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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의 죄 (시14:1-7)

본문

옥스포드와 켐브리지에서 가르친
C.S 루이스 교수가 한 번은 그의 비서를 데리고 학교 캠퍼스 근교의 무덤공원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비서가 갑자기
C.S 루이스 교수에게 한 무덤의 비문을 가리키면서 선생님, 이 비문을 보세요. 이 비문이 아주 흥미롭지 않습니까 봤더니 그 비문에 이렇게 씌여져 있었다고 합니다. 유언에 의하여 쓰여지다. 갈 곳을 모르는 무신론자가 여기에 누워있다. 이 비서가 말하기를 선생님 재미있지 않아요 이 때
C.S 루이스는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재미라니 이제 그는 갈 곳을 알지 않았겠나 그리고 너무 늦었지. 시편 14편 1절 말씀을 보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하나님이 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 소위 무신론자를 가리켜서 혹은 무신론을 가리켜서 어리석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어리석다라는 말은 희브리어의 본래 나발이라는 말입니다. 나팔이 아니라 나발입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에 보시면 나발이라는 사람이 나오지요 사무엘상 25장에 나옵니다. 그가 다윗을 만났어요. 그래서 다윗과 평화롭게 살자! 이런 제안을 했는데 이 나발이라는 부자였기 때문에 혹시 다윗과 함께 살면 자기 재산에 축이 나고 손해가 되지 않을까 하여 그것을 거절합니다. 그리고 다윗을 좀 악하게 대했습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서 그는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 아내 아비가일의 구명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비참하게 죽습니다. 성경은 이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상 25장 3절에 보시면 그에 대하여 그는 완악하고 악한 사람이었다. 이름처럼 악한 사람이었다. 나발이라는 말은 단순히 어리석다는 것뿐만 아니라 악하다는 뜻을 동시에 갖습니다. 무신론은 단순히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죄악입니다. 그래서 이 무신론자에 대해서 오늘 시편 14편 4절에 보시면 동시에 죄악을 행하는 자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도스토엡스키가 남긴 유명한 말 가운데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무슨 일이라도 할 수가 있다. 이것은 무서운 소리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무슨 일이라도 할 수가 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이라고 생각해요. 하나님이 없다. 이 말은 모든 질서,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선언인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신론은 어떠한 죄인가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무신론은 어떤 죄일까요
첫째로 그것은 양심을 거스리는 죄악입니다. 오늘 14편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은 없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 마음을 향해서 말해요. 하나님이 없다. 자기의 마음을 지금설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자기 마음을 설득해요 하나님이 없으면 없다고 믿고 그냥 살면 되지 자기 마음과 싸우고 있는 거예요, 지금 이 사람은. 어쩌면 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 신은 존재할지 몰라, 하나님은 계실지 몰라… 마음의 외침을 들으면서도 그는 그것을 누르고 싶어하는 고백일지도 모릅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한 기독교 심리학자는 무신론자에 관해서 정확히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무신론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 안에 각인된 하나님 의식과 더불어 그 의식을 지우기 위해서 일부러 싸우고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 의식이 있는데 그 의식을 없애 버리려고 싸우고 있는 사람이 사실은 무신론자이다. 니이체라는 유명한 철학자가 하나님은 죽었다,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말년에 미쳤어요. 그가 광기어린, 그 미침속에서 그가 휘갈려 쓴 그가 낙서장처럼 남겨진 메모지에는 이런 글이 남겨져 있습니다. 신이여, 당신은 살아있다. 나는 죽었다. 니이체 사실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신의식과 더불어 한 평생을 싸웠던 불행한 철학자라고 우리는 말할 수가 있습니다. 가끔 교회나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신앙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어서 자기 건물의 위에다 기독교적인 표어를 써 붙이기도 하고 또 교회당 위에다가 지나가는 사람들 보라고 우리가 복음적인 구호나 하나님의 말씀을 써 붙이지 않습니까 뭐, 경부고속도로 선상에도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이런 표시를 우리가 볼 수가 있지요. 