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그날이 가까움을 보는 사람 (히10:19-25)

본문

여러분이 너무나도 잘 아시는 이솝의 우화 중에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사자와 나귀와 여우가 합동 사냥을 나갔더랍니다. 서로 협력해서 사냥을 해서 성공해서 사냥감을 하나 얻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분배할려고 할 때 사자가 말하기를 "자, 우리가 셋이 합동해서 이 사냥감을 얻었으니깐 나누어 먹자." 그리고 나귀에게 말하기를 "네가 분배하라." 그랬습니다. 나귀가 분배할 때 아주 공정하게 삼등분해서 분배했더랍니다. 그 사자가 이걸 보고 마음이 편하질 못했어요. "나쁜 놈, 내가 사잔데, 나를 똑같이 취급해" 넌 나쁜 놈이라고, 나귀를 잡아 먹어버렸어요. 이제는 여우하고 사자하고 둘이 남았습니다. 여우에게 말하기를 "이제, 네가 분배해라." 그랬답니다. 여우가 사자에게 말하기를 "아 그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합니까 사자님께서 다 잡수시고 남은 다음에 제가 먹겠습니다." 그러니까 사자가 빙그레 웃으면서 "너 참 똑똑하다. 너 그 어디서 배웠냐"하고 물었더니 여우 대답이 "나귀가 죽는 걸보고 배웠습니다." 그러더래요. 여러분, 남이 죽는 걸보고 배워야 됩니다.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를 이렇게 구분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남의 얘기를 많이 합니다. 그리고 남의 일에 관심이 많아요. 자기 일까지도 남에게 떠맡기고, 다 다른 사람 때문에 자기가 불행하답니다. 그래서 전부 다른 사람에게 떠맡기고, 남의 이야기로, 또 남의 걱정까지 다하고 앉았어요. 이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구요.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얘기하지 않습니다. 관심은 자기 자신에게 있고, 자기 자신의 인격, 자기 자신의 내면 세계에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살핍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어떤 때에 옆집에 불이 났다고 합시다. 아 불났다고, 뛰쳐나가서 불 구경만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불이 났고, 어떻게 돼서, 누구 잘못이고, 이거 떠들고 있는 사람, 이 사람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불이 난 걸 봤거든 정말 부리나케 돌아와서 자기 집 불 단속을 해야지요.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또 하나 어리석은 사람은 과거에 매인 사람입니다. 지나간 일, 옛날 일, 이미 끝난 일, 거기에 마음을 쓰면서 세월 다 보냅니다.
좀 미안한 얘기입니다만은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동안에 미국사람 장례식을 하나 한 일이 있습니다. 그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그 부인과 같이 제가 병원에 갔습니다. 의사가 문간에서 말하기를 "Your husband is expired already당신 남편은 죽었습니다." 그러더라고요. " I see." 알았다고 그러고 들어갔어요. 그 시트를 딱 제치고 시체 앞에 서서, 한참 기도하고 나서, 시체에 대하여 키스를 해요. 딱 입술을 대고 " I love you"하고는 다시 시트를 덮어놓고 싹 돌아서는데, 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아요. 여전히 명랑하게 자기 할 일을 다하더라고요. '너무 지나치다…' 싶기는 했습니다만은 우리는 그에 비해서는 너무 또 정이 많아요. 죽은 사람은 죽었어요. 이제 끝났어요. 거기다 대고 뭐 슬퍼하고, 울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오늘과 내일을 다 망치고 마는, 그게 바로 우리예요. 너무 감상적이에요. 너무 과거지향적이에요. 그런가 하면 지혜로운 사람은 항상 미래지향적입니다. 여러분 늙었다는게 뭔지 아십니까 옛날얘기 많이 하는 사람, 또 그것밖에 아는 것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옛날에 어떻고, 옛날에 어떻고…." 또 어떻게 그건 또 많이 기억을 합니다. 그리곤 오늘과 미래에 대한 건 깜깜요. 이게 바로 늙었다는 겁니다. 젊은 사람들은 항상 미래지향적입니다. 생각이 저 앞에 가있습니다. 또한, 어리석은 사람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일에 신경을 씁니다. 여러분 혹 운전을 못하시는 분 있으십니까 "아휴, 사고 날까봐 운전 못해요." 왜요 사고라는 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꼭 있다고 생각할 거 없잖습니까 없다고 생각해야죠.
