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 밖에서 왜 울고 있느냐? (행10:34-43,고전15:19-26,요20:1-18)
본문
세상을 살다보면 억울하고 속상한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당하 다 보면,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어합니다. 털어놓을 상대가 없으면, 높은 산 에 올라가서 큰 소리로 한 번 외쳐야만 속이 시원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그런 면에서 참 좋습니다. 괴롭고 답답하거나 속상한 일이 있으면, 교회에 와서 냅다 소리치며 기도를 하면 되거던요. 들어주시는 분이 시덥잖은 우리 인간이 아니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니, 만약 우리의 호 소나 외침이 합당하다면, 그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외쳐 기도를 하게 되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게되는 것입니다. 억울한 사정을 큰소리로 외칠 수 있으니 답답한 마음을 풀어낼 수 있 어서 좋고, 또 합당한 기도라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실 것임으로, 억 움함을 풀 수 있어서 좋을 것입니다. 아뭏든, 억울하고 속상한 일이 있으면, 누군가에게 하소연도 하고 떠들어 대고 싶은 것이 우리네 보통 인간의 성정(性情)입니다. 그러나,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모욕을 당하고 수치를 겪으면서도, 아무 말이 없었던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ㄱ.으뜸가는 제자인 베드로에게 배반을 당했습니다. 이미 가룟 유다에게 배신당하여 팔리는 신세가 된 바 있습니다.
ㄴ.경비병으로부터 뺨을 얻어맞았습니다.(요18:22)
ㄷ.빌라도의 지시로, 웃옷을 벗기우고 채찍으로 등어리를 맞았습니다(요 19:1)
ㄹ.군인들이 가시나무로 만든 왕관을 씌우 고 왕이 입는 자색 용포를 입힌 다음 "유대인의 왕 만세!"하고 조롱하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릴 때에, 그 모든 것을 그대로 다 당해야만 했습니다. ㅁ.군인들은 또 예수의 겉옷과 속옷을 벗기어 나누어 가졌습니다(요 19:23-2
4). ㅂ.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다음, 두 다리를 꺾이우고, 옆구리에는 창으 로 찔리움을 당했습니다(요19:33-34) ㅅ.마태복음 27장 38-41절의 말씀을 보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예수께 욕을 퍼붓고 고개를 흔들었으며,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유대 지도자 들도 예수를 조롱하고 비웃었다고 했습니다. ㅇ.마가복음15장에서 살펴보면, 20절에 '실컷 희롱을 했다'는 말이 있고, 29절에는 "하하, 너는 성전을 헐고 사흘 안에 다시 짓는다더니, 십자가 에서 내려 와 네 목숨이나 건져 보아라" 하며 모욕하였다고 했습니다. ㅈ.심지어는 양편에 있던 두 강도까지 예수께 욕을 퍼부었다고 했습니다 (막15:32). ㅊ.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를 지키고 있던 보초병들이 예수의 눈을 가려놓 고 주먹으로 치면서 "예언자라 했으니 이번에는 누가 쳤는지 알아맞혀 보시지"하며 예수께 온갖 무례한 짓을 다 했다고 했습니다(눅22:63). 이 밖에도 예수님께서 모욕을 당하신 일은 얼마든지 더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애매한 죄명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도 억울하다는 말씀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철저하게 죽였습니다. 밟고 또 밟아 죽였습니다. 찌르고 또 찔러 죽였습니다. 욕하고 때리고 흉을 보며 저주했습니다. 사실 그들도 하나님을 알고 섬긴다는 사람들인데, 그처럼 무지막지하게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예수님의 육신만이 아니라, 인격과 자존심까지도 완전 히 죽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다싶이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말씀이 없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정말 억울하고 속상해서 미쳐 환장할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 은 소리 한 번 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릴 필요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얼마든지 천사 를 동원하여 적들을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니 말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일들은 우리 인간이 어느 경우든지 겪을 수 있는 상황 입니다.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께서 그런 모욕과 수치를 당하면서도 고스란히 당하시고 아무 말씀이 없으셨던 것은,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시고자 함이었던 것입니다. 아니,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이 가셔야 할 길이었고 또한 우리 인간 이 가야 할 길이었습니다. 죄없는 내가 아무 말없이 모든 모욕과 고통을 당했는데, 너희들은 무슨 말이 그렇게도 많으냐는 것이지요. 자기 챙피인 줄도 모르고 떠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고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 믿는다고 왜 억울한 일을 당하고만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욕을 얻어 먹으면서 왜 무엇 때문에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공의로우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엉뚱하고도 애매한 죄명으로 철저히 죽였지만, 하나님 은 예수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가 죄없음을 하나님께서 밝히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무덤 속에까지 끌어내렸으나, 하나님은 예수를 하늘로 끌어 올리셨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부활입니다. 우리도 물론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다만 예수님처럼 철저히 죽어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죽여도 그대로 당해야 합니다. 죽지 않으면 부 활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이 있은 다음에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죽지 않으려 하는 것을 보면, 부활을 확실히 믿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1.