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감각한 시대 (말3:13-18)
본문
여러 명의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놀 수 있을 것인가를 의논했습니다. 한 아이가 "어제 우리 누나가 결혼을 했는데 혼인 놀이를 하면 참 재미있을 것이라는 말을 꺼내자 몇몇 아이들이 여기에 동의를 하고 각자의 역할을 정했습니다. 어떤 아이는 신랑이 되고 어떤 아이는 신부가 되었습니다. 또, 어떤 아이는 신랑의 부모들이 되고 어떤 아이들은 신부의 부모들이 되었습니다. 또 어떤 아이들은 축가를 부르는 사람이 되고 또 어떤 아이들은 악기를 연주할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몇몇의 아이에게 결혼식을 재미있게 하기 위해서 춤을 추게 했는데 그들의 반응이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이유인즉은 결혼 놀이가 재미없으니다른 것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의 무반응으로 인해 결혼 놀이는 재미없이 끝나버리고 다른 놀이를 찾기 시작을 했습니다. 이 때 또한아이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어제 초상집에 다녀왔는데 굉장히 슬프더라 그것을 놀이로 만들어 놀아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몇몇 아이들이 여기에 동의를 하였고 각자의 역할들이 정해졌습니다. 어떤 아이는 죽은 사람이 되고 어떤 아이는 상주가 되었습니다. 또 어떤 아이들은 조문객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각자의 역할을 정해 놓고 상주가 곡을 하기 시작을 합니다.
그런데 또다시 문제가 생겼습니다. 함께 슬프게 울어야 할 조문객의 역을 맡은 아이들이 우리들은 이 놀이를 할 수 없어 라고 말하고는 그 자리를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결국 재미있게 놀아보려는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렸습니다. 춤출 사람이 없어서 결혼 놀이도 재미없게 되어버렸고 함께 울어줄 사람들이 없어서 장례 놀이도 재미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제가 조금 각색을 한 것입니다. [눅 7:31-32]은 이렇게 이 일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한 말씀으로 당시대의 무감각함을 아이들의 놀이에 비교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출 사람이 없고 애곡을 하여도 함께 울어줄 사람이 없을 만큼 당시대는 무감각한 시대였습니다. 무감각한 시대 그러나 이런 시대는 예수님 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시대도 역시 무감각한 시대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회적으로는 면역이 되어서 웬만한 일들에 놀라지 않습니다. "그저 그러려니" 해 버리고 맙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 무슨 일인들 못 일어나랴" 해버립니다. 일들에 면역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일입니다. 말씀을 들어도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찬송을 불러도 가슴이 뜨거워지지가 않습니다. 기도의 의미가 상실되어지고 그저 아무런 감각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입니다. 이제는 교회를 출석하는 일도 하나의 습관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무런 의미 없이 늘 하던 대로 그렇게 왔다갔다 할 뿐입니다. 성도들의 가슴속에는 냉랭함이 있을 뿐입니다. 서로에 대해서 냉담하고 무관심합니다. 더욱이 문제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누구 하나 가슴을 치면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자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겠거니" 하기도하고 "그래 이것이 신앙의 성숙된 모습이야, 언제까지든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잖아" 하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회적인 환경이 어려워지면 그것을 면해 보고자 많은 노력을 동원해 보지만 영적인 침체기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주님께 매달리는 사람은 잘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던 피리를 불어도 춤출 사람이 없고 애곡을 하여도 울어줄 사람이 없는 그런 시대 한 가운데 우리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말라기서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도전이 됩니다. 말라기서를 읽다보면 계속 생각되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무감각할 수 있을까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굳어질 수 있을까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이런 자세를 취할 수 있을까 하는 것들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록 중에 말라기서 만큼 무감각한 시대는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만큼 말라기시대는 하나님에 대해서 무감각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수없이 하나님을 향해 되지도 않는 오리발을 내밀고 있습니다. 나를 시험해서라도 우리는 지금까지 6번에 걸쳐서 말라기서를 살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민 것은 오리발 뿐이었습니다. 한번도 솔직하게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려 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자신들의 죄를 감추고 오리발을 내밀기에 급급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이 말라기서를 살피는 동안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으셨습니까 "난 저들처럼 살지 않아"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어쩌면 내 모습하고 이렇게 닮을 수 있지"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렇게 끊임없이 오리발을 내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돌아오라고 간절히 부르시던 하나님의 모습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저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음을 증명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을 시험하게 할 정도로 저들이 돌아서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허락된 일이 아닙니다. 그 어떤 문제를 가지고서도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십일조의 문제로 자신을 시험하라고 말씀하셨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른 것은 다 시험해도 안돼지만 십일조 문제는 시험이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시험하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십일조의 시험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멀어져 있었는가 아닌가를 증명해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종종 십일조를 하나님을 시험하는 수단으로 사용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라기서에 복을 주나 아니 주나 시험해 보아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므로 십일조를 통해서 하나님을 시험해 보아라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잘못 해석한 연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십일조로 자신을 시험하라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십일조를 잘해서 저들이 복을 얻으면 지금까지 저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었던 증거가 되기 때문에 십일조로 시험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리발을 내미니까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신을 시험의 도구로 이용하도록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시험치 말라고 하셨던 하나님께서 자신을 시험의 도구로 내어놓으실 정도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자신이 아끼는 백성들이 돌아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인간들에게 자신이 시험 거리가 된다고 하더라도 기꺼운 마음으로 그것을 감수하겠다고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넘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이 이스라엘 백성들에도 넘치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을 하고 있을 까요 13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또다시 오리발을 내밀고 있습니다. 