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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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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둥이 촌을 방문한 주님 주님의 마지막 전도 여행입니다. 주님은 마지막 한 주간을 남겨 두고 구원사 역을 완성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했습니다. 이제 가면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길입니다. 그래서 꼭 들려야 할 한 곳이 있었습니다. 그 곳에 대접을 받으려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인들은 아무도 그 곳에 가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 곳은 주님이 아니고는 갈 수 없는 곳입니다. 바로 갈릴리와 사마리아 접경지역 에 있는 한 문둥이 촌입니다. 주님은 갈보리를 목전에 두고 그 곳을 찾았습니다. 주님이 골고다를 향하신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구상에 있는 수 많은 문둥이들을 깨끗하게하여 천국 시민을 삼기 위해서입니다. 문둥병은 가장 무서운 병입니다. 현대인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암이나 에이 즈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환경오염이나 성적 문란함이 오늘날과 같지 않을 뿐 아니라 성민 이스라엘에게는 엄한 율법적인 규례가 있어서 그러한 병이 발병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문둥병은 그 당시 선민에게 버림을 받는 것이므로 가장 무서운 저주였습니다. 사실 문둥병과 죄와는 그 속성이 너무도 유사한 점 이 많습니다. 형질의 일그러집입니다. 문둥병자는 부모로부터 받은 아름답고 고운 얼굴이 뒤틀리고 일그러집니다. 범죄한 죄인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아담이 범죄하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더러운 냄새가 납니다. 살 이 썩어 고름이 생기므로 고약한 냄새가 납니다. 죄는 우리의 심령을 부패하게 만들어 온갖 더럽고 추악한 행위를 하게 만듭니다. 감각을 상실하게 됩니다. 신경과 세포가 죽어서 꼬집어도 감각이 없습니다. 화인 맞은 양심같은 죄인은 죄를 지어도 양심의 아무런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영적인 것에 대하여 무감각 해져 버립니다. 버림받는 고통입니다. 마을에서 함께 살아갈 수 없을 뿐 아니 라 친족과도 같이 살수 없고 심지어 가족에게도 버림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문둥이만이 겪는 아픔이요 상처입니다.
나병환자 한하운씨의 시입니다. 너무도 비통한 절규입니다. 내 죄명은 문둥이 이것 참 어처구니 없는 죄이 올시다. 아무 법문에도 어느 조항에도 없어 내 죄는 변호할 길이 없습니다. 옛날부터 사람이 지은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받게 했는데 그러나 나를 아무도 없는 이 하늘밖에 세워 놓고 죄명은 문둥이라고 이것 참 어처구니 없는 죄이올시다 문둥이들의 절규 주님은 문둥이 촌을 찾았습니다. 이때 열 문둥이들이 일어나서 절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멀리 서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고 싶으나 갈 수 없는 것이 문둥 이의 신세입니다. 이것이 문둥이의 비극입니다(레위기 13:45-46, 민수기 5:2). 그래서 소리 높여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최후의 수단입니다. 그들에게는 주변을 의식할 위신이나 체면이 없습니다. 꾸며 보았자 문둥이입니다. 우리가 주 님 앞에 설 때에 그 어떤 체면을 의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둥이 그대로를 보 이는 것입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찬송가 349장 후렴) "예수 선 생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하고 탄원하는 것입니다. 지구상에 이보다 더 좋 은 기도는 없습니다. 주님이 그들을 보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둥이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의 편에 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주님이 보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창조한 피조물을 보신 것입니다. 본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하여 관 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 대상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주님이 그들을 보셨습니다. 손이 일그러지고, 다리가 뒤틀리고, 입 까지 돌아가서 혀가 잘 꼬부라지지도 않는 그들의 절규(絶叫)하는 모습을 보셨 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 님이 당신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바라보는 순간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끝없이 주님의 눈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땅 위에 가장 큰 비극은 주님이 고개를 돌리고 당신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입술을 주목합시다.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4) 고요하 게 들려오는 음성이지만 천둥 벼락이 치는 것보다 더 위엄이 넘치는 권세 있는 말씀입니다. 그의 말씀에 천지가 창조되었고, 성난 파도가 고요해 졌고, 죽은 나 사로가 살아났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권위 있는 말씀에 아무런 항변도 댓구도 없이 그대로 믿고 제사장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가다가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비틀거리는 다리가 온전해지고, 오그라진 손가락이 펴지기 시작합니다. 일 그러진 입술이 돌아오면서 곪았던 곳에 새로운 살이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모두 가 서로를 바라보고 놀랐습니다. 이제 가는 길을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먼저 주님께 돌아가서 감사할 것인지 .
그런데 절대 다수인 아홉은 가던 길을 계 속하여 제사장의 진찰을 받은 후 성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때 사마리아 문둥이는 가는 길을 멈추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사마리아 문둥이 사마리아 문둥이에게 배웁시다.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15)고 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이었습니다. 그는 인생의 목적을 바로 알았던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0:31). 돌아왔습니다. "돌아와"(15)라고 한 것은 그는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알았습니다. 돌아와서 주님께 먼저 감사하고 후에 제사장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행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을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무릎 꿇어 감사했습니다.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16)라고 했 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겸손한 사람입니다. 사실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에게 받은 모욕감은 굴욕적입니다.