무덤 밖에서 울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 다음 날, 그러니까 예수님이 돌아가신지 사흘째 되는 날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묻히신 무덤에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 사실을 급히 베드와 요한에게 알렸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요한이 베드로보다 먼저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무덤 안에는 베드로가 먼저 들어갔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마리아의 말을 듣고서 긴가민가했습니다. 무덤 에 들어가 눈으로 보고서야 마리아의 말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누차 하신 말씀인데, 그리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이었건만,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기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20:9) 그들 은 그 때까지도 예수께서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아가 다시 무덤에 도착한 것은 두 제자보다 조금 늦게였습니다. 그리고 무덤밖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얼마간 울다가 몸을 굽혀 무덤 안을 들여다 보 았습니다. 그랬더니 무덤 안에 천사 두 명이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천 사들이 "왜 울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마리아는 "누가 우리 주님을 모셔 갔습니다. 어디로 모셔갔는지 모르겠습니다"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마리아는 등 뒤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뒤를 돌아다보면서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예수님을 누가 모셔갔는 지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 야!"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그제서야 예수님이신 것을 알고 "선생님!"하고 소리쳤습니다.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예수님을 만나뵌 일과 주님이 일러 주신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마리아의 말을 꿈같은 이야기로만 듣고 믿지 않았다고, 마가복음의 기자는 24장 11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현 실에 묶여있으며 또한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살기가 어렵 네 어쩌네 하면서도 ,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다시 말하면, 현실에서 벗어나 살기를 그렇게 원하면서도, 현실에서 벗어난 일들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오로지 이 세상만이 전부요, 이 세상을 떠나면 모든 게 끝장인 줄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현실의 모든 것들에 대한 미련도 대단합니다. 그것을 잃어 버리면 죽는 줄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보이는 물질이든지, 보이지 않는 자존심이나 명예, 또는 체면까지라도, 깎이거나 잃어버리면 큰일나는 줄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억울한 소리를 들어도 참지 못하고, 떠들고 욕하며 싸워대는 것입니다. 사실 자기 자신도 다른 사람을 어지간히 억울하게 하고 속상하게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건만, 자기만 억울하다고 소리쳐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요11: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 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요11:26)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 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하고 말입니다. 바울도 (행24:15)저도 하나님을 믿으며, 올바른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다 같이 부활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1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까닭에,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마음이 이 세상 현실에 너무 강하게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2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부활의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죽은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더 많이 가지려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며 더 명예롭게 되고자, 물고 뜯으며 싸우고 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일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를 얼마간 깨달으면서도,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것보다 훨씬 고상하고 귀하며 값진 것이 하늘 에 있다는 것을, 예수 믿는 사람들은 배워 알고 있으면서도 땅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예수쟁이 가운데 의외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부활한 예수, 곧 이 세상을 모든 것을 포기함으로써 하늘의 새 생 명을 얻으신 예수를 믿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3그 결과로 해서, 부활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삶은 이 세상 욕심을 버린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삶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 했습니다. 아담에서 비롯된 욕심을 버리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욕심을 버리지 못하면, 비록 예수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억울해 하며 속상해 하고, 또한 다투며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부활의 삶인 화해와 용서의 삶이란 가당치도 않은 일 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마리아가 무덤 밖에서 왜 울었을까요 그녀가 부활을 확실 히 믿었다면, 울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2.왜 울고 있느냐고 물으시고 있습니다. 