네시아에서 기독교인들과 이슬람교도들이 무력충돌해서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번 주에는 또 이집트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들이 서로 배타적이지 않게 되고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인정하면 인류의 이런 비극을 방지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만약 종교가 구원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타협에 의해 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기독교 안에서도 다른 종교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신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구원을 주지 않는 하나님이라면 너무 이기적이며 하나님의 속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기독교 2000년의 역사 가운데 많은 이단의 도전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매우 심각하고 위험한 도전은 바로 이 혼합주의입니다. 꼭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그래서 그들과 대화하고 필요하면 교리나 가르침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 우리 본문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부인이었으며 세상에서 구원의 소망이 없이 하나님을 모르고 살던 사람들이었다.'

3.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런 이방인들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교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정신적 거리는 그야말로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멀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막고 있던 높은 담이 무너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허무셨습니다. 10년 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사건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렇게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무너지니까 동독과 서독이 완전히 하나가 된 것처럼 유대인과 이방인이 이제 완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교회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얻어서 그리스도를 섬기며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몸에 새긴 하나님 백성의 표시가 아니라 마음에 새긴 그리스도인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그리스도인의 표시가 마음에 있으면 한 형제요 한 민족이요 한 가족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따로 없고 자유인과 종의 구별도 없습니다. 기독교인과 불교도, 이슬람교도가 모두 하나가 되고 형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화평이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이지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어느 누구와도 화해하고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특성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진리 문제가 아닌 것으로 분쟁과 다툼이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요, 우리가 회개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 밖으로 나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본질을 훼손하면서 화평을 이루는 것은 절대로 안되는 일입니다.

4. 또 하나의 화평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화평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 이방인과 유대인의 화평뿐만이 아닙니다. 더 본질적인 화평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이루어진 화목입니다. 16절에 뭐라고 했나요?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였었다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보다 강하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하나님이 우리보다 훨씬 강한 분이라면 그의 원수였던 우리의 운명은 비참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중재하셨어요.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고 한 편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그의 피로 이루신 구원이지요.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고 또한 우리끼리 서로 사랑하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아름답게 세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밖에 있는 형제들과도 이 화평을 누릴 수 있도록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일에 애쓰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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