그런데 그는 주님의 발 아래 엎드린 것은 민족적인 반 감 이전에 메시야이신 주님 앞에 엎드린 겸손함이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즉시로 감사했습니다. 사단의 공작은 이러합니다. 사단은 우리의 이성을 교묘하게 이용합니다. 가는 길이니 계속갑시다. 지금까지 이렇게 먼길을 달려 왔는데 되돌아 갈 수 있 겠는가 공연히 헛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과 정력을 낭비할 필 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다음에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사단이 즐겨 사 용하는 수법중에 하나가 "다음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사를 받을 주님은 기 다릴 여유가 없습니다. 주님이 가는 길은 갈보리를 향해서 가는 마지막 길입니다. 망각해서 기억지도 않게 하십니다. 그들이 제사장에게 나아가서 당장에 해결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이 진찰을 하고 규례를 따라 정결한 예법을 행한 후 칠일 동안을 장막 밖에서 기다렸다가 아무런 후유증이 없을 때 거룩한 제사를 드리고 집으로 복귀하는 것입니다(레위기 14장). 그러니 자연히 감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선순위를 바꾸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에는 창조질서 가 있습니다. 이 질서가 깨뜨려질 때 혼돈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사람을 짓지 않았습니다. 모든 피조 물을 지으신 후에 사람의 필요를 공급해 주신 후에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영적인 세계에도 원리가 있고 순서가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 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 복음 6:33)고 했습니다. 재미있는 글자풀이가 있습니다. 영어에 산다(live)는 말을 순서를 바꾸어 쓰보면 악(evil)이 됩니다.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우선 이고 이것이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은 덤으로 하나님이 채워 주십니다. 비록 사마리아인이고 문둥이지만 바른 가 치관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갑시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18)고 했습니다. 사마리아인 그를 이방인이라고 불렀던 것 을 보아서 그는 문둥이 촌에서 소외와 갈등과 버림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인생의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갔느냐 그들은 감사를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감사가 없는 행위는 불완전한 미완성 품입니다. 감사는 모든 것의 완성입니다. 감사없는 기도는 이기적인 기도입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13)하고 절규했습니다. 헨리 워드 비쳐는 "기도는 아침에 열쇠이며 저녁의 자물쇠이다"고 했습니다. 기도로 시작하 여 끝에 감사로 마쳐질 때 사단 권세가 침입하지 못합니다. 감사없는 믿음은 반쪽 믿음입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4) 그들은 주님의 말씀 을 믿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육체적인 고침은 받았으나 영혼 구원에는 이 르지 못했던 것입니다(19). 감사없는 순종은 참된 순종이 아닙니다.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문둥이가 고침을 받았다는 사실은 어떤 것으로도 바 꿀 수 없는 감격입니다. 당신의 순종에 감사와 감격과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맹 종과 아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된 순종에는 넘치는 감사인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절입니다. 맥추란 말은 보리맥(麥), 때추(秋)란 말로 보리를 거두는 때 드리는 감사입니다. 이것은 옛날 농경사회 때 밭에 뿌린 곡식의 첫 열매를 거두는 때입니다(출애굽기 23:16). 이 때가 유월절을 지난 일곱 주간이 지난 날이므로 칠칠절 혹은 50일 째 되는 날이므로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이때 첫 열매를 거둠으로 초실절이라고도 부릅니다. 바로 이때 구약에서는 유대인들 이 출애굽을 하여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았고, 신약에서는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고 교회가 탄생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난 반년 동안 말씀을 받고 성령님 충만히 받아 교회에서 사명을 감당하게 된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태리 어느 도시에 피도라는 동상이 있습니다. 제2차대전 때입니다. 어느날 개 한 마리가 물에 빠져 죽어갈 때 한 신사가 건져서 집에서 키웠습니다. 그 개 가 은혜를 알고 주인이 직장에 출근할 때 버스 타는 곳까지 배웅을 합니다. 어 느날 주인이 돌아오는 길에 버스에 폭탄이 떨어져 주인이 죽고 말았습니다. 개는 낮이고 밤이고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다가 죽었습니다. 이를 지켜본 자들 이 감동을 받아 그 곳에 피도(개 이름)의 동상을 세워 주었습니다. 이성없는 짐 승이지만 받은 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13년 동안 자리를 지키면서 받은 바 은혜를 감사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는 경건의 완성입니다. 미국 청교도인들의 가정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 유명한 표어 하나가 붙어 있습니다. "생각하라 그리고 감사하라"(think and thank)것 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받은 바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하여 그들의 생애에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정욕적인 기도와 불완전 한 믿음과 기쁨이 없는 순종이 감사를 통해서 완전해집니다. 주님은 오늘도 "그 아홉은 어디 갔느냐" 하고 찾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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