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과 제자 (눅6:12-19)
본문
저희 교회에는 이제 오늘 제자 훈련반 개강을 합니다. 예수님 처럼 12제자입니다. 훈련 수칙을 보시면 알겠지만 아주 강도가 높 습니다. 그러나 무슨 성경 공부니, 무슨 훈련이니 하는 과정 자 체가 모든 걸 보장해 주는 걸 의미 하지는 않습니다. 예수의 인 격과 삶을 모방하고, 우리의 전 삶을 바쳐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는 제자는 한 순간의 성경공부 프로그램이나 장치로 달성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전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지요. 이런 제자의 삶은 한 평생 동안 말씀을 향한 몸부림과 투쟁의 산 물이요, 주님을 향함 초점, 중심, 질서 잡기의 결과물일 것입니다. 그러나 동기와 과정이 중요한 만큼 이제 제자 훈련반을 개강 하려고 합니다. 물론 시간 차이는 있지만 모두 제자 훈련을 거쳐 군중에서 제자로 태어 나시기 바랍니다. 제자라는 말이 성경에서는 무엇입니까 희랍어로는 '마테테스'입니다. '만타노'(배우다)에서 유래했으니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이 강합니다. 라틴어로는 '디스키풀루스'라 합니다. '가까운 등가물(等價物)'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가치가 같다는 뜻입니다. 똑 같은 값어치의 물건이라는 뜻입니다. 말하 자면, 제자는 예수와 같은 값어치를 지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의 인격과 같은 가치가 있어야 하고, 그의 삶과 같은 값어치를 가져야 합니다. 똑 같지는 않다 하더라도 유사 값어치는 지녀야 되지요. 그래서 제자는 예수의 삶과 인격을 닮는 자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핵심제자 열둘, 그밖의 제자무리, 예수께 나아온 군중 이 세 종류입니다.
'저희와 함께'(17절)-12제자를 말합니다. 핵심제자들입니다. 기도하고 선택한 무리들이지요.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 니'(13절)'제자의 허다한 무리'(17절)-12제자를 제외한 예수님 의 여러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어떤 성경에는 70인 제자를 선발 해 전도 파송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70인이 될 수도 있고 그 이 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12제자 이외에도 예수님의 제자는 많았 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많은 백성, 온 무리가'(19절)-이 사람들은 군중입니다. 오클로 스라 번역하는 이 말은 군중이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민중이라 번역하기도 합니다. 자, 이제 이 종류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한 번 보십시다. 군중들 먼저 군중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만질려는 무리입니다.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19절) 예수를 따르려는 무리라기 보다 예수를 만지려는 무리들입니다. 예수의 옷 자락이라도 만져 서 능력을 받아 병 고침을 얻으려는 한 가지 열망만 있는 사람들 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한가지 열망이라도 간직하고 예수께 나아 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대의 수 많은 사람, 수많은 병자가 있 었지만 예수께 나아온 자는 아주 적은 소수에 불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 가지입니다. 비뚤어진 동기, 한 가지 열망 만을 안고 온 다 하더라도 예수 께 나아온 무리가 되는 것은 중 요한 일입니다. 그런 까닭에 먼저 무리가 되는 것, 가치있는 일 입니다. 무리가 되어야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제자들도 무리 중에서 선택했습니다. 열 두제자는 수 많은 방계 제자들 중에서 선택했습니다. 열두 제자는 금방 탄생한 것이 아니지요. 무리로 예수를 수 없이 따라 다닌 가운데 제자로 선택함을 받았고, 제자 로 예수와 함께 많은 훈련의 시간을 보낸 끝에 열 두 핵심 제자 로 선택 받은 것입니다. 열 두제자로 확정 되기 전에 베드로도, 안드레도, 야고보도, 요한도, 세리 마태도 예수의 부르심을 받았 습니다. 그리고도 많은 기적과 가르침이 있었지요. 시간도 많이 지났습니다. 그 후에 12제자 확정 사건이 오늘 누가복음 6장에서 비로소 나오는 겁니다. 이 오클로스라고 하는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에 대한 연구가 예로 부터 많았습니다. 예수께 몰려든 군중들이 어떨 때는 수만명이나 되었습니다. "그 동안에 무리 수 만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라고 누가 기자는 보도하고 있습니다.(눅12:1) 이 수만 명의 군중들은 예수의 기적을 보러 모였습니다. 군중은 예수의 기적의 혜택을 받으려고 모였습니다.
