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교육, 방목교육 (시23:1-6)
본문
요즈음 어린이들에게 최고 인기프로인 꼬꼬마 텔레토비 아시지 요 이 텔레토비의 기획자는 '앤 우드'라는 예순 한 살의 할머니 입니다. 텔레토비 만으로 약 1070억원 정도 벌어들여서 올 해 영 국 내 500대 부자 대열에 올랐습니다. 우드의 이러한 성공은 역 설적이게도 `불우한 어린시절'에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어릴 때 오빠 2명을 모두 잃은 우드는 영국의 소도시인 '더럼'에서 할머니 와 한방을 쓰며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노상에서 막일을 할 정도 로 형편이 어려웠던 우드는 친구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유일한 취미 거리가 텔레비젼 보는 것입니다. 그가 82년 'TV-am' 어린이 텔레비전 총책임자를 거쳐, BBC와 텔레토비를 제작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영화계의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도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혼한 어머니에다 핏줄은 유대인입니다. 또 딸 많은 집안의 장남입니다. 불안한 가정환경입니다. 고 등학교 재학시절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학우들로부터 갖은 모욕을 받고 구타까지 당해야 했습니다. 대학 때는 성적이 C학점으로 일 관했습니다. 이런 남들과 같지 못한 불안한 환경에서도 자신의 우뚝 선 세계를 건설했습니다. 이런 걸 보면 부모로서 좀 모자라는 환경 때문에 자녀교육에 기 죽을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남들과 같지 못한 환경 때문에 열등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쓰레기더미에서도 장미꽂은 피 고, 시궁창 같은 연못에서도 연꽂은 피는 겁니다. 다 부모하기 나름이고 자녀 하기 나름입니다. 부모된 우리가 포기하지 않으면 자녀는 바로 자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수많은 자녀 교육이론이 있는 데 어떻게 키워야 가장 올바르게 키우는 것일 까요
성경은 시편 23편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그것은 바로 목자 (牧者)교육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지요. 여호와는 아버지도 되지만 우리의 목자도 되십니다. 아버지의 역할 과 목자의 역할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시편기자도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 을 선한 목자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부모 교육에서도 목자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이 목자 교 육은 부모로서의 많은 단점들을 보완해 줄 수 있습니다. 부모는 핏줄로 맺어진 자연스런 관계입니다. 뗄 레야 뗄 수 없는 혈연적 관계이지요.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부모는 아무나 될 수 있습니다. 생식의 능력만 갖추면 됩니다. 장애자도, 정신질 환자도, 청소년도 아이를 출산하면 부모가 자연스럽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핏줄관계가 곧 이상적인 부모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핏줄 이상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 까닭에 부 모는 모름지기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 목자가 되어야 합니까 목자는 세 가지의 장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객관적이고, 전문적이고, 목적 의식적이기 때문입니다. 애정에 관한 한, 부모는 맹목적이지만, 목자는 목적지향적입니다. 맹목적(盲目的)이라는 말 잘 아시지요 눈을 감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객관적인 지대에서 또렷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 고 목자가 애정이 없는 게 아닙니다. 선한 목자는 객관적이 될 뿐더러 목숨을 바치기까지 합니다. 우리 주님도 선한 목자가 되 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녀에 대해 이런 목자의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들 자기 자녀에 대해서는 얼마나 맹목적인 애정이 되는지 모 릅니다. 그냥 놔 둬도 콸콸 흘러가는 것이 부모 된 핏줄의 애정 입니다. 특수한 소수를 빼고는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무조건 넘치는 애정이 자녀를 망치기 일 수라는 사실입니다. 홍수가 왜 납니까 물이 다스려지지 못해서 납니다. 통제되지 못해서 홍수가 납니다. 통제되지 못한 큰물은 사람을 죽이고 집 을 무너뜨립니다. 때문에 물은 통제되어야 합니다. 치수(治水)입니다. 애정도 통제되어야 합니다. 치애(治愛)입니다. 부모 된 애정 은 자연스러운 것이니까, 이제는 그 정을 좀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정을 좀 떼야 하겠습니다. 