한 무신론자가 이것을 흉내를 내서 자기 나름대로 무신론을 선전하기 위해서 자기 집 지붕 위에다가, 이것은 미국에서 일어난 일인데, 자기 집이 길 가에 있었기 때문에 길 가에 지나가는 사람 다 보라고 영어로 이렇게 써 붙여 놨다고 그래요. God is nowhere. 이 말은 신은 어디에고 없다, 하나님은 아무데도 없다. 크게 써 붙여 놨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씩 조금씩, 세월이 지나 가니까 끝의 자가, 페인트가 희미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희미해지기 시작했느냐 하면 h자 부터 here가 희미해 졌어요. 그러니까 그 앞에 있는 now하고 차별화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니까 뭐라고 썼는가 하면 God is now here. 신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여기에 있다. 이렇게 써 붙여 놨단 말이지요. 이 광경을 보면서 곁에 있는 크리스챤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그래요. 하나님은 정말 sense of humor 가 있는 그런 하나님이시다. 이 사람의 선언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있다. 제가 언젠가 그 얘기를 드렸습니다만 지금도 살아있는 사람인데 미국의 무신론자들의 협회의 회장을 지내는 매들린 오헤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미국에서, 공립학교에서 기도를 못하는 기도 금지 운동을 벌리는 사람인데 미국 중서부의 어떤 도시에서 그것을 재판에 걸었다가 이 사람이 이겼어요. 자기는 질 줄 알았는데 뜻밖에 승소를 했습니다. 그래서 공립학교에서 기도하지 말자, 이 사람이 승리를 해서 너무나 기뻐서 법정에서 갑자기 이 사람이 소리치기를 Oh, my God! 하고 소리쳤습니다. 이 무신론자가. 그래서 그것이 미국의 신문에 회자가 되었어요. 어떤 신문은 조크를 하기를 무신론자가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을 자기 마음속에서 지워버리려고 해도 지울 수 없는 어떤 신의식이 우리의 마음 밑바탕에 남아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0절에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우리 안에 하나님을 아는 증거들이 있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 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 졌도다 이 말씀이 계속되면서 로마서 2장에 가면 2장15절에 하나님 없이, 하나님 모르고 살아가는 이방인들에 대해서 이방인들은 양심이 하나님의 율법을 나타낸다. 이런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양심이 하나님의 율법을 나타낸다. 양심! 하지 말아야 돼, 이건 안 하지… 우리 마음속에 이런 양심이 하나님의 법이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주신 하나님의 법이다. 법은 법의 제정자없이는 주어질 수 없잖아요. 양심이 어디에서 나왔겠습니까 흥미로운 것은 양심이라는 단어가 희랍어에서 본래의 두 개의 단어의 결합입니다. 누구 누구와 더불어 안다. 영어에도 conscience라고 그러는데 con, 더불어 함께 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하나님과 더불어 안다. 하나님과 더불어 아는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라는 유명한 철학자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저 하늘에는 무수히 별들이 반짝이고 내 마음에는 양심의 도덕율이 빛나고 있다. 우리 안에서 소리치는 것이 있어요. 하나님의 음성이 계속 들려옵니다.
그런데 무신론은 뭡니까 무신론은 이런 양심의 증거를 거스리는 것이다. 따라서 무신론은 양심의 증거를 묵살하고 거슬리는 부자연스러운 죄악인 것입니다. 부자연스럽다. unnatural한 죄가 바로 무신론의 죄악인 것입니다. 무신론은 어떤 죄일까요
둘째로 무신론의 정체, 그것은 자기의 죄를 합리화시키는 죄인 것입니다. 다시 한번 1절을 읽겠습니다. 14장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3절도 보세요.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편 14편 3절의 말씀은 유명한 로마서 3장에서 또 인용되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다, 하나도 없다. 사람은 다 죄인이다. 자, 무신론 얘기를 하다가 왜 시편 기자가 이 얘기를 하고 있을까요 지금 시편 기자는 무신론자의 어리석음을 증거할 때 지적인 오류를 반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신론의 오류를 도덕적인 오류속에서 찾고 있습니다. 도덕적인 오류의 반증을 들고 있어요. 다시 말하면, 쉽게 말하면 이런 얘기입니다. 왜 무신론을 주장합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자기 마음속에 있는 죄악을 은폐하기 위해서다. 자기 마음속의 죄를 은폐하고 그 죄를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사람들은 무신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시편 기자의 말씀이에요. 무신론이라는 이 철학적 체계가 가진 가장 커다란 딜레마와 난점이 있다면 윤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도덕을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문제예요. 나름대로 무신론자들이 고민하면서 요즘 무신론자의 윤리 뭐이런 책들도 나왔더라구요.