요한복음 6장 26절에 보니 까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까지 혹독한 말씀을 하십니다. 오 병이어의 사건 바로 다음에 한 이야기입니다. 또 군중들은 예수 의 가르침을 들을려고 모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단지 예수의 가르침을 듣는 것 뿐만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데 까 지 나아갔습니다. 또 이 군중들은 숱한 요구를 가지고 모여 들었습니다. 병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고쳐 주신 병 중에는 열 세가지 이상이 나 되는 병의 종류가 성경에 등장합니다. 고치신 병자의 수는 헤 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예수께 온 병자들은 좀 나은 편에 속 합니다. 절박한 것이나까요. 그 밖에는 온갖 시시콜콜한 문제를 다 가지고 왔습니다. 어떨 때는 선생님, 내 형에게 아버지가 남 긴 유산을 나와 잘 나누도록 잘 말씀해 달라는 부탁 까지 할 정 도였으니까요.(눅12:13) 마치 우리가 예수를 처음 믿을 때 처럼 말이지요. 예수를 처음 믿을 때는 요구만 살아 있습니다. 요구가 아예 없는 것이 제자라는 말이 아닙니다. 제자인 베드로에게는 요구가 없어도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단지 요구만 살아 있 었을 뿐입니다. 또 군중들은 예수를 열광적으로 따르기도 했지만 이들은 돌변해 서 예수를 십자가 형에 처하라고 외치기도 했습니다. 군중들은 예수에게 몰려 오기는 했지만, 예수와 함께 동거하지는 않았습니다. 또 이들 군중은 예수의 가르침을 들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걸 종종 한탄했습니다.(마 13:10)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로 가르치신 다음에 '귀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 항상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저희 교회 주보에 설교문을 실어 가끔 신앙을 가지지 못한 분들에게 보냅니다만 잘 깨 닫지 못해요. 무슨 말인지를 모르는 겁니다. 언어가 다르고 사상의 체계가 달라요. 그래서 저희들은 절절히 은혜를 받는 데, 멀뚱멀뚱 합니다. 예수는 군중들에게 수 없이 많은 가르침을 베풀기는 했지만 그 들을 파송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권능을 주어서 마 을로 파송을 했습니다. 세부지침 까지 주었지요. 군중들은 예수의 가르침의 수혜자이긴 하지만 자신의 인생이 송 두리 채 변화지는 않았습니다. 가르침을 경청하긴 했지만 인생을 걸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의 생애를 걸었습니다. 자신의 전 삶을 바쳐서 예수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건 예수의 죽 음 후의 제자들의 삶이 증명합니다.
