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의 인도를 받는 삶 (요10:9-10)
본문
우리는 지난 시간에 양인 우리 성도들이 목자이신 예수님을 통해 그날 그날에 필요한 “꼴”을 얻는다는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갈수록 더욱 풍성한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도 생각했습니다. 만약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생명의 양식으로 생각하며 성취하지 못하면서, 오직 “떡”으로만도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자는 아직 예수님의 양이 아니든지, 비실 비실한 병든 양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상적인 생활의 연속 가운데서도 풍성한 삶을 얻지 못하고, 타성에 젖은 생활을 한다면, 그 또한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돌이켜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통해 도전을 받았습니다. 나는 매일 생명의 양식을 섭취하고 있는가 점점 더 풍성한 삶을 누리고 있는가 진지하게 자신의 상태를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과연 내가 매일 꼴을 먹고 있는지 점점더 풍성한 삶을 얻고 있는지그 현실적인 증거들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매일 꼴을 섭취하고, 더욱 풍성한 삶을 얻고 있는 성도에게는 그만한 현실적인 증거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현실적인 증거들을 확인할 방법이 무엇인지를 잘 익혀서 자신의 영적상태를 점검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 증거를 확인할 수 있는 시점은
1. 단시간에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양이라면, 매일의 말씀을 먹고 자라났다고 하는 그리스도의 양다운 증거가 그속에 있는 것인데, 이 증거는 날마다 새로운 무엇을 늘 깨닫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또 그렇게 되는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 시간에 놓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참으로 양식을 먹었는가 하는 것은 외면에서 보려고 할 때에 보통은 아무도 사람의 눈으로는 그것을 들여다 볼 길이 없습니다. 단시간에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들은, 말씀이라는 양식을 먹고서 자라난 증거라기 보다는, 당시의 기분이나 어떤 친분관계나 동기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열심이나 감정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정상적으로 말씀을 매일 섭취하는 가운데서 오는 풍성한 삶의 증거로써 나타난 열심인지, 아니면 일시적인 감정에서 나온 열심인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말씀이 매일 정상적으로 공급되어서 나오는 열심이 아니라, 일시적 감정에 의한 열심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이런 것을 주의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봉사나 일로서 열심을 내게 하거나, 성장시키려 해서는 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오래가지 못합니다. 목회하는 가운데 깨닫는 교훈 중의 하나는, 처음 교회에 나와서 얼마동안 봉사도 하고 교회의 많은 일에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이들은 반드시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교회 나온지 얼마 안되어서 열심을 내고 하는 분들을 보면 그 열심이 얼마나 갈까하는 걱정이 앞서곤 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일시적 감정에서 나온 열심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열심은 말씀을 매일 정상적으로 섭취하는데서, 그 증거로써 나오는 것입니다.
2. 오랜 시간이 지나서 나타납니다. 어떤 성도가 배를 곯았는지 안곯았는지를 알려면 긴 시간을 놓고 따져 보아야 합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말씀을 매일 매일 그날에 필요한 양식으로 섭취해 갈때에 거기에서 참된 신앙과 풍요한 삶이 형성하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감정에 의해 열심을 내기만 하지 오랜 시간 전혀 말씀이 그날 그날 제공되지 않으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후에 얼마나 곯았는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둘째, 오랜 시간후 나타나는 증거들은 그날에 필요한 양식인 말씀을 섭취할 때 당장에는 그렇게 많은 변화가 없는 것 같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증거들이 들어나게 됩니다. 그 증거들은 주로 사상적인 것과 일상생활로 나타납니다. 그 사람이 정말 매일 필요한 양식을 먹으며 살아왔는가를 확인할려면 그사람의 생각과 생활 두면을 유심히 살펴보면 쉽게 알수 있는 것입니다.
