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흩어진 자의 사명 (행8:1-8)
본문
요한복음 9장을 읽어보시면 1절부터 그 이야기 속에 예수님과 제자들의 아주 심각한 대화의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어떤 날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함께 길을 가다가 나면서 소경 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 인생에 불행이 있다고 하지만은 불행 중에 가장 큰 불행이 뭐냐 하면은 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몸이 만원이라면 눈이 칠천원이랍니다. 이 본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그런데 나면서부터 소경 됐다는 얘깁니다. 고통이나 불행을 말한다면 이 이상으로 더 불행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길거리에서 얻어먹는 거지가 됐습니다. 나이 40이 넘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남의 신세를 져야 하는 그런 불쌍한 한 거지가 여기 있더란 말입니다. 이 가장 불행한 대표적인 인간을 보는 순간 제자들은 아주 궁금해했습니다. 이래서 물어 보는 겁니다. "예수님, 이 사람이 소경으로 살아가는 것, 또 소경으로 태어난 것 뉘 죄 때문입니까 왜 이 사람은 이렇게 살아가야 합니까 그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죄 때문이라면 뉘 죄 때문입니까 부모입니까 본인입니까" 심각한 질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대답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 우리는 이 질문과 대답 속에서 세 가지 진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뉘 죄 때문입니까'라고 하는 질문은 도덕적 질문이올시다. 이 사람이 죄가 많아서, 혹 부모가 죄가 많아서, 왜 죄 때문에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로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서 인과 응보적인 그런 철학적 근거에서 말하는 겁니다. "뉘 죄 때문에 즉, 도덕적 원인으로 해서 이 사람이 불행해진 겁니까"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의 대답은 "아니,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땅 끝까지 전해지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하여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그 놀라운 구원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서 이 사람이 이만큼의 불행한 생을 살게 됐다." 대단히 중요한 대답을 하십니다.
또 두 번째 문제는 '뉘 죄 때문입니까'라고 하는 말은 원인을 과거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과거에 본인이 죄를 지었고, 또 과거에 부모가 죄를 지어서 이렇게 오늘의 불행의 원인을 과거에 두려는 겁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불행은 어제 때문이요. 어제의 불행은 더 좀 더 과거 때문이요. 그래서 설명이 다 안되면 전생에 죄가 많아서 여기까지 끌고 올라가는 거예요. 이 사람들은 모든 원인을 과거에 두고 또 먼 과거에 두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 즉 미래에 두었습니다. 과거가 원인이 아니고 원인이 미래에 있다는 겁니다. 이 사람을 통해서 현재와 미래에 큰 일을 하기 위하여 놀라운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잠깐 눈이 어둡고 괴로운 시간을 가고 있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우리는 모든 원인을 자꾸 과거로 돌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논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미래입니다. 보다 높은 차원으로 미래가 원인이 되어서 오늘 현재가 있다는 겁니다. 보다 더 높은 미래를 위해서 오늘의 현실이 있다는 겁니다. 대단히 중요한 얘기 아닙니까 죄인이 감옥에서 고생하는 것은 과거에 지은 죄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공부하는 것은 미래 때문입니다. 공부하면서 만일에 어떤 학생이 말하기를 '나는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서…' 이 말이 됩니까 그건 아니지요. 어디까지나 유능한 미래를 위해서 오늘 이 고생이 여기 있는 거예요. 차원이 틀립니다.
근데 세 번째 의미는 뭐냐하면 죄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건 인간차원에서 생각하는 거예요. 어디까지나 인간세상에서 문제도 해답도 얻으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아니요. 하나님께서 현실이라고 하는 또는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룬다는 것이죠." 이런 높은 차원의 대답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생각하게 됩니까 이 나라, 이 민족, 내가, 여러분이 하루하루 당하는 이 사건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현대의 문제는 How의 문제가 아니라 Why의 문제라고 합니다. 우린 흔히 'Know-how'라는 말을 합니다마는 NO!! 'Know-why'의 문제입니다. '왜'가 문제지 '어떻게'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당한 문제에서 그 동안에 늘 how만 생각했어요. 'Know-how'만 생각했어요.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까, 어떻게 하면 피해 갈까, 어떻게 하면 면할까……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왜 우리는 이 일을 당해야 하느냐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왜'에 대해서 깊이 물어야 하고 생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건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원인도 모릅니다. 왜 이것을 당해야 하는지 우린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간간이 우리는 과거만 들추고 있습니다. 계속 역사적인 맥락이니. 뭐 누구 때문입니까 어느 놈이 죽일 놈이냐. 그냥 쑤시고 돌아요. 이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 많은 청문회, 그 많은 토론, 그 많은 이야기 중에 그래서 원인을 찾은 바가 있습니까 제가 무식해서 그런지 몰라도 한 번도 드러난 일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전부 마음만 상했어요. 모두 마음만 다 헐뜯어서 상처가 나서 그만 견딜 수가 없게 되었어요. 이것뿐이지 원인은 오리무중이요. 그 아무도 바른 원인을 뻔한 얘기까지도 바로 생각하는 사람도 없고 그렇게 말하는 일도 없어요. 이것이 인간사올시다. 그런고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사람이 죄인이 아니다 기다 뭐 그런 얘기도 아니에요. 아버지가 의인이다 죄인이다 뭐 그런 거 묻고 있는 게 아닙니다. 문제는 이 사건, 또한 미래적 의미를 묻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은혜에 충만한 초대 교회에 볼 수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님강림 한 다음에 모두가 은혜에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잃어버렸던 용기를 얻어서 순교적 신앙을 가지고 열심히 복음을 전했죠. 교인들은 말씀을 사랑으로 받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가슴에 넘치고 교인들끼리만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이 사랑을 실천해서 내 것을 내 것이라고 하는 자가 없더라. 필요에 따라서 나누어주더라. 얼마나 아름다운 얘기입니까! 사랑과 은혜와 진리가 넘치는 교회예요.
