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그가 죄인 위해 오셨다면 (막2:13-17)

본문

우리들의 교회 생활의 한 보편적 시험이 있다면 교회 생활을 통해서 만나는 어떤 사람에 대한 인간적 실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 반응이 다양한데요. 아마 어떤 사람들은 자기에게 실망을 준 어떤 사람, 교회 안에 어떤 사람, 또 그것은 교회 지도자일 수도 있겠죠. 내가 저런 사람이 있는 한 나는 이 교회에 나오고 싶지 않다. 그래서 교회를 옮길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저는 굉장히 나은 ,좋은 케이스라고 생각하고요, 어떤 분들은 저런 사람들이 크리스챤이라면 나 예수 안 믿겠다. 아예 교회를 등지고 교회를 떠나가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저는
그런데 이런 교회에서 받는 우리들의 상처, 갈등 이런 것들의 한가지 중요한 원인 중에 하나는 우리가 가진 교회에 대한 지나친 이상적 기대 때문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은 비성서적인 교회에 대한 우리들의 그림, 비성서적 교회관에 기여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역사 가운데서 가장 교회가 이상적이고 역동적인 교회 시대가 있었다면 언 제일까요. 초대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일세기의 초대교회. 그래서 우리가 종종 표어를 붙일 때도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 우리가 이런 표어를 붙입니다. 초대 교회들 가운데에서도 성경에 나타나 있는 초대교회 가운데서도 가장 영적이고 모범적인 교회 중에 하나가 저는 에베소 교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 이상 머물며 개척했던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을 목사님으로 모셨던 교회. 그것도 짧은 기간이 아니라 3년 이상. 바울이 아마 제일 한 장소에 오래 머물러서 집중적 선교를 했던 곳은 이 에베소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괜찮은 교회, 좋은 교회 아주 좋은 특성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4장 25절 이하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보내는 편지 가운데서 이런 메시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이웃들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왜 이런 얘기를 했겠어요 교인들 가운데 거짓말쟁이가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 거예요. 거짓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여러분 거짓 버리세요, 참된 말을 하세요. 이런 권고가 왜 필요했겠어요. 그러니까 교인들 중에 거짓말쟁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28절에 보시면 도적질하는 자는 도적질하지 말고 그러니까 교인들 가운데 뭐가 있었다는 얘기입니까 교인들 가운데도 도둑놈이 있었다. 도둑놈 뿐만 아니라 도둑녀도 있었다. 도둑질하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도적질하지 말라 이런 편지를 기록하지, 도적질하는 사람이 없는데 바울이 그런 편지를 기록했겠어요 또 29절에 보면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라 그러니까 심지어 교인들 가운데도 더러운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EDPS, 음담패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러분! 그러기 때문에 교회 생활 하다가 그런 교인, 거짓말하고 도적질도 하고 사기도 치고 또 이상스럽게 꼭 말해서 상처 주는 사람, 교인들을 만나거나 경험하거든 너무 놀래지 마세요. 초대교회에도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느냐. 궁금하지 않으세요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셨을까 교회 안에서 이런 사람들을 만났을 때 예수님 같으면.
그런데 오늘 본문, 사건의 결론이 17절입니다. 같이 읽어보세요.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이것이 사건의 결론인데, 결론에서 예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 고 하니 예수께서 내가 온 이유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누구를 부르러 왔다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우리는 예수님의 몸이라 고백합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고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예수께서 교회를 통해서 지금도 사람들을 부르고 있다면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을 부르실 까요 지금도 죄인들을 부르시고 있을 거란 말이예요. 교회를 통해서 죄인들을 부르시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는 누가 모여야 합니까 의인이 모여야 합니까 죄인이 모여야 합니까 죄인이. 그러니까 교회는 죄인의 집합소다. 다른 말로 바꾸면 예수님이 이렇게 비유하셨는데 병든자에게라야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냐 나는 병든 사람을 부르러 왔다.그러니까 교회가 다른 말로 말하면 교회는 병원이다. 병든 자들의 클리닉이다. 그러면 여러분 좋은 병원이 어떤 병원이에요 좋은 병원은 건강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좋은 병원입니까 여러분 소문난 병원 가 보세요.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소문난 병원에 가면, 각종 병자들이 다 모여듭니다. 그러니까, 좋은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각종 죄인들이 모이는 곳. 각종 병든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바로 교회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요. 그렇다고 해서 좋은 병원이라는 것은 병자들만 많이 모이는 곳이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있어야 할 소식이 뭐냐하면 그 병원에서는 병자들이 잘 낳는다. 치료를 받는다. 그래서 참 병 고치고하는 역사가 많이 일어난다 하는 소문이 나야죠.