아직도 이들은 무감각한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말라기서의 전형적인 모습을 또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말라기서의 전형적인 모습은 하나님께서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적하십니다. "너희들이 이러이러하게 죄를 지었다" 여기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언제 그런 죄를 지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저들의 이 이야기가 잘못되었음을 설명하십니다. "너희가 이러이러하고도 죄를 짖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그러므로 돌아 오라" 오늘 본문도 바로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너희가 악한 말로 나를 대적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기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합니까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습니까" 이런 이스라엘의 대답에 대해서 잘못되었음을 14-18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또다시 저들이 지은 죄와 저들이 내민 오리발 그리고 하나님의 증거를 함께 살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악한 말로 대적하고서도 먼저 하나님께서 내민 저들의 죄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악한 말로 나를 대적 했다는 것입니다. 이미 이 문제는 지난 2:17절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던 문제입니다. 2:17절을 보십시다. "" 문제가 무엇입니까 말입니다. 어떤 말을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를 사랑하심으로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이런 내용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지적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예,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말합니다. 이제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저들의 오리발이 잘못 내민 것임을 14,15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 자 먼저 14절을 살펴보십시다. 14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한 요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고 생각을 했을 까요 14절 마지막 부분은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섬겨도 아무것도 유익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헛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들이 하나님을 섬긴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유익을 얻고자 함입니다. 무엇인가 한 번 얻어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겼더니 그것들을 얻었습니까 아닙니다.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여기 슬프게 행한다는 것은 금식으로 기도를 한다는 의미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보기도 하고 금식 기도를 해 보기도 했지만 하나님은 전혀 응답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전혀 우리들에게 유익을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이런 순간에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복을 많이 받는가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을 살펴보았더니 악인이 더 잘되고 잘 삽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들이 더 잘됩니다. 그래서 이들은 무엇을 말합니까 15절을 보십시다. "지금 우리는 "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의 관심사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다른 어떤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보다도 다른 것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잘살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복을 주시지 않자 그만 돌아서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슴없이 ""라 말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은 "지금 우리는" 라는 말입니다. 여기 "지금 우리는" 이라는 말이 주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말은 우리가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난 후 잘 않되길래 가만히 주변을 살펴 보았더니 이러이러한 자들이 잘 되더라 그래서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포기하고 이러이러한 자들이 잘 된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이라는 말은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께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악인이 더 잘되고 복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오리발을 내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일입니다. 오늘날도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세상적인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쫓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을 어떤 사람은 건강을 어떤 사람은 출세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쫓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바른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을 주시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물론 이런 것들을 주관하시고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믿음이며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들이 하나님을 따르는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따르는 목적이라면 하나님은 도깨비 방망이에 불과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위해서 하나님을 쫓다가 그만 낙심하고 돌아서는 경우들을 봅니다. 넘어질뻔 함 시 73편은 이런 면에서 우리들에게 귀중한 교훈을 줍니다. 먼저