그런데 이 교회에 왜 환난이 있습니까 왜 핍박이 있습니까 요새 논조대로 말하면 이렇게 은혜롭게 살면 하나님이 복을 듬뿍 줘야 되는 거 아닙니까 오래오래 살게 자손 만대에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해 줘야 되는 거 아니에요 요새처럼 문제가 많은 교회도 아니에요. 이렇게 거룩하고 깨끗한 교회에 왜 핍박이 있고, 왜 고난이 있었더란 말입니까 그것도 보통 고난이더냐고요. 아주 어려운 문제가 있어요. 야고보가 목 베임을 당합니다. 죄 없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그 뿐만 아니라 온 교인들을 모두다 색출을 해서 남녀를 막론하고 감옥에 다 쳐 넣었어요. 이것도 모자라서 저 멀리 다메섹으로 피난을 간 사람까지 찾아가서 끌어다가 감옥에 넣으려고 하는 바로 이렇게 온 교회가 쑥밭이 되었어요. 난장판이 되었어요. 왜 이래야 합니까. 그래 예수 믿고 성령님 충만하고 예수 잘 믿어서 복 받으려고 하는데 이게 복입니까. 오늘 같은 때에 이런 일이 있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평가하겠습니까 저 사람 예수 믿는다고 하더니 재산몰수 당했고, 가정 완전히 쑥밭 되었습니다. 예수 잘 믿어서 도대체 얻은 소득이 뭐냐고요. 이런 말 안 하겠습니까 정말로 어려운 형편이 됐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다시 한 번 제자들의 질문을 해 보십시다. 뉘 죄 때문입니까 누가 무엇을 잘못해서 결정적인 원인이 있어서 이 같은 어려운 핍박이 여기에 온 겁니까. 스데반은 죽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엄청난 사건이 터져서 마침내 저들은 두려워서 이곳 저곳으로 성경이 말하는 대로 사도 외에는 다 흩어져서 유대로 사마리아로 도망가게 되었다. 이 흩어진다는 말은 집을 떠난다는 얘깁니다. 이산가족이요. 재산몰수요. 고향을 떠나고 안정된 사회를 떠나서 피난의 길을 나섭니다. 정처도 없고 기약도 없이…… 이거 비참한 거 아닙니까 여러분 피난생활 해보신 분은 알지만 이 피난생활 이라는 거 정말 난감한 겁니다. 아무 기약도 계획도 없이 그저 목숨 하나 살기 위해서 그냥 집을 떠나는 겁니다. 저도 생각합니다마는 참 생각하면 난감한 얘기죠. 피난 올 때 오로지 성경책 하나 그것도 또 이상하게 제가 보던 성경책은 놔두고 아버지가 보시던 성경책을 손에 들고 나왔어요.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했던지 제가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성경책 하나 딱 손에 들고, 그리고 나섭니다. 오늘 저녁부터 어디서 먹는 겁니까 어디서 잠을 자는 겁니까 이게 바로 피난길이올시다. 이렇게 나섰다. 그리고 다메섹까지 도망간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인데 가까운 사마리아야 또 색출하지 않겠습니까 사마리아라고 무사한 게 아니에요. 또 어디서 어느 사람이 붙들어다가 동회에 넘길는 지 알 수가 없습니다. 순간순간 위기를 느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원치 않는 고생을 합니다. 피난살이를 합니다. 위험한 시간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낯선 지방에서 낯선 자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고난이 그들에게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더라. 너무나도 감격스러운 얘깁니다.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더라. 다시 한번 돌아가서 본문을 생각해 봅시다.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고향을 떠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 핍박과 환난이라고 하는 큰 사건 때문에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흩어졌다는 것은 강권적인 겁니다. 이건 피동적이요 수동적이요 원치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 원치 않은 엄청난 사건이 터졌는데 이 사건 앞에서 저들은 오늘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이것은 자원(自願)적 입니다.