그런데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일, 그런 일이 많죠 우리 걱정거리가 다 그런 거예요. '기우'라는거 아닙니까 이런 걱정하느라고 정신없어요. 지혜로운 사람은 꼭 있을 일만 생각합니다. 반드시 있을 일, 결정적 사건에 대해서만 신경을 씁니다. 이게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여러분, 계절이 변화됩니다. 한 해가 저물었습니다.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그 날이 다가옵니다. D-day가 옵니다. 역사의 종말이 옵니다.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역사관이라고 하는 건 크게 나누어서 둘이 있는데, 하나는 Cycling 입니다. 원으로 그림을 그려서, 돌고 도는 것이다. 그래서 윤회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또 하나는 직선적입니다. Linien입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고, 창조가 있고, 심판이 있다. 생이 있고, 죽음이 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건 다른 세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마세요. 내년에도 겨울은 있습니다. 내년에도 봄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같은 겨울도 아니고, 같은 봄도 아닙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성경의 아주 핵심 교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주의 날'입니다. 신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합니다.
'The Lord's day', '주의 날' 그 '주의 날'에 대한 설명이 신구약 성경을 꽉 차게 있습니다. 그 '주의 날'은 역사의 끝이요, 심판의 날이요, 동시에 구원의 날입니다. 이 날은 숨겨져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죽을 날을 모르는 것처럼… 이건 모른다는데 매력이 있는 거예요. 그러나 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있는 것이요, 내가 모른다고 없어질 일이 아닙니다. '주의 날'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신비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예언되고, 계속 설명되고, 계속 그 내용을 전파하고 있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주의 날'입니다. 우주적으로는 주님이 재림하는 역사의 끝을 말하는 것이요, 개인적으로는 그날 내가 육신의 옷을 벗고 주님 앞에 가는 요단강을 건너가는 그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날이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가 인정을 하거나 말거나, 때로는 믿거나 말거나 그날은 계속 다가오고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큐블러-로스 (Elisabeth Kubler-Ross)라고 하는 유명한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죽음의 심리학에서는 세계적인 권위잡니다. 아주 오래 전, 60년대 초에 그분이 'On Death and Dying' 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것이 타임지에 크게 소개된 걸 보고 너무 빨리 그 책을 보고 싶어서 제가 급하게 비행기로 주문을 해 가지고 이것을 정독하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던 때가 있습니다. 그는 600명을 상대로, 죽어 가는 사람 600명을 상대로 상담을 합니다. 거기에서 많은 지식을 배웠습니다. 많은 것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이 책을 쓰게 됩니다. 그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죽어 가는 사람은 이를 지켜보는 의사나 간호원이나 목사나 가족에게 가르치는 바가 있다. 죽어 가는 사람은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 죽어 가는 사람으로부터 꼭 배워야한다. 죽어 가는 사람은 할 말이 있다" 그겁니다. 여러분 이 큐블러는 사람의 죽음을 다섯 단계로 설명합니다. "당신은 의학적으로 볼 때 생이 끝났습니다. 이제 얼마 후에 갈 겁니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죽는 시간까지를 아주 섬세하게 연구합니다. 주고 받은 대화까지 책에 다 실려있습니다.
첫째 단계가 뭐냐하면 Denial and Isolation. 아주 부정한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 내가 죽다니, 그럴 수 없다. 오진일거다. 잘못 됐을거다. 이거 뭐가 잘못 된거다." 부정하면서도 또 부정할 수 없는 한가지가 있는데, 그 마음속에서 지금까지 소중히 여겼던 거, 그렇게 애써오던 일들, 또한 쌓아올린 일들이 전부 무너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벌어놓은 돈, 아무 소용없어요. 공부하고 명예, 아무 소용없어요. 또 사랑하는 사람, 가정,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도 그 시간은 그를 위로할 수가 없어요. 아무 소용없어요. 그대로 다 녹아 내리고 무너져 내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혼자 섭니다. 오로지 혼잡니다. 고독합니다. 그 순간을 경험하게 됩니다. 두 번째 단계는 Anger 입니다. 분노하는 겁니다. 분노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Why me하필이면 나냐" 이말이오. "아 죽어야 할 사람 많은데 왜 하필이면 나냐 쓸모 없는 사람도 많은데 하필이면 나냐 어째서 나냐" 이것이 고민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세요. "Why me"가 아닙니다. "Me too"지. "왜 나냐" 그게 아니지요. 나도 가는 거죠. Me too일 뿐이오.