1,2절을 읽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그렇다면 시인이 무엇 때문에 실족할뻔 하였다고 말합니까 3-13을 보십시다.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그런데 보십시오. 시인은 어떤 일을 당하였습니까 [시 73:14]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여기서 시인이 고민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악인이 더 잘된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건하게 섬기려 하는 자신은 어려움을 당하고 힘든데 악인은 더 잘 되고 형통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인에게 고민이 되고 실족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 가운데서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17-19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저들의 결국이 어떠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 시가 우리들에게 교훈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는 악인들이 잘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형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이 땅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그 날 그 날에는 모든 것들이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시 73:28]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자신의 복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시험에 듭니다. 악인이 더 잘 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들이 부러워지고 그렇게 살고 싶은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더 좋아합니다. 하나님은 그저 나의 부를 위해서 잠깐 등장하는 요술 호리병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요술 호리병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요술 호리병에 나온 거인은 모든 것들을 다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거인이 요술 호리병을 가진 사람을 향해 무엇이라 부르는 줄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주인님입니다. 욉니까 그렇습니다. 아무리 거인이고 힘이 좋아도 그가 존재하는 이유는 단지 요술 호리병의 주인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어린아이든지 노인이든지 가리지 않고 그 호리병을 가지고 있기만 하면 충성을 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종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해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들의 위해서 요술 호리병에 나타나는 거인처럼 요술만 부리지 않습니다. 우리들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향해서 충성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쫓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보다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어떻게 해주어야 하는가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시험에 들고 넘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어떻게 해주시는가에 더 관심이 많으십니까 아니면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인가에 더 관심이 많으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함으로 하나님을 향해 서슴없이 발언을 일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런데 보십시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고 있을 때 그렇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6절을 보십시다. 16절은 이렇게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그 때란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13-15절에서 처럼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바로 그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된 일 같아지고 쓸데없는 일 같아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은 우리들을 돌보아 주시지 않는다고 말하는 바로 그 때를 말합니다. 바로 이 때 이들은 무엇을 합니까 예, "피차 말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피차 말한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이 부분에 대해서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문맥을 통해 볼 때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분명해 집니다.
왜냐하면 16절은 이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고 있는 바로 그 때에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슨 이야기를 했을 까요 아마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잘 안돼는 것처럼 보이고 오히려 악한 자들이 잘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나는 하나님을 섬기리라" 이것은 하박국이 하나님을 향해 고백했던 것과 너무나 흡사한 고백이라 생각이 듭니다. [합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실 그 멋지고 아름다운 나라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잠시의 영광이 아닌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무어라 말하든 하나님만을 인해 즐거워하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잠시의 것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영원한 것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무엇을 바라보시면서 사십니다. 이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무엇을 말하더라도 아삽과 같이 하나님만이 나의 복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런데 보십시오. 우리들의 이런 고백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계속 17절을 읽습니다. 여호와께서 어떻게 하신다고요 그렇습니다. 들으신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들으신다고요 예, 분명히 들으신다고요.
그렇다면 여기서 분명히 들으신다는 이야기는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그렇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들으신다는 이야기는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잘 섬겨도 잘 안돼고 어려움이 계속 있고 오히려 악을 행하는 자가 더 잘된다고 느껴는 그런 세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분명히 경건한 사람들의 신앙고백을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고백을 잊지 않고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분명히"의 의미는 들으시고 잊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이야기들을 기억하시고 곤란함 가운데서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을 높인 사람들을 선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념 책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어떻게 선대 하실까요 16절 하반절을 보십시다. 무엇이라고요 그렇습니다. "기념 책에 기록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념 책에 기록한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기억력이 없으셔서 잊어버리실까바 기록한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록하시지 않아도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기 기록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처럼 기억한 바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힘을 잃지 말고 당당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들을 몰라줘도 하나님은 다 알고 있으니 낙망하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격려하기 위해서 본문은 이렇게 기록하고있는 것입니다. 기념 책에 기록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모든 것들 잊어버리시 않고 기억하십니다.