수동적이고 억압적인 사건 앞에서 저들은 자율성을 찾았습니다. 할 일을 찾았습니다. 이제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는 말입니다. 다시 돌아가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큰 명령을 하십니다. "성령님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권능을 받으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예언이요 명령입니다.
그런데 증인이 되리라 했는데 이 사람들 초대 교회에서 은혜 충만하고 유무상통하니 얼마나 좋아요. 모일 때마다 떡을 떼고 반갑고 은혜롭고 주님이 함께 하시고 주의 영이 함께 하시고. 이 충만하다보니까 복음 전할 생각 다 잊어 버렸어요. 예수님의 명령 까맣게 잊어버렸어요. 땅 끝까지는 고사하고 이웃집에도 복음 전하지도 않아요. 언젠가 자기들에게 주어진 소중한 사명을 전혀 망각해 버렸어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어요. 전해야 할 복음을 전하지 않았어요. 사마리아로 가야되는데 안 갔어요. 땅 끝까지 생각 없어요. 오로지 예루살렘에서 이대로 안주하려고 했습니다. 이제 핍박과 환난이라고 큰 사건을 통해서 저들을 다 때려 모았어요. 다 흩어지게 되었어요. 이 사건을 어떻게 보십니까 그 동안에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생각, 평안하게 잘 살아 보려는 생각, 이거 버리기 어렵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그 돈 좋아하는 사람, 그 돈에 미친 사람, 그거 사람 만들기 어렵습니다. 이기적인 사람, 우월감 가지고 저 잘났다는 사람, 목에 힘주고는 사람, 아이고 사람 만들기 어렵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교만한 사람 겸손하게 만드는 거 참 힘듭니다. 예수를 믿어도 잘 안되던데요. 오랫동안 믿어도 안되던데요. 정말 어려워요. 난 그런 걸 볼 때마다 스승님이 제게 가르쳐 주신 교훈을 생각합니다. '세상 살면서 이걸 잊지 마라. 배냇병신 누구도 못 고친다.' 그러더라고요. 정말이요. 배냇병신 그거 누구도 못 고쳐요. 그것은요. 그 많은 날 설교 듣고 기도하고 회개하고 뉘우치는데 여전히 그거 못 고치더라고요. 그걸 어떡하면 좋아요. 이것은 하나님이 손을 보아야 됩니다. 손 좀 봐야 돼요. 그렇지 않고는 절대로 안됩니다. 전 그래서 가끔 어떤 때는 "어느 집사님이 어떻고, 어느 장로님이 어떤데 목사님 좀 만나서 충고 좀 해 주세요." 그래요. 제가 충고 안 합니다. "예, 생각해 보지요"하고 안 합니다. 왜요. 안 될 거니까 안하지요. 그저 기도하고 기다리는 수 밖에요. 사람의 말로 될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참 힘듭니다.
자,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게 지금.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했는데 이 사람들 어디 앉아있는 거예요. 이 큰 환난을 통해서 저들을 이방으로 내 쫓았어요. 이제는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강권적으로 온 세계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거기서 비로소 복음을 전하게 되더라 말입니다. 지금 네덜란드에 암스테르담이라고 하는 도시가 있지요. 근데 거기에 옛날 유명한 화가가 있었는데 이 화가는 좋은 그림을 많이 그려서 특별히 시민들이 어떤 그림이 좋아하는지 그 성향을 잘 알아 가지고 비싼 그림을 많이 그려서 돈을 많이 벌었어요. 그에게는 특별히 유별나게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어요. 딱 하나 유감된 것은 자식이 있었으면 더 좋겠는데 자식은 없었답니다. 넓은 정원과 좋은 저택에서 아주 화려한 생활을 했습니다. 부러울 것이 없는 생활을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부인이 병들어 죽었습니다. 너무 상심돼 가지고 그만 정신없이 여기에 빠져 있는 동안에 재산 다 날려 버리고 말았어요. 아주 거지가 되었어요. 이렇게 어려워졌을 때 비로소 사랑하는 친구가 "나와 같이 교회 나가자"고 전에 같으면은 그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닙니다. "너나 나가." 그럴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에 따라 나갔고, 말씀을 듣게 되고, 성경을 읽게 됩니다. 성경을 깊이 됩니다. 예수의 사랑에 감격하게 됩니다.
