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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들이 아기 예수님을 만났다 (눅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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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은 사람들에게 남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성탄절을 둘러싼 아름다운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본래 이기적입니다. 자기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당신 자신이 지금 누군가에게 자선을 베풀고 있는지 스스로 반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불쌍한 고아를 돌보고 있습니까 굶주린 이웃을 돌보고 있습니까 지구촌의 굶주린 현장에 구조물자를 보내는 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까 이제 아시겠습니까 사람들은 나를 포함하여 본래 이기적입니다. 그러나 성탄절은 이런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게 했습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생각하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서 가장 귀한 선물을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성탄절을 둘러싼 아름다운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아마 들어보면 다들 생각이 날 것입니다. 스쿠루지 아저씨 이야기가 있습니다. 노랭이 스쿠루지 아저씨가 성탄 전날 꿈을 꾸다가 죄에 대한 심판이 어떠한지 절실하게 깨닫고 새로운 마음으로 성탄절을 맞이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만을 위해 돈을 모으고 자선이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수전노가 이웃의 어려움을 생각하고 돕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단편소설도 있습니다.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사는 한 부부가 상대방을 기쁘게 해 주려는 마음으로 각각 성탄 선물을 준비합니다. 남편은 가보와 다름없는 회중시계를 팔아 아내의 아름다운 금발 머리에 꽂을 비녀를 준비했고, 아내는 자신의 긴 금발머리를 짤라 팔아서 남편의 시계를 꿸 시계줄을 샀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과 희생으로 준비한 선물이 소용이 없게 되었지만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희생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고 있지 않습니까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값진 교훈도 얻을 수 있습니다. 동방박사 이야기도 있습니다.
네번째 동방박사 이야기도 있습니다. 현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을 위해 구호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의 한 구호단체에 최근 한 국민하교 여학생이 8만원과 함께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저는 보통 아이들보다 살이 찐 편입니다. 그리고 음식도 많이 먹는 편입니다. 살이 찐 내 모습을 볼 때마다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미안해요. 그래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모아둔 이 돈을 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 보냅니다.” 요즘 우리도 이 소녀의 양심을 가져야 하겠다. 성탄절과 연말이 과소비와 향락으로 얼룩져선 안된다.(국민일보 겨자씨 95.12.21) 겸손한 사람이 곧 낮은 사람은 아닙니다. 동방 박사들은 겸손한 사람들이었습니다만 지위가 낮은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이들과 비교하면 베들레헴 지경에서 밤중에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은 겸손한 사람들이라기보다 지위가 낮은 비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아기 예수님을 제일 먼저 뵐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겸손히 낮아지신 것은 낮은 자들의 접근을 허용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일 그분께서 왕궁에서 탄생하셨다면 과연 목자들이 그분을 뵐 수 있었겠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향해 팔을 벌리며 초청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사람들 가까이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마음 바로 바깥에 계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 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지체 높은 사람이 다 교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이 낮은 사람이 다 겸손한 사람은 아닙니다. 아무리 낮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교만하면 주님을 뵐 수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약속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나아가십시오. 주저하지 마십시오. 그분의 뜻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사람이면 누구나 생일이 있다. 그 날을 맞는 사람들은 자기의 생일을 다른 사람들이 진심으로 축하해 주기를 원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생일을 거창하게 맞이한다. 예를 들어보자 고대 이집트의 절대 주권자였던 파라오들은 자기의 생일날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수백명의 신하들에게 거창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자기가 사랑하는 안토니우스에게 화려한 생일 만찬을 차려주었는데 그때 무진장한 선물을 내려 연회에 빈손으로 왔던 손님들이 부자가 되어 돌아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뻑적지근한 생일이 있다. 조선왕조 500년의 왕통을 말아먹은 고종의 생일이다. 그는 자기의 생일을 만수성절이라고 이름짓고 그날을 국가적인 경축일로 삼았다. 그래놓고 생일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만조 백관에게 공식적으로 뇌물을 받았으며 허기진 백성은 아랑곳 하지 않고 엄청난 잔치를 베푼 것으로 유명하다. 