그러므로 잠시의 즐거움을 위해서 영원한 영광을 버리는 사람들이 아닌 영원함을 위해서 잠시의 어려움도 참고 우리들의 신앙을 지킬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특별한 소유로 다음으로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특별한 소유로 삼으실 것이라 말씀 하십니다. 특별하다는 것은 항상 기분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특별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최고의 인기인이 최고의 운동선수가 출연료나 연봉을 인해 줄다리기를 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운동선수는 누구누구보다 1원이라도 더 달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자존심의 싸움입니다. 즉,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의미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비록 지금은 별볼일 없는 사람 같고 가치 없는 사람 같지만 보십시오. 특별하게 하리라 말합니다. 언제요 그렇습니다. 정한날 바로 그 시간에 말입니다. 여기서 정한 날이란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그 때를 말합니다. 모든 것들을 잠재우시고 세상을 다스릴 바로 그 때 나도 특별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과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얼마나 신나고 즐거운 일입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특별한 사람이 되려 하지 마십시오. 세상에서 특별한 사람이 되려 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특별한 사람이 되지 않아도 됩니다. 세상에서 특별한 사람이 되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오면 세상을 지으시고 다스릴 바로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이것을 바라보고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껴주심 뿐만 아닙니다. 계속해서 17절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아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낀다는 말은 보호를 의미합니다.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우리들의 이 목숨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할 정도로 우리들이 초라해 보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들은 결코 초라한 존재가 아닙니다. 무가치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껴 보시는 그런 자들입니다. 이 얼마나 멋지고 기분 좋은 일입니까 스바냐 선지자는 이 사실을 알았기에 이렇게 말합니다. [습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 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 같으나 이런 우리들을 하나님께서는 아껴 보십시다. 사랑으로 대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집니다. 하나는 악한 말로 대적하는 자들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모든 상황 가운데서 자신을 지키며 신앙안에서 바로 서려 하는 경건한 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이 둘 중에 신앙을 지키며 경건하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더 초라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18절을 보십시오. "."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날 바로 그 때에 악한 자와 그렇지 않은자들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누가 고귀하게 살았는가가가 드러나다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삶의 자리가 힘들고 어렵더라도 신앙을 지키십시다. 경건하게 살기를 위해서 힘쓰십시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위해서 우리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몇몇의 아이에게 결혼식을 재미있게 하기 위해서 춤을 추게 했는데 그들의 반응이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이유인즉은 결혼 놀이가 재미없으니다른 것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의 무반응으로 인해 결혼 놀이는 재미없이 끝나버리고 다른 놀이를 찾기 시작을 했습니다. 이 때 또한아이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어제 초상집에 다녀왔는데 굉장히 슬프더라 그것을 놀이로 만들어 놀아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몇몇 아이들이 여기에 동의를 하였고 각자의 역할들이 정해졌습니다. 어떤 아이는 죽은 사람이 되고 어떤 아이는 상주가 되었습니다. 또 어떤 아이들은 조문객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각자의 역할을 정해 놓고 상주가 곡을 하기 시작을 합니다.