1. 사상(생각)의 변화 어떤 성도가 참으로 매일의 말씀을 양식으로 먹으며 살았다면, 그 성도의 생각이 일년이나 이년전과 많이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그 성도가 전에는 모르던 것들 전에는 가지지 않았던 거룩한 나라의 사상이나 사실에 대한 애착이나 동경을 가지고 있고, 전에는 가지지 않았던 것에 대한 깨달음을 이제는 가지고 있고, 또 전에 가졌던 희미하던 것이 자꾸 더 확연해지고 심오하고 고도적인 곳으로 올라갔다는 확실한 증거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사람이 무엇을 읽고 어떤 사상에 감염이 되어 있었다면, 일년동안 지나는 동안에 그 사람이 무엇에 감염되어 있다는 것을 자기도 모르게 나타내고 마는 것입니다. 그 말하는 것이나 남과의 대화나 교제에서 그것이 자연히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향기나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능력과 영광의 광채가 그런식으로 비추어지는 것입니다. 자기인생을 바라보는 눈이나, 사물과 사건을 인식하는 지식에 의한 생각(사상), 혹은 그가 가지고 있는 소위 생활 감정이라는 것, 그리고 계속적으로 일관해서 항상 움직이는 어떤 의지력의 발동이라든지, 이런 전인격적인 움직임이 어떤 방향을 취하고 있는가 어떤 성격을 취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자연히 보이는 것입니다.
2. 생활의 변화 이렇게 사상이 변화된 사람에게는 자연히 생활속에 변화가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교회에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이를테면, 전에는 그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서 냉담했는데, 얼마쯤 지난 다음에는 그 사람이 확고한 원칙 위에서 그 일에 대하여 적극적이 되었다면, 이것은 큰 변화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 사람이 과거에는 교회에서 하는 무슨 일들에 대해서 냉담까지는 안하더라도, 일을 시켜야만이 하고 자진해서 하지는 않더니, 그 사람이 참으로 거룩한 양으로서 양식을 먹고 자라나서 그 자라났다는 사실이 역력히 증거되는 날에는 차례 차례 각성을 해서 차츰 차츰 조그만 것이라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발휘하더니, 나중에는 그가 점점 장성해서 한해고 두해고 지나고 보면, 그가 변화되었다는 사실이 적극적으로 주님을 봉사하려는 그의 태도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생활 전체에 변동을 표시하는 하나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 양이 목자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초장에 이르러서 양식을 먹고 자라나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의 대화(말) 가운데 기독교적 사상이 자연스럽게 풍기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가보면 이야기가 여러 가지이고 그때마다 필요에 따라서 말들이 나오지만, 그말들을 장시간 들어보더라도 신앙의 기초의 어떤 확고한 것이라든지, 중요한 기독교적인 사상의 내용에 근거를 둔 그런 대화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 말은 꼭 어려운 철학이나 신학의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말이나 의견을 내는 것을 보면 불신자라도 다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상식적인 인간적인 이야기로 다 끝내고 마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인간관계로서의 이야기나 과거의 이야기를 하더라도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겪어 나올 수 있는 그런 생활담이나 경험담을 주로 이야기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생활에 대한 평범한 표면적 이야기만 할지라도, 그가 예수님의 양으로서 양식을 먹고 자라난 사람이라면 그 이야기가 하나의 간증이 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일상생활 이야기를 하는 속에도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양인 그 사람을 어떻게 자세히 보살피셨는가 어떻게 길러 주셨는가 하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만한 사례들이 나타나는 까닭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이런 것들이 없는데, 그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일부러 간증을 하지 아니해서 그런 것인지, 혹은 생활이 고갈해서, 혹은 깨달음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를 알수 없으나, 이런 일은 우리가 각각 반성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특히 구역예배후 대화의 내용을 보면, 살림장만한 것 자랑하는 내용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가 화제거리 입니다. 부동산 투기에 대한 화제도 큰 몫을 차지 합니다. 그래서는 안되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세상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 성도들의 모임에서까지 화제꺼리가 되어야 겠습니까 생활속에서 목자의 인도하심을 받는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 될 때, 그 모임에 속한 성도들이 매일 목자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양식을 먹고 장성하는 최종적 단계는
