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 (마5:38-42)
본문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어느 날 한가하게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 하나가 모름지기 문둥병 환자 같은 그런 분이 말입니다 마주 서서 적선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뭘 좀 도와 달라고……. 그 때에 그는 자기 호주머니를 뒤져보았는데 공교롭게도 한 푼의 돈도 없는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미안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형제여 내가 지금 가진 것이 있으면 꼭 도와줄 마음이 있는데 사실로 제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미안하다고. 그 거지는 만족한 얼굴을 가지고 "아니올시다. 당신이 나에게 돈을 준 건 없지만은 당신이 나를 지금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습니다. 이것이면 충분합니다. 오늘 저는 큰 것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돌아서서 갑니다. 이 사건은 톨스토이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물질을 주고 물질을 받아서 그것이 선행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는 깊은 충격을 받고 참 사랑이라는 것은 마음에 있고 또 마음을 주는 가운데서 그가 얻은 큰 감격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참 사랑은 그와 함께 하는 것이다 라고 깊이 깨닫고 억압받는 농민들과 함께 살면서 경건한 생활을 하게 되고 경건을 가르치게 됩니다. 그리고 말년에 불후의 명작 "부활"이라고 하는 소설을 쓰게 됩니다. 여러분 현대가 이렇게 피곤하고 어려워진 일이 물질적 빈곤 때문은 아닙니다 물질을 못 주어서, 물질을 못 받아서, 물질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강팍하고 또 절망적이고 많은 복잡한 문제, 또 왜 삶에 짜증이 나고 피곤하고 지치고 어째서 이런 겁니까 이것이 물질 때문입니까
현대인으로서 어떻게 하면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데 대한 책들이 많이 있습디다 만은 제가 읽은 대로는 커밍 웍(Cuming Walk)의 그 말이 너무 마음에 가장 와 닿는 그런 내용이었다고 생각해서 늘 기억합니다. 현대인으로 성공하려면 먼저 지능이 높아야 한다. 요새는 너무 복잡한 세상에 사니까 머리 회전이 빠르면 참 어렵습니다. 어리둥절한 사람은 살기가 어려워요. 머리가 좋아야겠다. 그러나 두 번째는 지식이 있어야 겠다. 아무리 머리가 있어도 공부하지 아니하면 빈 상자입니다. 소프트웨어가 없는 하드웨어는 "노 유스(No use)" 아무 소용 없는 거요. 그런고로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공부를 많이 해서 많은 지식을 입력시켜야 한다. 셋째는 아무리 좋은 지식이 있어도 내가 그것을 잘 사용할 수 있는 능숙한 숙련된 기술이 없으면 소용없다 이겁니다. 그걸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자동차를 봐도 아무리 좋은 자동차가 있고 아무리 지식이 있어도 자동차를 만드는 기술이 있다 하더라도 자동차를 잘 운전할 수 있는 기술이 없으면 그 자동차와 나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잘 다룰 수 있는 아주 스킬풀(Skillful)한 아주 능숙한 기술 그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세 가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자세다 그랬어요. 애티튜드(Attitude), 태도와 자세 즉 마음가짐이 문제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공의 비결은 바로 97%가 자세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건 깊이 생각할 문제입니다. 목적이 중요합니다 만은 그 목적에 따르는 내 자세가 중요합니다. 환경이 인생을 불행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 아닙니다. 문제는 삶의 자세가 문제입니다.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것도 자세요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것도 마음가짐입니다. 마음의 자세가 문제입니다. 같은 환경, 같은 처지,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직업, 같은 모양으로 사는 것 같으나 전혀 다릅니다. 한 사람은 낙원에 살고 한 사람은 지옥에 삽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삶의 자세에 대체로 크게 나누어서 세 가지로 분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형벌의식에 쫓기며 사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억지로 살아가는 겁니다. 죽지 못해 사는 겁니다. 왜 흔히 말하기를 팔자다, 내 운명이다, 그렇거니 하고 살아갑니다 그 아까운 시간들을 그 많은 시간 그렇게 살아갑니다. 노예적으로 삽니다 참 불행한 것이올시다.