그런데 또다시 문제가 생겼습니다. 함께 슬프게 울어야 할 조문객의 역을 맡은 아이들이 우리들은 이 놀이를 할 수 없어 라고 말하고는 그 자리를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결국 재미있게 놀아보려는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렸습니다. 춤출 사람이 없어서 결혼 놀이도 재미없게 되어버렸고 함께 울어줄 사람들이 없어서 장례 놀이도 재미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제가 조금 각색을 한 것입니다. [눅 7:31-32]은 이렇게 이 일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한 말씀으로 당시대의 무감각함을 아이들의 놀이에 비교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출 사람이 없고 애곡을 하여도 함께 울어줄 사람이 없을 만큼 당시대는 무감각한 시대였습니다. 무감각한 시대 그러나 이런 시대는 예수님 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시대도 역시 무감각한 시대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회적으로는 면역이 되어서 웬만한 일들에 놀라지 않습니다. "그저 그러려니" 해 버리고 맙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 무슨 일인들 못 일어나랴" 해버립니다. 일들에 면역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일입니다. 말씀을 들어도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찬송을 불러도 가슴이 뜨거워지지가 않습니다. 기도의 의미가 상실되어지고 그저 아무런 감각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입니다. 이제는 교회를 출석하는 일도 하나의 습관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무런 의미 없이 늘 하던 대로 그렇게 왔다갔다 할 뿐입니다. 성도들의 가슴속에는 냉랭함이 있을 뿐입니다. 서로에 대해서 냉담하고 무관심합니다. 더욱이 문제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누구 하나 가슴을 치면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자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겠거니" 하기도하고 "그래 이것이 신앙의 성숙된 모습이야, 언제까지든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잖아" 하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회적인 환경이 어려워지면 그것을 면해 보고자 많은 노력을 동원해 보지만 영적인 침체기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주님께 매달리는 사람은 잘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던 피리를 불어도 춤출 사람이 없고 애곡을 하여도 울어줄 사람이 없는 그런 시대 한 가운데 우리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말라기서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도전이 됩니다. 말라기서를 읽다보면 계속 생각되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무감각할 수 있을까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굳어질 수 있을까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이런 자세를 취할 수 있을까 하는 것들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록 중에 말라기서 만큼 무감각한 시대는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만큼 말라기시대는 하나님에 대해서 무감각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수없이 하나님을 향해 되지도 않는 오리발을 내밀고 있습니다. 나를 시험해서라도 우리는 지금까지 6번에 걸쳐서 말라기서를 살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민 것은 오리발 뿐이었습니다. 한번도 솔직하게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려 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자신들의 죄를 감추고 오리발을 내밀기에 급급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이 말라기서를 살피는 동안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으셨습니까 "난 저들처럼 살지 않아"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어쩌면 내 모습하고 이렇게 닮을 수 있지"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렇게 끊임없이 오리발을 내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돌아오라고 간절히 부르시던 하나님의 모습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저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음을 증명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을 시험하게 할 정도로 저들이 돌아서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허락된 일이 아닙니다. 그 어떤 문제를 가지고서도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십일조의 문제로 자신을 시험하라고 말씀하셨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른 것은 다 시험해도 안돼지만 십일조 문제는 시험이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시험하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십일조의 시험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멀어져 있었는가 아닌가를 증명해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종종 십일조를 하나님을 시험하는 수단으로 사용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라기서에 복을 주나 아니 주나 시험해 보아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므로 십일조를 통해서 하나님을 시험해 보아라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잘못 해석한 연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십일조로 자신을 시험하라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십일조를 잘해서 저들이 복을 얻으면 지금까지 저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었던 증거가 되기 때문에 십일조로 시험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리발을 내미니까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신을 시험의 도구로 이용하도록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시험치 말라고 하셨던 하나님께서 자신을 시험의 도구로 내어놓으실 정도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자신이 아끼는 백성들이 돌아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인간들에게 자신이 시험 거리가 된다고 하더라도 기꺼운 마음으로 그것을 감수하겠다고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넘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이 이스라엘 백성들에도 넘치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을 하고 있을 까요 13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또다시 오리발을 내밀고 있습니다. 아직도 이들은 무감각한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말라기서의 전형적인 모습을 또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말라기서의 전형적인 모습은 하나님께서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적하십니다. "너희들이 이러이러하게 죄를 지었다" 여기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언제 그런 죄를 지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저들의 이 이야기가 잘못되었음을 설명하십니다. "너희가 이러이러하고도 죄를 짖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그러므로 돌아 오라" 오늘 본문도 바로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너희가 악한 말로 나를 대적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기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합니까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습니까" 이런 이스라엘의 대답에 대해서 잘못되었음을 14-18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또다시 저들이 지은 죄와 저들이 내민 오리발 그리고 하나님의 증거를 함께 살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악한 말로 대적하고서도 먼저 하나님께서 내민 저들의 죄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악한 말로 나를 대적 했다는 것입니다. 이미 이 문제는 지난 2:17절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던 문제입니다. 2:17절을 보십시다. "" 문제가 무엇입니까 말입니다. 어떤 말을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를 사랑하심으로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이런 내용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지적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예,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말합니다. 