제가 로마인 이야기를 이번 구정에 5권 까지 읽었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한니발과 카이사르인데, 이들의 군대는 위대한 지도자와 병사가 한 몸이 되었다는 겁니다. 상황이 아주 불리해 죽을 위기 에 처해 있어도 몸을 던져 상황을 타개해 냅니다. 카이사르의 백 인 대장들은총사령관을 위해 최후의 순간에 목숨을 기꺼이 던집니다. 총사령관과 병사는 한 몸 한 운명체로 연결이 되있었습니다. 서로에게 헌신하는 관계입니다. 헌신하지 않는 병사는 전투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알렉산 더와 한니발, 카이사르 모두는 어떨 때 열배의 전력에 맞서 싸워 이기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적은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헌신되지 못한 두려움에 떨거나 목숨을 아까워하는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 었습니다. 헌신 없는 병사는 아무리 많아도 전력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 가지로, 헌신되지 않은 군중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한치도 전진 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군중은 헌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자는 헌신된 자를 말합니다. 예수를 따라 다닌 군중이 많을 때는 수만명을 넘을 때도 있었지만 이들은 예수께 헌신하지 도 인생을 걸지도 않는 단순한 청중일 뿐입었습니다. 자 이제 하나님 앞에서 자문해 보십시다. 그대는 청중입니까, 제자입니까 청중에 머물러 있기를 원합니까, 제자이기를 원합니 까 제자들/ 그런 까닭에 제자는 예수께 헌신된 자입니다. 마더 테레사에게 한 형제가 찾아왔습니다. '수녀님, 제 소명은 나환자들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일에 제 모든 삶과 제 모든 것을 바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더랍니다. 물론 이 형제는 진심으로 나환자를 사랑하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테레사는 이 형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님, 당신은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소명은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 분이 스스로 당신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일은 오직 하나님 께 대한 당신의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 드리는 수단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무슨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중요한 것은 당신은 하나님의 소유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께서는 이일을 수행하는 수단을 단지 당신에게 제공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헌신은 나의 전 삶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걸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무슨 일에 대한 헌신이 아닙니다. 인격과 삶을 바쳐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제자의 요건입니다. 그러나 한 번 보세요. 제자들의 헌신이든, 결단이든 그들의 초기 삶을 보면 엉터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인내와 헌신에 오히려 고개가 숙여 집니다. 제자들의 헌신이 100% 순도를 가지고 있었나요 완전무결한 것 인가요 제자들은 헌신하고 나서 한 번도 실패한적이 없나요 제자들은 헌신을 철회하거나 회피한 적이 없나요 대답은 전부 "노"입니다. 과정을 보면, 진행의 속도를 보면, 정도의 순수성으 로 보면 전부 낙제점입니다. 실천의 강도로 보면, 일관성으로 보 면 전부 실망할 수준입니다. 그러나 이런 실망스러운 제자들도, 그들의 전 생애를 통털어 놓 고 보면 최후의 순간 까지 잘 달려간 완벽한 헌신의 사람들이었 습니다.
12제자들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요한 만이 유일하게 순 교하지 않은 제자라고 까지 전해집니다. 유세비어스 교회사에 따르면 열 두 제자의 순교일지는 다음과 같 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 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힘 당했습니다. 안드레는 헬라에 가서 전도하다가 아가야 성에서 X 형 십자가에 줄로 매달려 죽임 당했습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 서 헤롯에게 칼로 목베여 죽임 당했습니다. 빌립은 소아시아 부 르기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기둥에 매달려 죽임 당했습니다. 바돌 로매는 알메니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꺼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 임을 당했습니다. 도마는 인도에 가서 전도하다가 창에 맞아 죽 었습니다. 