제가 어느 미국 가정에 가서 하룻밤을 같이 지내고 아침 조반 식사를 하는데 공교롭게 내 앞에서 조반 먹다 말고 부부싸움을 하더만요. 그래 그 미국사람 부부싸움 하는 거 한번 봤습니다. 아내는 얘기가 이렇습니다. 이 집에 와서 내가 아이 낳아주고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당신을 위해서 난 다른 사람들처럼 직장도 가지질 않고 온전히 당신 하나만을 위해서 살았는데 나는 완전히 이 집의 노예요 이 집의 식모라고 돈 받지 못하는 식모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남편은 하는 말이 나는 당신과 함께 이 자녀들 다 벌여 먹이느라고 밖에 나가서 아침부터 밤까지 이렇게 수고하지 않느냐 나는 이 집에 머슴이라고. 그래 저는 재판을 했습니다. 이 집에는 머슴과 식모가 사누만, 그랬어요. 안 그렇습니까 똑같은 생을 사는데 억지로 사는 사람 많아요 심지어는 부부생활도요 한 평생 강간당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있어요. 이 웬일입니까 무사히 살았지요. 한 평생 무사했어요. 이혼은 안 했어요. 심지어는 싸운 일도 없어요. 그러나 그건 산 게 아니요. 당신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요. 왜 인생을 그렇게 살아가야 됩니까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이렇게 보냈습니까 억지로 부득이해서 할 수 없이. 그런가하면 또 형벌의식이 무서워서 매맞을까봐, 벌받을까봐, 저주받을까봐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심지어는 신앙생활도 이따위로 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감기만 걸려도 아 벌받는가보다, 또 내가 남의 말을 좀 했더니 또 저주받는구만. 이런 식의 의식, 얼마나 불쌍합니까 벌벌 떨며 사는 거예요. 그런가하면 또 하나는 보상을 바라고 사는 사람이 있어요. 좋은 일 하면 좋은 일이 오겠지. 아이들 잘 키워놓으면 효도 받겠지. 또 사랑하면 사랑 받겠지. 항상 투자의식을 가지고 상 받을 마음으로, 보상받는 마음을 가지고 삽니다. 그랬다가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지 안는다고 원망 불평입니다. 항상 받으려는 마음, 사랑 받으려는 마음, 칭찬 받으려는 마음에 아주 민감합니다. 그래서 허영적인 사람도 되고 위선적인 사람도 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큰아들에게 "너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했더니 "예 가겠습니다" 대답은 잘 했어요. 그리고 안 갔어요. 둘째아들에게 "너 포도원에 가서 좀 일하렴" 대답하기를 "안 가겠습니다" 거절하거든요. 아버지 마음이 아팠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뒤에 뉘우치고 갔어요. 나는 이 두 아들이 다 못마땅해요. 아들 하나 더 있으면 좋겠어요. "가겠습니다"하고 간 사람, 예수님의 시각으로 볼 때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었던 거 같아요. 하나같이 이 모양이요. 한다고 하면서 안 하고 안가겠다 하고선 억지로억지로 가는 거요. 이게 얼마나 불행하냐 말입니다.
참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사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 요새요 직장 생활하는데 있어도 21세기를 지향하는 좋은 직장에서는요 출퇴근 시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은 집에 와서도 생각이 나서 연구를 하고 있으면 그건 근무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고로 내 마음대로 출근하든 퇴근하든 일만하면 된다 이거예요. 길거리에 있든 직장에 있든 상관없어요. 이래서 출퇴근이 없는 직장들이 많이 생깁니다. 그러나 한번 옛날로 말하면은 출퇴근, 정확한 시간에 출근하고 정확한 시간에 퇴근하고 출퇴근에는 아주 명수요 하루종일 담배 피운 거 밖에 없어. 이런 사람 있으나 마나 월급만 타먹는 사람이요 비생산적인 직원이요. 이젠 그런 거 안 통하는 세상이에요. 형식적인 충성, 구조적인 충성 이런 강요된 충성이라는 것은 아무의미가 없어요. 그런고로 마음의 자세. 그래 세 번째 사람은 존경과 사랑과 감사로 일하는 거예요. 일이 주어졌다는 것이 감사하고 오늘도 일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하고 또 나로 하여금 이만한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 또 회사에도 감사, 지혜를 주신 것 감사, 즐거운 마음으로 일합니다. 자나깨나 필요하면 일거리를 집에 가지고 와서도 하고 혹은 직장에서 밤을 새우면서도 하고 이걸 얼마 주느냐고 따지지 않아요. 문제는 이 자체가 너무 소중한 일이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심취해서 일한다. 자 이런 삶의 자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신상수훈의 말씀을 하시는 그 중간부분에 하신 말씀이요. 기독교인의 윤리, 기독교인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 하고 누누이 하나 하나 예를 들어 말씀하시는 중에 그 중심부에 있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너무 높은 규범이라서 때로 "아이고 그거야 예수님이니까. 우리 같은 사람이야 어디 거기까지 생각을 하나." 하고 쳐다보지도 않는 경우가 있어요. 난 그런 생각을 합니다. 못 올라갈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 그랬는데 난 그거 잘못된 말이라고 생각해요. 쳐다보기라도 해야 올라갈 때가 있지 못 올라갈 나무라도 쳐다보아야 언젠가 올라갈 수가 있는 거지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은 영 끝난 거죠. 예수님의 윤리 아주 높아요.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이요 너무나도 확실한, 요새말로 말하면 21세기 지향적입니다. 보세요, 속옷을 달라고 하거든 속옷만 아니라 겉옷까지 주어라. 오리를 억지로 가자고 하자. '내가 길을 모르니 그 오리까지 좀 가주세요' 그러면 나는 십리까지 가 줘라 이거 통하는 얘기입니까 요새는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요 많은 사람들이 신경을 써요. 또 남의 것 그저 할 수만 있으면 갈취하려고 해요. 이런 무서운 세상에 어떻게 달라고 하지도 않은 것까지 주라 이거요. 이런 얘기가 통하는 겁니까 그러나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올시다. 행복한 생활은 자유에서 얻어지는 거이니까요. 주도성 속에서 평가되는 것이올시다. 잘 생각해 보십시다. 주는 것과 빼앗기는 것은 달라요. 물질적으론 꼭 같은 겁니다. 주는 것이나 빼앗기는 것이나 어차피 내 물건이 저 쪽으로 넘어간 건 사실이요. 물리적으론 똑같죠. 형식적으로는 같으나 빼앗기는 것과 주는 건 다른 거예요. 빼앗기는 건 억지로 된 것이고 주는 것은 내 마음에서 주는 거예요. 한 평생 주면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평생 빼앗기면서 사는 거예요. 항상 강도 만나며 사는 거예요, 강도 만나는 그 마음으로 한 평생 사는 불행한 사람이 있다 말입니다. 그런고로 너희는 선택적으로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주도적으로 살라. 이것을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보세요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까지 가라. 무슨 말씀입니까 오리까지 가는 것은 억지로 가는 거예요 이건 내 뜻이 아닙니다. 한데 이건 어떤 사람이 와서 길을 잘 모르는데 좀 같이 가 주세요. 아 이거 거절하기가 안 됐어요. 또 그 사람 딱하거든요. 그래 갑시다하고 가 주었어요. 이거는 억지로 되는 것이고 피동적이고 수동적이고 끌려가는 것이요.