이제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저들의 오리발이 잘못 내민 것임을 14,15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 자 먼저 14절을 살펴보십시다. 14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한 요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고 생각을 했을 까요 14절 마지막 부분은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섬겨도 아무것도 유익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헛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들이 하나님을 섬긴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유익을 얻고자 함입니다. 무엇인가 한 번 얻어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겼더니 그것들을 얻었습니까 아닙니다.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여기 슬프게 행한다는 것은 금식으로 기도를 한다는 의미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보기도 하고 금식 기도를 해 보기도 했지만 하나님은 전혀 응답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전혀 우리들에게 유익을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이런 순간에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복을 많이 받는가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을 살펴보았더니 악인이 더 잘되고 잘 삽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들이 더 잘됩니다. 그래서 이들은 무엇을 말합니까 15절을 보십시다. "지금 우리는 "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의 관심사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다른 어떤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보다도 다른 것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잘살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복을 주시지 않자 그만 돌아서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슴없이 ""라 말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은 "지금 우리는" 라는 말입니다. 여기 "지금 우리는" 이라는 말이 주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말은 우리가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난 후 잘 않되길래 가만히 주변을 살펴 보았더니 이러이러한 자들이 잘 되더라 그래서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포기하고 이러이러한 자들이 잘 된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이라는 말은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께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악인이 더 잘되고 복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오리발을 내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일입니다. 오늘날도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세상적인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쫓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을 어떤 사람은 건강을 어떤 사람은 출세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쫓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바른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을 주시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물론 이런 것들을 주관하시고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믿음이며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들이 하나님을 따르는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따르는 목적이라면 하나님은 도깨비 방망이에 불과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위해서 하나님을 쫓다가 그만 낙심하고 돌아서는 경우들을 봅니다. 넘어질뻔 함 시 73편은 이런 면에서 우리들에게 귀중한 교훈을 줍니다. 먼저
1,2절을 읽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그렇다면 시인이 무엇 때문에 실족할뻔 하였다고 말합니까 3-13을 보십시다.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그런데 보십시오. 시인은 어떤 일을 당하였습니까 [시 73:14]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여기서 시인이 고민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악인이 더 잘된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건하게 섬기려 하는 자신은 어려움을 당하고 힘든데 악인은 더 잘 되고 형통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인에게 고민이 되고 실족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 가운데서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17-19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저들의 결국이 어떠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 시가 우리들에게 교훈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는 악인들이 잘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형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이 땅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그 날 그 날에는 모든 것들이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시 73:28]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자신의 복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시험에 듭니다. 악인이 더 잘 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들이 부러워지고 그렇게 살고 싶은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더 좋아합니다. 하나님은 그저 나의 부를 위해서 잠깐 등장하는 요술 호리병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요술 호리병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요술 호리병에 나온 거인은 모든 것들을 다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거인이 요술 호리병을 가진 사람을 향해 무엇이라 부르는 줄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주인님입니다. 욉니까 그렇습니다. 아무리 거인이고 힘이 좋아도 그가 존재하는 이유는 단지 요술 호리병의 주인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어린아이든지 노인이든지 가리지 않고 그 호리병을 가지고 있기만 하면 충성을 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종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해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들의 위해서 요술 호리병에 나타나는 거인처럼 요술만 부리지 않습니다. 우리들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향해서 충성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쫓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보다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어떻게 해주어야 하는가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시험에 들고 넘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어떻게 해주시는가에 더 관심이 많으십니까 아니면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인가에 더 관심이 많으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함으로 하나님을 향해 서슴없이 발언을 일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런데 보십시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고 있을 때 그렇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6절을 보십시다. 16절은 이렇게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그 때란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13-15절에서 처럼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바로 그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된 일 같아지고 쓸데없는 일 같아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은 우리들을 돌보아 주시지 않는다고 말하는 바로 그 때를 말합니다. 바로 이 때 이들은 무엇을 합니까 예, "피차 말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피차 말한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이 부분에 대해서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문맥을 통해 볼 때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분명해 집니다.