여기서 이제는 방향을 돌려서 성화를 그렸습니다. 좋은 그림들을 많이 그렸습니다. 공교롭게도 지금 제 방에 이 램브란트라고 하는 이 램브란트 그림 두 점이 제 방에 있습니다. 하나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그 그림이 너무 좋아서 제가 수 십 년 동안 그 그림을 사랑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그림, 예수님의 제자의 그림을 너무너무 아름다운 성화로 그렸고, 또 하나는 '감옥에 있는 사도 바울' 조그마한, 컴컴침침한 감옥에서 앉아서 성경을 기록하고 있는 편지를 쓰고 있는 그 장면을 그린 그림입니다. 영감이 있는 그림입니다. 이 두 점이 제 방에 있습니다마는 여러분 램브란트는 그 외에 많은 성화들을 그려서 많은 사람들을 감동케 했고, 오늘도 우리가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그가 어려운 일을 겪어야 했는지 이제 알 것 같지 않습니까 때때로 우리는 전혀 모르고 고난을 당합니다.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먼 훗날에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고, 이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이것이 내게 향한 축복이었다고 이것이 내게 주시는 새로운 기회였다고 비로소 깨닫는 것이올시다. 보세요. 저들은 이방으로 축출됩니다. 알고 보면 사람들은 교만했어요. 유대 사람들 경제적으로야 어쨌든 간에 지금도 그렇지만 종교적으로는 아주 교만합니다. 민족적 우월감이 있습니다. 선민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교만은 대단한 겁니다. 민족적인 우월감과 협소한 민족주의, 도덕적 교만, 종교적 교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사마리아 땅을 무시했습니다. 이 더러운 땅이라고 생각해서 사마리아를 통해서 쉽게 갈 수 있는 길도 일부러 멀리 피해 갔습니다. 이 사마리아 땅은 내가 발로 밟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마리아 사람하고 상종하는 것 자체 뭐 말하고 뭐 말도 안 됩니다.
그런데 큰 핍박을 통해서 '꽝' 하고 얻어맞으니까 사마리아에 들어가서 사마리아 사람의 집에서 신세를 지고 얻어먹게 됩니다. 그들의 도움을 청하게 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콧대 높은 그 교만이 스스로 깨지고 저들이 상종도 하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의 집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사기라고 하는 교만과 오만함이 다 깨져나가고 맙니다. 우월감 다 버리고 겸손해 졌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더 신학적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이렇게 환난과 핍박에 쫓기면서 복음을 전할 때는 그 전하는 복음 내용은 언제나 순수하고 단순한 복음입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상상을 해 보세요. 이렇게 피난의 길을 다니는 사람들이 여기 가서 복음 전하면서 "여러분들 예수 믿으면 장사가 잘 됩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 사람들이 받아들이겠습니까 "너나 믿어." 그럴 거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평안할 때는 간혹 보면은 이 같은 복음을 전하더라도 이 복음이 조금 퇴색을 합니다. 그래서 기복사상에 빠집니다. 예수 믿으면 병 낫고, 예수 믿으면 아이들이 공부 더 잘하고, 예수 믿으면 남편도 속 안 썩이고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이게 다 사실은 순 복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역적인 거예요. 변두리 복음이요. 그 별로 그렇게 높은 가치의 복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핍박과 환난 속에 전해지는 복음은 순 복음입니다.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 그겁니다. 편지를 받아도 우리 교인들한테 편지를 받아보면 "목사님 은혜 가운데 평안하십니까 교회는 다 부흥하십니까" 편지 이렇게 씁니다마는 북한에서 오는 편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재림하실 날이 가까이 왔는데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아주 종말론적입니다. 거기는 기복사상이 없습니다.