그런데 오리까지 가서 보니 이 사람 이제부터는 내가 찾아가겠습니다 하지만 그거 또 길을 잃어버리기 쉽겠어요. 좋아요 당신이 바란 건 오리까지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내가 가겠습니다. 십리까지 가 드릴께요. 바로 이 마음이요. 이것은 자발적이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이고 내가 선택적으로 하고 싶어하는 거예요. 이건 강요된 것이 아닙니다. 좀 더 깊은 말씀을 하나 여기서 생각하십시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일의 발단은 억지로 시작되었다는 거예요. 도대체 오리 가는 거 가고 싶어 간 게 아니에요. 내가 가야할 이유가 없어요. 그게 무슨 저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요. 그저 딴에는 좋은 마음이지만 어쨌든 억지로 시작한 거예요. 나에게 가자고 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내가 갈 필요가 없어요. 애당초 시작은 억지로 된 것입니다.
상황은 그렇고 현실은 그렇고 사건은 피동적으로 시작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운명 여러분이 정했습니까 어떤 사람은 좌우간 삼년 동안이나 남자가 따라다니면서 결혼하자고 졸라서 결혼해 주었대요. 그리고는 일생동안 우려먹는 거야 말끝마다 당신이 하도 좇아 다녀서 해 주었더니 이게 뭐냐고. 나는 그 여자가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래 결혼은 그렇게 끌려가면서 하는 겁니까 이게 어째서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까 이 사람 딴에는 무슨 값을 올리는 줄 아는가 본데 참으로 불쌍한 여자입니다. 내가 선택하지 못하고 남의 선택에 끌려간 거예요. 한 평생 그렇게 노예적으로 살아야 되는 겁니까 시작은 또 그렇다고 합시다. 그러면 결혼식 날부터는 얘기가 달라야죠. 이제는 내가 당신을 선택한 거요. 이러고 살아야지. 한 평생 그게 뭡니까 이건 잘못이에요. 지금부터 바로 지금 이 현실부터는 빼앗기는 데서부터 시작해서 주는 마음으로 억지로 된 것이나 이제부터는 자발적으로 다시 말해서 동기 전환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음을 바꿔요. 마음의 태도를 바꿔요. 처음에는 억지로 했지만은 이제는 즐거움으로 하는 거예요. 여기에 자유가 있어요. 이 자유함에 행복이 깃들이는 것이고 능률이 솟아오르는 것이죠. 그 뿐 아니라 보세요 남의 일이거든요. 가자 할 때 끌려가면 오리동안 가는 동안에는 그건 남의 일이요. 내일 아닙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그래서 십리까지 가 줄 때는 이건 내 일이 됩니다. 거기에 차이가 있는 겁니다. 옛날에 시골에서는 농사하는 사람들이 품앗이라는게 있었습니다. 요새 젊은 사람들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품앗이라고 하는 말은 농촌에서 농사를 할 때 우리 밭에 씨를 뿌려야겠고 또 김을 매야겠는데 나 혼자서 각각 따로 하다가는 힘이 드니까 이웃사람들을 불러서 같이 합니다. 이게 품앗이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와서 우리 집에 하루 품을 일 해 주었으면 내가 또 다른 집에 가서 하루 품을 일하는 거예요. 이게 품앗이입니다. 그러니까 온 동네가 하루는 이 집에 가서 일하고 하루는 저 집에 가서 일하고 서로 품앗이를 하고 혹은 내가 그 집에 김 매는 날 못 가게 되면 다른 분을 대신 세워야 됩니다. 어쨌든 이렇게 품앗이라는 게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다 보면 내 집에 나의 집에서 내 밭에 일 할 수가 있지만 어떤 날은 남의 집에서 일 할 때가 많거든요. 여기서 인생이 달라집니다. 자기 집 밭에 일할 때는 부지런히 일하고요 남의 집의 밭에 가서 일할 때는 함부로 하는 사람이 있어요. 요런 사람이 문제라고요. 그걸 억지로 하는 것처럼 생각해요. 아니지요. 남의 밭이나 내 밭이나 내 일이나 남의 일이나. 처음에는 남의 일이요. 그러나 지금은 내 일이요. 그 마음가짐으로는 언제나 내 일처럼 내 것처럼 그렇게 해야하는 것이거든요. 거기에 인간의 기본 자세란 말입니다. 그것 뿐인가 하면 할 수 없이 시작한 일이지만 이제부터는 하고 싶어서 하는 일로 하라 그런 말이예요.