목자의 양육으로 좀 객관화되어야 하겠어요. 그러면 이런 목자교육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바로 방목교육입니다. 오늘 시편 23편에서 제시한 방목 교육의 원리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환경조성의 교육입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 도하시는도다 "(2-3절)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것이 목자의 제일 우선 되는 임무입니다. 풀도 없는 거친 사막이 아닙니다. 급류가 휘몰아치는 그런 물가도 아닙니다. 안전하고 풍족한 환경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여기서부터 방목은 시작되는 겁니다. 환경 조성입니다. 목자는 자갈을 물리고 굴레를 씌우는 데 열심이어서는 안됩니다.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를 찾는 데 열심이어야 합니다. 안전하고 풍요로운 곳, 그 다음에는 방목인 거지요. 고삐를 죄는 것은 쉽지 만, 푸른 초장을 찾는 것은 무척 어렵습니다. 열심히 자녀교육 하는 데도 아이들은 왜 짜증만 늘어나고 자꾸 비뚤어집니까 방목 교육을 안 해서 그렇습니다. 푸른 목초지를 찾아줄 생각은 않고 무조건 고삐와 굴레만 씌워서 끌고 다닐 생각을 하니, 둘 다 힘들고 짜증만 늘어 나는 겁니다. 거칠고 어설 픈 곳으로 몰아넣고 고삐를 죈다고 됩니까 푸른 초장만 찾아 주 면 훨씬 힘이 덜 듭니다. 목자는 힘이 덜 들어서 좋고 양떼는 자유롭고 살쪄서 좋습니다. 방치교육과 방목교육은 다릅니다. 방치교육은 죽이지만 방목교육 은 풍성하게 살립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도 "내가 온 것은 양으 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얻어 풍성豊盛케 하려 함이니라"(요 10:10)했습니다. 방치 교육이 아닌 방목교육을 해 보세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갈을 물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굴레를 씌우지도 않습니다. 방목이지요. 하나 하나 간섭하고 통제 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이런 인상으로 간직하고 있는 분 이 계신데 잘못된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큰 울타리를 쳐 놓고 우리들을 방목하십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풀을 뜯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쉴만한 물가, 푸른 초장입니다., 오늘 시편 23편은 방목의 원형입니다. 평화로운 한 폭의 방목 장 면입니다. 그래서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고 합니다. 악다 구니 쓰는 부모, 강제하고 통제하고 구속하는 부모, 그래서 여러분의 자녀가 오늘도 생기가 넘치는 게 아니라 죽을 맛이라고 하 지는 안는지요 기억하실 일입니다.
둘째로는 신뢰교육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절) 양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쳐 박혀 있을 때에라도 인도 가 능한 사람이 바로 목자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유대광야 의 깊은 '와디'입니다. 이곳은 대단히 위험한 곳입니다. 양들이 이 런 위험한 곳을 소란을 피우지 않고 지날 수 있는 것은 목자에 대한 신뢰감 때문입니다. 만약 양떼들이 목자에 대한 신뢰감을 잃고 저 마다 앞다퉈 탈출하려고 소란을 피우면 양떼들이 서로 깔려죽고 골짜기에 빠져 죽을 것입니다. 건물 안에서 화재가 났을 때 인도자를 믿고, 당황하거나 몰려들 지 않으면 큰 피해는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신뢰감이 중요합니다. 신뢰감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벗어날 수 있게 해 줍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부모에 대 한 신뢰감만 있으면 위험지대를 벗어납니다. 작년에 어린이 여름 야외수련회를 성주 금수 계곡에서 1박2일 할 때인데, 거기 개울가에 외나무다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 외나무 다리를 건너는 데 아주 재미있는 광경이 벌어 졌습니다. 평소 교회 안에서 얌전하게 굴던 녀석들이 겁먹고 못 건너갈 줄 알았는 데, 정반대 현상이 벌어진 겁니다. 얌전한 아이들은 타박타박 잘 도 건넜습니다.
그런데 제일 왈가닥인 녀석들이 의외로 겁을 먹 고 못 건너가,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는 겁니다. 신뢰감에 대한 반응입니다. 평소 부모에 대한 신뢰감이 풍부한 사람은 선생님에 대한 신뢰감도 큽니다. 그리고 낯선 외나무 다리에 대한 신뢰감 도 커지는 거지요. 선생님이 건너 가셨고, 또 저 편에서 오라고 하니까, 믿고 가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신뢰감이예요. "해를 두려워 않을 것은" 공동번역에는 '무서울 것 없어라'고 했습니다. 지극한 신뢰감입니다. 신뢰감이 많으면 일단 겁이 없어 집니다. 도전의식이 생깁니다. 부모에 대한 신뢰감은 자신에 대한 신뢰감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사물과 일에 대해서는 안정감으 로 나타납니다.
