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풍성한대로 (빌4:14-23)
본문
사도행전 16장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어떻게 빌립보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자주 장사인 루디아와 바울과 실라가 옥고를 치르는 동안 구원을 받게 된 빌립보 감옥의 간수 가정이 모체가 되어 빌립보 교회가 시작이 된 것입니다. 이런 어려운 여건속에서 시작한 교회이기 때문에 그런지는 몰라도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사도 바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각별한 데가 있었습니다. 사실 다른 교회는 사도 바울을 물질적으로 돕는 일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만은 참으로 최선을 다해서 감옥안에서 교생하고 있는 사도 바울을 오왔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이 고마운 성도들의 사랑에 대해서 깊이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난 시간 생각한 빌립보 4:10-13에서 그를 능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어떤 상황에 처한다고 하더라도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이말은 바울에게 선물이 필요하지 않다든지 물질적으로 여유를 즐기고 있다는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여기 오늘 주신 말씀14절에 "그러나"라는 말로 시작한 것이 바로 그런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nevertheless, however)라는 부사로써 그의 생활에 물질적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사도 바울을 물질적으로 도운 것을 가리켜 사도 바울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라고 말했습니다. 여기 사도 바울이 말하느 '괴로움'이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소간의 의견 차이가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문맥을 보아도 사도 바울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 구체적으로 말해서 지금 빌립보 감옥에 수감되어 고생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가까운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종이 복음을 위하여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데 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구체적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어에 'compassion'이란 말이 있습니다. 본래 라틴말에서 나온 말인데 "함께(com)","고통한다(passion)"는 뜻이 있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할 때 "나는 상관없으나까" 하면서 무관심하게 지낸다면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관심입니다. 좋을 때 같이 기뻐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파하는 사람을 볼 때 함께 괴로워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사도 바울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복음 때문에 감옥에 수감되어 고행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가슴 아파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슴만 아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사도 바울이 당하는 괴로움을 어떻게 하면 함께 나눌 수 있을까 생각하고 그에게 사랑의 표로 선물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이번에 처음으로 사도 바울에게 선물을 보낸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선물을 보낸 것이 있었습니다. 복음의 초기,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파해 그곳에 교회가 세워지던 무렵에 하나님의 뜻에 따하 데살로니가로 갈 때도 바울에게 선물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주고 그들에게 복음을 주고 그들은 바울에게 물질을 보냄으로 '주고 받는 일'에 참예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회 성도들 사이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도록 신령한 것을 공급했고, 그들은 바울에게 물질적인 것을 공급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의 씨앗을 뿌림으로서 복음으로 살 권리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장애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스스로의 손으로 일해서 자신의 필요를 채웠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물질적으로 곤경에 처하기도 했고 도움이 필요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빌립보 성도들을 통해 채워지게 된 것이고 그 결과 하나님의 사역은 계속 전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계속 전진하도록 하기 위해서 물질을 공급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방면에 능력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물질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자동차의 운전사라면 물질은 연료에 해당합니다. 운전사 없이도 차가 움직일 수 없지만 연료가 떨어졌어도 차는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이 두 가지가 적절하게 결합할 때 차는 신명나게 달릴 수 있게 됩니다. 일을 직접 할 수 있는 사람은 생애를 온전히 드려서 일을 하고 자신이 직접 일할 수 없는 사람은 물질로 참여함으로 하나님의 일은 중단없이 계속 전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직접 농어촌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지만 이 일을 위해서 직접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하나님의 종들을 돕는 것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 또한 우리가 직접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에 가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지만 물질적으로 선교사님들을 돕는 것으로 외국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참여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국내 선교와 국외 선교하는 일에 참예하심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아직 이 귀한 일에 참예하지 못하신 분 계시면 이제라도 하시면 됩니다. 세상에 귀한 일이 많지만 복음을 전하는 것만큼 귀한 일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도 빌립보의 성도들의 선물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선물을 받고 감사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우선, 그들의 선물은 그들의 영적 성장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14절부터 16절까지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이전에 보낸 선물로 인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칫 잘못하면 사도 바울이 물질에만 관심있는 사람같이 보일 수가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진정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17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이 말이 조금 애매하게 표현되었는데 `너희에게 유익하도록'이란 표현은 상거래에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여기 헬라어 `코조그'이란 말이 사용되었는데 이 말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말씀이란 말이 아니고 계정, 혹은 구좌(Accout)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선물이 그들의 계정에 이익 배당이 돌아가는 영적 투자로 생각했습니다. 사실 이 면에 사도 바울이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로부터 선물을 받지 않고도 지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물을 받고 보니 기쁘면서도 감사했고 이것이 그들에게는 어떤 유익이 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사도 바울에게 선물을 보낸 그 행위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이요, 유익이 되는가 하는 사실을 알려 주려는 것이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께 헌금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물질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온 천하 만물이 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드리는 물질이 없어도 그가 원하시면 무엇이나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물질을 드리기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입니다. 