그런데 이 병 고치는 게 사람마다 달라요. 오래 고치는 사람도 있고 빨리 고치는 사람이 있고. 그래서 교회 와서 이상한 사람들 보면 저 사람은 병 고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자, 병자들이 병원 갈 때 어떤 기대를 하겠습니까 병 고칠 기대를 하겠지요. 그러나 또 하나 병자들이 늘 병원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있어요. 저 병원에 가면 병자인 나를 어떤 식으로 다룰까 좀 친절하게, 좀 나를 잘 존중하면서 다뤄 줄까 막 다룰까 가급적이면 내가 치료 받는 과정에서 나를 잘 다뤄 주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이런 병자들을 죄인들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모본을 보여 주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주변의 소위 이웃들 죄인들을 우리가 접촉할 때 사람들을 접촉할 때 나도 죄인이지만 또 다른 죄인들을 접촉할 때 사람들을 어떤 방식으로 다루어야 하느냐에 대한 모본을 제시합니다. 어떻게 우리 이웃들을 다루어야 할까 접촉해야 할까
첫째로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보시는 방식으로 우리도 사람들을 보아야 합니다. 그가 죄인이라 할 지라도 그 죄인들을 예수님은 어떻게 보셨을까 예수님이 보시는 방식으로 우리들도 사람을 보려고 애써야 합니다. 자, 본문이 시작되면서 14절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14절 같이 읽어요.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여기서 우선 지나가시다가 예수님이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는 사람 . 청바지 리바이스가 여기서 나온 말이 예요. 레위가 사람 이름인데,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뭐하셨다고요 보시고. 세리죠. 세관에 앉아 있으니까 이 사람은 세리입니다. 이 세리를 보시고.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이 세리를 보시고. 이 자체가 보통 사건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리는 그 당시 유대인들이 피하는 대상이에요. 예수님은 랍비입니다. 가르치는 교사예요. 그 당시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 당시에 만약 유대인 랍비, 유대인의 도덕적인 종교적인 교사가 지나가다가 세리를 만났다. 그러면 안봅니다. 안보고 지나갑니다. 피해요. 그렇게 세리들은 그 당시에 인간으로 취급을 당하지 못했습니다. 쓰레기로 취급을 당했습니다. 민족반역자, 로마에게 붙어서 세금을 걷어 내기 위해서 동족들을 착취하고 있는 사람, 반유대주의자, 반 민족주의자, 인간으로 취급될 수 없는 사람들. 그 당시에 정상적으로 걷는 세금이 두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정세와 관세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세만 해도 세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인두세, 토지세, 소득세.인두세, 사람 머리에 따라 인간이면 그 나라에서 태어나면 무조건 내는 세금, 열 두 살부터 65세까지 인두세를 내고, 토지세 내고, 소득세 내고 이것만해도 죽을 지경인데 그 당시 세리들은 멋대로 관세라는 것을 붙였습니다. 이 관세는 주로 로마정부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 예요. 거의 전부가 세리들이 자기 주머니로 다 세금이 들어갔어요. 그 가운데는 길을 통과 할 때 받는 통과세, 마차 끌고 가면 마차세, 마차 바퀴가 여러 개면 바퀴마다 바퀴 세. 그렇게 부과했습니다. 또 그 근처에서 물고기를 잡으면 물고기세. 약탈자들입니다. 그래서 거의 전부가 자기들이 착복했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세금을 받아 내기 위해서 그 동네 살인 청부업자와 세리들은 결탁되어 있었습니다. 강제 집행을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 세리들을 만나면 사람취급을 하지 않았고, 상대하지도 않았고, 법정증인으로 세리들은 세우지도 않았습니다. 판사가 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증인도 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으로서 도무지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는 세리들을 유대인들은 보편적으로 다 기피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지나가시다가 일부러 보시고, 이 세리를 보시고, 여기서부터 보통 일이 아니예요. 보시고. 런데 어떤식으로 봤을까요. 어떻게 째려 보셨을까요 예수님이 어떻게 보셨을까요
