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면 (수23:1-16)
본문
여호수아 23장과 24장은 여호수아서의 종결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세상을 떠나갈 것을 눈앞에 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향하여 당부하는 권면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3장은 주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를 불러놓고 하는 말이고 24장은 백성의 지도자는 물론이고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도 함께 불러 놓고 하는 말입니다. 이 중에서 오늘은 23장을 중심해서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1절은 여호수아가 이 권면을 한 시기가 언제인지를 짐작하게 하는 구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사방 대적을 다 멸하시고 안식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의 나이가 많아 늙은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4절에는 "보라 나는 오늘날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러한 구절들을 보아서 이 권면은 여호수아가 죽음을 눈 앞에 두고 했던 것임을 짐작하게 해 줍니다. 아마도 전쟁이 끝나고 20 여년의 세월이 흘러 간 때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이 때에 여호수아는 자기가 이스라엘을 위해서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는 출애굽 때부터 지금까지 여호와 여호와 하나님께 붙잡혀서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지나왔었습니다. 파란만장의 광야 40년의 유랑 생활과 수많은 가나안 전쟁을 이끈 여호수아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그는 하나님의 사역을 수없이 보아 왔었습니다. 이러한 일생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이 하나님 여호와 앞에 이스라엘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계시를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의 지도자들을 불러서 자기가 알고 있는 계시에 따라서 설교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한 것과 비슷합니다.
신명기에서 모세도 32,33장에 걸쳐서 길게 설교했습니다. 창세기 끝에는 야곱이 그렇게 했습니다. 모세와 야곱의 설교 속에는 그들의 생애 동안에 겪었던 사건들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겪었던 사건들은 껍데기와 같습니다. 그 사건들을 껍데기로 삼아서 그 안에 그들이 깨달았던 계시를 담았던 것입니다. 그 속에는 이스라엘의 미래가 담겨 있습니다. 이들은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실 미래를 내다보면서 설교로서 예언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설교 속에는 이스라엘의 실패와 그로 인한 멸망과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회복과 그 회복의 절정을 이루는 왕의 도래를 설교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시의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의 새로운 나라 이스라엘을 바라보고 그것에 소망을 두도록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설교 속에는 특별한 미래를 바라보도록 하는 면이 대단히 강합니다(창49:10, 24; 신32:43, 33:26-29). 이런 의미에서 야곱과 모세는 역시 미래를 바라보는 선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이들과는 좀 다릅니다. 여호수아의 설교는 이미 주어진 것을 지키고 보존하는 것에 초점이 모아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는 야곱과 모세가 내다보았던 약속의 성취를 이미 누리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즉 모세가 그렇게도 들어가고 싶어하던 가나안에서 수십년을 살아왔었고 야곱과 아브라함 같은 조상들이 약속으로만 받았던 땅에서 이미 수십년을 살아온 입장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호수아에게도 아직 미래가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상태를 잘 보존하는 것이 미래에 이르는 길이며 또 미래를 바라보는 태도이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현재의 상태가 가진 계시적인 의미를 잘 지키도록 강조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자기가 계시를 받은 자가 아니라 야곱과 모세가 받은 계시를 누리는 자입니다. 여호수아는 그 계시대로 실현된 현실을 누리는 자이기 때문에 그 현실을 보존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야곱과 모세와는 달리 독립된 선지자라고 하기가 어렵습니다. 여호수아는 선조들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을 누리고 보존하는 입장에 있다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을 말해 주는 것이 바로 1절에 나오는 '안식'이라는 단어입니다. 안식이라는 말은 '쉰다, 정착한다'는 말인데 여호수아가 이 말을 할 때는 이미 사방의 대적이 멸망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식을 누린지 20여년이 지난 후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이미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했던 것이 실제적으로 실현이 되어져서 그들이 누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 40년을 방황했고 또 7년의 전쟁을 겪었으며 그런 후에 20여년이 지났으니 하나님의 궤도 실로 성소에(수18:1) 있는 상황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궤가 여행이 끝이 난 것과 같은 생각을 가지게 해 주는 상황입니다. 그들은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이 안식 상태가 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안식 상태를 누리는 데는 먼저 그들이 경험했던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르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3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자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가나안 민족들을 싸워서 쳐부순 분입니다. 이것은 싸움쟁이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절에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의 마음과 뜻에 아는 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한 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소원을 이루는 분이 아니라 자기의 약속을 이루는 여호와이십니다. 여호수아가 평생 하나님이 일하신 것을 보고 결론짓고 있는 것이 바로 이점입니다. 이점이 바로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다른 점입니다. 인간은 인간의 소원을 이루는 신을 생각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의 소원을 이루는 신이 아닙니다. 여호와는 자신의 뜻만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는 인간은 하나님이 내 뜻을 이루어 주지 않은 분이라면 내 뜻은 내가 이루리라고 하면서 자기의 뜻을 이루려고 고집합니다. 이것은 불신앙입니다. 