그런데 이걸 수락하지 못해서 왜 하필이면 나냐고 몸부림을 치게 됩니다. 그것이 두 번째 단계요. 또 하나 고민이 있고, 분노가 있습니다. "Why now", "하필이면 지금이냐 내가 할 일이 많은데…, 하던 일도 많고, 끝내지 못한 일도 있고 일을 시작하는 중에 있는 데, 아직 젊은데…, 어째서 하필이면 지금이냐" 이 말이요. "내 갈 것은 알지마는 지금 간다는 건 뭔가 잘못 됐다 이거요." 이런 분노가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 할 때, 그런 경험을 한 일이 있습니다. 수요일 저녁에, 성경공부 시간에 성경을 가르치는데 제가 믿기는 이 강단에서 서서 하나님 말씀을 전할 때,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다 함께 성령님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령님이 친히 역사 하셔서 말씀하시고, 성령님을 통하여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설교하는 도중에 불현듯 생각지도 않았던 그런 생각이 강하게 옵니다. 그것은 '이 가운데 오늘 온 사람들 중에 다음 시간에 교회에 못 나올 사람도 있을거다.' 그런 생각에 강하게, 그렇게 충격을 받게 됩니다. 강한 압박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얘기했습니다. "여러분, 이 가운데 다음 시간에 꼭 교회 나올 수 있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이 마지막날이요, 오늘이 마지막날이요, 마지막 시간인줄 알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서도록 다 회계하고 깨끗한 심령으로 돌아가도록 합시다." 특별 통성 기도를 했어요. 그리고 주기도문으로 폐했습니다. 교인들이 나가는 중에 저 문간에서 스물네살 난 결혼한 지 몇 달밖에 안된 아주머니가, 건강한 분입니다. '쿵'하고 쓰러져요. 우리 교회 청년들이 둘러 업고 뛰었지마는 벌써 갔어요.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너무나도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올 때 순서적으로 오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습니다. 나이 들었다고 빨리 가는 것도 아니고, 젊었다고 넉넉한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죽음이란 언제나 나 자신의 일이요, 언제나 현재적이요, 언제나 구체적인 일이요, 현실적인 일입니다. 항상 우리는 죽음을 옆에 두고 삽니다. 죽음과 함께 살아 갑니다. 그리고 죽는 자를 통해서 우리는 생생한 교훈을 들어야 합니다.
또한 세 번째 단계는 Bargaining 입니다. 흥정을 하자고 듭니다. "어떻게 더 살 수 없을까요 뭐 병원을 옮겨볼까요 뭐 외국 가서 수술하면 될까요 뭘 어떻게…, 돈 얼마든지 내겠습니다." 이런 얘기합니다. 흥정을 합니다. 비참합니다. 조금 더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는거 참으로 불쌍합니다. 참으로 안됐습니다. 여러분, 이제 한번 굳게 결심하십시다. 그렇게 그렇게 Bargaining 하지 맙시다. 흥정하지 맙시다. 지금이 그때라고 하거든 그저 조용한 마음으로 담담하게 가십시다. 어떤 때는 나이 많은 어른인데도 불구하고 의사도 소용없다는데 자꾸 수술해 달라 그러고, "아 돈 아끼느냐" 온 자녀들을 다 아주 못살게 굽니다. 벌어놓은 것 다 쓰고 갑니다, 아주 그냥. 빚까지 잔뜩 걸머지고 갑니다. 제발 이러지 맙시다. 기독교인의 죽음은 그래서는 안됩니다. 언제 맞아도 맞을 것이니까, 다 살아도 보태고 갈 생각을 하고 가야지, 빚 걸머지고 가겠다는 그런 생각을 합니까 여러분, 미리미리 준비하십시다. 미리미리
기도하십시다.