유명한 성서학자 윌리암바클레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사람을 보았을 때 레위라는 이름을 가진 이 세리를 보았을 때 예수님은 세리였던 레위안에서 위대한 전도자 마태를 보았다. 여러분! 레위라는 사람은 잘 모르지만 마태라는 사람은 알지요. 마태. 몰라요 마태는 몰라도 마태복음은 알죠. 마태복음은 기록한 사람과 동일한 사람이 예요. 중요한 얘기입니다. 세리 레위 안에서 전도자 마태를 보았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예수 믿고 변화된 다음에 이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이 쓰시는 특별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많은 성서학자들은 아마도 마태라는 이름은 이 사람이 변화된 다음에 붙여진 새로운 이름이었을 것이다. 마태의 뜻이 뭐냐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물처럼 소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 마태복음을 읽어보시면 여러분, 이것이 유대인을 대상으로 기록된 복음서인데 본래 마태가 유대인 관리였으니까 얼마나 잘 알겠어요. 그는 천대받는, 그리고 많은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세리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리의 특유한 관찰력을 가지고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 유대인의 메시아 구세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정확하게 관찰하여 우리에게 그의 생애를 증거하는 마태복음서를 남깁니다. 변화된 후에 말이죠. 근데 예수님이 아, 세리, 넌 상대하지 않아 이러고 지나갔다면 어떻게 되었겠어요. 그를 보셨습니다. 어떻게 보셨느냐 이 사람이 예수 믿고 변화되면, 얼마나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아 놀랍게 쓰임을 받을 수가 있는가 이 가능성의 안목을 가지고 사람을 보았다. 이것이 중요한 겁니다. 가능성의 안목을 가지고 사람을 볼 수가 있었다 예수님은 항상 그렇게 보십니다. 현재 있는 모습대로만 안 보세요. 시몬을 만났을 때 시몬 베드로, 본래 이름이 시몬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가 가정 세미나를 하면서 기질 공부를 했습니다마는 대표적인 다혈질의 대표가 누구라 그랬습니까 베드로예요. 충동적인 사람, 다혈질이에요. 종잡을 수 없는, 격정적이고 충동적인 사람, 신뢰하기 어려운 인물이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시몬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몬을 만나셨을 때 예수님은 첫번째로 그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시몬아 네가 장차 게바라 하리라 게바의 뜻이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반석의 이미지. 생각해 보세요. 육중한 반석의 이미지. 이건 시몬에게 어울리지 않는 별명이거든요. 충동적이고 급하고 조변석개하고 계속 변하고 말이죠. 그러나 그런 사람으로 보시지 않으시고 주님의 손에 붙들렸을 때 초대교회가 세워지는 기초같은 역할을 할 위대한 전도자 베드로의 가능성을 시몬 안에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사람을 보십니다. 창녀 마리아, 창녀로 보시지 않으셨습니다. 창녀 마리아 안에서 성녀 마리아의 가능성을 보신 예수님. 저 유명한 창녀 막달라 마리아, 계속 받고 또 받고 욕망을 좇아 달려가는 생애를 살았어도 도무지 만족이 없고 불안했던 여인, 막 달라 마리아가 막 주는 마리아가 되는 가능성을 보신 예수님. 어떤 사람들은 왜 웃나 늦게 깨닫는 사람이 있어요. 막달라 마리아, 이 마리아 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 여인이 변화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고 십자가까지 주님을 수행하는 위대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가능성을 이 창녀 안에서 보셨던 예수님. 사람을 그렇게 봐야 돼요.