그러나 생명은 인간의 뜻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기 때문에 미래 또한 확실합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아직 정복하지 못하고 남아 있는 땅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정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약속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복하지 못한 것이 있다고 염려할 필요도 없고 안된다고 염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10절에는 "너희 중 한 사람이 천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것이 무엇입니까 6절 이하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일은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요즈음 말로서 여호와를 믿는 것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가라고 한다면 그것도 성경에 맞지 않는 말씀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안 자가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일진대 이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신앙이 불가능하다는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역사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부정하는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은 이 말을 자기의 말씀으로 받아서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여호와를 사랑하는 길을 6절에는 율법을 가지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이란 여호와가 어떤 분인가를 말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율법을 지켜 행한다는 것은 여호와를 사랑하고 믿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8절에는 여호와를 친근히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로 말하자면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것이 율법을 행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예수 믿는 것 즉 사랑하는 것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예수 사랑하는 것은 완성된 율법을 행하는 것이 됩니다. 결코 예수 사랑이 율법의 정신과 배치되게 가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약에서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주의 할 것이 있습니다. 타락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7절에는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나라들 중에 가지 말라 그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그것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에게 절하지 말라"고 합니다. 남아 있는 이 나라들 중에 가지 말라는 것은 12절에 나와있는 대로 남아 있는 이교도들과 친근히 하고 왕래하며 더불어 혼인을 맺기까지 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들의 우상적인 삶의 정신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니 그 신들의 이름을 부르게 되며, 또 그것을 가리켜 맹세하게 되는 것입니다. 맹세한다는 것은 우상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처럼 믿고 그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사이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점장이를 찾아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가지 말라고 해도 가지 않을 수 없어서 다닌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점을 치는 귀신은 그를 지배하는 자가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한 마디로 불신앙에 빠진 것을 뜻합니다. 이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고통과 멸망입니다.
13절부터 끝까지 타락할 때에 있을 이스라엘의 고통과 멸망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수아가 말하고 있는 신앙과 불신앙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무엇이 신앙이고 무엇이 불신앙입니까 여호수아는 신앙을 머리로서 말하지 않습니다. 이론적이고 논리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는 신앙과 불신앙을 아주 실천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율법을 따라 살면 신앙이고 우상을 따라 가면 불신앙이라고 합니다.
6절과 7절이 아주 대조적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살면 신앙이고 우상을 따라 살면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가 누가 우상을 따라 살겠느냐고 반문하겠지만 명목상의 신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려고 하고 예수를 따라 살려고 하는 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상적인 삶을 추구하는 자라면 그는 불신자입니다. 명목상 신자인데 실제 삶으로는 불신자가 되어 불신적인 삶을 추구하는 자일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을 실천적인 면에서 불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타락이란 자기의 지식으로 막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으로는 듣고 알고 있다고 해도 자신이 불신적인 삶을 사랑하고 그것을 좋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놓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불신적인 삶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을 12절에는 '퇴보하여'라고 했습니다. 어쨌던 이러한 퇴보는 순간적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욕심을 따라 유혹에 끌려 이리저리 치우치는 중에서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삶에 집착하고 추구하게 됩니다.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친근히 한다'는 말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관계를 맺고 빠져 나올 수 없는 상황에 빠집니다. 이렇게 되어 불신앙적으로 살게 되고 실천적인 불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멸망입니다. 여호수아는 이런 것을 경고하고 신앙 안에 있도록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권면은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고 했고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고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엡5:1-3)고 했습니다. 이런 식의 가르침들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왜 이런 식의 권면들이 필요합니까 믿음이 있으면 이러한 권면들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는 자면 이런 것을 자기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하고 불신적인 생활을 계속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도 여러분에게 권면하겠습니다. 언약의 완성이신 예수를 주로 믿는 여러분도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퇴보하여 불신적인 삶을 추구하다가 망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바울은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16:22)라고 했습니다. 지옥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를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이 주를 사랑하지 않아 망한다고 해도 주님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망하고 없어져도 주님의 교회는 영원히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나라는 이미 왔고 또 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영광스럽게 하지 않으면 주님은 돌들을 세워서라도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버려지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새로이 세워지는 가운데서 이어져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고인 물이 아니며 신앙 역시 고인 물이 아닙니다. 돌고 도는 것이 교회요 신앙입니다. 여러분이 믿는 자일진대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주님이 주신 안식을 지키고 보존하는 자가 되십시오. 결코 세상 것에 빠져서 이것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도 믿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도 은혜로 되는 일이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 안에서 주신 안식을 지키도록 하십시오. 믿는 자에게는 되게 되어 있는 일입니다.