그런데 읽어보면 아주 논리의 근거가 빈약합니다. 그것은 모래 위에 세운 누각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정했을 때 절대 가치를 부인하고, 그리고 절대자를 부인해 버렸을 때 남는 것은 상대화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계약밖에는 남지 않습니다. 윤리가 세워지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무신론이 포교되는 사회, 무신론이 지배하는 사회는 도덕이 말살되고 그리고 도덕적인 건강이 상실되는 사회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회의 아주 분명한 징후가운데 하나는 뭐냐하면 반드시 크리스챤들이 핍박받아요. 무신론자의 세계속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어려움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자, 본문의 4절을 읽겠습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무신론자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것이 거추장스럽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백성을 핍박할 수 밖에 없어요. 여러분, 철학자 니이체가 가장 영향을 끼친 정치가가 누군지 아십니까 히틀러예요. 히틀러는 바로 니이체에게서 철학적인 감동을 받고 그것을 실천에 옮긴 정치가입니다. 결과가 어때요 600만명의 유대인을 무참하게 학살했습니다. 유대인만 학살당한 것이 아니예요. 아주 소수의 히틀러 정권에 아부했던 기독교인들 빼 놓고는 수 많은 크리스챤들이 또한 히틀러의 지배아래서 죽어갔습니다. 그래서 예외없이 무신론이 성횡하는 곳에서 기독교의 가치가 저하되고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는 사례가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제가 미국에 살면서 보니까 낙태 운동, 낙태를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미국에서 아주 핫 이슈인데 무신론자들은 자연스럽게 낙태운동, 낙태지지 운동에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 생명 살상운동에 앞장을 서고 있는 것이예요. 그래서 무신론은 부자연스러운 죄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부도덕한 죄악인 것입니다. 무신론은 죄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무신론은 심판의 두려움에서 도피하는 죄악입니다. 무신론은 부도덕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무책임합니다. 우리가 창세기의 기사에 보면 성경에 자, 아담과 하와, 첫 사람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이 아담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자, 아담의 대답이 뭐예요 내가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두려움이 그가 숨게 된 동기라고 말합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현대 무신론의 원조 역할을 했던 철학자에 한 사람이 있고, 심리학자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철학자는 포이에르 바하라는 철학자고, 심리학자는 프로이드라는 유명한 심리학자가 현대 무신론의 원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같은 논고를 제시했습니다. 뭐냐하면 왜 종교가 생긴 줄 아느냐 사람들의 마음의 두려움 때문이다. 그 두려움에서 위로받고 싶어서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신을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고 사람이 신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에 근거에는 뭐냐하면 사람들의 wishful thinking, 원하는 생각, 아! 신이 있으면 좋겠다. 그래야 보호를 받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이 현대 수많은 지성인들을 매료시킨 무신론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된 것입니다. 소위 투사의 원리, projection의 원리에 있어서 신이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밑바탕의 동기에는 두려움이 있다. 이런 지적을 했어요.