생일날 어이없는 살인을 저지른 사람도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헤롯왕이다. 그는 생일을 자축하다가 세례요한의 목을 베어 버리는 악행을 범했다. 역사적인 사실은 아니지만 춘향전에 등장하는 변학도는 자기의 생일을 뜻있게 한다고 춘향이를 닥달하다가 오히려 예기치 못한 파멸을 당한다. 자기의 생일을 지나치게 자축했던 사람들치고 제대로 된 삶을 산 사람이 없다. 인간의 교만을 싫어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실까 예수님은 자기의 생일을 자축하신 적이 없다. 그의 제자들 또한 주님의 생일을 기억하고 잔치상을 차려주었다는 기록이 없다. 그들은 모두 생일에 무관심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온 세계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잃어버린 주님의 생일 대신에 일 년 중 가장 의미로운 날, 12월 25일을 그분의 생일로 정하여 범세계적인 축제를 벌이면서 즐거워 하고 있다. 무릇 사람의 생일은 이렇게 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자신은 자신의 생일에 무관심했는데 다음 후세인들이 그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유달리 자기의 생일을 챙기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배우자가 자기의 생일에 무관심하다는 이유로 싸움을 벌여서 결국 이혼까지 하는 사례도 있다. 이북의 김일성과 김정일을 보라. 그들은 자신들의 생일을 만고의 경축일로 떠벌리고 있다. 그래서 고혈을 짜낸 인민들의 피로 잔치를 벌이고 그들은 호화롭게 배를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말로가 역사를 통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우리가 쉽게 짐작할 수 있으니 어찌 불쌍한 인간이라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우리의 생일은 나를 경축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다음, 나를 낳아 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생일은 나의 날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날이요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날임이 분명하다. 성탄절 축제가 언제부터 시작 되었을까 기독교의 성립 후 처음 300년 동안에는 성탄절 축제가 없었다. 왜냐하면 온 교회의 관심이 오직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 승천하신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만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는 성육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 사상가들이 주님의 인성에 대하여 좀 더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부터 교회도 성육신의 심오한 의미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특별히 동방의 기독교인들이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의 불가사의한 사건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였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서 교회는 성탄절을 기쁨과 경이로써 축하하기 시작하였다. 오늘 우리에게 알려진 성탄절에 대한 기록 중 최초는 4세기 초기의 이집트 파피루스에 남은 기록이다. 이 파피루스에는 수많은 손자국들이 찍혀 있는데, 이것은 이미 그 파피루스가 많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파피루스는 4세기 초의 성탄절이 1월 6일 저녁부터 7일까지 축하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 1월 6일을 성탄절로 지냈을까 2세기에 있었던 이단 분파인 알렉 산드리아의 영지주의 추종자들은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신 날(1월 6일 또는 10일)을 축제일로 지켰다. 그들은 예수께서 세례를 통하여 신성의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또한 1월 5-6일 밤엔 나일강 물이 놀라운 기적의 힘을 갖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 날을 에피파니(Epiphany) 또는 ‘현현’이라고 불렀다. 한편 정통적인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것을 믿지는 않았지만 그 중요성은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세례 받으심과 탄생을 연결시키기 위해서 역시 1월 6일을 축제일로 선택했다. 이 에피파니 축제는 오랫동안 팔레스틴에서 장엄하게 행해졌다. 성탄절이 1월 6일에서 12월 25일로 바뀐 것은 언제부터인가 그리고 왜 바뀌게 되었나 가장 유력한 가설은 AD 325년에서 354년 사이에 로마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AD 336년에는 그리스도의 성탄일이 12월 25일로 증명되고 모두가 그것을 신봉하도록 공포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특히 12월 25일은 정복되지 않는 태양신을 경배하는 이교도들의 축제일이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 빛의 축제가 세상의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드려지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성 암부로스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새로운 태양’이라고 말했다. 한 동안은 태양의 축제를 그리스도의 성탄절에 통합한 것이 많은 혼란을 주었다. 그리고 많은 반대도 있었다. 성탄절을 12월 25일로 확정지은 것은 크리소스톰에 의해서였다.
그러므로 주님의 탄생은 인간에게 가장 큰 기쁨의 사건이다. 인간의 일, 세상의 일은 결코 "온 백성에게 미치는 큰 기쁨"은 되지 못한다. 우리 속담에 비가 오면 나막신 장수가 웃고 날이 맑으면 짚신 장수가 웃는다. 인간의 일이란 언제나 상대적이다 그러나 주님의 탄생은 온 백성에게 기쁨을 주는 좋은 소식이다
1. 주님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게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 하나님과 불화한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은 없다.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은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진정한 친구가 없다. 하나님과 화목할 때 인간은 행복하고 모든 것과도 화목하게 된다. 주님은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려고 오셨다.
