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고전6:15-20)
본문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실 때 창조하신 창조물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뭐니뭐니 해도 인간의 몸입니다. 사람의 몸은 작품입니다. 작품도 이런 작품이 세상에 없습니다. 우선 외모가 우수합니다. 여러분, 갓 태어난 어린 아이를 눈여겨보십시오. 참 신비하고 섬세합니다. 어쩌면 그렇게 오밀조밀하게 만들어져 나오는지, 들어갈 데 들어가고 나올 데 나오고 손가락 발가락 정확하게 다섯 개씩 붙어 있는데 볼수록 신비롭고 섬세합니다. 참 신묘막측합니다. 그리고 그 구조도 정교합니다. 기계도 이런 기계가 없습니다. 피가 혈관을 통해서 돌아다니는데 하루 동안 움직이는 거리가 268,800㎞라고 합니다. 지금도 여러분은 점잖케 앉아 계시지만 몸 속에는 쉴 사이 없이 피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또 머리 속에는 700만 개나 되는 뇌세포가 들어 있어 쉬지 않고 움직이고 활동하고 기억시키고 생각하게 하고 느끼게 하고 그럽니다. 얼마나 신비한 일입니까 뿐만 아니라 그 기능도 섬세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대충 만드신 것이 아니고 예리한 기능을 지닌 인간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슬픔을 알고 기쁨을 느끼고 보람을 느끼고 허무를 느끼는 인격을 지닌 사람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판단의 능력까지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선과 악을 분별하며 스스로 결단하고 결정하는 능력을 지녔습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가장 가까운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렇게 지으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에 몇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영광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창조물들로부터도 영광을 받으시지만 그 상대가 인간과는 격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상대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아주 값있는 상대입니다. 아주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서를 보면 신앙에 대한 요리 문답이 모두 81개가 나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제일
첫째 문답이 “사람이 제일 가는 목적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인간의 첫 번째 값어치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세상에 왜 태어났느냐 하면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의미가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 가면서 하나님은 끝내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십니다. 왜 이끌어 내셨는가 하면 그 이유가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만 섬기며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출애굽의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고향 갈데아 우르에서 불러내셨습니다. 왜 불러내셨는가 하면 그것도 하나님만을 섬기게 하시 위해서입니다. 갈데아 우르라는 곳은 우상의 도시입니다. 그곳에 있으면 순전한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서 가나안으로 보내십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목적입니다. 알고 보면 그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들도 이 세상으로부터 불러 내셨습니다. 왜 불러내셨습니까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불러내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섬길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잡신도 많습니다. 우상도 많습니다. 세상 유행도 많습니다. 재미도 많습니다. 사람이 그런 곳에 푹 빠져 살면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마지막에는 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세상 속에서 우리를 불러내셨습니다. 왜 불러내셨는가 하면 “오직 하나님만 섬기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가리켜서 성도라고 하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값이고 삶의 목적이고 신앙인이 된 이유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디 그렇습니까 하나님만 섬기라고 애굽에서 불러내어 놓았더니 나오자마자 우상을 섬깁니다. 잡다한 잡신들을 숭배합니다. 이방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화가나신 것입니다. 이것은 배은망덕입니다. 배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백성들의 버릇을 고치시기 위해 바벨론과 앗수르의 손에 붙여서 고난을 받게 하십니다. 그 결과 이 백성들이 얼마나 혹독한 고난을 당합니까 배은망덕은 이렇게 상대방으로 하여금 마음을 상하게 하고 무서운 분노를 유발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최소한 배은망덕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은혜를 저버리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가장 기본이 되는 마음이고 성숙한 모습입니다. 가끔 보면 부모들이 자식들로부터 실망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는 경우를 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참 불행한 일입니다. 세상에서 이것처럼 슬픈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배신감을 이기지 못해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배신 가운데서도 자식으로부터 당하는 배신이 가장 슬픈 배신일 것입니다. 그래서 단테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를 배신이라고 했습니다. 배은망덕이나 배신은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상하게 하는 부도덕입니다. 제가 오래전에 개를 한 마리 키웠습니다. 그 개는 근본도 없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잡종개로서 보신탕 집에서 환영하는 그런 개입니다. 누가 가져 와서 그냥 길렀습니다. 키우다 보니까 정이 들었습니다. 하는 짓이 아주 귀여웠습니다.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이 개가 반겨 주는데 온갖 아양을 다 떱니다. 