셋째는 존귀와 칭찬의 교육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5절) 원수 앞에서도 칭찬의 상을 베푸는 목자입니다. 원수들 보라는 듯 상(床)을 차려 주십니다. 상을 베푼다는 것은 교제와 언약의 상징입니다.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존귀의 상징입니다. 유대나라 에서는 귀족들이 잔치에 참여할 때 머리나 수염에 기름을 발랐다 고 합니다. 기름을 머리나 수염에 바른다는 것은 존귀하게 해 주 신다는 것입니다. 자녀교육에서는 존귀와 칭찬의 상을 자주 베풀 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요즈음 어떤 부모들은 원수는커녕 친구 앞에서 자기 자녀를 비교 하고 타박을 합니다. 자녀끼리도 서로 비교하고 타박을 합니다. 오늘 주보에 실은 자녀 망치기 10계명 중에 이런 구절이 있지요 "남과 비교해 말한다. 형 동생 언니의 학교성적이나 성격과 비교해 가며 혼내준다. 평생 마음의 상처를 입을 것이다. 남들 앞에서 망신을 주며 잘 못을 지적하라. 마음에 증오를 품을 것이다" 존귀와 칭찬은 자녀의 마음에 담긴 상처와 증오심을 치유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목자교육입니다. . 그러면 이런 목자교육, 방목 교육을 하면 결과가 어떻게 될까요 두 가지 복된 고백이 나옵니다. 바로 "부족함이 없다"라는 것과 "집에 영원히 거한다"라는 고백입니다. 이 축복된 고백이 자녀의 입에서 나오는 겁니다. 오늘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삼은 시편 기 자의 고백입니다.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 "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6절) 이렇듯 부족함이 없는 목자상이 바로 부모상이어야 합니다. 아 쉬움을 못 느끼는 자녀들. 이것이 가장 큰 자녀 축복 아닙니까 이 세상에 왜 결핍이 없겠어요 아무리 풍족해도 결핍은 느낄 수 있습니다. 모든 걸 채워준다고 결핍을 안 느끼나요 결핍은 전 혀 심리적인 문제입니다. 자녀의 심리에 결핍 의식이 사라져야 합니다. 환경조성, 신뢰감, 존귀와 칭찬을 주면, 자녀의 마음에서 결핍이 사라집니다. 아무리 결핍해도 아쉬움을 느끼지 않고 자족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축복 중의 축복인 것입니다. 이 구절을 공동번역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부 모의 은총과 복에 겨워하는 자녀, 영원히 부모님의 집에 거하겠 다고 하는 자녀! 이게 바로 성공적인 자녀 양육입니다. 자녀들이 자라는 청소년 시절에는 물론이고 성장해서도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내가 아버님 어머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런 고백이 울려 퍼지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시편 23편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그것은 바로 목자 (牧者)교육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지요. 여호와는 아버지도 되지만 우리의 목자도 되십니다. 아버지의 역할 과 목자의 역할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시편기자도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 을 선한 목자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부모 교육에서도 목자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이 목자 교 육은 부모로서의 많은 단점들을 보완해 줄 수 있습니다. 부모는 핏줄로 맺어진 자연스런 관계입니다. 뗄 레야 뗄 수 없는 혈연적 관계이지요.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부모는 아무나 될 수 있습니다. 생식의 능력만 갖추면 됩니다. 장애자도, 정신질 환자도, 청소년도 아이를 출산하면 부모가 자연스럽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핏줄관계가 곧 이상적인 부모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핏줄 이상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 까닭에 부 모는 모름지기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 목자가 되어야 합니까 목자는 세 가지의 장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객관적이고, 전문적이고, 목적 의식적이기 때문입니다. 애정에 관한 한, 부모는 맹목적이지만, 목자는 목적지향적입니다. 맹목적(盲目的)이라는 말 잘 아시지요 눈을 감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객관적인 지대에서 또렷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 고 목자가 애정이 없는 게 아닙니다. 선한 목자는 객관적이 될 뿐더러 목숨을 바치기까지 합니다. 우리 주님도 선한 목자가 되 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녀에 대해 이런 목자의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들 자기 자녀에 대해서는 얼마나 맹목적인 애정이 되는지 모 릅니다. 