마태는 이디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목베임 당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곱은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뜨려 죽임당했 습니다. 젤롯이라고 하는 시몬은 애굽에 가서 전도하고 유대국에 돌아와서 전도하다가 활에 맞아 죽었습니다. 야곱의 동생 유다는 파사에 가서 전도하다가 활에 맞아 죽었습니다. 맛디아는 가롯 유다 대신 선거된 제자로서 이디오피아에 가서 전 도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땅 끝 까지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이름으 로 세례를 주고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했습니다. 예수 의 명령을 종국에는 완벽하게 실천을 했습니다. 성질이 급해 '보아너게-우뢰의 아들'이라 불리던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인격과 체질도 완전히 변하게 되엇습니다. 인격에 까지 예수와 닮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계하고 조심한 일은 제자로 선택을 당했어도, 예수를 떠난 제자나 예수를 배반한 제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자 선택이 모든 걸 보장해 주지는 않는 것이지요. 어떤 헌신자들은 제자의 길이 험난하고 어려운 길이라는 것을 알고는 예수 따르는 걸 포기했습니다. "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 한대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 냐 .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 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 려느냐 '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 (요 6:60-66)
왜냐하면 이들은 정치적인 메시야 왕국에만 관심이 있었던 거지 요. 예수를 거룩한 자로 믿고 그를 영접하고 그의 살과 피를 먹 고 마시며 그가 전파한 영생에 들어 가라는 요구를 부담스러운 것으로 생각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영생에 관한 말씀이 도무지 납득되지도 않았고, 입맛에 맞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예수를 떠 났던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적어도 이 때는 베드로 의 자세가 정확했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리이까" 떠난 제자와 남은 제자는 이렇게 해서 갈라졌습니다. 가룟유다를 한 번 보세요. 예수를 진정으로 믿지 못한 결과, 그 에게 예수는 랍비였을 뿐입니다. (마26:25). 가룟 유다에게 예수가 주님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의심 많은 도마에게도 결국 예수님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군중에게 예수님은 단지 랍비일 뿐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나의 주인, 나의 하나님입니다. 떠난 제자들이나 배반한 제자 유다를 보면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떠난 제자나 배반한 제자는 모두 군중은 아니지만 사실 군중 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정확하게 고백하지도 않고, 정확한 헌신 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들은 사실 군중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프릿츠 리데나워가 쓴 "종교인이냐 그리스도인이냐"의 논점 처 럼 종교인이 너무 많아요. 군중이 너무 많습니다. 전투는 하겠지 만 루비콘 강은 건너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참고는 하겠지만 깊 이 발을 들여 놓을 생각은 없습니다. 사실 예수의 말씀이 참고서 나 교과서(택스트)이냐는, 삶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올해 촛점, 중심, 질서를 자꾸 강조 합니다만, 말씀 원 칙이 단지 참고서 역할만 해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교과서가 되야 합니다. 말씀이 철칙이 되고 행동 준거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가치 판단의 근거요, 삶의 핵심이어야 합니다. 올해는 우리 모두 참고서가 교과서로 바꿔지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세계를 변화 시킨 것은 예수를 따르던 일만명의 무리가 아니였습니다. 단지 12명의 헌신된 제자였습니다. 이 12명이 세상을 변화 시킨 것이지요. 물론 자신의 변화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자신 이 말씀 앞에 철저히 헌신된 혁명의 사람이라야 사회혁명도 시킬 수 있습니다. "오라 우리가 세상을 변화 시키자!" 저희 교회는 작지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군중이 아니라 예수께 깊게 헌 신된 제자가 모두 되시기 바랍니다. 100% 제자인 교회가 되십시다. 올해 일년 동안의 제자 훈련을 합니다. 12명, 모두 헌신된 그리스도의 제자로 태어 나시기를 바랍니다.
핵심제자 열둘, 그밖의 제자무리, 예수께 나아온 군중 이 세 종류입니다.