물질을 드림으로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 주님은 우리의 물질을 요구하시고 또 그것을 기꺼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자녀를 키워보신 분은 아시겠습니다만 부모가 무엇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녀에게 조그마한 것만 받아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18절 말씀을 보세요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라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로부터 선물을 받고 감사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들 자신에게 큰 영적인 유익을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빌립보 교회의 선물을 받고도 이제 그를 다시 돌려 보내면서 선물을 틀림없이 받았다는 것을 빌립보 교회에 알려 주고 있습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다"라는 말은 "나는 모든 것을 받았다"라는 말은 영수증 용어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로부터 받은 것은 그의 필요를 채우기에 충분했기 때문에 `풍부하다'는 단어에 이어서 `풍족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섣도들로부터 넘치도록 풍부한 선물을 받은 사람은 물론 사도 바울 자신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볼 때 그 선물을 받은 이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의 선물은 단순히 바울 사도에게만 기쁨을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향기로운 제물인 것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향기'란 말이나 `재물'이란 말은 모두 구약성경의 개념입니다. 사람들이 제물을 드릴 때 하나님은 그 향기를 흠향하십니다. 물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선물을 하나님의 종, 바울에게 드렸지만 실상은 하나님께 드린 향기로운 제물인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한가지 중요한 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종들에게 행해진 것은 실상 종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에게 행해진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진 것은 바로 하나님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궁극적인 공급자인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빌립보 교회 성도들로부터 넘치도록 풍부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이 그들에게 물질적으로 무엇인가를 갚아 줄 만한 능력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 가지 분명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빌립보 4장 19절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그의 하나님은 만물을 소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풍성한 대로' 모든 필요를 채우신다고 했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풍족하게 했으니 하나님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풍족하게 하실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필요를 채워 주었으므로 하나님은 빌립보 교회의 `모든 쓸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들이 나의 모든 쓸 것을 공급해 주었으니 하나님이 내 대신 당신들의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실 것이요'라는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급은 예수를 떠나서는 불가능하고 오직 예수 안에서 그리고 예수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말한 이 약속은 그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오늘도 주 안에 새 사람이 되고, 하나님께 속한 모든 성도들은 똑같은 특권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나의 하나님께서 그 무궁무진한 보고로부터 나의 필요를 채워 주신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감격스럽습니다. 사람의 경우에는 마음에은 있어도 가진 것이 없어서 필요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습니까 하나님께 구하면 우리의 쓸 것을 채우시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항상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겠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 보며 마지막 때의 사람들은 감사할 줄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어떤 이가 "우리가 가장 배우기 쉬운 산수는 잃어버린 것을 세는 것이요, 가장 배우기 어려운 산수는 우리가 받은 축복을 세어 보는 것이다."고 한 말은 옳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항상 감사할 조건을 찾아서 감사하는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를 돕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로 인해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음으로 인해 감사해야 합니다. 더구나 우리는 하나님이 풍성한 것으로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워 주심으로 인해 감사해야 겠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만은 참으로 최선을 다해서 감옥안에서 교생하고 있는 사도 바울을 오왔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이 고마운 성도들의 사랑에 대해서 깊이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난 시간 생각한 빌립보 4:10-13에서 그를 능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어떤 상황에 처한다고 하더라도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이말은 바울에게 선물이 필요하지 않다든지 물질적으로 여유를 즐기고 있다는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여기 오늘 주신 말씀14절에 "그러나"라는 말로 시작한 것이 바로 그런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nevertheless, however)라는 부사로써 그의 생활에 물질적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사도 바울을 물질적으로 도운 것을 가리켜 사도 바울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라고 말했습니다. 여기 사도 바울이 말하느 '괴로움'이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소간의 의견 차이가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문맥을 보아도 사도 바울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 구체적으로 말해서 지금 빌립보 감옥에 수감되어 고생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가까운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종이 복음을 위하여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데 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구체적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어에 'compassion'이란 말이 있습니다. 본래 라틴말에서 나온 말인데 "함께(com)","고통한다(passion)"는 뜻이 있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할 때 "나는 상관없으나까" 하면서 무관심하게 지낸다면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관심입니다. 좋을 때 같이 기뻐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파하는 사람을 볼 때 함께 괴로워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사도 바울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복음 때문에 감옥에 수감되어 고행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가슴 아파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슴만 아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사도 바울이 당하는 괴로움을 어떻게 하면 함께 나눌 수 있을까 생각하고 그에게 사랑의 표로 선물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이번에 처음으로 사도 바울에게 선물을 보낸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선물을 보낸 것이 있었습니다. 복음의 초기,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파해 그곳에 교회가 세워지던 무렵에 하나님의 뜻에 따하 데살로니가로 갈 때도 바울에게 선물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주고 그들에게 복음을 주고 그들은 바울에게 물질을 보냄으로 '주고 받는 일'에 참예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회 성도들 사이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도록 신령한 것을 공급했고, 그들은 바울에게 물질적인 것을 공급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의 씨앗을 뿌림으로서 복음으로 살 권리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장애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스스로의 손으로 일해서 자신의 필요를 채웠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물질적으로 곤경에 처하기도 했고 도움이 필요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빌립보 성도들을 통해 채워지게 된 것이고 그 결과 하나님의 사역은 계속 전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계속 전진하도록 하기 위해서 물질을 공급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방면에 능력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물질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자동차의 운전사라면 물질은 연료에 해당합니다. 