. 깨끗하게 가십시다. 그렇게 좀 더 살겠다고, 비굴한 흥정하지 맙시다. 의사에게 아무리 매달려봐도 그 사람도 갈 사람이오. 별 재주 없는 거요. 조금 더 연기해 봤댓자, 되돌아오는 것은 그 자리요. 어차피 영안실에서 끝나는 거요. 그 너무 그렇게 비굴하게, 처절하게 그렇게 가지 맙시다.
또 하나는, 네째는 Depression 입니다. 아주 포기하고 실망하고 낙담하는 겁니다. 우울해지는 것입니다. 이 우울은 극단적인 것입니다. 죽음을 앞에 놓은 사람의 우울증. 이건 대단히 심한 것입니다. 이것을 잘 넘어서야 됩니다. 잘 통과해야 됩니다. 여기서 잘못하면 남을 원망하게되고, 불평하게 되고, 많은 사람 괴롭히게 됩니다. 우울할 때가 있고.
자 다섯째는 이제는 순응을 합니다. Acceptance 입니다. "자 그러면 간다는데, 이제 내가 할 일이 뭘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되느냐고, 이제 나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깨끗하게 순응을 합니다. 받아들입니다. 볼티모어 선이라고 하는 일간지에서 그 독자들에게, 신문 독자들에게 이상한 설문을 냈습니다. "당신이 1년밖에 살지 못한다면, 그 1년 동안에 무엇을 하겠습니까"하고 수 천명에게 물어보았는데, 다 답안이 왔습니다. 거기에는 공통적으로 저택이라든가, 여행이라든가, 무슨 새로운 자동차라든가 저축이라든가 출세라든가 명예라든가 이런 세상적인 건 서원이 하나도 없어요. 딱 두 가지 서원으로 집약이 되는데, "일년 남았다면…"하고 대답이 왔습니다. 하나는 "더 많은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지금까지는 도움 받는데 신경을 썼지만은요 남은 일년은 뭔가 도우며 살고 싶습니다."
두 번째는 "사랑 받을려는 것이 아니고, 더 많은 사랑을 주고 싶습니다." 여러분, 이 점을 잊지 마세요. 1년 동안에 더 받아보면 뭘 하겠어요 이제는 단 1시간이 남았더라도 남에게 주고, 위로를 주고,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사랑을 주는 그런 것으로 살아가야 됩니다. 죽음이 가까워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음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징조는 충분합니다. 오십견이 와서 어깨를 두드리고 "여기 주물러라. 저기 주물러라."하면 반은 간 겁니다. 계단을 올라갈 때 숨이 헐떡헐떡해서 중간에 쉬었다 올라간다, 얼굴이 노래지면 이건 징조가 온 겁니다. 여러분,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이세요. 준비하세요. 없을 일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 마세요. 있을 시간이 온 것뿐이오. 그리고 문제는 죽음을 부정 할려고 드는 그 마음 자체에서 고민이 오는 겁니다. 하이데커는 그래서 '던져진 생이다.' '주어진 생'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받아들이는 자세가, 부정 할려들지 마세요. 긍정하되 가슴을 열고 받아 들이는거요. 그게 중요하고요. 또 하나는 나 자신을 예외시하지 마세요. 건강하니, 뭐 젊었느니, 일이 많으니, 공부를 많이 했고, 준비를 많이 했고… 쓸데없는 말하지 마시고요. 나를 예외시하지 마세요. 다 가는 길에 나도 가는 거요. 또 하나는 그것이 언제라 생각해도 좋아요. 아침에도 좋고, 저녁에도 좋고, 이대로 여기서 끝나도 상관이 없다. 한만큼 밝게, 준비된 생을 사세요. 한 순간도 부끄러움 없이 그대로 주를 맞이할 수 있는 그런 준비된, 죽음을 준비한, 미래를 준비한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 12절에서 말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어둠의 옷을 벗어라." 분명히 밤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생각합니다. 밤이 밤으로 끝나는게 아니고, 이 밤 뒤에는 아침이 오고 있단 말입니다. 그는 아침을 바라보며 밤을 극복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날은 어두움이 아닙니다. 그날은 밝음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참 많은 존경을 받고, 그리고 도승이라고도 하고, 공부를 많이 해서 학승이라고도 하던, 성철 스님이라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 쓴 책에 '우리 옆에 왔던 부처'라고 하는 책을 이청 스님이 썼습니다. 