그래서 목욕도 시켜 주고 안아 주고 먹여도 주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기대를 걸고 자꾸만 개에게 암시를 주었습니다. “너는 근본이 잡종이지만 좀 품위 있게 살아서 절대로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는다든가 함부로 싸는 일이 없도록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별수없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해라.” 그러면서 화장실 가는 법을 가르치고 밥을 줄 때도 그릇을 깨끗이 닦아서 깨끗한 밥만 주고 그랬습니다. 개가 그렇게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루는 밖에 나갔다 들어오니까 이 개가 무엇인가 열심히 먹으면서 본 척도 하지 않습니다. 이상해서 보니까 자신이 싸 놓은 것을 정신없이 먹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인은 본 체도 하지 않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까 순간적으로 분노가 일어나는데 얼마나 괘씸한지 빗자루로 사정없이 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보기 싫어서 다른 사람에게 주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실망감에서 나오는 분노입니다. 출애굽을 했으면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지긋지긋한 애굽을 빠져 나와 그들을 위해서 특별히 예비해 놓으신 가나안에 들어가 살면서도 애굽에서의 버릇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살 때의 못된 짓들만 흉내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얼마나 화가 나셨겠습니까 하나님은 바벨론과 앗수르라는 큰 막대기를 들어서 이 백성들을 사정없이 치신 것입니다. 배은망덕에서 오는 분노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실망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이렇게 사랑하시는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목적입니다. 두 번째 목적은 두고 보시기 위해서입니다. 왜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렇게 애착을 가지시는가 하면 “보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왜 자식을 낳습니까 그것은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커가는 모습을 보고 행복해 하려고 낳습니다. 자식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기쁨 중 가장 큰 기쁨입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때로 자식 자랑을 많이 합니다. 얼마나 귀엽습니까 어린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고 흐믓해 하지 않는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침이 마르도록 자식 자랑을 합니다. 자식이 그 어려운 입시에서 시험을 잘 보았습니다. 그래서 대학에 합격을 했습니다. 그때는 본인보다도 부모가 더 기뻐하고 좋아합니다. 부모는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기쁩니다. 낙방하는 아이의 부모 앞에서도 혼자 기뻐서 떠들며 자랑을 합니다. 부모는 자식 앞에서 푼수가 될 때가 많습니다.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은 그렇게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것은 인간만이 아니고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욥기서 1장을 보면 하루는 하나님이 사탄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딜 갔더냐.” “예, 세상을 두루 살펴보고 오는 중입니다.” “그럼 내 종 욥을 보았느냐. 그는 순전하고 정직하여 악을 모르는 사람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식 자랑입니다. 그것도 사탄에게 자랑을 하십니다.
왜냐하면 욥이 세상에서 너무나 깨끗하고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대견하고 자랑스러워 사탄 앞에서 자랑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들이 세상에서 잘 살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면서 그토록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말씀 안에서 잘 살아갈 때 가장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흡족한 마음으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창 12:3). 이것이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인간의 값은 이렇게 소중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대를 가진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넘어지고 실패하고 낙오될 때 하나님의 실망이 얼마나 크시겠습니까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식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는 부모처럼,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건전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 원하십니다. 자식이 세상에서 실패하고 넘어지고 낙오하고 병들어 사는 것을 보기 좋아하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부모의 마음은 한결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ㅜ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자신 만만하게 잘 살아가는 모습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뒤에서 응원도 하시고 격려도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성자로 만들어 놓지 않으셨습니다. 애초부터 인간을 성자로 만들어 놓으셨더라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실패하고 넘어지고 유혹받는 그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싸웠다 하면 100% 모두 이기고 살아갈 것인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들이 구원은 받은 사람들이지만 세상과 사워서 자신 있게 이긴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이긴다면 겨우 한두 번 이기고 대부분은 실패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넘어지고 나서 고민도 하고 실망도 하고 그럽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인간의 능력을 세상과 싸워서 겨우 이길 만한 힘만 부여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세상에서 살면서 여러 가지 유혹들과 싸우게 되는데 그때마다 이겨도 겨우 이길 정도밖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파스칼의 말대로 인간은 고민이 많은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중간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파스칼은 팡세 72장에서 인간은 중간적인 존재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공간적으로는 자연과 우주 사이에 위치한 중간적 위치에 있습니다.