그런데 이런 생활의 변화나 사상(생각)의 변화는 단순한 변화가 아니고, 이것은 다른 말로하면장성이라고 합니다. 전에는 희미하던 것이 분명해지고, 전에는 미미하고 모르던 것을 더 잘 알고 명백하게 해나간다는 이것이 장성인데, 이 장성에는 늘 방향이 있고, 그래야만이 그것을 장성이라고 하는것입니다. 양이 목자의 뒤를 따라가는 것은 밤낮 자기만 잘 먹고 평온하게 살고, 주님을 의지해서 보호하심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최종에는무엇이든지 주님을 위해서 다 내던지고 무엇이든지 요구하시는대로 다 쓰겠습니다하는 이 생활의 위치에 들어가기 위해서 꼴도 먹고 잔잔한 시냇가에서 쉬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도달하는 곳이 어디냐면, 자발적으로이제 주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겠습니다!하는 데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1. 양과 목자의 관계 이상의 표시 그러면 이런 것은 양과 목자의 관계로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 이상은 양과 목자의 관계로 표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싸우는 군인”의 비유, “주의 종”, “법대로 힘을 겨루는 경기자”, “일군”, “그릇” 등의 표현을 했습니다. 즉주님께 대한 넘치는 사랑을 가지고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서라도 주를 따라 가겠다!는 이런 정신을 가진 사람들의 생활을 묘사하는 때에는,너는 그리스도의 정병이다!,너는 그리스도의 그릇이다!,너는 법대로 가서 힘을 겨루는 경기자이다!,너는 주인의 일을 맡아서 하기 위한 일군이다!라는 말들을 쓴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을 향해서 들어가는 처음 과정으로 양에게 먹을 것을 먹여 가면서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든지 양노릇만 하고 거기 앉아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우리를 기르시는 것도장성해서 그 장성의 분량에 합당하게 주의 영광을 짊어지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큰 목적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무시하고나는 항상 주님의 것을 따 먹기만 하면 좋다!하고 안일하게 지내려고만 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고도의 신앙이 아닙니다.
2. 사명자로 장성하는 것입니다. 주를 의지하지만, 동시에 주를 위해서 내게 주신 사명을 수행하는자로 장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의 양이지만, 양으로 끝난 사람들도 아니고 양으로 밤낮 주저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양과 같이 그의 인도하심을 늘 받고, 그의 주시는 양식을 먹고, 보호하심을 받아 살아야 하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의 정병 노릇도 해야 하는 것이고, 종노릇도 해야 하는 것이고, 일군 노릇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나는 예수님의 양으로 늘 길리움을 받고 있습니까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를 위해 쓰임받는 자로 자라고 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그렇다면과연 내가 매일 꼴을 먹고 있는지 점점더 풍성한 삶을 얻고 있는지그 현실적인 증거들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매일 꼴을 섭취하고, 더욱 풍성한 삶을 얻고 있는 성도에게는 그만한 현실적인 증거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현실적인 증거들을 확인할 방법이 무엇인지를 잘 익혀서 자신의 영적상태를 점검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 증거를 확인할 수 있는 시점은
1. 단시간에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양이라면, 매일의 말씀을 먹고 자라났다고 하는 그리스도의 양다운 증거가 그속에 있는 것인데, 이 증거는 날마다 새로운 무엇을 늘 깨닫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또 그렇게 되는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 시간에 놓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참으로 양식을 먹었는가 하는 것은 외면에서 보려고 할 때에 보통은 아무도 사람의 눈으로는 그것을 들여다 볼 길이 없습니다. 단시간에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들은, 말씀이라는 양식을 먹고서 자라난 증거라기 보다는, 당시의 기분이나 어떤 친분관계나 동기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열심이나 감정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정상적으로 말씀을 매일 섭취하는 가운데서 오는 풍성한 삶의 증거로써 나타난 열심인지, 아니면 일시적인 감정에서 나온 열심인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말씀이 매일 정상적으로 공급되어서 나오는 열심이 아니라, 일시적 감정에 의한 열심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이런 것을 주의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봉사나 일로서 열심을 내게 하거나, 성장시키려 해서는 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오래가지 못합니다. 목회하는 가운데 깨닫는 교훈 중의 하나는, 처음 교회에 나와서 얼마동안 봉사도 하고 교회의 많은 일에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이들은 반드시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교회 나온지 얼마 안되어서 열심을 내고 하는 분들을 보면 그 열심이 얼마나 갈까하는 걱정이 앞서곤 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일시적 감정에서 나온 열심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열심은 말씀을 매일 정상적으로 섭취하는데서, 그 증거로써 나오는 것입니다.