거기는 변두리적인 얘기가 없습니다. 순 복음입니다. 십자가의 복음과 재림하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깨끗한 마음이요. 이것이 바로 핍박 속에서 전한 복음이요, 저들이 받은 복음이란 말이에요. 종말론적 메시지. 이거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리로 강권적으로 몰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역사하게 될 때에 보세요. 주님께서 표적을 두었어요. 빌립은 사도가 아닙니다. 집사입니다. 빌립 집사인데 이 사람이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에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능력을 주시고 권세를 주시고 표적을 주시고 이적을 주었어요. 그래 오늘 성경 말씀에 보니까 '온 성이 크게 기뻐하더라' 아주 기가 막힌 얘깁니다. 이것이 환난과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됩니다. 자, 아직도 우리는 우리가 당한 많은 시련, 엄청난 사건의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라고 하는 생각에 벗어나서 '왜 이런 일이 있느냐'고 물읍시다. 과거에서 벗어나서 우리는 먼 미래를 바라봅시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세계 안에서 내가 우리가 왜 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지 한국교회에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여러분 개개인에게 주님은 지금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분명히 듣고 바르게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이루기까지 결코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몸이 만원이라면 눈이 칠천원이랍니다. 이 본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그런데 나면서부터 소경 됐다는 얘깁니다. 고통이나 불행을 말한다면 이 이상으로 더 불행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길거리에서 얻어먹는 거지가 됐습니다. 나이 40이 넘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남의 신세를 져야 하는 그런 불쌍한 한 거지가 여기 있더란 말입니다. 이 가장 불행한 대표적인 인간을 보는 순간 제자들은 아주 궁금해했습니다. 이래서 물어 보는 겁니다. "예수님, 이 사람이 소경으로 살아가는 것, 또 소경으로 태어난 것 뉘 죄 때문입니까 왜 이 사람은 이렇게 살아가야 합니까 그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죄 때문이라면 뉘 죄 때문입니까 부모입니까 본인입니까" 심각한 질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대답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 우리는 이 질문과 대답 속에서 세 가지 진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뉘 죄 때문입니까'라고 하는 질문은 도덕적 질문이올시다. 이 사람이 죄가 많아서, 혹 부모가 죄가 많아서, 왜 죄 때문에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로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서 인과 응보적인 그런 철학적 근거에서 말하는 겁니다. "뉘 죄 때문에 즉, 도덕적 원인으로 해서 이 사람이 불행해진 겁니까"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의 대답은 "아니,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땅 끝까지 전해지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하여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그 놀라운 구원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서 이 사람이 이만큼의 불행한 생을 살게 됐다." 대단히 중요한 대답을 하십니다.
또 두 번째 문제는 '뉘 죄 때문입니까'라고 하는 말은 원인을 과거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과거에 본인이 죄를 지었고, 또 과거에 부모가 죄를 지어서 이렇게 오늘의 불행의 원인을 과거에 두려는 겁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불행은 어제 때문이요. 어제의 불행은 더 좀 더 과거 때문이요. 그래서 설명이 다 안되면 전생에 죄가 많아서 여기까지 끌고 올라가는 거예요. 이 사람들은 모든 원인을 과거에 두고 또 먼 과거에 두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 즉 미래에 두었습니다. 과거가 원인이 아니고 원인이 미래에 있다는 겁니다. 이 사람을 통해서 현재와 미래에 큰 일을 하기 위하여 놀라운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잠깐 눈이 어둡고 괴로운 시간을 가고 있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우리는 모든 원인을 자꾸 과거로 돌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논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미래입니다. 보다 높은 차원으로 미래가 원인이 되어서 오늘 현재가 있다는 겁니다. 보다 더 높은 미래를 위해서 오늘의 현실이 있다는 겁니다. 대단히 중요한 얘기 아닙니까 죄인이 감옥에서 고생하는 것은 과거에 지은 죄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공부하는 것은 미래 때문입니다. 공부하면서 만일에 어떤 학생이 말하기를 '나는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서…' 이 말이 됩니까 그건 아니지요. 어디까지나 유능한 미래를 위해서 오늘 이 고생이 여기 있는 거예요. 차원이 틀립니다.
근데 세 번째 의미는 뭐냐하면 죄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건 인간차원에서 생각하는 거예요. 어디까지나 인간세상에서 문제도 해답도 얻으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아니요. 하나님께서 현실이라고 하는 또는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룬다는 것이죠." 이런 높은 차원의 대답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생각하게 됩니까 이 나라, 이 민족, 내가, 여러분이 하루하루 당하는 이 사건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현대의 문제는 How의 문제가 아니라 Why의 문제라고 합니다. 우린 흔히 'Know-how'라는 말을 합니다마는 NO!! 'Know-why'의 문제입니다. '왜'가 문제지 '어떻게'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당한 문제에서 그 동안에 늘 how만 생각했어요. 'Know-how'만 생각했어요.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까, 어떻게 하면 피해 갈까, 어떻게 하면 면할까……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왜 우리는 이 일을 당해야 하느냐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왜'에 대해서 깊이 물어야 하고 생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건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원인도 모릅니다. 왜 이것을 당해야 하는지 우린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간간이 우리는 과거만 들추고 있습니다. 계속 역사적인 맥락이니. 뭐 누구 때문입니까 어느 놈이 죽일 놈이냐. 그냥 쑤시고 돌아요. 이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 많은 청문회, 그 많은 토론, 그 많은 이야기 중에 그래서 원인을 찾은 바가 있습니까 제가 무식해서 그런지 몰라도 한 번도 드러난 일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전부 마음만 상했어요. 모두 마음만 다 헐뜯어서 상처가 나서 그만 견딜 수가 없게 되었어요. 이것뿐이지 원인은 오리무중이요. 그 아무도 바른 원인을 뻔한 얘기까지도 바로 생각하는 사람도 없고 그렇게 말하는 일도 없어요. 이것이 인간사올시다. 그런고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사람이 죄인이 아니다 기다 뭐 그런 얘기도 아니에요. 아버지가 의인이다 죄인이다 뭐 그런 거 묻고 있는 게 아닙니다. 문제는 이 사건, 또한 미래적 의미를 묻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은혜에 충만한 초대 교회에 볼 수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님강림 한 다음에 모두가 은혜에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잃어버렸던 용기를 얻어서 순교적 신앙을 가지고 열심히 복음을 전했죠. 교인들은 말씀을 사랑으로 받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가슴에 넘치고 교인들끼리만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이 사랑을 실천해서 내 것을 내 것이라고 하는 자가 없더라. 필요에 따라서 나누어주더라. 얼마나 아름다운 얘기입니까! 사랑과 은혜와 진리가 넘치는 교회예요.