그런데 저는 이러한 논고에 대한 정반대의 반증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자, 죄인들은 자연히 자기들이 범한 죄나 악 때문에 심판을 두려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죄인들에게 죄인들에게 제일 거추장스러운 것이 신이 있다는 것이 거추장스러운 거예요. 그래서 무신론자들도 똑 같이 신이 없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하는 것 아니에요 신 없으면 좋겠다! 저는 반대로 왜 무신론이 생긴 줄 아느냐 그것은 신이 없으면 좋겠다는 바램 때문에 무신론이 생긴거란 말이지요. 똑같은 두려움이에요. 그러나 무신론자들은 그 두려움이 자연의 두려움에 국한을 시킵니다. 사람들이 자연에 대한 공포, 두려움 이러한 것들 때문에 신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재미난 얘기가 있어요. 우리 갈릴리 바다를 여행하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에 풍랑이 일어나자 두려워합니다. 분명히 자연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요. 자, 예수님이, 배 안에 계시던 예수님이 나와서 풍랑아, 잠잠하라! 풍랑을 잠잠케 했을 때 제자들이 또 두려워합니다. 이번 두려움은 어떤 두려움일까요 단순히 자연에 대한 두려움, 환경에 대한 두려움 정도가 아니예요. 이 자연을 정복하신 한 분에 대한 두려움, 이건 신에 대한 두려움이예요. 이것은 가장 근원적인 경외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무신론자들은 결국 그 심판에 대한 두려움속에서 무신론이라는 이론을 만들어 그 이론의 체계속으로 도피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한 신학자는 무신론을 가리켜서 그것은 죄인들의 자기 방어술 혹은 죄인의 변장술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무책임한 것입니다. 자기 죄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 그는 무신론의 영역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 이런 얘기가 오늘 본문에도 나와요. 5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왜 두려워하느냐 성경은 더 근본적인 두려움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나님 계시니까 두려워하고 회개하면 되는데 두려워하고 두려움을 카바하고 합리화하기 위해서 무신론을 만들어 거기로 도피해 버리는 것이다, 이 말이지요.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아, 그것은 나하고는 상관없다. 나는 교회당 나오고, 나는 예수 믿고, 나는 하나님 믿으니까. 그러나 저는 정말 문제가 교회당 안에 있는 무신론자들이 문제라고 생각해요. 교회당 안에 있는 무신론자들. 적지 않게 있습니다. 무신론 가운데도 실천적 무신론이라는 것이 있어요. 실천적 무신론자는 하나님 소리도 잘 해요, 찬양도 부를 수 있습니다. 기도도 몇 마디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느냐 그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보니까, 가정 생활할 때 보니까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가정에서는 살아요. 교회당에서는 하나님 믿는 것 같은데 가정에 가보니까 하나님 없는 것처럼 남편 대하고, 아내 대하고, 자식 대하고… 또 직장생활 할 때, 중요한 결정할 때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결정하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업하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속이고… 이것이 실제적 무신론자예요. 실제로는 무신론자란 말이지요.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무신론자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무신론의 죄악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시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두려움을 이용할 수가 있지만 마귀도 두려움을 이용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마귀는 자꾸만 하나님을 두려워 할 존재로만 부각시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두려움의 존재만은 또 아닙니다. 마귀는 계속 두려움의 존재처럼 부각시켜서 그 앞에 가면 큰 일 날것처럼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피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앞에 돌아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자, 6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신다.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앞에 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뭐가 되신다고요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받아주신다. 이 말이에요. 옛날 이스라엘 땅, 팔레스타인 땅 안에는 소위 도피성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그 당시 사회에서 최고의 어떤 극형이 뭐냐하면 물론 사형인데 사형을 이 사회속에서, 어떤 법 제도안에서 집행하기 보다도 사형선고를 내고 사람을 바깥으로 보내버려요., 그런 제도가 있었어요. ,그러면 누구라도 이 사람을 죽일 수가 있어요. ,돌을 들어서 이 사람을 어디서든지 죽여도 상관이 없는 판결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자, 이것 큰 일이지요 어디 가서 내가 어떻게 맞아 죽을 지 몰라요. 그러나 이런 사람들에게 꼭 한 가지 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도피성으로 가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 당시에도 이런 사람들에게 살 길을 마련하기 위해서 도피성 제도를 준비했어요. 