'저희와 함께'(17절)-12제자를 말합니다. 핵심제자들입니다. 기도하고 선택한 무리들이지요.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 니'(13절)'제자의 허다한 무리'(17절)-12제자를 제외한 예수님 의 여러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어떤 성경에는 70인 제자를 선발 해 전도 파송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70인이 될 수도 있고 그 이 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12제자 이외에도 예수님의 제자는 많았 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많은 백성, 온 무리가'(19절)-이 사람들은 군중입니다. 오클로 스라 번역하는 이 말은 군중이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민중이라 번역하기도 합니다. 자, 이제 이 종류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한 번 보십시다. 군중들 먼저 군중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만질려는 무리입니다.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19절) 예수를 따르려는 무리라기 보다 예수를 만지려는 무리들입니다. 예수의 옷 자락이라도 만져 서 능력을 받아 병 고침을 얻으려는 한 가지 열망만 있는 사람들 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한가지 열망이라도 간직하고 예수께 나아 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대의 수 많은 사람, 수많은 병자가 있 었지만 예수께 나아온 자는 아주 적은 소수에 불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 가지입니다. 비뚤어진 동기, 한 가지 열망 만을 안고 온 다 하더라도 예수 께 나아온 무리가 되는 것은 중 요한 일입니다. 그런 까닭에 먼저 무리가 되는 것, 가치있는 일 입니다. 무리가 되어야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제자들도 무리 중에서 선택했습니다. 열 두제자는 수 많은 방계 제자들 중에서 선택했습니다. 열두 제자는 금방 탄생한 것이 아니지요. 무리로 예수를 수 없이 따라 다닌 가운데 제자로 선택함을 받았고, 제자 로 예수와 함께 많은 훈련의 시간을 보낸 끝에 열 두 핵심 제자 로 선택 받은 것입니다. 열 두제자로 확정 되기 전에 베드로도, 안드레도, 야고보도, 요한도, 세리 마태도 예수의 부르심을 받았 습니다. 그리고도 많은 기적과 가르침이 있었지요. 시간도 많이 지났습니다. 그 후에 12제자 확정 사건이 오늘 누가복음 6장에서 비로소 나오는 겁니다. 이 오클로스라고 하는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에 대한 연구가 예로 부터 많았습니다. 예수께 몰려든 군중들이 어떨 때는 수만명이나 되었습니다. "그 동안에 무리 수 만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라고 누가 기자는 보도하고 있습니다.(눅12:1) 이 수만 명의 군중들은 예수의 기적을 보러 모였습니다. 군중은 예수의 기적의 혜택을 받으려고 모였습니다.
요한복음 6장 26절에 보니 까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까지 혹독한 말씀을 하십니다. 오 병이어의 사건 바로 다음에 한 이야기입니다. 또 군중들은 예수 의 가르침을 들을려고 모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단지 예수의 가르침을 듣는 것 뿐만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데 까 지 나아갔습니다. 또 이 군중들은 숱한 요구를 가지고 모여 들었습니다. 병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고쳐 주신 병 중에는 열 세가지 이상이 나 되는 병의 종류가 성경에 등장합니다. 고치신 병자의 수는 헤 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예수께 온 병자들은 좀 나은 편에 속 합니다. 절박한 것이나까요. 그 밖에는 온갖 시시콜콜한 문제를 다 가지고 왔습니다. 어떨 때는 선생님, 내 형에게 아버지가 남 긴 유산을 나와 잘 나누도록 잘 말씀해 달라는 부탁 까지 할 정 도였으니까요.(눅12:13) 마치 우리가 예수를 처음 믿을 때 처럼 말이지요. 예수를 처음 믿을 때는 요구만 살아 있습니다. 요구가 아예 없는 것이 제자라는 말이 아닙니다. 제자인 베드로에게는 요구가 없어도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단지 요구만 살아 있 었을 뿐입니다. 또 군중들은 예수를 열광적으로 따르기도 했지만 이들은 돌변해 서 예수를 십자가 형에 처하라고 외치기도 했습니다. 군중들은 예수에게 몰려 오기는 했지만, 예수와 함께 동거하지는 않았습니다. 또 이들 군중은 예수의 가르침을 들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걸 종종 한탄했습니다.(마 13:10)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로 가르치신 다음에 '귀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 항상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저희 교회 주보에 설교문을 실어 가끔 신앙을 가지지 못한 분들에게 보냅니다만 잘 깨 닫지 못해요. 무슨 말인지를 모르는 겁니다. 언어가 다르고 사상의 체계가 달라요. 그래서 저희들은 절절히 은혜를 받는 데, 멀뚱멀뚱 합니다. 예수는 군중들에게 수 없이 많은 가르침을 베풀기는 했지만 그 들을 파송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권능을 주어서 마 을로 파송을 했습니다. 세부지침 까지 주었지요. 군중들은 예수의 가르침의 수혜자이긴 하지만 자신의 인생이 송 두리 채 변화지는 않았습니다. 가르침을 경청하긴 했지만 인생을 걸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의 생애를 걸었습니다. 자신의 전 삶을 바쳐서 예수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건 예수의 죽 음 후의 제자들의 삶이 증명합니다.