1500대 초에 이태리의 프로렌스라는 도시에는 도나텔로라는 조각가가 있었습니다. 유명한 조각가였다 그래요. 우리 교회 안에도 조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마는 이 도나텔로라는 사람이 자기 생애의 필생의 작품을 한번 남기자, 조각 작품을. 그래서 저 유명한 카레라라는 지방에 대리석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거기서 값비싼 값을 지불하고 왕창 대리석을 가져왔습니다. 채석장에서. 갖다 놓은 것을 보더니 이 도나텔로가 쓸 만한 것이 없구먼. 그리고 그 대리석을 버렸어요 성당 뒤뜰에 그냥 버렸어요. 근데 무명의 젊은 조각가가 그 버려진 대리석을 보다가 쓸 만한데, 잘 쓰면 쓸 만한데 그 중에 대리석 몇 개를 갖다가 2년 동안 자기의 열정을 퍼부어서 한 조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2년 후 1504년 1월 25일 프로렌스의 많은 시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이 조각상을 덮고 있었던 베일을 거두자 프로렌스의 시민들은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인류가 기억할 작품이다. 그것이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다비드상이예요. 다윗상. 그는 거친 대리석, 거기서 위대한 조각상의 가능성을 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의 사람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이 내게 얼마나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든,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든, 그러나 그 사람 안에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예수 믿고 성령님 체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이 사람, 어떻게 변할까 이런 가능성을 가지고 사람을 보십니까. 이런
기도하십시다.
, 오늘. 예수님의 눈을 가지고 저도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도와 주시옵소서. 아멘. 주님의 눈을 가지고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열리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의 눈으로 사람들을 볼 수가 있어야 돼요.
두번째로 예수님이 어떻게 사람들을 다루셨는가 예수께서는 예수님이 그들을 부르시고 있다는 메시지를 우리가 전달해야 되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렇게만 보신 것이 아니라 보신 다음에 그들을 부르십니다. 자기에게로 부르십니다. 지금도 부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사람들을 만날 때 예수님의 안목으로 보고 그 다음에는 당신을 예수님이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로 인도해야 되요. 그렇죠 자. 마태를 예수님이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보셨습니다. 위대한 전도자의 가능성을 가지고 보셨습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다시 한번 14절 읽어봐요. 14절 다같이 시작.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마태가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보신 다음에 어떻게 하셨어요 말씀하셨습니다. 뭐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를 좇으라 라고 초청하셨어요. 부르셨어요. 나를 좇아라. 오라고 예수님을 좇아오라고 예수님이 초청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심장과 안목으로 사람들을 본 다음에 당신 자신에게로 사람들을 초청하십니다. 지금도 그렇게 하세요. 지금도. 믿습니까 지금도 예수님이 당신에게로 사람들을 초청하고 있다고 믿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오라 오라 초청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초청하고 있습니다. 나를 좇으라. 그 나가 누구예요 그 나굉장한 분입니다. 그냥 내가 어떤 사람 만나서 나 좇으라 그래 봐야 수지맞는 거 없어요. 나 좇아다녀봐야 수지 맞는 일 하나도 없어요. 그러나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신 예수. 예수.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 육신을 입고 오신 구세주. 나를 좇으라. 그분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십자가로 가시기 전에 나는 길이요. 뭐라고 하셨습니까 진리요 생명이니 길 되신 예수님을 좇아가면 아버지께로 도달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진리이신 예수님 생명이신 예수님 그분 만나 그분 좇아가면 영생을 경험할 줄로 믿습니다. 그분이 진리이십니다. 그분이 생명이십니다. 그분이 구원이십니다. 그분이 소망이십니다. 그 분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좇으라. 나를 좇으라. 예수님이 말씀하세요. 나를 좇으라. 여러분 신앙생활이 뭡니까 신앙생활이. 결국 두가지예요. 신앙생활을 간단히 말하면 결국 두가지예요. 째는 예수 만나고 두 번째 예수님 따라가는 것. 그게 신앙생활의 전부예요. 째로 예수님 만나고 교회 나와서 예수님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 제일 불쌍한 사람들이예요. 교회 나와서 먼저 할 일. 예수 만날 일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일. 그것이 가장 중요한 사건인 줄 믿으세요 예수 만나는 것. 그것이 구원이예요. 그것이 거듭나는 것이예요. 그것이 영생을 얻는 것이예요. 예수님 만나는 것.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만나는 것 주님으로 만나는 것. 예수님 만나지 못했다면 교회 나와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해결 안된 거예요. 어떤 사람들 교회 나와서 시간 흘러가니까 잘 처세하고 잘 적응해서 교회서 직분도 받고 교회서 뭐 그럴듯한 감투도 쓰지만 예수님 만나지 못한 사람 많아요. 비극입니다.