그래서 도피성을 노크하면 문이 열려요. 성주가 나와서 welcome! 이 사람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을 받아줍니다. 그를 용서합니다. 그를 먹입니다. 그에게 자유를 줍니다. 그 안에서, 성 안에서. 그리고 그 사람을 새롭게 만듭니다. 도피성 제도가 있었어요. 여러분! 지금도 도피성이 있다는 것을 아세요 우리의 범죄,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없는 우리의 상태에도 불구하고 그 곳으로 달려가기만 하면 거기에서 용서를 경험하고, 거기에서 내가 인생이 새로와질 수가 있는 나의 피난처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가 누구일까요 하나님이, 예수가 우리의 피난처인 줄 믿습니다. 예수안에 들어오면 거기에 자유가 있습니다. 거기에 용서가 있습니다. 거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뭐예요 도망가려면 무신론으로 도망가지 말고 어디로 도망가요 하나님께로 도망치시기 바랍니다. 제가 PC통신 유머란에 보니까 이런 유머가 올라와 있어요. 박찬호가 화가 나서 야구 게임하다가 미국 선수 하나 이단 옆차기로 차 버렸잖아요 그 친구 하고 화해하기 위해서 술을 한 잔 마셨답니다. 술을 한 잔 마시면서…
그런데 술 한 잔 마시니까 미국 선수가 맞은 것이 화가 나니까 야구 방망이를 들고 일어나서 박찬호를 두드리려는 순간 박찬호가 소리를 쳤답니다. 여러분, 그 미국 선수의 이름을 아세요 피하자예요. 피하자! 그러면서도망갔어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어요. 두 가지 도망가는 방법이 있어요. 죄를 범했을 때 사람들이 그 죄를 가지고 무신론이라는 이론속으로 도망가서 하나님은 없어 이러고 살아가는 방법이 있고, 그러나 죄를 범했을 때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도피성안에 들어와, 예수안에 들어와 용서를 체험하고 구원을 체험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디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거절할 때, 예수를 거절할 때, 구원을 거절할 때 이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법 제도가 판사님, 검사님 이런 분들이 판사, 검사 하시다가 그 다음에 옷을 벗으시면 변호사를 하시지요.
그런데 미국에 가 보니까 거꾸로예요. 반대예요. 변호사를 먼저해요. 변호사를 하다가 변호사를 잘 하면 그 다음에 판사가 됩니다. 저는 그게 더 좋은 것 같아요. 경험하고 그 다음에 제대로 판결할 수 있는 판사가 되요.
그런데 미국의 한 변호사님이 계셨어요. 젊은 변호사인데 아주 의협심이 강하고 특별히 미성년자들을 돕는 그런 변호사였습니다. 이 분이 무료 변론을 많이 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소위 미성년자로서 범죄한 젊은이들을 많이 도왔어요. 특별히 한 소년을 열심히 도왔습니다. 석방을 시켰습니다. 또 재범하고 또 들어왔어요. 또 무료 변론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타이르고 설득하고 올바로 살도록 도왔습니다. 나갔어요.
그런데 또 들어왔어요. 세 번씩이나 무료 변론을 통해서 그 젊은이를 잘 도왔습니다. 세월이 흘러 갑니다. 이 변호사가 판사가 되었습니다. 판사가 되어서 어느 날 보니까 그 젊은이, 자기가 도왔던 그 젊은이가 또 왔단 말이지요. 자, 자기를 도와준 변호사가 판사가 된 것을 보고 얼마나 반가왔을까요 이 사람이 이번에는 사람을 죽였어요. 그래서 사형에 합당한 죄목을 짊어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자기가 잘 아는 이 판사에게 호소를 합니다. 판사님, 한 번만 더 옛날처럼 저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이 때 판사가 뭐라고 그랬을까요 형제여, 젊은이, 내가 변호사였을 때 나는 당신을 돕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도왔습니다. 당신은 나의 충고를 거절했습니다. 또 범죄하고, 또 범죄했습니다. 오늘 나는 당신을 변호사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판사로서 나는 당신을 만나고 있습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공정한 판결뿐입니다. 당신은 사형이요!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님을 두 번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아세요 지금 예수님 앞에 오시면 예수님은 변호사로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우리를 변호해 주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시는 하나님… 그러나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면 어느 날 우리는 그 그리스도를 심판의 주님으로 만날 것입니다. 그 때에는 구원의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길이 열려 있습니다. 6절에 보시면 너희는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는도다… 지금은 구원의 시간입니다. 지금은 은혜의 때입니다. 지금은 구원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이 날 그 분앞에 나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삼고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을 거절하는 자에게는 그 어느 날 기회가 사라진 채 심판자로서의 그 분앞에 서야 할 날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요. 우리의 희망의 시간은 오직 지금 뿐입니다. 아직 문이 열려 있을 때 도피성안으로 뛰어 들어오십시오. 예수 안에 들어오십시요. 예수 안에서 당신은 새로와질 수 있을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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