여기에 진리가 있는 것이올시다. 나 중심에서 시작 한 것이요. 그러나 이제부터는 다른 사람의 필요와 중심을 생각하면서 일하라 그런 말씀입니다. 영어에 이런 말이 있죠.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란 말이 있습니다. 대화 혹은 소통이라는 말이죠. 라틴어에는 이커뮤니케이션이라는 말이 라틴말에서 나오는데 코무누스(Communus)라고 합니다. 코무누스라는 말은 짐을 지고 함께 간다는 뜻입니다. 코무누스. 신화에 오펠로라고 하는 힘이 센 장사 하나가 있었는데 이 사람의 소원은 가장 강한 자의 신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왕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그래 왕하고 가까이 지내면서 보니까 왕이 무슨 얘기하다가도 악마라는 말만 나오면은 벌벌 떨어요. 아하 악마가 왕보다 더 세구나. 그래서 그는 또 악마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악마하고 좇아 다니면서 심부름을 해 보니까 악마는 예수의 이름만 나오면은 벌벌 떨어요. 옳지 예수가 더 높구나 그래 예수의 제자가 됩니다. 예수를 섬기고 사는데 어느 날 나루터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어린아이 하나가 "어머니가 병들어서 지금 약을 구해 가지고 가는 중입니다. 나루를 건네주세요."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부는데 도저히 배를 띄울 수가 없어요. 이 어린아이가 하도 사정을 하니까 "그래 그럼 내가 업고 가자." 그 물이 깊지 않아서 업고, 이 아이를 업고 강을 건넙니다.
그런데 어린아이가 점점 무거워 집니다. 하도 무거워서 "애야 넌 쇳덩어리를 달았냐 왜 이렇게 무겁냐" 하고 한 마디 했더니 어린아이가 조용히 그의 귀에 대고 말합니다. "나는 네가 섬기는 예수다" 그랬어요.
여러분 때때로 우리는 억지로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그게 억지가 그 다음에 나가서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꾸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때부터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이죠. 21세기를 지향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연구를 합니다. 소위 미래학이라는 이름으로 앞으로 21세기에는 어떤 기업이 성공할까, 어떤 사람이 성공할까, 어떤 기술이 좋을까, 여러 가지로 연구합니다 만은 제가 그저 돌아가는 책들을 읽어 본 대로는 이런 결론입니다. 21세기는 행복한 사람이 성공합니다. 남을 모방해서는 살 수 없습니다. 억지로 해서는 더더욱 안됩니다. 행복한 마음으로 일할 때 창의력이 생깁니다. 창의적이 아니고는 미래는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남의 흉내나 내고 뒤꽁무니 좇아가고 억지로 끌려가고 그거 가지고는 살지 못합니다. 이것이 결론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음식 한가지를 먹어도 먹는다는 형식은 같지만 맛있게 먹는 사람과 억지로 먹은 사람하고는 하늘과 땅입니다. 똑같은 일을 한 장소에서 하는 것 같으나 그 마음 자세가 어디에 있느냐 그거요. 오리를 가자고 하지만 나는 십리까지 간다 이거요 바로 이 마음입니다. 라디오방송 프로에 나온 얘기입니다만은 전대영이라고 하는 청년이 고등학교 2학년때 교회봉사 활동에 참여했다가 경험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어느 맹아원을 방문해서 하루를 맹아들과 같이 하루를 지냈답니다. 시각장애자 아이들하고 일대일로 하나씩 만나가지고 그 애를 즐겁게 하면서 같이 놀이를 하고 놀았어요. 근데 여섯살 난 종민이라는 아이를 데리고 놀게 됐는데 애가 "나 좀 업어 줘! 형 나 좀 업어 줘!" 그래요. 그래 업어주었답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이 맹아원 밖으로 좀 나가자" 그건 규칙에 없지만은 하도 얘기를 하니까 "그러자" 하고 나갔어요. 그래 "가게를 가자" 가게를 갔어요. 자 이 생각에 "너는 보지도 못하면서 밖으로 나가면 뭘 하니 또 이 가게는 가서 뭘 하니 보지도 못하면서" 그러고 싶지만은 본인이 원하니까 가게에 갔더니 "인형하나 사 줘" 그러더래요. 자기 주머니 돈을 다 털어서 인형 하나를 샀더니 이걸 손에 만져 보고는 이 맹아원으로 들어오다가 그 아이들이 노는 것을 듣고 이 아이가 하는 말이 "형아 이 인형 저 아이들에게 줘" 그러더랍니다. 그 때 그는 많이 생각했어요. 내가 원하는 대로만 되는 게 아니요. 합리적으로만 되는 게 아니요. 저가 원하니까 그대로 따라 주었더니 이제 와서 보니 얼마나 귀한 일을 했는지 그 다음에야 깨닫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강요된 현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살지 마십시다. 환경의 변화를 기대하지 마세요. 문제는 내 마음의 변화가 먼저입니다. 오리를 가지고 그럽니까 십리를 갑시다. 속옷을 달라고 하십니까 겉옷까지 주는 마음으로 삽시다. 십자가란 기쁨으로 진자에게만 십자가의 의미가 있는 겁니다. 억지로 지는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순교자는 기뻐하며 감사하며 죽을 때 순교자요 만일에 "속았다" 그리고 죽는다면 그는 순교가 아닙니다. 죽는다고 순교가 아닙니다. 고통을 당한다고 다 의미가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리를 가자 하는데 십리까지 가는 바로 그 마음이래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엄청난 자유와 높은 지혜, 창조적 능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현대인으로서 어떻게 하면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데 대한 책들이 많이 있습디다 만은 제가 읽은 대로는 커밍 웍(Cuming Walk)의 그 말이 너무 마음에 가장 와 닿는 그런 내용이었다고 생각해서 늘 기억합니다. 