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능력도 중간입니다. 너무 큰 소리도 못 듣고 너무 작은 소리도 못 듣습니다. 너무 밝아도 못 보고 너무 어두워도 못 봅니다. 너무 가까워도 못 보고 너무 멀어도 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중간자입니다. 또 인간은 천사가 되기에는 부족하고 짐승이 되기에는 너무 넘치는 존재입니다. 이를테면 짐승이라고 하기에는 천사에 가깝고 찬사라고 하기에는 짐승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속에는 천사의 기질도 있고 짐승의 기질도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는 성 어거스틴이나 성 프랜시 스의 성자적인 영적 자질도 들어 있는가 하면 또 진시왕 같은 탕자적인 기질도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내 가냘픈 지체 속에는 성모 마리아나 나이팅게일 같은 천사적인 영성이 들어 있는가 하면 양귀비나 살로메 같은 육감적인 욕망도 들어 있습니다. 히틀러 같은 광폭함, 잔인함, 포악함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존파, 막가파 같은 잔인함이 우리들 마음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슈바이처 같은 인간애와 지킬 박사와 같은 고상한 인품도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중간자입니다. 이 말은 인간은 고민이 많은 존재라는 말입니다. 중간에 서서 이럴까 저럴까 고민이 많습니다.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내 마음이 짐승 편으로 기울면 타락하고 실패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 마음이 천사 편으로 기울면 승리하고 악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돈뭉치를 주웠습니다. 그 돈뭉치를 주워 들고 얼마나 고민을 많이 하겠습니까 고민하다가 짐승의 마음이 이기면 그 돈이 지갑 속으로 들어가고 마음이 천사 편으로 기울면 주인을 찾아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갈등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은 갈등이 많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들이 짐승의 마음과 천사의 마음이 싸우고 있을 때 배후에서 응원을 하고 계시다는 것이버니다.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면서 이기도록 응원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는 이야기입니까 이것이 신앙생활의 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이 세상에서 이기는 모습을 보기 원하십니다. 늠름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또한 우리 몸이 당신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를 가리켜서 보배라고 했습니다. 또는 질그릇이라고 했고 성령님의 전이라고도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는 보배로운 옥합이라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우리 몸은 하나님의 영을 담고 살아가는 옥합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몸을 가리켜서 성령님의 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옥합인 내 몸은 언젠가 가장 요긴한 시점에 가서 하나님을 위해서 깨져야 합니다. 옥합은 깨지는 데 그 값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깼을 때 온 집안에 향기가 가득했고 주님께서 그렇게 좋아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옥합도 깨져야 값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내게서 향기가 나고 부서지는 소리가 납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소중한 인생을 살면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 전체를 책임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복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전승에 보면 그런 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식일을 열심히 지켰습니다. 바벨론으로 잡혀 가서도 안식일만은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랬더니 나중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켜 주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하면 안식일을 지키다 보니 2천년 동안 남의 나라에서 흩어져 살았는데도 그 민족이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존재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 힘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면 안식일을 지키는 전통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내 몸을 부수고 깨서 섬기고 봉사하는 삶을 살면 나중에는 교회가 나를 지켜 줍니다. 교회가 내 생명을 지켜 주고 내 영혼을 지켜 줍니다. 이것이 신앙인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이것이 하니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고 또한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신 이유입니다. 우리들이 신앙 안에서 이렇게 살 수만 있다면 그 인생은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같은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첫째 문답이 “사람이 제일 가는 목적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인간의 첫 번째 값어치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세상에 왜 태어났느냐 하면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의미가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 가면서 하나님은 끝내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십니다. 왜 이끌어 내셨는가 하면 그 이유가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만 섬기며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출애굽의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고향 갈데아 우르에서 불러내셨습니다. 왜 불러내셨는가 하면 그것도 하나님만을 섬기게 하시 위해서입니다. 갈데아 우르라는 곳은 우상의 도시입니다. 그곳에 있으면 순전한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서 가나안으로 보내십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목적입니다. 