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이 오면 (눅23:26-31)
본문
본문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에 대중을 상대로 가르치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십자가의 무게를 몸으로 지탱하지 못하여 고꾸라지는 상황에서도 자신을 돌보시지 않고 따라오는 사람들을 걱정하셨습니다. 마지막까지 남을 위한 삶을 사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교훈을 받아야 할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이 땅에서 불의가 행해지는 것을 슬퍼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십자가 형이 확정된 후 군인들은 그분에게 십자가를 지우고 총독관저를 나섰습니다. 밖에 있던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고 순식간에 예루살렘에 예수님의 처형 소식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는 길(비아 돌로로사-라틴어로 슬픔의 길, 수난의 길이란 뜻)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많은 이적을 행하던 예수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죽는지 보고자 하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그 행렬을 따라갔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그분을 동정하는 마음으로 따라갔습니다. 특히 여인들의 큰 무리는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따라갔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직.간접적으로 여성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당시의 랍비들은 여성들을 무시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달리 여성들과 대화를 하시며 가르치셨습니다.(사마리아 여인, 간음 중에 잡힌 여인, 혈루증 앓던 여인, 막달라 마리아, 또 간음하지 말며 이혼하지 말라는 강력한 가르침은 어떻습니까 그 당시에 유대인 남자는 마음만 있다면 어떠한 구실을 만들어서도 아내와 이혼할 수 있었습니다. 빵을 태우거나 불을 꺼뜨리거나 자기를 더 즐겁게 하는 애인을 발견할 경우에 이 여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든 안 믿었든 그것은 이 시간에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당대에 가장 선한 사람이 가장 악랄한 처형을 받게 되는 것에 슬퍼했습니다. 죄가 없는 사람이 고통받게 될 것을 생각하며 슬퍼했습니다. 무슨 병이든 낫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죽게 되는 것을 슬퍼했습니다. 그 동안의 선행으로 상을 주어도 부족한데 상을 받기는 커녕 십자가 형에 처해지는 인간 예수를 동정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현대는 눈물이 흔치 않은 시대입니다. 워낙 사람이 많아 거리에서 사람들에 떠밀리며 지내다보니 인정이 메말라졌습니다.
개인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지다 보니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 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만 잘 먹고 잘 살면 다른 사람들은 어떠하든지 상관없다는 식입니다. 우리는 이 여인들처럼 이 세상에서 불의가 행해지는 것에 애통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불의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한 달 전에 나이가 서른 한 살인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 팔과 다리를 쓰지 못하는 지체장애인의 동냥통에서 돈을 훔쳤다고 합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고 3개월 동안 20여 차례에 걸쳐 상습적으로 훔쳤다는 것입니다. 벼룩의 간을 떼어 먹는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땀 흘려 노력하며 돈을 벌 생각은 하지 않고 쉽게 벌려고 하는 세태에 대해서 애통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지 자기만 편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애통해야 합니다. 훨씬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이용하고 탈취하는 일들에 대해서 애통해야 합니다. 걸인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서울 청량리역에서 구걸하는 두 걸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은 37살이고 또한사람은 목발을 짚고 다니는 56세입니다. 두 사람이 역 광장에서 술을 마시다가 젊은 사람이 불구자의 목발을 빼앗아 마구 때려 전치 2주의 상처를 입혔다고 합니다. 왜 그랬는지 압니까 “불경기라 돈벌이가 안되는 마당에 동료가 잠만 자는등 열심히 구걸하지 않아 때렸다”는 것입니다(97년10월13일).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아무리 거지라도 위계질서가 있는 법인데 하는 말은 옛말이 되었습니다. 힘이 있다고 위 아래 가리지 않고 폭력을 휘두르는 세상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청소년들의 비행을 책망하고 바로잡으려다가 그들에게 봉변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고도 더럽다 하며 침이나 뱉고 돌아서야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로 애통해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세상에서 사는 것을 애통해 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해서 슬퍼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슬피 우는 여인들에게 그분 자신을 위해서 울지 말고 그들과 그들의 자녀를 위해서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동정의 눈물을 흘리는 것도 좋지만 그들에게도 훗날 엄청난 고난이 닥치고 재앙이 임할 것이므로 그것을 슬퍼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29절) 이 구절을 21장 20-24절과 비교해 보면 이 날이 언제를 가리키는지 확실해집니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21:20,23,24) 그 날은 예루살렘이 로마 군대에게 유린되는 날이며 그 날에 아이를 가진 부녀가 큰 환난을 겪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부녀가 가장 큰 환난을 당하는 때가 전쟁 때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금요일 저녁 신문에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을 이루려는 티모르사람들에게 인도네시아 정부군이 얼마나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는지 보여주는 사진이 게재되었습니다. 군인들이 상의를 벗긴 젊은 여성 두 명을 나무에 꼼짝 못하게 묶어놓고 성희롱을 하기도 하고 담뱃불로 지지는 사진도 있고, 성폭행을 당한 뒤 실신해 있는 여성의 배에 못을 박고 있는 사진도 있고, 죽은 여성의 온몸에 낙서를 하는 사진도 있다고 합니다. 그 사진들을 보면서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잔인할 수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것입니다. 광주사태 때에도 진압군에 의한 만행 소문이 일부 사실로 드러나 충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세계가 각 나라의 인권상황에 대해서 주시하고 있는 이 시대에도