현대인으로 성공하려면 먼저 지능이 높아야 한다. 요새는 너무 복잡한 세상에 사니까 머리 회전이 빠르면 참 어렵습니다. 어리둥절한 사람은 살기가 어려워요. 머리가 좋아야겠다. 그러나 두 번째는 지식이 있어야 겠다. 아무리 머리가 있어도 공부하지 아니하면 빈 상자입니다. 소프트웨어가 없는 하드웨어는 "노 유스(No use)" 아무 소용 없는 거요. 그런고로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공부를 많이 해서 많은 지식을 입력시켜야 한다. 셋째는 아무리 좋은 지식이 있어도 내가 그것을 잘 사용할 수 있는 능숙한 숙련된 기술이 없으면 소용없다 이겁니다. 그걸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자동차를 봐도 아무리 좋은 자동차가 있고 아무리 지식이 있어도 자동차를 만드는 기술이 있다 하더라도 자동차를 잘 운전할 수 있는 기술이 없으면 그 자동차와 나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잘 다룰 수 있는 아주 스킬풀(Skillful)한 아주 능숙한 기술 그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세 가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자세다 그랬어요. 애티튜드(Attitude), 태도와 자세 즉 마음가짐이 문제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공의 비결은 바로 97%가 자세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건 깊이 생각할 문제입니다. 목적이 중요합니다 만은 그 목적에 따르는 내 자세가 중요합니다. 환경이 인생을 불행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 아닙니다. 문제는 삶의 자세가 문제입니다.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것도 자세요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것도 마음가짐입니다. 마음의 자세가 문제입니다. 같은 환경, 같은 처지,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직업, 같은 모양으로 사는 것 같으나 전혀 다릅니다. 한 사람은 낙원에 살고 한 사람은 지옥에 삽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삶의 자세에 대체로 크게 나누어서 세 가지로 분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형벌의식에 쫓기며 사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억지로 살아가는 겁니다. 죽지 못해 사는 겁니다. 왜 흔히 말하기를 팔자다, 내 운명이다, 그렇거니 하고 살아갑니다 그 아까운 시간들을 그 많은 시간 그렇게 살아갑니다. 노예적으로 삽니다 참 불행한 것이올시다.
제가 어느 미국 가정에 가서 하룻밤을 같이 지내고 아침 조반 식사를 하는데 공교롭게 내 앞에서 조반 먹다 말고 부부싸움을 하더만요. 그래 그 미국사람 부부싸움 하는 거 한번 봤습니다. 아내는 얘기가 이렇습니다. 이 집에 와서 내가 아이 낳아주고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당신을 위해서 난 다른 사람들처럼 직장도 가지질 않고 온전히 당신 하나만을 위해서 살았는데 나는 완전히 이 집의 노예요 이 집의 식모라고 돈 받지 못하는 식모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남편은 하는 말이 나는 당신과 함께 이 자녀들 다 벌여 먹이느라고 밖에 나가서 아침부터 밤까지 이렇게 수고하지 않느냐 나는 이 집에 머슴이라고. 그래 저는 재판을 했습니다. 이 집에는 머슴과 식모가 사누만, 그랬어요. 안 그렇습니까 똑같은 생을 사는데 억지로 사는 사람 많아요 심지어는 부부생활도요 한 평생 강간당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있어요. 이 웬일입니까 무사히 살았지요. 한 평생 무사했어요. 이혼은 안 했어요. 심지어는 싸운 일도 없어요. 그러나 그건 산 게 아니요. 당신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요. 왜 인생을 그렇게 살아가야 됩니까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이렇게 보냈습니까 억지로 부득이해서 할 수 없이. 그런가하면 또 형벌의식이 무서워서 매맞을까봐, 벌받을까봐, 저주받을까봐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심지어는 신앙생활도 이따위로 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감기만 걸려도 아 벌받는가보다, 또 내가 남의 말을 좀 했더니 또 저주받는구만. 이런 식의 의식, 얼마나 불쌍합니까 벌벌 떨며 사는 거예요. 그런가하면 또 하나는 보상을 바라고 사는 사람이 있어요. 좋은 일 하면 좋은 일이 오겠지. 아이들 잘 키워놓으면 효도 받겠지. 또 사랑하면 사랑 받겠지. 항상 투자의식을 가지고 상 받을 마음으로, 보상받는 마음을 가지고 삽니다. 그랬다가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지 안는다고 원망 불평입니다. 항상 받으려는 마음, 사랑 받으려는 마음, 칭찬 받으려는 마음에 아주 민감합니다. 그래서 허영적인 사람도 되고 위선적인 사람도 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큰아들에게 "너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했더니 "예 가겠습니다" 대답은 잘 했어요. 그리고 안 갔어요. 둘째아들에게 "너 포도원에 가서 좀 일하렴" 대답하기를 "안 가겠습니다" 거절하거든요. 아버지 마음이 아팠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뒤에 뉘우치고 갔어요. 나는 이 두 아들이 다 못마땅해요. 아들 하나 더 있으면 좋겠어요. "가겠습니다"하고 간 사람, 예수님의 시각으로 볼 때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었던 거 같아요. 하나같이 이 모양이요. 한다고 하면서 안 하고 안가겠다 하고선 억지로억지로 가는 거요. 이게 얼마나 불행하냐 말입니다.