왜 무엇이 속상해서, 무엇이 억울하고 원통해서, 아니면 무엇이 그토록 서운하고 서글퍼서 우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죽은 예수가 불쌍해서 우는가, 아니면 너 자신을 위해서 우는가 하고 묻습니다. 죽은 예수 때문이라면 울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그토록 못살게 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1예수님은 죽음이라고 하는 원수를 물리치셨습니다. 사람들이 어지간히도 애지중지하는 것, 예수님은 그것으로부터 자유한 자 였기에, 다시 말하면 죽음에 빠뜨리는 이 세상 것으로부터 해방된 분이었기 에, 예수님은 죽음과 아무 상관이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인간적인 욕망이 꿈틀대도록 충돌 질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셨습니다. 세상 사람 들에게는 아무 말씀이 없으신 예수님이셨지만, 하나님께는 다음과 같이 부르 짖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말입니다. 어쩌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으로서 자기 자신과의 마지막 싸움 이셨을 것입니다. 자기를 이기고자 하는 몸부림을 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으 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 말씀을 보면 죄가 있는 곳에는 죽음이 있게 마 련 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게 되면, 그 죄와 상관이 없게 되므로 죽음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입니다. 우리 인간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 속에 있는 죄를 향하여 사망이 화살을 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죄를 우리 예수님이 우리에게서 벗겨 주시게 되면, 죽음은 그 표적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과 관련이 있던 이 세상 욕심, 그 연결고리를 끊어버 린 우리는, 이제 죽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은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생명줄만이 우리를 붙들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성령님과 능력을 받아, 사방에 다니시면서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셨다 고, 고린도전서 15장 38 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귀신들린 자란, 물론 사람 구실을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 의미를 여 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으나, 오늘의 말씀에 있어서는 인간을 죽음의 골짜 기로 인도하는 여러 악한 세력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이 땅에 속한 것들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와 그의 부활을 확실히 믿어야, 이 귀신들을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믿고 그 모든 멸시와 모욕을 이 겨내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의지하고 모든 판단을 유보해야 합니다. 귀신의 속삭임이나 그 유혹을 물리치지 못해서, 괜스레 미 리 판단을 하고 사람을 정죄하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일이 아니라,
3.성경 말씀을 잘 깨닫고 예수의 부활을 확실히 믿음으로써, 사망이 쏘는 죄를 벗어버린 후 새 삶을 사는 것입니다. 새 삶이란, 예수께서 보여 주신 삶입니다. 지금까지 남을 원망하며 속상 해하고 억울해 하던 그런 생활을 그만두는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랬던 것처럼, 모든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고, 오히려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화해하고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늘 듣는 말씀이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화해와 용서의 삶이지만,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 문제를 올바로 해결해야만 합니다. 영원한 멸 망의 길로 가지 않고 영원히 참된 삶을 살려면, 이 과제를 바로 풀어야만 합니다. 남을 죽이고 내가 살려 한다면, 우선 나부터 죽어야 합니다. 살인 죄는 죽음을 면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긴다면, 그 러한 죄를 짓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그보다 급한 것이 남의 잘못이나 죄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내 잘못이요 내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염려는 없게 되었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여전 히 이 세상 욕심을 버리지 못하여 남을 정죄하는 죄를 짓게 되는 일입니다. 남을 정죄하게 되면, 예수님의 속죄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땅에서 풀어야 하늘에서도 푼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좀더 적극적으로 살 필요성이 있습니다. 남을 정죄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려면, 부활의 참 의미가 화해와 용서의 삶에 있음을 믿어 야 합니다. 단지 육신적으로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사는 것으로 끝난다면, 아 무 소용이 없습니다. 물론 육신적인 부활이 없이 용서와 화해의 삶을 산다는 것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바라는 바는, 억울하고 속상한 일이 없이 평안을 누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관건이 부활을 믿는데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 욕심 으로만 살게 되면, 억울하고 속상한 일이 떠날 날이 없을 것이며, 또한 그로 인하여 영원히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고 예수님이 사신대로만 살면, 속상한 일도 극복할 수 있고 억울한 일도 이겨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이웃과 화해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연히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어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ㄱ.으뜸가는 제자인 베드로에게 배반을 당했습니다. 이미 가룟 유다에게 배신당하여 팔리는 신세가 된 바 있습니다.