알고 보면 그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들도 이 세상으로부터 불러 내셨습니다. 왜 불러내셨습니까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불러내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섬길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잡신도 많습니다. 우상도 많습니다. 세상 유행도 많습니다. 재미도 많습니다. 사람이 그런 곳에 푹 빠져 살면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마지막에는 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세상 속에서 우리를 불러내셨습니다. 왜 불러내셨는가 하면 “오직 하나님만 섬기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가리켜서 성도라고 하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값이고 삶의 목적이고 신앙인이 된 이유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디 그렇습니까 하나님만 섬기라고 애굽에서 불러내어 놓았더니 나오자마자 우상을 섬깁니다. 잡다한 잡신들을 숭배합니다. 이방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화가나신 것입니다. 이것은 배은망덕입니다. 배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백성들의 버릇을 고치시기 위해 바벨론과 앗수르의 손에 붙여서 고난을 받게 하십니다. 그 결과 이 백성들이 얼마나 혹독한 고난을 당합니까 배은망덕은 이렇게 상대방으로 하여금 마음을 상하게 하고 무서운 분노를 유발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최소한 배은망덕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은혜를 저버리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가장 기본이 되는 마음이고 성숙한 모습입니다. 가끔 보면 부모들이 자식들로부터 실망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는 경우를 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참 불행한 일입니다. 세상에서 이것처럼 슬픈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배신감을 이기지 못해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배신 가운데서도 자식으로부터 당하는 배신이 가장 슬픈 배신일 것입니다. 그래서 단테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를 배신이라고 했습니다. 배은망덕이나 배신은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상하게 하는 부도덕입니다. 제가 오래전에 개를 한 마리 키웠습니다. 그 개는 근본도 없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잡종개로서 보신탕 집에서 환영하는 그런 개입니다. 누가 가져 와서 그냥 길렀습니다. 키우다 보니까 정이 들었습니다. 하는 짓이 아주 귀여웠습니다.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이 개가 반겨 주는데 온갖 아양을 다 떱니다. 그래서 목욕도 시켜 주고 안아 주고 먹여도 주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기대를 걸고 자꾸만 개에게 암시를 주었습니다. “너는 근본이 잡종이지만 좀 품위 있게 살아서 절대로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는다든가 함부로 싸는 일이 없도록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별수없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해라.” 그러면서 화장실 가는 법을 가르치고 밥을 줄 때도 그릇을 깨끗이 닦아서 깨끗한 밥만 주고 그랬습니다. 개가 그렇게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루는 밖에 나갔다 들어오니까 이 개가 무엇인가 열심히 먹으면서 본 척도 하지 않습니다. 이상해서 보니까 자신이 싸 놓은 것을 정신없이 먹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인은 본 체도 하지 않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까 순간적으로 분노가 일어나는데 얼마나 괘씸한지 빗자루로 사정없이 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보기 싫어서 다른 사람에게 주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실망감에서 나오는 분노입니다. 출애굽을 했으면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지긋지긋한 애굽을 빠져 나와 그들을 위해서 특별히 예비해 놓으신 가나안에 들어가 살면서도 애굽에서의 버릇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살 때의 못된 짓들만 흉내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얼마나 화가 나셨겠습니까 하나님은 바벨론과 앗수르라는 큰 막대기를 들어서 이 백성들을 사정없이 치신 것입니다. 배은망덕에서 오는 분노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실망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이렇게 사랑하시는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목적입니다. 두 번째 목적은 두고 보시기 위해서입니다. 왜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렇게 애착을 가지시는가 하면 “보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왜 자식을 낳습니까 그것은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커가는 모습을 보고 행복해 하려고 낳습니다. 자식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기쁨 중 가장 큰 기쁨입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때로 자식 자랑을 많이 합니다. 얼마나 귀엽습니까 어린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고 흐믓해 하지 않는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침이 마르도록 자식 자랑을 합니다. 자식이 그 어려운 입시에서 시험을 잘 보았습니다. 그래서 대학에 합격을 했습니다. 그때는 본인보다도 부모가 더 기뻐하고 좋아합니다. 부모는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기쁩니다. 낙방하는 아이의 부모 앞에서도 혼자 기뻐서 떠들며 자랑을 합니다. 부모는 자식 앞에서 푼수가 될 때가 많습니다.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은 그렇게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것은 인간만이 아니고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욥기서 1장을 보면 하루는 하나님이 사탄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딜 갔더냐.” “예, 세상을 두루 살펴보고 오는 중입니다.” “그럼 내 종 욥을 보았느냐. 그는 순전하고 정직하여 악을 모르는 사람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식 자랑입니다. 그것도 사탄에게 자랑을 하십니다.