참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사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 요새요 직장 생활하는데 있어도 21세기를 지향하는 좋은 직장에서는요 출퇴근 시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은 집에 와서도 생각이 나서 연구를 하고 있으면 그건 근무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고로 내 마음대로 출근하든 퇴근하든 일만하면 된다 이거예요. 길거리에 있든 직장에 있든 상관없어요. 이래서 출퇴근이 없는 직장들이 많이 생깁니다. 그러나 한번 옛날로 말하면은 출퇴근, 정확한 시간에 출근하고 정확한 시간에 퇴근하고 출퇴근에는 아주 명수요 하루종일 담배 피운 거 밖에 없어. 이런 사람 있으나 마나 월급만 타먹는 사람이요 비생산적인 직원이요. 이젠 그런 거 안 통하는 세상이에요. 형식적인 충성, 구조적인 충성 이런 강요된 충성이라는 것은 아무의미가 없어요. 그런고로 마음의 자세. 그래 세 번째 사람은 존경과 사랑과 감사로 일하는 거예요. 일이 주어졌다는 것이 감사하고 오늘도 일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하고 또 나로 하여금 이만한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 또 회사에도 감사, 지혜를 주신 것 감사, 즐거운 마음으로 일합니다. 자나깨나 필요하면 일거리를 집에 가지고 와서도 하고 혹은 직장에서 밤을 새우면서도 하고 이걸 얼마 주느냐고 따지지 않아요. 문제는 이 자체가 너무 소중한 일이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심취해서 일한다. 자 이런 삶의 자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신상수훈의 말씀을 하시는 그 중간부분에 하신 말씀이요. 기독교인의 윤리, 기독교인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 하고 누누이 하나 하나 예를 들어 말씀하시는 중에 그 중심부에 있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너무 높은 규범이라서 때로 "아이고 그거야 예수님이니까. 우리 같은 사람이야 어디 거기까지 생각을 하나." 하고 쳐다보지도 않는 경우가 있어요. 난 그런 생각을 합니다. 못 올라갈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 그랬는데 난 그거 잘못된 말이라고 생각해요. 쳐다보기라도 해야 올라갈 때가 있지 못 올라갈 나무라도 쳐다보아야 언젠가 올라갈 수가 있는 거지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은 영 끝난 거죠. 예수님의 윤리 아주 높아요.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이요 너무나도 확실한, 요새말로 말하면 21세기 지향적입니다. 보세요, 속옷을 달라고 하거든 속옷만 아니라 겉옷까지 주어라. 오리를 억지로 가자고 하자. '내가 길을 모르니 그 오리까지 좀 가주세요' 그러면 나는 십리까지 가 줘라 이거 통하는 얘기입니까 요새는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요 많은 사람들이 신경을 써요. 또 남의 것 그저 할 수만 있으면 갈취하려고 해요. 이런 무서운 세상에 어떻게 달라고 하지도 않은 것까지 주라 이거요. 이런 얘기가 통하는 겁니까 그러나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올시다. 행복한 생활은 자유에서 얻어지는 거이니까요. 주도성 속에서 평가되는 것이올시다. 잘 생각해 보십시다. 주는 것과 빼앗기는 것은 달라요. 물질적으론 꼭 같은 겁니다. 주는 것이나 빼앗기는 것이나 어차피 내 물건이 저 쪽으로 넘어간 건 사실이요. 물리적으론 똑같죠. 형식적으로는 같으나 빼앗기는 것과 주는 건 다른 거예요. 빼앗기는 건 억지로 된 것이고 주는 것은 내 마음에서 주는 거예요. 한 평생 주면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평생 빼앗기면서 사는 거예요. 항상 강도 만나며 사는 거예요, 강도 만나는 그 마음으로 한 평생 사는 불행한 사람이 있다 말입니다. 그런고로 너희는 선택적으로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주도적으로 살라. 이것을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보세요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까지 가라. 무슨 말씀입니까 오리까지 가는 것은 억지로 가는 거예요 이건 내 뜻이 아닙니다. 한데 이건 어떤 사람이 와서 길을 잘 모르는데 좀 같이 가 주세요. 아 이거 거절하기가 안 됐어요. 또 그 사람 딱하거든요. 그래 갑시다하고 가 주었어요. 이거는 억지로 되는 것이고 피동적이고 수동적이고 끌려가는 것이요.