오늘 현대교회의 비극. 예수님 만나야 되요. 예수님 만나고 두 번째는 두 번째는 예수님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 쫓아가는 것. 예수님 쫓아가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이예요. 그것이 영적 성숙이예요. 예수님 쫓아가는 것. 예수님 쫓아가면 우리가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 쫓아가니까 신나요. 예수님 쫓아가니까 내 삶에 보람이 있어요. 기쁨이 있어요. 풍성함이 있어요. 물론 시련도 있습니다. 고통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아니하는 소망, 천국의 희망 그리고 내 마음속의 시련과 고통을 이기는 내 마음속의 저력과 비전과 능력이 생깁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의 삶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근데 예수님 쫓아가다 보니까 좋거든요. 야아무개도 예수님 만났으면 좋겠다. 그때부터 제자들의 전도가 시작됩니다. 전도하는 게 바로 뭐예요. 전도하는 것이. 나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 예요. 전도자인 나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만나 내가 예수님 따라가 보니까 예수님 만나고 예수님 따라가 보니까 이 삶이 놀랍더라고요. 기쁨이 나더라고요. 그리고 소망이 있고 그리고 약간의 시련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걸음으로 인생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고 내 삶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고 세계관이 바뀌고 인생이 달라져요. 예수 믿읍시다. 우리 같이 예수님 믿고 하나님 예수님 쫓아가십시다. 이게 전도죠. 우리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경험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 예요. 전도는.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 소개하고 예수님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따라가면 소망입니다. 그거 소개하는 것이예요. 어떤 사람들은 전도한다고 하면서 자꾸만 자기만 나타내려고 해요. 꺼꾸로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도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사람들을 예수님에게서 멀리 쫓는 사람들이 있어요. 전도한다는 것은 예수님 만나게 하고 이웃들에게 예수님 소개하는 것인데 때때로 우리가 방해가 되어서 예수님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 많아요. 벌써 복음서에도 그런 증거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른 사람이 예수님 만나는데 제일 방해 요인들이 된 경우를 볼 수가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 생각나세요 스로보니가의 여인이 불쌍한 여인이 예수님 만나려고 왔는데 제자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이 여자 쫓아버립시다. 제자들이 방해 요인이 되었어요. 제자들이. 바디메오. 소경 바디메오가 예수님 만나려 하자 잠잠하라. 꾸짖었어요. 그가 빛을 보고 싶어서 그가 생명을 보고싶어서 예수님 앞에 나오는데 그 일을 차단하는 것이 제자예요.
제자. 오늘날의 제자는 안 그렇습니까. 저는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데 최대의 방해가 뭐냐 교회가 제일 방해물이라고 전 생각해요. 부끄러운 교회모습. 오늘 이 교회가 사람들이 예수 믿고 사람들이 주님 앞에 나오는 일에 가장 커다란 방해 요소가 아니 예요. 내가. 나 때문에 예수 믿지 못하고 나 때문에 주님 발견하지 못하고 나 때문에 주님 앞에 나오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아요 우리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바로 내가 내 주변의 이웃들이 예수님 만나는데 방해요인이 되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그거 기도해야 합니다. 그거 기도해야 해요. 그리고 예수님에게만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예수 만납시다. 예수님 바라보십시다. 예수님 쫓아가십시다. 예수님이 주인이십니다. 그러나 자꾸 자기 나타내지 말구요. 예수님을 주인으로 나타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초대교회 전도 야화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어요. 어떤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에게 전도를 하니까 예수 믿으라고 예수. 예수를 소개하니까 전도 받던 사람이 이렇게 묻더래요. 그 예수 한국 옛날 시골이니까. 그 예수 성씨가 뭐요 이름은 예수라면 성씨가 뭐요 갑자기 이상한 질문을 받으니까 이 사람이 당황을 했습니다. 그때 옆에 예수믿은지 얼마 안된 초신자인데 냉큼 나오더니 대답을 하드래요. 예수님 성씨야 주씨죠. 주씨. 주예수. 대답 잘했습니다. 그죠 예수님이 주님이십니다. 믿으십니까 예수님을 주로 나타내고 주로 증거하는 것 그것이 전도예요. 주님이 부르십니다. 주님 만나세요. 이렇게 전도하는 막힘 없는 도구. 막힘 없는 도구로 저와 여러분이 쓰임 받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이웃들을 다뤄야 할까. 마지막 세 번째로는 우리가 이웃들을 정말 주님 앞으로 인도하려면 예수님처럼 사람에 대한 편견을 넘어서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편견.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넘어서야 합니다. 이것이 제일 중요한 겁니다. 자. 오늘 본문에 보니까 마태가 예수님 만나고 예수님 쫓아가면서 젤 먼저 한일이 뭐냐면 잔치를 열었습니다.