그런데 그 옛날에는 오죽했겠습니까! 유대인의 독립운동에 몇 년 동안 시달린 로마군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아이 밴 여인의 배를 칼로 가르기도 하고 엄마 품에 있는 아이를 가로채 땅에 매치기도 했습니다.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 차라리 아이를 갖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여인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31절 말씀은 의미 파악을 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기 쉬운 구절입니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여기서 푸른 나무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고 마른 나무는 예수님을 배척한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다름과 같은 의미로 새겨볼 수 있습니다. 로마인들이 죄가 없는 나도 이처럼 다루는데 죄 있는 너희 유대인들은 어떻게 다루겠느냐 유대인들이 죄 없는 나를 이처럼 응징하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응징하시겠느냐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이 지은 죄 때문에 무죄한 나도 이렇게 응징하시는데 죄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응징하시겠느냐 광주사태 때 투입된 진압군인들이 성질이 못된 특별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 이웃에 살던 순진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인간으로서 도무지 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른 인도네시아의 진압군이 우리와 다른 정서를 가진 특이한 체질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대학살의 주범 나찌가 정신병자 집단이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들이나 우리나 똑 같습니다. 대부분의 우리도 그들과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똑 같은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죄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무서운 죄의 성품이 우리 안에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애통해야 합니다. 우리가 저지르는 죄악된 행동들에 대해서 애통해야 합니다. 웨슬레는 설교할 때 눈물을 흘리지 않고 한 적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종종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설교를 잠시 중단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운다고 비난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불멸의 영혼이 멸망 직전에 있는데도 여러분은 조금도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설교를 듣고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제시될 기회를 가지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울지 않으니 내가 달리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세상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날이 머지 않아 다가올 것입니다. 당신과 당신의 자녀를 위하여 슬퍼하십시오.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십시오. 그리하면 죄사함 받고 영생을 선물로 받습니다. 더 이상 심판받지 않습니다.
첫째, 우리는 이 땅에서 불의가 행해지는 것을 슬퍼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십자가 형이 확정된 후 군인들은 그분에게 십자가를 지우고 총독관저를 나섰습니다. 밖에 있던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고 순식간에 예루살렘에 예수님의 처형 소식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는 길(비아 돌로로사-라틴어로 슬픔의 길, 수난의 길이란 뜻)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많은 이적을 행하던 예수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죽는지 보고자 하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그 행렬을 따라갔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그분을 동정하는 마음으로 따라갔습니다. 특히 여인들의 큰 무리는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따라갔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직.간접적으로 여성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당시의 랍비들은 여성들을 무시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달리 여성들과 대화를 하시며 가르치셨습니다.(사마리아 여인, 간음 중에 잡힌 여인, 혈루증 앓던 여인, 막달라 마리아, 또 간음하지 말며 이혼하지 말라는 강력한 가르침은 어떻습니까 그 당시에 유대인 남자는 마음만 있다면 어떠한 구실을 만들어서도 아내와 이혼할 수 있었습니다. 빵을 태우거나 불을 꺼뜨리거나 자기를 더 즐겁게 하는 애인을 발견할 경우에 이 여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든 안 믿었든 그것은 이 시간에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당대에 가장 선한 사람이 가장 악랄한 처형을 받게 되는 것에 슬퍼했습니다. 죄가 없는 사람이 고통받게 될 것을 생각하며 슬퍼했습니다. 무슨 병이든 낫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죽게 되는 것을 슬퍼했습니다. 그 동안의 선행으로 상을 주어도 부족한데 상을 받기는 커녕 십자가 형에 처해지는 인간 예수를 동정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현대는 눈물이 흔치 않은 시대입니다. 워낙 사람이 많아 거리에서 사람들에 떠밀리며 지내다보니 인정이 메말라졌습니다.