그런데 오리까지 가서 보니 이 사람 이제부터는 내가 찾아가겠습니다 하지만 그거 또 길을 잃어버리기 쉽겠어요. 좋아요 당신이 바란 건 오리까지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내가 가겠습니다. 십리까지 가 드릴께요. 바로 이 마음이요. 이것은 자발적이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이고 내가 선택적으로 하고 싶어하는 거예요. 이건 강요된 것이 아닙니다. 좀 더 깊은 말씀을 하나 여기서 생각하십시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일의 발단은 억지로 시작되었다는 거예요. 도대체 오리 가는 거 가고 싶어 간 게 아니에요. 내가 가야할 이유가 없어요. 그게 무슨 저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요. 그저 딴에는 좋은 마음이지만 어쨌든 억지로 시작한 거예요. 나에게 가자고 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내가 갈 필요가 없어요. 애당초 시작은 억지로 된 것입니다.
상황은 그렇고 현실은 그렇고 사건은 피동적으로 시작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운명 여러분이 정했습니까 어떤 사람은 좌우간 삼년 동안이나 남자가 따라다니면서 결혼하자고 졸라서 결혼해 주었대요. 그리고는 일생동안 우려먹는 거야 말끝마다 당신이 하도 좇아 다녀서 해 주었더니 이게 뭐냐고. 나는 그 여자가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래 결혼은 그렇게 끌려가면서 하는 겁니까 이게 어째서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까 이 사람 딴에는 무슨 값을 올리는 줄 아는가 본데 참으로 불쌍한 여자입니다. 내가 선택하지 못하고 남의 선택에 끌려간 거예요. 한 평생 그렇게 노예적으로 살아야 되는 겁니까 시작은 또 그렇다고 합시다. 그러면 결혼식 날부터는 얘기가 달라야죠. 이제는 내가 당신을 선택한 거요. 이러고 살아야지. 한 평생 그게 뭡니까 이건 잘못이에요. 지금부터 바로 지금 이 현실부터는 빼앗기는 데서부터 시작해서 주는 마음으로 억지로 된 것이나 이제부터는 자발적으로 다시 말해서 동기 전환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음을 바꿔요. 마음의 태도를 바꿔요. 처음에는 억지로 했지만은 이제는 즐거움으로 하는 거예요. 여기에 자유가 있어요. 이 자유함에 행복이 깃들이는 것이고 능률이 솟아오르는 것이죠. 그 뿐 아니라 보세요 남의 일이거든요. 가자 할 때 끌려가면 오리동안 가는 동안에는 그건 남의 일이요. 내일 아닙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그래서 십리까지 가 줄 때는 이건 내 일이 됩니다. 거기에 차이가 있는 겁니다. 옛날에 시골에서는 농사하는 사람들이 품앗이라는게 있었습니다. 요새 젊은 사람들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품앗이라고 하는 말은 농촌에서 농사를 할 때 우리 밭에 씨를 뿌려야겠고 또 김을 매야겠는데 나 혼자서 각각 따로 하다가는 힘이 드니까 이웃사람들을 불러서 같이 합니다. 이게 품앗이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와서 우리 집에 하루 품을 일 해 주었으면 내가 또 다른 집에 가서 하루 품을 일하는 거예요. 이게 품앗이입니다. 그러니까 온 동네가 하루는 이 집에 가서 일하고 하루는 저 집에 가서 일하고 서로 품앗이를 하고 혹은 내가 그 집에 김 매는 날 못 가게 되면 다른 분을 대신 세워야 됩니다. 어쨌든 이렇게 품앗이라는 게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다 보면 내 집에 나의 집에서 내 밭에 일 할 수가 있지만 어떤 날은 남의 집에서 일 할 때가 많거든요. 여기서 인생이 달라집니다. 자기 집 밭에 일할 때는 부지런히 일하고요 남의 집의 밭에 가서 일할 때는 함부로 하는 사람이 있어요. 요런 사람이 문제라고요. 그걸 억지로 하는 것처럼 생각해요. 아니지요. 남의 밭이나 내 밭이나 내 일이나 남의 일이나. 처음에는 남의 일이요. 그러나 지금은 내 일이요. 그 마음가짐으로는 언제나 내 일처럼 내 것처럼 그렇게 해야하는 것이거든요. 거기에 인간의 기본 자세란 말입니다. 그것 뿐인가 하면 할 수 없이 시작한 일이지만 이제부터는 하고 싶어서 하는 일로 하라 그런 말이예요.