왜냐하면 욥이 세상에서 너무나 깨끗하고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대견하고 자랑스러워 사탄 앞에서 자랑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들이 세상에서 잘 살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면서 그토록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말씀 안에서 잘 살아갈 때 가장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흡족한 마음으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창 12:3). 이것이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인간의 값은 이렇게 소중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대를 가진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넘어지고 실패하고 낙오될 때 하나님의 실망이 얼마나 크시겠습니까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식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는 부모처럼,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건전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 원하십니다. 자식이 세상에서 실패하고 넘어지고 낙오하고 병들어 사는 것을 보기 좋아하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부모의 마음은 한결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ㅜ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자신 만만하게 잘 살아가는 모습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뒤에서 응원도 하시고 격려도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성자로 만들어 놓지 않으셨습니다. 애초부터 인간을 성자로 만들어 놓으셨더라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실패하고 넘어지고 유혹받는 그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싸웠다 하면 100% 모두 이기고 살아갈 것인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들이 구원은 받은 사람들이지만 세상과 사워서 자신 있게 이긴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이긴다면 겨우 한두 번 이기고 대부분은 실패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넘어지고 나서 고민도 하고 실망도 하고 그럽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인간의 능력을 세상과 싸워서 겨우 이길 만한 힘만 부여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세상에서 살면서 여러 가지 유혹들과 싸우게 되는데 그때마다 이겨도 겨우 이길 정도밖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파스칼의 말대로 인간은 고민이 많은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중간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파스칼은 팡세 72장에서 인간은 중간적인 존재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공간적으로는 자연과 우주 사이에 위치한 중간적 위치에 있습니다.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능력도 중간입니다. 너무 큰 소리도 못 듣고 너무 작은 소리도 못 듣습니다. 너무 밝아도 못 보고 너무 어두워도 못 봅니다. 너무 가까워도 못 보고 너무 멀어도 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중간자입니다. 또 인간은 천사가 되기에는 부족하고 짐승이 되기에는 너무 넘치는 존재입니다. 이를테면 짐승이라고 하기에는 천사에 가깝고 찬사라고 하기에는 짐승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속에는 천사의 기질도 있고 짐승의 기질도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는 성 어거스틴이나 성 프랜시 스의 성자적인 영적 자질도 들어 있는가 하면 또 진시왕 같은 탕자적인 기질도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내 가냘픈 지체 속에는 성모 마리아나 나이팅게일 같은 천사적인 영성이 들어 있는가 하면 양귀비나 살로메 같은 육감적인 욕망도 들어 있습니다. 히틀러 같은 광폭함, 잔인함, 포악함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존파, 막가파 같은 잔인함이 우리들 마음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슈바이처 같은 인간애와 지킬 박사와 같은 고상한 인품도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중간자입니다. 이 말은 인간은 고민이 많은 존재라는 말입니다. 중간에 서서 이럴까 저럴까 고민이 많습니다.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내 마음이 짐승 편으로 기울면 타락하고 실패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 마음이 천사 편으로 기울면 승리하고 악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돈뭉치를 주웠습니다. 그 돈뭉치를 주워 들고 얼마나 고민을 많이 하겠습니까 고민하다가 짐승의 마음이 이기면 그 돈이 지갑 속으로 들어가고 마음이 천사 편으로 기울면 주인을 찾아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갈등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은 갈등이 많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들이 짐승의 마음과 천사의 마음이 싸우고 있을 때 배후에서 응원을 하고 계시다는 것이버니다.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면서 이기도록 응원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는 이야기입니까 이것이 신앙생활의 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이 세상에서 이기는 모습을 보기 원하십니다. 늠름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또한 우리 몸이 당신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를 가리켜서 보배라고 했습니다. 또는 질그릇이라고 했고 성령님의 전이라고도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는 보배로운 옥합이라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우리 몸은 하나님의 영을 담고 살아가는 옥합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몸을 가리켜서 성령님의 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옥합인 내 몸은 언젠가 가장 요긴한 시점에 가서 하나님을 위해서 깨져야 합니다. 옥합은 깨지는 데 그 값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깼을 때 온 집안에 향기가 가득했고 주님께서 그렇게 좋아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옥합도 깨져야 값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내게서 향기가 나고 부서지는 소리가 납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소중한 인생을 살면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 전체를 책임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복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전승에 보면 그런 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식일을 열심히 지켰습니다. 바벨론으로 잡혀 가서도 안식일만은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랬더니 나중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켜 주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하면 안식일을 지키다 보니 2천년 동안 남의 나라에서 흩어져 살았는데도 그 민족이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존재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 힘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면 안식일을 지키는 전통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내 몸을 부수고 깨서 섬기고 봉사하는 삶을 살면 나중에는 교회가 나를 지켜 줍니다. 교회가 내 생명을 지켜 주고 내 영혼을 지켜 줍니다. 이것이 신앙인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이것이 하니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고 또한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신 이유입니다. 우리들이 신앙 안에서 이렇게 살 수만 있다면 그 인생은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같은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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