개인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지다 보니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 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만 잘 먹고 잘 살면 다른 사람들은 어떠하든지 상관없다는 식입니다. 우리는 이 여인들처럼 이 세상에서 불의가 행해지는 것에 애통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불의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한 달 전에 나이가 서른 한 살인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 팔과 다리를 쓰지 못하는 지체장애인의 동냥통에서 돈을 훔쳤다고 합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고 3개월 동안 20여 차례에 걸쳐 상습적으로 훔쳤다는 것입니다. 벼룩의 간을 떼어 먹는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땀 흘려 노력하며 돈을 벌 생각은 하지 않고 쉽게 벌려고 하는 세태에 대해서 애통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지 자기만 편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애통해야 합니다. 훨씬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이용하고 탈취하는 일들에 대해서 애통해야 합니다. 걸인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서울 청량리역에서 구걸하는 두 걸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은 37살이고 또한사람은 목발을 짚고 다니는 56세입니다. 두 사람이 역 광장에서 술을 마시다가 젊은 사람이 불구자의 목발을 빼앗아 마구 때려 전치 2주의 상처를 입혔다고 합니다. 왜 그랬는지 압니까 “불경기라 돈벌이가 안되는 마당에 동료가 잠만 자는등 열심히 구걸하지 않아 때렸다”는 것입니다(97년10월13일).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아무리 거지라도 위계질서가 있는 법인데 하는 말은 옛말이 되었습니다. 힘이 있다고 위 아래 가리지 않고 폭력을 휘두르는 세상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청소년들의 비행을 책망하고 바로잡으려다가 그들에게 봉변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고도 더럽다 하며 침이나 뱉고 돌아서야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로 애통해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세상에서 사는 것을 애통해 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해서 슬퍼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슬피 우는 여인들에게 그분 자신을 위해서 울지 말고 그들과 그들의 자녀를 위해서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동정의 눈물을 흘리는 것도 좋지만 그들에게도 훗날 엄청난 고난이 닥치고 재앙이 임할 것이므로 그것을 슬퍼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29절) 이 구절을 21장 20-24절과 비교해 보면 이 날이 언제를 가리키는지 확실해집니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21:20,23,24) 그 날은 예루살렘이 로마 군대에게 유린되는 날이며 그 날에 아이를 가진 부녀가 큰 환난을 겪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부녀가 가장 큰 환난을 당하는 때가 전쟁 때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금요일 저녁 신문에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을 이루려는 티모르사람들에게 인도네시아 정부군이 얼마나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는지 보여주는 사진이 게재되었습니다. 군인들이 상의를 벗긴 젊은 여성 두 명을 나무에 꼼짝 못하게 묶어놓고 성희롱을 하기도 하고 담뱃불로 지지는 사진도 있고, 성폭행을 당한 뒤 실신해 있는 여성의 배에 못을 박고 있는 사진도 있고, 죽은 여성의 온몸에 낙서를 하는 사진도 있다고 합니다. 그 사진들을 보면서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잔인할 수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것입니다. 광주사태 때에도 진압군에 의한 만행 소문이 일부 사실로 드러나 충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세계가 각 나라의 인권상황에 대해서 주시하고 있는 이 시대에도
그런데 그 옛날에는 오죽했겠습니까! 유대인의 독립운동에 몇 년 동안 시달린 로마군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아이 밴 여인의 배를 칼로 가르기도 하고 엄마 품에 있는 아이를 가로채 땅에 매치기도 했습니다.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 차라리 아이를 갖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여인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31절 말씀은 의미 파악을 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기 쉬운 구절입니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여기서 푸른 나무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고 마른 나무는 예수님을 배척한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다름과 같은 의미로 새겨볼 수 있습니다. 로마인들이 죄가 없는 나도 이처럼 다루는데 죄 있는 너희 유대인들은 어떻게 다루겠느냐 유대인들이 죄 없는 나를 이처럼 응징하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응징하시겠느냐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이 지은 죄 때문에 무죄한 나도 이렇게 응징하시는데 죄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응징하시겠느냐 광주사태 때 투입된 진압군인들이 성질이 못된 특별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 이웃에 살던 순진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인간으로서 도무지 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른 인도네시아의 진압군이 우리와 다른 정서를 가진 특이한 체질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대학살의 주범 나찌가 정신병자 집단이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들이나 우리나 똑 같습니다. 대부분의 우리도 그들과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똑 같은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죄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무서운 죄의 성품이 우리 안에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애통해야 합니다. 우리가 저지르는 죄악된 행동들에 대해서 애통해야 합니다. 웨슬레는 설교할 때 눈물을 흘리지 않고 한 적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종종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설교를 잠시 중단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운다고 비난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불멸의 영혼이 멸망 직전에 있는데도 여러분은 조금도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설교를 듣고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제시될 기회를 가지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울지 않으니 내가 달리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세상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날이 머지 않아 다가올 것입니다. 당신과 당신의 자녀를 위하여 슬퍼하십시오.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십시오. 그리하면 죄사함 받고 영생을 선물로 받습니다. 더 이상 심판받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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