ㄴ.경비병으로부터 뺨을 얻어맞았습니다.(요18:22)
ㄷ.빌라도의 지시로, 웃옷을 벗기우고 채찍으로 등어리를 맞았습니다(요 19:1)
ㄹ.군인들이 가시나무로 만든 왕관을 씌우 고 왕이 입는 자색 용포를 입힌 다음 "유대인의 왕 만세!"하고 조롱하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릴 때에, 그 모든 것을 그대로 다 당해야만 했습니다. ㅁ.군인들은 또 예수의 겉옷과 속옷을 벗기어 나누어 가졌습니다(요 19:23-2
4). ㅂ.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다음, 두 다리를 꺾이우고, 옆구리에는 창으 로 찔리움을 당했습니다(요19:33-34) ㅅ.마태복음 27장 38-41절의 말씀을 보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예수께 욕을 퍼붓고 고개를 흔들었으며,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유대 지도자 들도 예수를 조롱하고 비웃었다고 했습니다. ㅇ.마가복음15장에서 살펴보면, 20절에 '실컷 희롱을 했다'는 말이 있고, 29절에는 "하하, 너는 성전을 헐고 사흘 안에 다시 짓는다더니, 십자가 에서 내려 와 네 목숨이나 건져 보아라" 하며 모욕하였다고 했습니다. ㅈ.심지어는 양편에 있던 두 강도까지 예수께 욕을 퍼부었다고 했습니다 (막15:32). ㅊ.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를 지키고 있던 보초병들이 예수의 눈을 가려놓 고 주먹으로 치면서 "예언자라 했으니 이번에는 누가 쳤는지 알아맞혀 보시지"하며 예수께 온갖 무례한 짓을 다 했다고 했습니다(눅22:63). 이 밖에도 예수님께서 모욕을 당하신 일은 얼마든지 더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애매한 죄명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도 억울하다는 말씀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철저하게 죽였습니다. 밟고 또 밟아 죽였습니다. 찌르고 또 찔러 죽였습니다. 욕하고 때리고 흉을 보며 저주했습니다. 사실 그들도 하나님을 알고 섬긴다는 사람들인데, 그처럼 무지막지하게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예수님의 육신만이 아니라, 인격과 자존심까지도 완전 히 죽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다싶이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말씀이 없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정말 억울하고 속상해서 미쳐 환장할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 은 소리 한 번 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릴 필요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얼마든지 천사 를 동원하여 적들을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니 말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일들은 우리 인간이 어느 경우든지 겪을 수 있는 상황 입니다.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께서 그런 모욕과 수치를 당하면서도 고스란히 당하시고 아무 말씀이 없으셨던 것은,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시고자 함이었던 것입니다. 아니,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이 가셔야 할 길이었고 또한 우리 인간 이 가야 할 길이었습니다. 죄없는 내가 아무 말없이 모든 모욕과 고통을 당했는데, 너희들은 무슨 말이 그렇게도 많으냐는 것이지요. 자기 챙피인 줄도 모르고 떠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고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 믿는다고 왜 억울한 일을 당하고만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욕을 얻어 먹으면서 왜 무엇 때문에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공의로우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엉뚱하고도 애매한 죄명으로 철저히 죽였지만, 하나님 은 예수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가 죄없음을 하나님께서 밝히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무덤 속에까지 끌어내렸으나, 하나님은 예수를 하늘로 끌어 올리셨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부활입니다. 우리도 물론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다만 예수님처럼 철저히 죽어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죽여도 그대로 당해야 합니다. 죽지 않으면 부 활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이 있은 다음에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죽지 않으려 하는 것을 보면, 부활을 확실히 믿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1.무덤 밖에서 울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 다음 날, 그러니까 예수님이 돌아가신지 사흘째 되는 날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묻히신 무덤에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 사실을 급히 베드와 요한에게 알렸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요한이 베드로보다 먼저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무덤 안에는 베드로가 먼저 들어갔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마리아의 말을 듣고서 긴가민가했습니다. 무덤 에 들어가 눈으로 보고서야 마리아의 말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누차 하신 말씀인데, 그리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이었건만,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기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20:9) 그들 은 그 때까지도 예수께서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아가 다시 무덤에 도착한 것은 두 제자보다 조금 늦게였습니다. 