신명기에서 모세도 32,33장에 걸쳐서 길게 설교했습니다. 창세기 끝에는 야곱이 그렇게 했습니다. 모세와 야곱의 설교 속에는 그들의 생애 동안에 겪었던 사건들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겪었던 사건들은 껍데기와 같습니다. 그 사건들을 껍데기로 삼아서 그 안에 그들이 깨달았던 계시를 담았던 것입니다. 그 속에는 이스라엘의 미래가 담겨 있습니다. 이들은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실 미래를 내다보면서 설교로서 예언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설교 속에는 이스라엘의 실패와 그로 인한 멸망과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회복과 그 회복의 절정을 이루는 왕의 도래를 설교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시의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의 새로운 나라 이스라엘을 바라보고 그것에 소망을 두도록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설교 속에는 특별한 미래를 바라보도록 하는 면이 대단히 강합니다(창49:10, 24; 신32:43, 33:26-29). 이런 의미에서 야곱과 모세는 역시 미래를 바라보는 선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이들과는 좀 다릅니다. 여호수아의 설교는 이미 주어진 것을 지키고 보존하는 것에 초점이 모아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는 야곱과 모세가 내다보았던 약속의 성취를 이미 누리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즉 모세가 그렇게도 들어가고 싶어하던 가나안에서 수십년을 살아왔었고 야곱과 아브라함 같은 조상들이 약속으로만 받았던 땅에서 이미 수십년을 살아온 입장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호수아에게도 아직 미래가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상태를 잘 보존하는 것이 미래에 이르는 길이며 또 미래를 바라보는 태도이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현재의 상태가 가진 계시적인 의미를 잘 지키도록 강조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자기가 계시를 받은 자가 아니라 야곱과 모세가 받은 계시를 누리는 자입니다. 여호수아는 그 계시대로 실현된 현실을 누리는 자이기 때문에 그 현실을 보존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야곱과 모세와는 달리 독립된 선지자라고 하기가 어렵습니다. 여호수아는 선조들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을 누리고 보존하는 입장에 있다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을 말해 주는 것이 바로 1절에 나오는 '안식'이라는 단어입니다. 안식이라는 말은 '쉰다, 정착한다'는 말인데 여호수아가 이 말을 할 때는 이미 사방의 대적이 멸망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식을 누린지 20여년이 지난 후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이미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했던 것이 실제적으로 실현이 되어져서 그들이 누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 40년을 방황했고 또 7년의 전쟁을 겪었으며 그런 후에 20여년이 지났으니 하나님의 궤도 실로 성소에(수18:1) 있는 상황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궤가 여행이 끝이 난 것과 같은 생각을 가지게 해 주는 상황입니다. 그들은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이 안식 상태가 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안식 상태를 누리는 데는 먼저 그들이 경험했던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르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3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자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가나안 민족들을 싸워서 쳐부순 분입니다. 이것은 싸움쟁이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절에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의 마음과 뜻에 아는 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한 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소원을 이루는 분이 아니라 자기의 약속을 이루는 여호와이십니다. 여호수아가 평생 하나님이 일하신 것을 보고 결론짓고 있는 것이 바로 이점입니다. 이점이 바로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다른 점입니다. 인간은 인간의 소원을 이루는 신을 생각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의 소원을 이루는 신이 아닙니다. 여호와는 자신의 뜻만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는 인간은 하나님이 내 뜻을 이루어 주지 않은 분이라면 내 뜻은 내가 이루리라고 하면서 자기의 뜻을 이루려고 고집합니다. 이것은 불신앙입니다. 그러나 생명은 인간의 뜻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기 때문에 미래 또한 확실합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아직 정복하지 못하고 남아 있는 땅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정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약속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복하지 못한 것이 있다고 염려할 필요도 없고 안된다고 염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10절에는 "너희 중 한 사람이 천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것이 무엇입니까 6절 이하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일은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요즈음 말로서 여호와를 믿는 것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가라고 한다면 그것도 성경에 맞지 않는 말씀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안 자가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일진대 이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신앙이 불가능하다는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역사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부정하는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은 이 말을 자기의 말씀으로 받아서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여호와를 사랑하는 길을 6절에는 율법을 가지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이란 여호와가 어떤 분인가를 말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율법을 지켜 행한다는 것은 여호와를 사랑하고 믿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8절에는 여호와를 친근히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로 말하자면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것이 율법을 행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예수 믿는 것 즉 사랑하는 것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예수 사랑하는 것은 완성된 율법을 행하는 것이 됩니다. 