잔치. 15절 보세요. 같이 읽겠습니다. 15절.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와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예수 만난 감격으로 예수님 초청하고 잔치가 열렸습니다. 누가복음 5장 29절에 보면 같은 사건을 기록하면서 큰 잔치가 열렸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어요. 큰 잔치. 동네잔치가 열렸습니다. 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어요. 누가 모였을까요 어떤 사람들이 모였다구요 15절에. 많은 세리와 세리집이니까. 세리가 많이 모였습니다. 당연하죠 그 다음에 누가 모였어요 죄인들 아니, 이건 무슨 죄인들 이건 무슨 표현일까요. 이건 우리가 보통 말하는 죄인에 대한 보편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여기서 죄인이라는 것은 그 당시의 소위 종교인.대표적인 종교에 있던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의 구전율법을 따르지 않고 율법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을 다 죄인으로 정죄했어요. 그 사람들이 다 모였어요.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다 환영했습니다. 같이 끌어안고 같이 시간 보내고 함부로 사람에 대한 타이틀을 붙여서 사람들을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에게 죄인의 타이틀이 필요하다면 그 죄인은 모두가다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하였으매 예외 없어요. 그러나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은 의인이고 저 사람은 죄인이고 상대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들었는데 저희 집에 오신 분에게. 미국서 오신 분에게 아주 재미있는 humor얘기 하나를 들었어요. 미국의 어떤 마을에 깡패 형제가 살았답니다. 아주 유명한 깡패였대요. 마약밀수 해가지고 그 동네에 소개하고 동네를 어지럽히고 알코올중독자로 술 먹으면 주사가 심해서 동네 사람들을 두들겨 패고 이웃들의 것들을 빼앗고 돈은 좀 있겠다 그 동네를 소란 시키던 아주 깡패형제가 있었는데 어느날 동생이 죽었답니다. 동생이 죽었어요. 그러니까 형이 돈은 좀 있고 그러니까 동생 장례식이나 좀 제대로 치뤄주자
그런데 문제는 하도 인심을 잃어놨으니까 장례식 주례할 사람이 없단 말이예요. 주례할 목사를 초청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 사람이 돈을 가지고 흥정하기 시작했답니다. 우리 동생 장례식 주례를 잘해주면 내가 주례할 때 조건이 하나 있는데 내 동생 주례설 할 때 내 동생은 참 성자였다. Saint-성자였다. 이 한마디 말만 하면 몇만 불을 주겠다 했어요. 몇만 불을. 그래도 아무도 나서질 않아요. 그 치사한 일에 제대로 된 어떤 성직자가 누가 장례식 주례를 하겠습니까.