2. 오랜 시간이 지나서 나타납니다. 어떤 성도가 배를 곯았는지 안곯았는지를 알려면 긴 시간을 놓고 따져 보아야 합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말씀을 매일 매일 그날에 필요한 양식으로 섭취해 갈때에 거기에서 참된 신앙과 풍요한 삶이 형성하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감정에 의해 열심을 내기만 하지 오랜 시간 전혀 말씀이 그날 그날 제공되지 않으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후에 얼마나 곯았는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둘째, 오랜 시간후 나타나는 증거들은 그날에 필요한 양식인 말씀을 섭취할 때 당장에는 그렇게 많은 변화가 없는 것 같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증거들이 들어나게 됩니다. 그 증거들은 주로 사상적인 것과 일상생활로 나타납니다. 그 사람이 정말 매일 필요한 양식을 먹으며 살아왔는가를 확인할려면 그사람의 생각과 생활 두면을 유심히 살펴보면 쉽게 알수 있는 것입니다.
1. 사상(생각)의 변화 어떤 성도가 참으로 매일의 말씀을 양식으로 먹으며 살았다면, 그 성도의 생각이 일년이나 이년전과 많이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그 성도가 전에는 모르던 것들 전에는 가지지 않았던 거룩한 나라의 사상이나 사실에 대한 애착이나 동경을 가지고 있고, 전에는 가지지 않았던 것에 대한 깨달음을 이제는 가지고 있고, 또 전에 가졌던 희미하던 것이 자꾸 더 확연해지고 심오하고 고도적인 곳으로 올라갔다는 확실한 증거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사람이 무엇을 읽고 어떤 사상에 감염이 되어 있었다면, 일년동안 지나는 동안에 그 사람이 무엇에 감염되어 있다는 것을 자기도 모르게 나타내고 마는 것입니다. 그 말하는 것이나 남과의 대화나 교제에서 그것이 자연히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향기나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능력과 영광의 광채가 그런식으로 비추어지는 것입니다. 자기인생을 바라보는 눈이나, 사물과 사건을 인식하는 지식에 의한 생각(사상), 혹은 그가 가지고 있는 소위 생활 감정이라는 것, 그리고 계속적으로 일관해서 항상 움직이는 어떤 의지력의 발동이라든지, 이런 전인격적인 움직임이 어떤 방향을 취하고 있는가 어떤 성격을 취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자연히 보이는 것입니다.
2. 생활의 변화 이렇게 사상이 변화된 사람에게는 자연히 생활속에 변화가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교회에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이를테면, 전에는 그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서 냉담했는데, 얼마쯤 지난 다음에는 그 사람이 확고한 원칙 위에서 그 일에 대하여 적극적이 되었다면, 이것은 큰 변화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 사람이 과거에는 교회에서 하는 무슨 일들에 대해서 냉담까지는 안하더라도, 일을 시켜야만이 하고 자진해서 하지는 않더니, 그 사람이 참으로 거룩한 양으로서 양식을 먹고 자라나서 그 자라났다는 사실이 역력히 증거되는 날에는 차례 차례 각성을 해서 차츰 차츰 조그만 것이라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발휘하더니, 나중에는 그가 점점 장성해서 한해고 두해고 지나고 보면, 그가 변화되었다는 사실이 적극적으로 주님을 봉사하려는 그의 태도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생활 전체에 변동을 표시하는 하나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 양이 목자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초장에 이르러서 양식을 먹고 자라나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의 대화(말) 가운데 기독교적 사상이 자연스럽게 풍기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가보면 이야기가 여러 가지이고 그때마다 필요에 따라서 말들이 나오지만, 그말들을 장시간 들어보더라도 신앙의 기초의 어떤 확고한 것이라든지, 중요한 기독교적인 사상의 내용에 근거를 둔 그런 대화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 말은 꼭 어려운 철학이나 신학의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말이나 의견을 내는 것을 보면 불신자라도 다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상식적인 인간적인 이야기로 다 끝내고 마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인간관계로서의 이야기나 과거의 이야기를 하더라도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겪어 나올 수 있는 그런 생활담이나 경험담을 주로 이야기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생활에 대한 평범한 표면적 이야기만 할지라도, 그가 예수님의 양으로서 양식을 먹고 자라난 사람이라면 그 이야기가 하나의 간증이 