여기에 진리가 있는 것이올시다. 나 중심에서 시작 한 것이요. 그러나 이제부터는 다른 사람의 필요와 중심을 생각하면서 일하라 그런 말씀입니다. 영어에 이런 말이 있죠.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란 말이 있습니다. 대화 혹은 소통이라는 말이죠. 라틴어에는 이커뮤니케이션이라는 말이 라틴말에서 나오는데 코무누스(Communus)라고 합니다. 코무누스라는 말은 짐을 지고 함께 간다는 뜻입니다. 코무누스. 신화에 오펠로라고 하는 힘이 센 장사 하나가 있었는데 이 사람의 소원은 가장 강한 자의 신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왕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그래 왕하고 가까이 지내면서 보니까 왕이 무슨 얘기하다가도 악마라는 말만 나오면은 벌벌 떨어요. 아하 악마가 왕보다 더 세구나. 그래서 그는 또 악마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악마하고 좇아 다니면서 심부름을 해 보니까 악마는 예수의 이름만 나오면은 벌벌 떨어요. 옳지 예수가 더 높구나 그래 예수의 제자가 됩니다. 예수를 섬기고 사는데 어느 날 나루터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어린아이 하나가 "어머니가 병들어서 지금 약을 구해 가지고 가는 중입니다. 나루를 건네주세요."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부는데 도저히 배를 띄울 수가 없어요. 이 어린아이가 하도 사정을 하니까 "그래 그럼 내가 업고 가자." 그 물이 깊지 않아서 업고, 이 아이를 업고 강을 건넙니다.
그런데 어린아이가 점점 무거워 집니다. 하도 무거워서 "애야 넌 쇳덩어리를 달았냐 왜 이렇게 무겁냐" 하고 한 마디 했더니 어린아이가 조용히 그의 귀에 대고 말합니다. "나는 네가 섬기는 예수다" 그랬어요.
여러분 때때로 우리는 억지로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그게 억지가 그 다음에 나가서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꾸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때부터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이죠. 21세기를 지향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연구를 합니다. 소위 미래학이라는 이름으로 앞으로 21세기에는 어떤 기업이 성공할까, 어떤 사람이 성공할까, 어떤 기술이 좋을까, 여러 가지로 연구합니다 만은 제가 그저 돌아가는 책들을 읽어 본 대로는 이런 결론입니다. 21세기는 행복한 사람이 성공합니다. 남을 모방해서는 살 수 없습니다. 억지로 해서는 더더욱 안됩니다. 행복한 마음으로 일할 때 창의력이 생깁니다. 창의적이 아니고는 미래는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남의 흉내나 내고 뒤꽁무니 좇아가고 억지로 끌려가고 그거 가지고는 살지 못합니다. 이것이 결론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음식 한가지를 먹어도 먹는다는 형식은 같지만 맛있게 먹는 사람과 억지로 먹은 사람하고는 하늘과 땅입니다. 똑같은 일을 한 장소에서 하는 것 같으나 그 마음 자세가 어디에 있느냐 그거요. 오리를 가자고 하지만 나는 십리까지 간다 이거요 바로 이 마음입니다. 라디오방송 프로에 나온 얘기입니다만은 전대영이라고 하는 청년이 고등학교 2학년때 교회봉사 활동에 참여했다가 경험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어느 맹아원을 방문해서 하루를 맹아들과 같이 하루를 지냈답니다. 시각장애자 아이들하고 일대일로 하나씩 만나가지고 그 애를 즐겁게 하면서 같이 놀이를 하고 놀았어요. 근데 여섯살 난 종민이라는 아이를 데리고 놀게 됐는데 애가 "나 좀 업어 줘! 형 나 좀 업어 줘!" 그래요. 그래 업어주었답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이 맹아원 밖으로 좀 나가자" 그건 규칙에 없지만은 하도 얘기를 하니까 "그러자" 하고 나갔어요. 그래 "가게를 가자" 가게를 갔어요. 자 이 생각에 "너는 보지도 못하면서 밖으로 나가면 뭘 하니 또 이 가게는 가서 뭘 하니 보지도 못하면서" 그러고 싶지만은 본인이 원하니까 가게에 갔더니 "인형하나 사 줘" 그러더래요. 자기 주머니 돈을 다 털어서 인형 하나를 샀더니 이걸 손에 만져 보고는 이 맹아원으로 들어오다가 그 아이들이 노는 것을 듣고 이 아이가 하는 말이 "형아 이 인형 저 아이들에게 줘" 그러더랍니다. 그 때 그는 많이 생각했어요. 내가 원하는 대로만 되는 게 아니요. 합리적으로만 되는 게 아니요. 저가 원하니까 그대로 따라 주었더니 이제 와서 보니 얼마나 귀한 일을 했는지 그 다음에야 깨닫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강요된 현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살지 마십시다. 환경의 변화를 기대하지 마세요. 문제는 내 마음의 변화가 먼저입니다. 오리를 가지고 그럽니까 십리를 갑시다. 속옷을 달라고 하십니까 겉옷까지 주는 마음으로 삽시다. 십자가란 기쁨으로 진자에게만 십자가의 의미가 있는 겁니다. 억지로 지는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순교자는 기뻐하며 감사하며 죽을 때 순교자요 만일에 "속았다" 그리고 죽는다면 그는 순교가 아닙니다. 죽는다고 순교가 아닙니다. 고통을 당한다고 다 의미가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리를 가자 하는데 십리까지 가는 바로 그 마음이래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엄청난 자유와 높은 지혜, 창조적 능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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