그런데 이 교회에 왜 환난이 있습니까 왜 핍박이 있습니까 요새 논조대로 말하면 이렇게 은혜롭게 살면 하나님이 복을 듬뿍 줘야 되는 거 아닙니까 오래오래 살게 자손 만대에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해 줘야 되는 거 아니에요 요새처럼 문제가 많은 교회도 아니에요. 이렇게 거룩하고 깨끗한 교회에 왜 핍박이 있고, 왜 고난이 있었더란 말입니까 그것도 보통 고난이더냐고요. 아주 어려운 문제가 있어요. 야고보가 목 베임을 당합니다. 죄 없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그 뿐만 아니라 온 교인들을 모두다 색출을 해서 남녀를 막론하고 감옥에 다 쳐 넣었어요. 이것도 모자라서 저 멀리 다메섹으로 피난을 간 사람까지 찾아가서 끌어다가 감옥에 넣으려고 하는 바로 이렇게 온 교회가 쑥밭이 되었어요. 난장판이 되었어요. 왜 이래야 합니까. 그래 예수 믿고 성령님 충만하고 예수 잘 믿어서 복 받으려고 하는데 이게 복입니까. 오늘 같은 때에 이런 일이 있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평가하겠습니까 저 사람 예수 믿는다고 하더니 재산몰수 당했고, 가정 완전히 쑥밭 되었습니다. 예수 잘 믿어서 도대체 얻은 소득이 뭐냐고요. 이런 말 안 하겠습니까 정말로 어려운 형편이 됐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다시 한 번 제자들의 질문을 해 보십시다. 뉘 죄 때문입니까 누가 무엇을 잘못해서 결정적인 원인이 있어서 이 같은 어려운 핍박이 여기에 온 겁니까. 스데반은 죽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엄청난 사건이 터져서 마침내 저들은 두려워서 이곳 저곳으로 성경이 말하는 대로 사도 외에는 다 흩어져서 유대로 사마리아로 도망가게 되었다. 이 흩어진다는 말은 집을 떠난다는 얘깁니다. 이산가족이요. 재산몰수요. 고향을 떠나고 안정된 사회를 떠나서 피난의 길을 나섭니다. 정처도 없고 기약도 없이…… 이거 비참한 거 아닙니까 여러분 피난생활 해보신 분은 알지만 이 피난생활 이라는 거 정말 난감한 겁니다. 아무 기약도 계획도 없이 그저 목숨 하나 살기 위해서 그냥 집을 떠나는 겁니다. 저도 생각합니다마는 참 생각하면 난감한 얘기죠. 피난 올 때 오로지 성경책 하나 그것도 또 이상하게 제가 보던 성경책은 놔두고 아버지가 보시던 성경책을 손에 들고 나왔어요.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했던지 제가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성경책 하나 딱 손에 들고, 그리고 나섭니다. 오늘 저녁부터 어디서 먹는 겁니까 어디서 잠을 자는 겁니까 이게 바로 피난길이올시다. 이렇게 나섰다. 그리고 다메섹까지 도망간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인데 가까운 사마리아야 또 색출하지 않겠습니까 사마리아라고 무사한 게 아니에요. 또 어디서 어느 사람이 붙들어다가 동회에 넘길는 지 알 수가 없습니다. 순간순간 위기를 느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원치 않는 고생을 합니다. 피난살이를 합니다. 위험한 시간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낯선 지방에서 낯선 자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고난이 그들에게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더라. 너무나도 감격스러운 얘깁니다.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더라. 다시 한번 돌아가서 본문을 생각해 봅시다.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고향을 떠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 핍박과 환난이라고 하는 큰 사건 때문에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흩어졌다는 것은 강권적인 겁니다. 이건 피동적이요 수동적이요 원치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 원치 않은 엄청난 사건이 터졌는데 이 사건 앞에서 저들은 오늘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이것은 자원(自願)적 입니다.