그리고 무덤밖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얼마간 울다가 몸을 굽혀 무덤 안을 들여다 보 았습니다. 그랬더니 무덤 안에 천사 두 명이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천 사들이 "왜 울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마리아는 "누가 우리 주님을 모셔 갔습니다. 어디로 모셔갔는지 모르겠습니다"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마리아는 등 뒤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뒤를 돌아다보면서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예수님을 누가 모셔갔는 지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 야!"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그제서야 예수님이신 것을 알고 "선생님!"하고 소리쳤습니다.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예수님을 만나뵌 일과 주님이 일러 주신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마리아의 말을 꿈같은 이야기로만 듣고 믿지 않았다고, 마가복음의 기자는 24장 11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현 실에 묶여있으며 또한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살기가 어렵 네 어쩌네 하면서도 ,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다시 말하면, 현실에서 벗어나 살기를 그렇게 원하면서도, 현실에서 벗어난 일들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오로지 이 세상만이 전부요, 이 세상을 떠나면 모든 게 끝장인 줄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현실의 모든 것들에 대한 미련도 대단합니다. 그것을 잃어 버리면 죽는 줄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보이는 물질이든지, 보이지 않는 자존심이나 명예, 또는 체면까지라도, 깎이거나 잃어버리면 큰일나는 줄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억울한 소리를 들어도 참지 못하고, 떠들고 욕하며 싸워대는 것입니다. 사실 자기 자신도 다른 사람을 어지간히 억울하게 하고 속상하게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건만, 자기만 억울하다고 소리쳐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요11: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 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요11:26)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 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하고 말입니다. 바울도 (행24:15)저도 하나님을 믿으며, 올바른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다 같이 부활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1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까닭에,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마음이 이 세상 현실에 너무 강하게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2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부활의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죽은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더 많이 가지려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며 더 명예롭게 되고자, 물고 뜯으며 싸우고 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일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를 얼마간 깨달으면서도,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것보다 훨씬 고상하고 귀하며 값진 것이 하늘 에 있다는 것을, 예수 믿는 사람들은 배워 알고 있으면서도 땅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예수쟁이 가운데 의외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부활한 예수, 곧 이 세상을 모든 것을 포기함으로써 하늘의 새 생 명을 얻으신 예수를 믿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3그 결과로 해서, 부활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삶은 이 세상 욕심을 버린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삶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 했습니다. 아담에서 비롯된 욕심을 버리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욕심을 버리지 못하면, 비록 예수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억울해 하며 속상해 하고, 또한 다투며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부활의 삶인 화해와 용서의 삶이란 가당치도 않은 일 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마리아가 무덤 밖에서 왜 울었을까요 그녀가 부활을 확실 히 믿었다면, 울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2.왜 울고 있느냐고 물으시고 있습니다. 왜 무엇이 속상해서, 무엇이 억울하고 원통해서, 아니면 무엇이 그토록 서운하고 서글퍼서 우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죽은 예수가 불쌍해서 우는가, 아니면 너 자신을 위해서 우는가 하고 묻습니다. 죽은 예수 때문이라면 울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그토록 못살게 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1예수님은 죽음이라고 하는 원수를 물리치셨습니다. 