왜냐하면 16절은 이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고 있는 바로 그 때에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슨 이야기를 했을 까요 아마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잘 안돼는 것처럼 보이고 오히려 악한 자들이 잘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나는 하나님을 섬기리라" 이것은 하박국이 하나님을 향해 고백했던 것과 너무나 흡사한 고백이라 생각이 듭니다. [합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실 그 멋지고 아름다운 나라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잠시의 영광이 아닌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무어라 말하든 하나님만을 인해 즐거워하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잠시의 것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영원한 것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무엇을 바라보시면서 사십니다. 이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무엇을 말하더라도 아삽과 같이 하나님만이 나의 복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런데 보십시오. 우리들의 이런 고백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계속 17절을 읽습니다. 여호와께서 어떻게 하신다고요 그렇습니다. 들으신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들으신다고요 예, 분명히 들으신다고요.
그렇다면 여기서 분명히 들으신다는 이야기는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그렇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들으신다는 이야기는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잘 섬겨도 잘 안돼고 어려움이 계속 있고 오히려 악을 행하는 자가 더 잘된다고 느껴는 그런 세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분명히 경건한 사람들의 신앙고백을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고백을 잊지 않고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분명히"의 의미는 들으시고 잊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이야기들을 기억하시고 곤란함 가운데서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을 높인 사람들을 선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념 책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어떻게 선대 하실까요 16절 하반절을 보십시다. 무엇이라고요 그렇습니다. "기념 책에 기록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념 책에 기록한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기억력이 없으셔서 잊어버리실까바 기록한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록하시지 않아도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기 기록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처럼 기억한 바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힘을 잃지 말고 당당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들을 몰라줘도 하나님은 다 알고 있으니 낙망하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격려하기 위해서 본문은 이렇게 기록하고있는 것입니다. 기념 책에 기록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모든 것들 잊어버리시 않고 기억하십니다.
그러므로 잠시의 즐거움을 위해서 영원한 영광을 버리는 사람들이 아닌 영원함을 위해서 잠시의 어려움도 참고 우리들의 신앙을 지킬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특별한 소유로 다음으로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특별한 소유로 삼으실 것이라 말씀 하십니다. 특별하다는 것은 항상 기분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특별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최고의 인기인이 최고의 운동선수가 출연료나 연봉을 인해 줄다리기를 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운동선수는 누구누구보다 1원이라도 더 달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자존심의 싸움입니다. 즉,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의미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비록 지금은 별볼일 없는 사람 같고 가치 없는 사람 같지만 보십시오. 특별하게 하리라 말합니다. 언제요 그렇습니다. 정한날 바로 그 시간에 말입니다. 여기서 정한 날이란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그 때를 말합니다. 모든 것들을 잠재우시고 세상을 다스릴 바로 그 때 나도 특별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과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얼마나 신나고 즐거운 일입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특별한 사람이 되려 하지 마십시오. 세상에서 특별한 사람이 되려 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특별한 사람이 되지 않아도 됩니다. 세상에서 특별한 사람이 되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오면 세상을 지으시고 다스릴 바로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이것을 바라보고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껴주심 뿐만 아닙니다. 계속해서 17절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아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낀다는 말은 보호를 의미합니다.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우리들의 이 목숨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할 정도로 우리들이 초라해 보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들은 결코 초라한 존재가 아닙니다. 무가치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껴 보시는 그런 자들입니다. 이 얼마나 멋지고 기분 좋은 일입니까 스바냐 선지자는 이 사실을 알았기에 이렇게 말합니다. [습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 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 같으나 이런 우리들을 하나님께서는 아껴 보십시다. 사랑으로 대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집니다. 하나는 악한 말로 대적하는 자들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모든 상황 가운데서 자신을 지키며 신앙안에서 바로 서려 하는 경건한 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이 둘 중에 신앙을 지키며 경건하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더 초라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18절을 보십시오. "."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날 바로 그 때에 악한 자와 그렇지 않은자들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누가 고귀하게 살았는가가가 드러나다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삶의 자리가 힘들고 어렵더라도 신앙을 지키십시다. 경건하게 살기를 위해서 힘쓰십시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위해서 우리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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