운전사 없이도 차가 움직일 수 없지만 연료가 떨어졌어도 차는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이 두 가지가 적절하게 결합할 때 차는 신명나게 달릴 수 있게 됩니다. 일을 직접 할 수 있는 사람은 생애를 온전히 드려서 일을 하고 자신이 직접 일할 수 없는 사람은 물질로 참여함으로 하나님의 일은 중단없이 계속 전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직접 농어촌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지만 이 일을 위해서 직접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하나님의 종들을 돕는 것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 또한 우리가 직접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에 가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지만 물질적으로 선교사님들을 돕는 것으로 외국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참여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국내 선교와 국외 선교하는 일에 참예하심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아직 이 귀한 일에 참예하지 못하신 분 계시면 이제라도 하시면 됩니다. 세상에 귀한 일이 많지만 복음을 전하는 것만큼 귀한 일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도 빌립보의 성도들의 선물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선물을 받고 감사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우선, 그들의 선물은 그들의 영적 성장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14절부터 16절까지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이전에 보낸 선물로 인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칫 잘못하면 사도 바울이 물질에만 관심있는 사람같이 보일 수가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진정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17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이 말이 조금 애매하게 표현되었는데 `너희에게 유익하도록'이란 표현은 상거래에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여기 헬라어 `코조그'이란 말이 사용되었는데 이 말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말씀이란 말이 아니고 계정, 혹은 구좌(Accout)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선물이 그들의 계정에 이익 배당이 돌아가는 영적 투자로 생각했습니다. 사실 이 면에 사도 바울이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로부터 선물을 받지 않고도 지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물을 받고 보니 기쁘면서도 감사했고 이것이 그들에게는 어떤 유익이 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사도 바울에게 선물을 보낸 그 행위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이요, 유익이 되는가 하는 사실을 알려 주려는 것이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께 헌금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물질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온 천하 만물이 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드리는 물질이 없어도 그가 원하시면 무엇이나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물질을 드리기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입니다. 물질을 드림으로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 주님은 우리의 물질을 요구하시고 또 그것을 기꺼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자녀를 키워보신 분은 아시겠습니다만 부모가 무엇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녀에게 조그마한 것만 받아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18절 말씀을 보세요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라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로부터 선물을 받고 감사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들 자신에게 큰 영적인 유익을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빌립보 교회의 선물을 받고도 이제 그를 다시 돌려 보내면서 선물을 틀림없이 받았다는 것을 빌립보 교회에 알려 주고 있습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다"라는 말은 "나는 모든 것을 받았다"라는 말은 영수증 용어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로부터 받은 것은 그의 필요를 채우기에 충분했기 때문에 `풍부하다'는 단어에 이어서 `풍족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섣도들로부터 넘치도록 풍부한 선물을 받은 사람은 물론 사도 바울 자신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볼 때 그 선물을 받은 이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의 선물은 단순히 바울 사도에게만 기쁨을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향기로운 제물인 것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향기'란 말이나 `재물'이란 말은 모두 구약성경의 개념입니다. 사람들이 제물을 드릴 때 하나님은 그 향기를 흠향하십니다. 물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선물을 하나님의 종, 바울에게 드렸지만 실상은 하나님께 드린 향기로운 제물인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한가지 중요한 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종들에게 행해진 것은 실상 종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에게 행해진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진 것은 바로 하나님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궁극적인 공급자인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빌립보 교회 성도들로부터 넘치도록 풍부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이 그들에게 물질적으로 무엇인가를 갚아 줄 만한 능력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 가지 분명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빌립보 4장 19절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그의 하나님은 만물을 소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풍성한 대로' 모든 필요를 채우신다고 했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풍족하게 했으니 하나님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풍족하게 하실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필요를 채워 주었으므로 하나님은 빌립보 교회의 `모든 쓸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들이 나의 모든 쓸 것을 공급해 주었으니 하나님이 내 대신 당신들의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실 것이요'라는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급은 예수를 떠나서는 불가능하고 오직 예수 안에서 그리고 예수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말한 이 약속은 그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오늘도 주 안에 새 사람이 되고, 하나님께 속한 모든 성도들은 똑같은 특권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나의 하나님께서 그 무궁무진한 보고로부터 나의 필요를 채워 주신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감격스럽습니다. 사람의 경우에는 마음에은 있어도 가진 것이 없어서 필요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습니까 하나님께 구하면 우리의 쓸 것을 채우시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항상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겠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 보며 마지막 때의 사람들은 감사할 줄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어떤 이가 "우리가 가장 배우기 쉬운 산수는 잃어버린 것을 세는 것이요, 가장 배우기 어려운 산수는 우리가 받은 축복을 세어 보는 것이다."고 한 말은 옳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항상 감사할 조건을 찾아서 감사하는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를 돕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로 인해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음으로 인해 감사해야 합니다. 더구나 우리는 하나님이 풍성한 것으로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워 주심으로 인해 감사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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