제가 로마인 이야기를 이번 구정에 5권 까지 읽었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한니발과 카이사르인데, 이들의 군대는 위대한 지도자와 병사가 한 몸이 되었다는 겁니다. 상황이 아주 불리해 죽을 위기 에 처해 있어도 몸을 던져 상황을 타개해 냅니다. 카이사르의 백 인 대장들은총사령관을 위해 최후의 순간에 목숨을 기꺼이 던집니다. 총사령관과 병사는 한 몸 한 운명체로 연결이 되있었습니다. 서로에게 헌신하는 관계입니다. 헌신하지 않는 병사는 전투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알렉산 더와 한니발, 카이사르 모두는 어떨 때 열배의 전력에 맞서 싸워 이기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적은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헌신되지 못한 두려움에 떨거나 목숨을 아까워하는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 었습니다. 헌신 없는 병사는 아무리 많아도 전력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 가지로, 헌신되지 않은 군중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한치도 전진 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군중은 헌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자는 헌신된 자를 말합니다. 예수를 따라 다닌 군중이 많을 때는 수만명을 넘을 때도 있었지만 이들은 예수께 헌신하지 도 인생을 걸지도 않는 단순한 청중일 뿐입었습니다. 자 이제 하나님 앞에서 자문해 보십시다. 그대는 청중입니까, 제자입니까 청중에 머물러 있기를 원합니까, 제자이기를 원합니 까 제자들/ 그런 까닭에 제자는 예수께 헌신된 자입니다. 마더 테레사에게 한 형제가 찾아왔습니다. '수녀님, 제 소명은 나환자들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일에 제 모든 삶과 제 모든 것을 바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더랍니다. 물론 이 형제는 진심으로 나환자를 사랑하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테레사는 이 형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님, 당신은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소명은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 분이 스스로 당신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일은 오직 하나님 께 대한 당신의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 드리는 수단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무슨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중요한 것은 당신은 하나님의 소유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께서는 이일을 수행하는 수단을 단지 당신에게 제공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헌신은 나의 전 삶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걸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무슨 일에 대한 헌신이 아닙니다. 인격과 삶을 바쳐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제자의 요건입니다. 그러나 한 번 보세요. 제자들의 헌신이든, 결단이든 그들의 초기 삶을 보면 엉터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인내와 헌신에 오히려 고개가 숙여 집니다. 제자들의 헌신이 100% 순도를 가지고 있었나요 완전무결한 것 인가요 제자들은 헌신하고 나서 한 번도 실패한적이 없나요 제자들은 헌신을 철회하거나 회피한 적이 없나요 대답은 전부 "노"입니다. 과정을 보면, 진행의 속도를 보면, 정도의 순수성으 로 보면 전부 낙제점입니다. 실천의 강도로 보면, 일관성으로 보 면 전부 실망할 수준입니다. 그러나 이런 실망스러운 제자들도, 그들의 전 생애를 통털어 놓 고 보면 최후의 순간 까지 잘 달려간 완벽한 헌신의 사람들이었 습니다.