그냥 놔 둬도 콸콸 흘러가는 것이 부모 된 핏줄의 애정 입니다. 특수한 소수를 빼고는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무조건 넘치는 애정이 자녀를 망치기 일 수라는 사실입니다. 홍수가 왜 납니까 물이 다스려지지 못해서 납니다. 통제되지 못해서 홍수가 납니다. 통제되지 못한 큰물은 사람을 죽이고 집 을 무너뜨립니다. 때문에 물은 통제되어야 합니다. 치수(治水)입니다. 애정도 통제되어야 합니다. 치애(治愛)입니다. 부모 된 애정 은 자연스러운 것이니까, 이제는 그 정을 좀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정을 좀 떼야 하겠습니다. 목자의 양육으로 좀 객관화되어야 하겠어요. 그러면 이런 목자교육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바로 방목교육입니다. 오늘 시편 23편에서 제시한 방목 교육의 원리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환경조성의 교육입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 도하시는도다 "(2-3절)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것이 목자의 제일 우선 되는 임무입니다. 풀도 없는 거친 사막이 아닙니다. 급류가 휘몰아치는 그런 물가도 아닙니다. 안전하고 풍족한 환경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여기서부터 방목은 시작되는 겁니다. 환경 조성입니다. 목자는 자갈을 물리고 굴레를 씌우는 데 열심이어서는 안됩니다.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를 찾는 데 열심이어야 합니다. 안전하고 풍요로운 곳, 그 다음에는 방목인 거지요. 고삐를 죄는 것은 쉽지 만, 푸른 초장을 찾는 것은 무척 어렵습니다. 열심히 자녀교육 하는 데도 아이들은 왜 짜증만 늘어나고 자꾸 비뚤어집니까 방목 교육을 안 해서 그렇습니다. 푸른 목초지를 찾아줄 생각은 않고 무조건 고삐와 굴레만 씌워서 끌고 다닐 생각을 하니, 둘 다 힘들고 짜증만 늘어 나는 겁니다. 거칠고 어설 픈 곳으로 몰아넣고 고삐를 죈다고 됩니까 푸른 초장만 찾아 주 면 훨씬 힘이 덜 듭니다. 목자는 힘이 덜 들어서 좋고 양떼는 자유롭고 살쪄서 좋습니다. 방치교육과 방목교육은 다릅니다. 방치교육은 죽이지만 방목교육 은 풍성하게 살립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도 "내가 온 것은 양으 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얻어 풍성豊盛케 하려 함이니라"(요 10:10)했습니다. 방치 교육이 아닌 방목교육을 해 보세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갈을 물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굴레를 씌우지도 않습니다. 방목이지요. 하나 하나 간섭하고 통제 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이런 인상으로 간직하고 있는 분 이 계신데 잘못된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큰 울타리를 쳐 놓고 우리들을 방목하십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풀을 뜯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쉴만한 물가, 푸른 초장입니다., 오늘 시편 23편은 방목의 원형입니다. 평화로운 한 폭의 방목 장 면입니다. 그래서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고 합니다. 악다 구니 쓰는 부모, 강제하고 통제하고 구속하는 부모, 그래서 여러분의 자녀가 오늘도 생기가 넘치는 게 아니라 죽을 맛이라고 하 지는 안는지요 기억하실 일입니다.
둘째로는 신뢰교육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절) 양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쳐 박혀 있을 때에라도 인도 가 능한 사람이 바로 목자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유대광야 의 깊은 '와디'입니다. 이곳은 대단히 위험한 곳입니다. 양들이 이 런 위험한 곳을 소란을 피우지 않고 지날 수 있는 것은 목자에 대한 신뢰감 때문입니다. 만약 양떼들이 목자에 대한 신뢰감을 잃고 저 마다 앞다퉈 탈출하려고 소란을 피우면 양떼들이 서로 깔려죽고 골짜기에 빠져 죽을 것입니다. 건물 안에서 화재가 났을 때 인도자를 믿고, 당황하거나 몰려들 지 않으면 큰 피해는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신뢰감이 중요합니다. 신뢰감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벗어날 수 있게 해 줍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부모에 대 한 신뢰감만 있으면 위험지대를 벗어납니다. 작년에 어린이 여름 야외수련회를 성주 금수 계곡에서 1박2일 할 때인데, 거기 개울가에 외나무다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 외나무 다리를 건너는 데 아주 재미있는 광경이 벌어 졌습니다. 평소 교회 안에서 얌전하게 굴던 녀석들이 겁먹고 못 건너갈 줄 알았는 데, 정반대 현상이 벌어진 겁니다. 얌전한 아이들은 타박타박 잘 도 건넜습니다.