사람들이 어지간히도 애지중지하는 것, 예수님은 그것으로부터 자유한 자 였기에, 다시 말하면 죽음에 빠뜨리는 이 세상 것으로부터 해방된 분이었기 에, 예수님은 죽음과 아무 상관이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인간적인 욕망이 꿈틀대도록 충돌 질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셨습니다. 세상 사람 들에게는 아무 말씀이 없으신 예수님이셨지만, 하나님께는 다음과 같이 부르 짖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말입니다. 어쩌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으로서 자기 자신과의 마지막 싸움 이셨을 것입니다. 자기를 이기고자 하는 몸부림을 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으 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 말씀을 보면 죄가 있는 곳에는 죽음이 있게 마 련 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게 되면, 그 죄와 상관이 없게 되므로 죽음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입니다. 우리 인간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 속에 있는 죄를 향하여 사망이 화살을 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죄를 우리 예수님이 우리에게서 벗겨 주시게 되면, 죽음은 그 표적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과 관련이 있던 이 세상 욕심, 그 연결고리를 끊어버 린 우리는, 이제 죽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은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생명줄만이 우리를 붙들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성령님과 능력을 받아, 사방에 다니시면서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셨다 고, 고린도전서 15장 38 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귀신들린 자란, 물론 사람 구실을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 의미를 여 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으나, 오늘의 말씀에 있어서는 인간을 죽음의 골짜 기로 인도하는 여러 악한 세력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이 땅에 속한 것들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와 그의 부활을 확실히 믿어야, 이 귀신들을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믿고 그 모든 멸시와 모욕을 이 겨내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의지하고 모든 판단을 유보해야 합니다. 귀신의 속삭임이나 그 유혹을 물리치지 못해서, 괜스레 미 리 판단을 하고 사람을 정죄하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일이 아니라,
3.성경 말씀을 잘 깨닫고 예수의 부활을 확실히 믿음으로써, 사망이 쏘는 죄를 벗어버린 후 새 삶을 사는 것입니다. 새 삶이란, 예수께서 보여 주신 삶입니다. 지금까지 남을 원망하며 속상 해하고 억울해 하던 그런 생활을 그만두는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랬던 것처럼, 모든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고, 오히려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화해하고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늘 듣는 말씀이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화해와 용서의 삶이지만,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 문제를 올바로 해결해야만 합니다. 영원한 멸 망의 길로 가지 않고 영원히 참된 삶을 살려면, 이 과제를 바로 풀어야만 합니다. 남을 죽이고 내가 살려 한다면, 우선 나부터 죽어야 합니다. 살인 죄는 죽음을 면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긴다면, 그 러한 죄를 짓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그보다 급한 것이 남의 잘못이나 죄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내 잘못이요 내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염려는 없게 되었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여전 히 이 세상 욕심을 버리지 못하여 남을 정죄하는 죄를 짓게 되는 일입니다. 남을 정죄하게 되면, 예수님의 속죄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땅에서 풀어야 하늘에서도 푼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좀더 적극적으로 살 필요성이 있습니다. 남을 정죄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려면, 부활의 참 의미가 화해와 용서의 삶에 있음을 믿어 야 합니다. 단지 육신적으로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사는 것으로 끝난다면, 아 무 소용이 없습니다. 물론 육신적인 부활이 없이 용서와 화해의 삶을 산다는 것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바라는 바는, 억울하고 속상한 일이 없이 평안을 누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관건이 부활을 믿는데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 욕심 으로만 살게 되면, 억울하고 속상한 일이 떠날 날이 없을 것이며, 또한 그로 인하여 영원히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고 예수님이 사신대로만 살면, 속상한 일도 극복할 수 있고 억울한 일도 이겨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이웃과 화해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연히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어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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