그런데 괴상한 목사가 항상 괴상한 목사가 있거든요. 가끔. 괴상한 목사 하나가 자기가 주례를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자그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날 장례식 인산인해를 이루었어요. 벌써 소문이 다 퍼졌어요. 그래서. 어떻게 이 사람을 이 깡패를 갖다가 성자로 소개할래나. 관심을 갖고 듣는 거예요. 드디어 주례사가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동네 여러분. 여러분이 알다시피 우리동네에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우리 이웃들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과 아픔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우리동네는 이사람 때문에 빛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많이 정말 그 동안에 속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기 누워있는 고인은 여기 살아있는 형한테 비교하면 이 사람은 성잡니다. 진실로. 근데 이 말이 일리가 있어요. 우리가 붙이는 타이틀-의인이다 뭐 성자다 죄인이다 이건 다 상대적인 타이틀이예요. 상대적인. 하나님 앞에선 다 죄인이죠. 우리가 어떻게 사람들을 받아들이느냐 수용하느냐 이건 전도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게 안되면 전도가 안돼요.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예수님은 다 편견 없이 받아들였어요. 다 받아들였어요. 사회가 내버린 사람 사회가 버린 사람들을 다 받아주었습니다.
거기서 복음의 축제가 복음의 위대한 잔치와 복음의 위대한 역사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캐토릭 복음주의자 가운데 캐토릭인이지만 그래서 개신교인들도 그분의 책을 많이 읽잖아요. 요즘. 헨리 나우엔이라는 분이 있어요. 헨리 나우엔. 작은 책자가 많이 나오죠. 요즘.헨리 나우엔. 이 사람은 예일대학과 하바드대학에 교수로 지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사람의 일생에서 1985년이 아주 중요한 해였어요. 1985년 초에 불란서에 있었던 정신지체아들을 모아서 수용하면서 그들을 섬기고 기르는 라쉬라는 공동체에 한 지도자가 예일대학으로 헨리 나우엔 교수를 방문합니다. 이 사람이 처음으로 정신지체아들의 세계에 대한 얘기를 들었어요. 아 그렇구나.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구나.또 정신지체아들을 섬기면서 이렇게 살고있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 얘길 감동으로 받고 그냥 헤어졌습니다. 근데 얼마되지 않아서 그 다음에 이 공동체의 지도자로 있었던 존 버니어라는 지도자에게 편지 한 장이 옵니다. 그건 뭐냐 하면. 수양회가 열리는데 정신지체아들의 수양회가 열리는데 거기에 와 줄 수 있느냐. 같이 했으면 좋겠다 처음에는 헨리 나우엔 교수가 강사로 초청한 줄 알았대요. 강사로. 근데 우리 수양회는 침묵 수양횝니다. 침묵 수양회. Silent retreat입니다. 사흘 동안 열리는데 기도만하고 행동으로만 사람들을 돌봐주고 섬기는 수양회입니다. 특이한 수양회. 근데 이상하게 마음이 끌려서 갔어요. 헨리 나우엔 교수가 사흘 동안 아무 소리 안하고 정신 지체아들을 돌봐주고 발도 씻어주고 밥도 해주고 같이 식사하고 그들을 쳐다보면서 마음으로 기도만하면서 돌봐주는 침묵 수양회. 처음으로 정신지체아들의 세계속에 자기 몸으로 부딪히면서 자기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던 그들과 경험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왔어요. 왔는데 그 다음에 또 편지 한 장이 또 날라옵니다. 뭐가 날라오냐면 교수님이 함께 있어서 축복이었습니다. 교수님이 이런 우리 같은 정신지체아 공동체의 리더가 지도자가 되어 주신다면 얼마나 커다란 하나님의 선물일까요. 아니 내가 하바드 그 당시 이제 예일대학에서 하바드대학으로 옮겼어요. 조금 있다가. 하바드대학 교수로 옮겼는데 한참 할 일이 많은데 이 하바드대학에서 나는 여기 교수하면서도 얼마든지 불쌍한 사람들을 도울 수가 있는데
그런데 그 편지 한 장이 이상하게 도전을 하는 거예요. 나중에 헨리 나우엔교수는 이런 말을 기록합니다. 주님이 나를 하바드대학을 떠나서 정신지체아 공동체의 지도자로 나를 부르신다. 자꾸 그런 부르심이 마음속에서 느껴지는 거예요.