12제자들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요한 만이 유일하게 순 교하지 않은 제자라고 까지 전해집니다. 유세비어스 교회사에 따르면 열 두 제자의 순교일지는 다음과 같 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 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힘 당했습니다. 안드레는 헬라에 가서 전도하다가 아가야 성에서 X 형 십자가에 줄로 매달려 죽임 당했습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 서 헤롯에게 칼로 목베여 죽임 당했습니다. 빌립은 소아시아 부 르기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기둥에 매달려 죽임 당했습니다. 바돌 로매는 알메니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꺼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 임을 당했습니다. 도마는 인도에 가서 전도하다가 창에 맞아 죽 었습니다. 마태는 이디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목베임 당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곱은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뜨려 죽임당했 습니다. 젤롯이라고 하는 시몬은 애굽에 가서 전도하고 유대국에 돌아와서 전도하다가 활에 맞아 죽었습니다. 야곱의 동생 유다는 파사에 가서 전도하다가 활에 맞아 죽었습니다. 맛디아는 가롯 유다 대신 선거된 제자로서 이디오피아에 가서 전 도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땅 끝 까지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이름으 로 세례를 주고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했습니다. 예수 의 명령을 종국에는 완벽하게 실천을 했습니다. 성질이 급해 '보아너게-우뢰의 아들'이라 불리던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인격과 체질도 완전히 변하게 되엇습니다. 인격에 까지 예수와 닮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계하고 조심한 일은 제자로 선택을 당했어도, 예수를 떠난 제자나 예수를 배반한 제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자 선택이 모든 걸 보장해 주지는 않는 것이지요. 어떤 헌신자들은 제자의 길이 험난하고 어려운 길이라는 것을 알고는 예수 따르는 걸 포기했습니다. "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 한대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 냐 .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 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 려느냐 '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 (요 6:60-66)
왜냐하면 이들은 정치적인 메시야 왕국에만 관심이 있었던 거지 요. 예수를 거룩한 자로 믿고 그를 영접하고 그의 살과 피를 먹 고 마시며 그가 전파한 영생에 들어 가라는 요구를 부담스러운 것으로 생각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영생에 관한 말씀이 도무지 납득되지도 않았고, 입맛에 맞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예수를 떠 났던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적어도 이 때는 베드로 의 자세가 정확했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리이까" 떠난 제자와 남은 제자는 이렇게 해서 갈라졌습니다. 가룟유다를 한 번 보세요. 예수를 진정으로 믿지 못한 결과, 그 에게 예수는 랍비였을 뿐입니다. (마26:25). 가룟 유다에게 예수가 주님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의심 많은 도마에게도 결국 예수님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군중에게 예수님은 단지 랍비일 뿐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나의 주인, 나의 하나님입니다. 떠난 제자들이나 배반한 제자 유다를 보면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떠난 제자나 배반한 제자는 모두 군중은 아니지만 사실 군중 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정확하게 고백하지도 않고, 정확한 헌신 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들은 사실 군중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프릿츠 리데나워가 쓴 "종교인이냐 그리스도인이냐"의 논점 처 럼 종교인이 너무 많아요. 군중이 너무 많습니다. 전투는 하겠지 만 루비콘 강은 건너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참고는 하겠지만 깊 이 발을 들여 놓을 생각은 없습니다. 사실 예수의 말씀이 참고서 나 교과서(택스트)이냐는, 삶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올해 촛점, 중심, 질서를 자꾸 강조 합니다만, 말씀 원 칙이 단지 참고서 역할만 해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교과서가 되야 합니다. 말씀이 철칙이 되고 행동 준거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가치 판단의 근거요, 삶의 핵심이어야 합니다. 올해는 우리 모두 참고서가 교과서로 바꿔지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세계를 변화 시킨 것은 예수를 따르던 일만명의 무리가 아니였습니다. 단지 12명의 헌신된 제자였습니다. 이 12명이 세상을 변화 시킨 것이지요. 물론 자신의 변화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자신 이 말씀 앞에 철저히 헌신된 혁명의 사람이라야 사회혁명도 시킬 수 있습니다. "오라 우리가 세상을 변화 시키자!" 저희 교회는 작지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군중이 아니라 예수께 깊게 헌 신된 제자가 모두 되시기 바랍니다. 100% 제자인 교회가 되십시다. 올해 일년 동안의 제자 훈련을 합니다. 12명, 모두 헌신된 그리스도의 제자로 태어 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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