이 책에 나온 얘기를 그대로 읽는 겁니다. 이것은 '열반송'입니다. 그가 세상 떠날 때 마지막으로 한 말을 여기에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평생 무수한 사람들을 속였으니 그 죄업 하늘에 가득차 수미산보다 더하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이니 한 덩이 붉은 해, 푸른 산에 걸려있다." 이게 스님의 말입니다. 그가 어떻게 도를 닦았든 말았든 마지막 말은 이렇게 합니다. 천추의 한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여러분 잘 아는 대로 헬렌 켈러 여사는 장님이요, 벙어리요, 귀머거리입니다. 얼마나 답답한 세상을 살았습니까만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헬렌 켈러 여사는 세상 떠날 때 "아, 나의 생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러고 갔습니다. 어찌 생각해야합니까 우리는 끝을 봅니다. 그러나 그 끝은 다시 다음 세대로 향한 시작입니다. 우리는 지옥을 보며 가는게 아니고, 하늘나라를 보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허무함의 노예가 된 것이 아니고, 영생의 기업을 바라보며 삽니다. 성경 어디를 읽어보세요. 예수님의 말씀을 보세요. 전부가 하늘 나라를 지향하고 있어요. 그래서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순교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화평케하는 자에게…. 그 복이 다 무얼 말하는 겁니까 하늘나라의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으라. 이 기본적인 소망, 영생에 대한 소망을 굳게 잡아라. 말씀합니다. 또는,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 사랑과 선을 행하는 것만 아닙니다. 격려해서 서로서로 격려해서 이제는 사랑하는 일만 남았어요. 이제는 선하는 일만 남았어요. 나로 인해서 사랑하게 되고,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선행을 하게 되도록, 그러한 사람으로 기뻐하며, 기쁨을 주며, 사랑을 격려하는 사람으로 살것이오. 또, 모이기를 힘쓰라. 이것은 사도행전 2장 46절에서 봅니다.
초대 교회 사람들 성령님이 충만할 때, 그들은 주님의 재림을 바로 의식하면서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모여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성도의 교재를 나누고, 봉사했습니다. 모이기를 힘쓰라. 여러분, 과거에 모이던 것보다 더 열심히, 그 어느때 보다도 더 충실히 모여야 합니다. 열심히 모여 예배하며, 기도하며, 주를 찬송할 것입니다. 피터 마샬이라고 하는 분을 제가 만났습니다. 그는 피터 마샬 목사님의 부인입니다. 마샬 목사님이 세상을 떠날 때 그 부인에게 빙그레 웃으면서 "슬퍼하지 마시오. 내일 아침 다시 만납시다." 하더랍니다. 이 한 마디가 그 마음속에 큰 충격이 됐어요. 그 영감을 얻어서 그는 미국의 베스트 작가로서도 유명한 사람입니다. 제가 그 할머니를 만났을 때, 얼마나 은혜스러운지 모릅니다. 그 한 마디, "내일 아침 다시 만납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마지막이오. 또 우리가 들어야 할 말입니다. 그날을 보십니까 그날을 믿습니까 그날의 내 모습이 어떻게 나타날 것 같습니까 Priority number이 뭡니까 오늘 내가 해야될 일이 뭡니까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에서 말합니다.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내 앞에 면류관이 있다고…, 하나의 군인으로 하나의 경기자로 달려갈 길을 다가서 내 앞에 면류관이 있다고, 나뿐만 아니라 그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이 면류관이 주워질 거라고…." 이렇게 내다보며 그는 마지막을 갑니다. 여러분, 이것이 성도의 길입니다. 이 밝은 미래를 바라보며 오늘을 사는 겁니다. 여기에 삶의 힘이 있고, 원동력이 있고, 능력이 있는 것이올시다. 승리 생활이 함께 하는 것이올시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346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