결코 예수 사랑이 율법의 정신과 배치되게 가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약에서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주의 할 것이 있습니다. 타락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7절에는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나라들 중에 가지 말라 그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그것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에게 절하지 말라"고 합니다. 남아 있는 이 나라들 중에 가지 말라는 것은 12절에 나와있는 대로 남아 있는 이교도들과 친근히 하고 왕래하며 더불어 혼인을 맺기까지 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들의 우상적인 삶의 정신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니 그 신들의 이름을 부르게 되며, 또 그것을 가리켜 맹세하게 되는 것입니다. 맹세한다는 것은 우상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처럼 믿고 그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사이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점장이를 찾아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가지 말라고 해도 가지 않을 수 없어서 다닌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점을 치는 귀신은 그를 지배하는 자가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한 마디로 불신앙에 빠진 것을 뜻합니다. 이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고통과 멸망입니다.
13절부터 끝까지 타락할 때에 있을 이스라엘의 고통과 멸망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수아가 말하고 있는 신앙과 불신앙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무엇이 신앙이고 무엇이 불신앙입니까 여호수아는 신앙을 머리로서 말하지 않습니다. 이론적이고 논리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는 신앙과 불신앙을 아주 실천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율법을 따라 살면 신앙이고 우상을 따라 가면 불신앙이라고 합니다.
6절과 7절이 아주 대조적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살면 신앙이고 우상을 따라 살면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가 누가 우상을 따라 살겠느냐고 반문하겠지만 명목상의 신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려고 하고 예수를 따라 살려고 하는 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상적인 삶을 추구하는 자라면 그는 불신자입니다. 명목상 신자인데 실제 삶으로는 불신자가 되어 불신적인 삶을 추구하는 자일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을 실천적인 면에서 불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타락이란 자기의 지식으로 막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으로는 듣고 알고 있다고 해도 자신이 불신적인 삶을 사랑하고 그것을 좋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놓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불신적인 삶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을 12절에는 '퇴보하여'라고 했습니다. 어쨌던 이러한 퇴보는 순간적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욕심을 따라 유혹에 끌려 이리저리 치우치는 중에서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삶에 집착하고 추구하게 됩니다.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친근히 한다'는 말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관계를 맺고 빠져 나올 수 없는 상황에 빠집니다. 이렇게 되어 불신앙적으로 살게 되고 실천적인 불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멸망입니다. 여호수아는 이런 것을 경고하고 신앙 안에 있도록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권면은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고 했고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고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엡5:1-3)고 했습니다. 이런 식의 가르침들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왜 이런 식의 권면들이 필요합니까 믿음이 있으면 이러한 권면들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는 자면 이런 것을 자기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하고 불신적인 생활을 계속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도 여러분에게 권면하겠습니다. 언약의 완성이신 예수를 주로 믿는 여러분도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퇴보하여 불신적인 삶을 추구하다가 망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바울은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16:22)라고 했습니다. 지옥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를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이 주를 사랑하지 않아 망한다고 해도 주님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망하고 없어져도 주님의 교회는 영원히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나라는 이미 왔고 또 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영광스럽게 하지 않으면 주님은 돌들을 세워서라도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버려지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새로이 세워지는 가운데서 이어져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고인 물이 아니며 신앙 역시 고인 물이 아닙니다. 돌고 도는 것이 교회요 신앙입니다. 여러분이 믿는 자일진대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주님이 주신 안식을 지키고 보존하는 자가 되십시오. 결코 세상 것에 빠져서 이것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도 믿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도 은혜로 되는 일이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 안에서 주신 안식을 지키도록 하십시오. 믿는 자에게는 되게 되어 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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