갈등을 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갈등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이라는 강렬한 부르심을 이라는 사실을 결국은 그가 승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바드대학 교수직을 포기하고 1985년 가을에 그가 토론토 캐나다의 토론토근처의 데이브렛 커뮤니티라는 정신지체아를 위한 새로운 공동체를 시작하는데 리더로 그가 떠나갑니다. 몇명 있었느냐. 6명. 6명의 정신지체아들과 살아가기 위해서 하바드 교수직을 버리고 그가 떠나갑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는 일지에다 이런 기록을 합니다. 이상하다. 이것은 희생이고 이것은 지금까지의 삶을 뒤엎는 나의 새로운 삶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웬일인가 이상한 마음의 평안이 이 놀라운 평안이여 자유여 자유여 그 다음에 자기 친구에게 편지를 써요. 이런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나는 이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여기에 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이 공동체에 와서 나는 처음으로 고향을 찾은 것 같은 홈드디어 내 홈을 고향을 찾은 것 같은 감정을 느낀다. 탕자였던 내가 오히려 돌아온 것을 느낀다. 그리고 더 놀라운 충격적인 글을 씁니다. “나는 이사람 들을 돕고 이사람 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왔지 만은 아니다. 친구에게 우리 공동체에 아담이라는 젊은 청년이 있는데 아담. 6명중에 한 사람 아담이라는 청년이 있는데 이 정신지체아였지만 깨끗하고 투명한 그의 영혼과 부딪히면서 그가 나를 치료하고 있다. 그가 나를 치료하고 있다. 나에게 붙어있던 찌꺼기. 그런 거짓된 위선, 가면, 이런 것들이 찢겨나가고 아담이.내가 섬기고 있는 아담이 내 영혼을 치료해주고 있다. 이것은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중에 그는 정신지체아들도 시간은 걸리지만 그들도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고 그들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반응하는 모습을 보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었어요. 여러분 우리가 사람에 대한 편견을 넘어서서 이렇게 우리의 이웃들 앞에 설 수 있다면 우리의 전도는 언어이상의 얼마나 더 위대한 설득력과 감동과 능력을 가질 수가 있을까요. 그러나 우리의 복음이 지체하고 이웃들과의 담이 단절되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어요. 우리의 좁은 인간관. 우리의 좁은 선택된 제한적인 교제. 우리가 성도의 교제라면 밤낮 그냥 자기하고 잘 어울리는 몇 사람하고만 밤낮 몰려다녀요 교회서 가만히 보면 밤낮 돌아다니는 몇 사람하고만 끼고 돌아다녀요 어떻게 이웃들을 향한 우리의 세계가 열릴 수가 있겠어요. 사람에 대한 편견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뛰어넘어서 이웃 앞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가설 때 열릴 수가 있는 새로운 선교의 장을 보세요.
일천구백구십육년 2년 전이죠. 9월 21일 헨리 나우엔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떠나기 직전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우리의 이웃들을 통해서 내 사랑하는 우리의 이웃들을 통해서 우리 주님 그리스도를 새롭게 경험했다. 나는 참 행복했다. 나는 참 행복했다. 이것이 마지막 유언. 마지막 유언. 기도합시다. 왜 우리가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을까요 이 복음. 이웃들에게 전도하지만 힘이 없어요. 우리가 사람들을 선입관을 가지고 대하고 편견을 가지고 대하고 주님의 심정을 가지고 대하지 못하기 때문이예요. 여러분 주님의 눈으로 보시면 여러분 언짢아 보이는 이웃들의 눈에서도 빛나는 내일의 가능성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주님의 사랑 주님의 가슴으로 내 이웃들을 느끼게 하시고 경험하게 하시고 그 사랑으로 이웃들에게 다가서도록 도와주시옵소서.이웃들이 탕자처럼 돌아오기 전에 사실은 어쩌면 집안에 있는 탕자와 같은 우리들 내가 탕자일지도 모릅니다. 헨리 나우엔교수의 말처럼 내가 정말 이웃들을 섬기면서 그 동안에 내가 탕자였다. 내가 탕자였다. 우리가 돌아올 때 우리의 찌꺼기가 다 사라지고 우리가 새로워질 때 교회가 새로워지면 민족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워지면 이웃들을 향한 전도가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 하나님 나를 새롭게 하시고 이웃들을 향해 열린 가슴을 가지고 다가갈 수 있는 주님의 심정 주님의 사랑 주님의 가슴을 주시옵소서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346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