그런데 제일 왈가닥인 녀석들이 의외로 겁을 먹 고 못 건너가,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는 겁니다. 신뢰감에 대한 반응입니다. 평소 부모에 대한 신뢰감이 풍부한 사람은 선생님에 대한 신뢰감도 큽니다. 그리고 낯선 외나무 다리에 대한 신뢰감 도 커지는 거지요. 선생님이 건너 가셨고, 또 저 편에서 오라고 하니까, 믿고 가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신뢰감이예요. "해를 두려워 않을 것은" 공동번역에는 '무서울 것 없어라'고 했습니다. 지극한 신뢰감입니다. 신뢰감이 많으면 일단 겁이 없어 집니다. 도전의식이 생깁니다. 부모에 대한 신뢰감은 자신에 대한 신뢰감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사물과 일에 대해서는 안정감으 로 나타납니다.
셋째는 존귀와 칭찬의 교육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5절) 원수 앞에서도 칭찬의 상을 베푸는 목자입니다. 원수들 보라는 듯 상(床)을 차려 주십니다. 상을 베푼다는 것은 교제와 언약의 상징입니다.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존귀의 상징입니다. 유대나라 에서는 귀족들이 잔치에 참여할 때 머리나 수염에 기름을 발랐다 고 합니다. 기름을 머리나 수염에 바른다는 것은 존귀하게 해 주 신다는 것입니다. 자녀교육에서는 존귀와 칭찬의 상을 자주 베풀 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요즈음 어떤 부모들은 원수는커녕 친구 앞에서 자기 자녀를 비교 하고 타박을 합니다. 자녀끼리도 서로 비교하고 타박을 합니다. 오늘 주보에 실은 자녀 망치기 10계명 중에 이런 구절이 있지요 "남과 비교해 말한다. 형 동생 언니의 학교성적이나 성격과 비교해 가며 혼내준다. 평생 마음의 상처를 입을 것이다. 남들 앞에서 망신을 주며 잘 못을 지적하라. 마음에 증오를 품을 것이다" 존귀와 칭찬은 자녀의 마음에 담긴 상처와 증오심을 치유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목자교육입니다. . 그러면 이런 목자교육, 방목 교육을 하면 결과가 어떻게 될까요 두 가지 복된 고백이 나옵니다. 바로 "부족함이 없다"라는 것과 "집에 영원히 거한다"라는 고백입니다. 이 축복된 고백이 자녀의 입에서 나오는 겁니다. 오늘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삼은 시편 기 자의 고백입니다.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 "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6절) 이렇듯 부족함이 없는 목자상이 바로 부모상이어야 합니다. 아 쉬움을 못 느끼는 자녀들. 이것이 가장 큰 자녀 축복 아닙니까 이 세상에 왜 결핍이 없겠어요 아무리 풍족해도 결핍은 느낄 수 있습니다. 모든 걸 채워준다고 결핍을 안 느끼나요 결핍은 전 혀 심리적인 문제입니다. 자녀의 심리에 결핍 의식이 사라져야 합니다. 환경조성, 신뢰감, 존귀와 칭찬을 주면, 자녀의 마음에서 결핍이 사라집니다. 아무리 결핍해도 아쉬움을 느끼지 않고 자족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축복 중의 축복인 것입니다. 이 구절을 공동번역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부 모의 은총과 복에 겨워하는 자녀, 영원히 부모님의 집에 거하겠 다고 하는 자녀! 이게 바로 성공적인 자녀 양육입니다. 자녀들이 자라는 청소년 시절에는 물론이고 성장해서도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내가 아버님 어머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런 고백이 울려 퍼지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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