수동적이고 억압적인 사건 앞에서 저들은 자율성을 찾았습니다. 할 일을 찾았습니다. 이제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는 말입니다. 다시 돌아가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큰 명령을 하십니다. "성령님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권능을 받으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예언이요 명령입니다.
그런데 증인이 되리라 했는데 이 사람들 초대 교회에서 은혜 충만하고 유무상통하니 얼마나 좋아요. 모일 때마다 떡을 떼고 반갑고 은혜롭고 주님이 함께 하시고 주의 영이 함께 하시고. 이 충만하다보니까 복음 전할 생각 다 잊어 버렸어요. 예수님의 명령 까맣게 잊어버렸어요. 땅 끝까지는 고사하고 이웃집에도 복음 전하지도 않아요. 언젠가 자기들에게 주어진 소중한 사명을 전혀 망각해 버렸어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어요. 전해야 할 복음을 전하지 않았어요. 사마리아로 가야되는데 안 갔어요. 땅 끝까지 생각 없어요. 오로지 예루살렘에서 이대로 안주하려고 했습니다. 이제 핍박과 환난이라고 큰 사건을 통해서 저들을 다 때려 모았어요. 다 흩어지게 되었어요. 이 사건을 어떻게 보십니까 그 동안에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생각, 평안하게 잘 살아 보려는 생각, 이거 버리기 어렵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그 돈 좋아하는 사람, 그 돈에 미친 사람, 그거 사람 만들기 어렵습니다. 이기적인 사람, 우월감 가지고 저 잘났다는 사람, 목에 힘주고는 사람, 아이고 사람 만들기 어렵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교만한 사람 겸손하게 만드는 거 참 힘듭니다. 예수를 믿어도 잘 안되던데요. 오랫동안 믿어도 안되던데요. 정말 어려워요. 난 그런 걸 볼 때마다 스승님이 제게 가르쳐 주신 교훈을 생각합니다. '세상 살면서 이걸 잊지 마라. 배냇병신 누구도 못 고친다.' 그러더라고요. 정말이요. 배냇병신 그거 누구도 못 고쳐요. 그것은요. 그 많은 날 설교 듣고 기도하고 회개하고 뉘우치는데 여전히 그거 못 고치더라고요. 그걸 어떡하면 좋아요. 이것은 하나님이 손을 보아야 됩니다. 손 좀 봐야 돼요. 그렇지 않고는 절대로 안됩니다. 전 그래서 가끔 어떤 때는 "어느 집사님이 어떻고, 어느 장로님이 어떤데 목사님 좀 만나서 충고 좀 해 주세요." 그래요. 제가 충고 안 합니다. "예, 생각해 보지요"하고 안 합니다. 왜요. 안 될 거니까 안하지요. 그저 기도하고 기다리는 수 밖에요. 사람의 말로 될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참 힘듭니다.
자,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게 지금.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했는데 이 사람들 어디 앉아있는 거예요. 이 큰 환난을 통해서 저들을 이방으로 내 쫓았어요. 이제는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강권적으로 온 세계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거기서 비로소 복음을 전하게 되더라 말입니다. 지금 네덜란드에 암스테르담이라고 하는 도시가 있지요. 근데 거기에 옛날 유명한 화가가 있었는데 이 화가는 좋은 그림을 많이 그려서 특별히 시민들이 어떤 그림이 좋아하는지 그 성향을 잘 알아 가지고 비싼 그림을 많이 그려서 돈을 많이 벌었어요. 그에게는 특별히 유별나게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어요. 딱 하나 유감된 것은 자식이 있었으면 더 좋겠는데 자식은 없었답니다. 넓은 정원과 좋은 저택에서 아주 화려한 생활을 했습니다. 부러울 것이 없는 생활을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부인이 병들어 죽었습니다. 너무 상심돼 가지고 그만 정신없이 여기에 빠져 있는 동안에 재산 다 날려 버리고 말았어요. 아주 거지가 되었어요. 이렇게 어려워졌을 때 비로소 사랑하는 친구가 "나와 같이 교회 나가자"고 전에 같으면은 그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닙니다. "너나 나가." 그럴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에 따라 나갔고, 말씀을 듣게 되고, 성경을 읽게 됩니다. 성경을 깊이 됩니다. 예수의 사랑에 감격하게 됩니다.