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일상생활 이야기를 하는 속에도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양인 그 사람을 어떻게 자세히 보살피셨는가 어떻게 길러 주셨는가 하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만한 사례들이 나타나는 까닭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이런 것들이 없는데, 그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일부러 간증을 하지 아니해서 그런 것인지, 혹은 생활이 고갈해서, 혹은 깨달음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를 알수 없으나, 이런 일은 우리가 각각 반성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특히 구역예배후 대화의 내용을 보면, 살림장만한 것 자랑하는 내용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가 화제거리 입니다. 부동산 투기에 대한 화제도 큰 몫을 차지 합니다. 그래서는 안되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세상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 성도들의 모임에서까지 화제꺼리가 되어야 겠습니까 생활속에서 목자의 인도하심을 받는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 될 때, 그 모임에 속한 성도들이 매일 목자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양식을 먹고 장성하는 최종적 단계는
그런데 이런 생활의 변화나 사상(생각)의 변화는 단순한 변화가 아니고, 이것은 다른 말로하면장성이라고 합니다. 전에는 희미하던 것이 분명해지고, 전에는 미미하고 모르던 것을 더 잘 알고 명백하게 해나간다는 이것이 장성인데, 이 장성에는 늘 방향이 있고, 그래야만이 그것을 장성이라고 하는것입니다. 양이 목자의 뒤를 따라가는 것은 밤낮 자기만 잘 먹고 평온하게 살고, 주님을 의지해서 보호하심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최종에는무엇이든지 주님을 위해서 다 내던지고 무엇이든지 요구하시는대로 다 쓰겠습니다하는 이 생활의 위치에 들어가기 위해서 꼴도 먹고 잔잔한 시냇가에서 쉬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도달하는 곳이 어디냐면, 자발적으로이제 주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겠습니다!하는 데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1. 양과 목자의 관계 이상의 표시 그러면 이런 것은 양과 목자의 관계로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 이상은 양과 목자의 관계로 표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싸우는 군인”의 비유, “주의 종”, “법대로 힘을 겨루는 경기자”, “일군”, “그릇” 등의 표현을 했습니다. 즉주님께 대한 넘치는 사랑을 가지고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서라도 주를 따라 가겠다!는 이런 정신을 가진 사람들의 생활을 묘사하는 때에는,너는 그리스도의 정병이다!,너는 그리스도의 그릇이다!,너는 법대로 가서 힘을 겨루는 경기자이다!,너는 주인의 일을 맡아서 하기 위한 일군이다!라는 말들을 쓴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을 향해서 들어가는 처음 과정으로 양에게 먹을 것을 먹여 가면서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든지 양노릇만 하고 거기 앉아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우리를 기르시는 것도장성해서 그 장성의 분량에 합당하게 주의 영광을 짊어지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큰 목적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무시하고나는 항상 주님의 것을 따 먹기만 하면 좋다!하고 안일하게 지내려고만 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고도의 신앙이 아닙니다.
2. 사명자로 장성하는 것입니다. 주를 의지하지만, 동시에 주를 위해서 내게 주신 사명을 수행하는자로 장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의 양이지만, 양으로 끝난 사람들도 아니고 양으로 밤낮 주저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양과 같이 그의 인도하심을 늘 받고, 그의 주시는 양식을 먹고, 보호하심을 받아 살아야 하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의 정병 노릇도 해야 하는 것이고, 종노릇도 해야 하는 것이고, 일군 노릇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나는 예수님의 양으로 늘 길리움을 받고 있습니까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를 위해 쓰임받는 자로 자라고 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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