2. 주님은 우리에게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오셨다. 사람은 누구나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신음한다. 그러나 주님이 오심으로 우리의 죄는 우리 어깨에서 벗어지게 되었다. 인간의 최대 축복은 죄짐을 벗는 것인데 주님이 이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기 위하여 오셨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므로 주님의 오심은 모든 사람에게 기쁨의 소식이다.
3. 주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다. 어떠 철학자는 "인간은 문제를 가진 존재"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는 분이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누구든지 주님을 만난 사람은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간증했다. 누가복음 7:20에서 주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듣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 다 하라"고 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기쁨이 되시는 분이다.
4. 주님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시는 분이므로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이다. 주님은 말구유에서 나셨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도 주님을 맞이할 수 있다. 크리스마스(Christmas)란 말은 그리스도(Christ)와 마스(mas) 의 두 말이 합하여 된 말이다. "마스"란 말은 "예배"란 말과 같다. 카톨릭교회에서 예배를 "미사"를 드린다고 하는데 "미사"와 "마스"는 같은 말이다. 크리스마스란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고 예배하는 거기에 참 뜻이 있다. 왜 우리가 그리스도를 예배해야 할까 그 이유는 2천년전 유대 베들레헴에서 그분이 유대인으로 태어나셨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다. 단순한 "나심"의 사건에 연결짓는다면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을 성자로 모시고 그의 생일을 기념하는 날이 될지언정 그가 예배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예배의 근거는 "나심"(자연인의 탄생) 때문이 아니요, "오심"의 사건, 곧 성육신(Incarnation)에 있다.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속에서 인간 구원을 위해 그의 "오심"의 사건을 알려주는 칭호는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오심의 사건은 구속사적으로 의미를 지녀야 된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께는 영광을,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민족과 국가 간에는 온전한 평화를 이루기 위함이었다(눅2:14).
(2) 성육신 하셔서 영원자, 구원자로 오셨다(빌2:6-11).
(3)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셨다(눅4:18-19).
(4) 죄의 어둠과 실패와 좌절의 어둠을 이기는 빛으로 오셨다(요1:4-5).
(5) 복을 주시고 더욱 풍성하게 하기 위해 오셨다(요10:10). 같은 인간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동물처럼 천대받는 차별사회 속에서 만인은 다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동등한 자녀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셨다. 항상 이웃 속에 함께 어울려 살면서도 자기 이웃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참 이웃이 누군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그분은 오셨다. 참 종교는 제사(종교의식) 그 자체 보다도 사랑의 실천(순종)에 있다는 순수한 진리를 알려주기 위해 예수님은 오셨다. 민중들의 가난, 질병, 고독함, 공포 그리고 각종 악령에 고통받는 아픔을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 죄의 댓가로 죽음이란 제한성 속에 사는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대속의 제물(어린양)이 되고자 예수님은 오셨다. 혼돈과 무질서의 역사 속에서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세상 인간들에게 천사가 전한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는 메시지를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그분에게 존경과 경배의 예를 표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크리스마스는 뜻도 모르고 막연하게 흥청대거나, 단순한 연례행사로만 그쳐서는 안된다. 보다 엄숙하고 정중한 것이 되어야 한다. 어느 추운 겨울, 함박눈이 몹시 내리는 성탄절 날이었습니다. 신앙심이 깊은 남편을 따라 성탄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며 아내는 계속 의심을 토해 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실 수 있지 난 아무리 믿으려 해도 믿을 수가 없어요!" 남편은 의심하는 아내에게 계속 설명하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집 문 앞에 이르러 이상한 광경이 시야에 들어 왔습니다. 참새들이 눈이 너무 많이 쌓여 먹이를 얻지 못해 집 문 앞에서 비실비실 대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얼른 집으로 들어가 먹이를 가져와서는 새들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그러나 새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푸드득 하며 날아 가 버렸습니다. 남편은 실망하여 "새들아! 난 너희들을 해하려는 것이 아니야, 이것을 먹지 않으면 너희들은 굶어서 얼어 죽는다구" 새들이 사람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습니다. 남편은 날아가는 새들의 뒷모습을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뜻을 어떻게 너희에게 전할 수 있겠니 내가 새가 되지 않고서는 " 이 말을 듣고 있던 아내의 뇌리에 번쩍 무엇인가 스쳐 갔습니다. "그래!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속 사랑을 배풀었지만 인간들은 하나님 품을 떠났던거야.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것이야. 그리고 그 사랑을 십자가로 표현 하셨던 거야" 아내는 고개를 떨구고 조용히 집안으로 들어가 기도 하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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