여기서 이제는 방향을 돌려서 성화를 그렸습니다. 좋은 그림들을 많이 그렸습니다. 공교롭게도 지금 제 방에 이 램브란트라고 하는 이 램브란트 그림 두 점이 제 방에 있습니다. 하나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그 그림이 너무 좋아서 제가 수 십 년 동안 그 그림을 사랑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그림, 예수님의 제자의 그림을 너무너무 아름다운 성화로 그렸고, 또 하나는 '감옥에 있는 사도 바울' 조그마한, 컴컴침침한 감옥에서 앉아서 성경을 기록하고 있는 편지를 쓰고 있는 그 장면을 그린 그림입니다. 영감이 있는 그림입니다. 이 두 점이 제 방에 있습니다마는 여러분 램브란트는 그 외에 많은 성화들을 그려서 많은 사람들을 감동케 했고, 오늘도 우리가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그가 어려운 일을 겪어야 했는지 이제 알 것 같지 않습니까 때때로 우리는 전혀 모르고 고난을 당합니다.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먼 훗날에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고, 이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이것이 내게 향한 축복이었다고 이것이 내게 주시는 새로운 기회였다고 비로소 깨닫는 것이올시다. 보세요. 저들은 이방으로 축출됩니다. 알고 보면 사람들은 교만했어요. 유대 사람들 경제적으로야 어쨌든 간에 지금도 그렇지만 종교적으로는 아주 교만합니다. 민족적 우월감이 있습니다. 선민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교만은 대단한 겁니다. 민족적인 우월감과 협소한 민족주의, 도덕적 교만, 종교적 교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사마리아 땅을 무시했습니다. 이 더러운 땅이라고 생각해서 사마리아를 통해서 쉽게 갈 수 있는 길도 일부러 멀리 피해 갔습니다. 이 사마리아 땅은 내가 발로 밟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마리아 사람하고 상종하는 것 자체 뭐 말하고 뭐 말도 안 됩니다.
그런데 큰 핍박을 통해서 '꽝' 하고 얻어맞으니까 사마리아에 들어가서 사마리아 사람의 집에서 신세를 지고 얻어먹게 됩니다. 그들의 도움을 청하게 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콧대 높은 그 교만이 스스로 깨지고 저들이 상종도 하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의 집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사기라고 하는 교만과 오만함이 다 깨져나가고 맙니다. 우월감 다 버리고 겸손해 졌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더 신학적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이렇게 환난과 핍박에 쫓기면서 복음을 전할 때는 그 전하는 복음 내용은 언제나 순수하고 단순한 복음입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상상을 해 보세요. 이렇게 피난의 길을 다니는 사람들이 여기 가서 복음 전하면서 "여러분들 예수 믿으면 장사가 잘 됩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 사람들이 받아들이겠습니까 "너나 믿어." 그럴 거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평안할 때는 간혹 보면은 이 같은 복음을 전하더라도 이 복음이 조금 퇴색을 합니다. 그래서 기복사상에 빠집니다. 예수 믿으면 병 낫고, 예수 믿으면 아이들이 공부 더 잘하고, 예수 믿으면 남편도 속 안 썩이고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이게 다 사실은 순 복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역적인 거예요. 변두리 복음이요. 그 별로 그렇게 높은 가치의 복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핍박과 환난 속에 전해지는 복음은 순 복음입니다.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 그겁니다. 편지를 받아도 우리 교인들한테 편지를 받아보면 "목사님 은혜 가운데 평안하십니까 교회는 다 부흥하십니까" 편지 이렇게 씁니다마는 북한에서 오는 편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재림하실 날이 가까이 왔는데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아주 종말론적입니다. 거기는 기복사상이 없습니다.
거기는 변두리적인 얘기가 없습니다. 순 복음입니다. 십자가의 복음과 재림하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깨끗한 마음이요. 이것이 바로 핍박 속에서 전한 복음이요, 저들이 받은 복음이란 말이에요. 종말론적 메시지. 이거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리로 강권적으로 몰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역사하게 될 때에 보세요. 주님께서 표적을 두었어요. 빌립은 사도가 아닙니다. 집사입니다. 빌립 집사인데 이 사람이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에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능력을 주시고 권세를 주시고 표적을 주시고 이적을 주었어요. 그래 오늘 성경 말씀에 보니까 '온 성이 크게 기뻐하더라' 아주 기가 막힌 얘깁니다. 이것이 환난과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됩니다. 자, 아직도 우리는 우리가 당한 많은 시련, 엄청난 사건의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라고 하는 생각에 벗어나서 '왜 이런 일이 있느냐'고 물읍시다. 과거에서 벗어나서 우리는 먼 미래를 바라봅시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세계 안에서 내가 우리가 왜 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지 한국교회에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여러분 개개인에게 주님은 지금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분명히 듣고 바르게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이루기까지 결코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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