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적인 삶을 (욥4:1-6)
본문
현대인은 매우 분주하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처럼 국토가 좁고 인구 가 밀집하며 자원이 부족한 나라에서는 더욱더 생존경쟁(生存競爭)이 치열 합니다. 그래서 하루 하루의 삶에 적응해 가다보면 마치 다람쥐가 쳇바퀴 돌리듯이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타성(惰性)에 젖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바 쁜 와중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삶이 본을 보이는 삶인가 아니면 지탄을 받는 삶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짧다면 짧은 한 평생을, 얼마나 타인에게 덕을 끼치는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멀지 않는 시간에 하나님 앞에서 청지기적 사명을 얼마나 잘 감당했는 가를 평가받아야할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성도의 삶이 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교훈대로 본을 보이는 삶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미련해도 남을 훈계(訓戒)하는 데는 밝다'는 말이 있습니다. (3절) '네가 여러 사람을 교훈 하였고'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물론 욥은 실천적인 모범을 보인 인물이지만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현대를 참된 스승을 찾기가 어려운 새대라고 말들 합니다. 또한 이웃이 없는 세상입니다. 돈이 되는 일에는 양심까지도 파는 세상입니다. 한마디 로 말해서 참된 가르침이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든지 어른이든지 도무지 버릇이 없습니다. 수천년된 피라미드를 발굴해서 판독을 하니 '요 즘 젊은이들은 도무지 버릇이 없다'라는 내용의 글이 발견됐습니다. 이처 럼 사람들이 제 갈길을 몰라 방황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실로 말하기는 쉬워도 행하기는 어려운 것이 우리들의 삶이라 하겠습니다. 사울은 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는 제사를 자신이 집례하는 죄를 범했습니다(삼상13:9) 사울이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을 몰랐을까요 아마 자신 이 백성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급한 상 황에 처하게되자, 스스로 그러한 가르침을 범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자신이 가르치신 교훈을 그대로 본으로 보이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오늘날은 말의 홍수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유권 자들 앞에서 굳게 다짐했던 정치인들의 공약(公約)이 훗날에는 공약(空約) 으로 끝나고 마는 것을 너무나 많이 봅니다. 비단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도, 상대방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여러 가지 감언이설(甘 言利說)을 늘어 놓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 은 '말하기를 더디하고 실행에 열성을 다하는 모범적인 삶'을 살아가야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게하고 세상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방법입니다.
2.약한 사람을 붙들어 주는 삶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식사하는 것을 보고는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이 때 주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라에라야 쓸데 있느니라'(막2:17)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표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넘어져 가는 자를 말로 붙 들어 주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했다'(4절)는 말씀이야 말로 모범적인 성도의 삶을 보여주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돕게다는 마음을 가지고 조금만 주위에 눈을 돌리면 사랑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이웃들은 쉽게 발견할수 있습니다. '가 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막14:7)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물질적으로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정신적 고뇌와 영혼의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머리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몸의 지체 로 비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하나된 형제는 서로의 아픔을 느끼어야 합니다. 형제의 아픔은 곧 나의 아픔이 되 어야 합니다. 만약 교우의 아픔이 느끼어지지 못한다면 이는 몸이 병든 것 으로서 머리이신 주님이 매우 걱정을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사회는 날이 갈수록 인정이 메마르고 인간관계가 철저한 이기심 의 장벽으로 단절되어 갑니다. 이럴 때일수록 이웃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그리스도의 정신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풀기 어렵도록 얼키어진 구조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로 끌어 모음으로써 안도와 만족을 얻으려함에서 시 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야하는 성도라면 '나누어 줌으 로써 기쁨과 부요함을 체험하는 생활'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약한 자 들을 붙들어 주는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기 위하여서는, 스데반 집사처럼 사랑의 마음이 가득해야 합니다. 그리고 에스라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열 심이 있어서 늘 여기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아름다운 주님의 공동체로 서 약한 자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주고, 힘이 되어 주는 교회를 만들려면 우리 개개인이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무엇에든지 감사하며 자족할 줄 아는 마음과 신앙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다른 사람이 닦아놓은 길만 따라가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시류에 편승하여 살아가므로 책임을 느끼지 않습니다. 적당히 하다가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이루어 놓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결단한 성도의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몸을 주님이 계신 성전임을 잘 압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주의 법도에 충실한 말을 해야하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런 성도의 삶은 남의 뒤따르는 삶이 아니라, 개척하고 창조하며 앞서가는 삶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모범이 되어주셨드시,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들도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어야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세상의 법칙에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도를 생명만큼 소 중하게 여기고 깨어있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바로 그리스도 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성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멀지 않는 시간에 하나님 앞에서 청지기적 사명을 얼마나 잘 감당했는 가를 평가받아야할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성도의 삶이 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교훈대로 본을 보이는 삶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미련해도 남을 훈계(訓戒)하는 데는 밝다'는 말이 있습니다. (3절) '네가 여러 사람을 교훈 하였고'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물론 욥은 실천적인 모범을 보인 인물이지만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현대를 참된 스승을 찾기가 어려운 새대라고 말들 합니다. 또한 이웃이 없는 세상입니다. 돈이 되는 일에는 양심까지도 파는 세상입니다. 한마디 로 말해서 참된 가르침이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든지 어른이든지 도무지 버릇이 없습니다. 수천년된 피라미드를 발굴해서 판독을 하니 '요 즘 젊은이들은 도무지 버릇이 없다'라는 내용의 글이 발견됐습니다. 이처 럼 사람들이 제 갈길을 몰라 방황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실로 말하기는 쉬워도 행하기는 어려운 것이 우리들의 삶이라 하겠습니다. 사울은 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는 제사를 자신이 집례하는 죄를 범했습니다(삼상13:9) 사울이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을 몰랐을까요 아마 자신 이 백성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급한 상 황에 처하게되자, 스스로 그러한 가르침을 범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자신이 가르치신 교훈을 그대로 본으로 보이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오늘날은 말의 홍수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유권 자들 앞에서 굳게 다짐했던 정치인들의 공약(公約)이 훗날에는 공약(空約) 으로 끝나고 마는 것을 너무나 많이 봅니다. 비단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도, 상대방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여러 가지 감언이설(甘 言利說)을 늘어 놓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 은 '말하기를 더디하고 실행에 열성을 다하는 모범적인 삶'을 살아가야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게하고 세상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방법입니다.
2.약한 사람을 붙들어 주는 삶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식사하는 것을 보고는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이 때 주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라에라야 쓸데 있느니라'(막2:17)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표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넘어져 가는 자를 말로 붙 들어 주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했다'(4절)는 말씀이야 말로 모범적인 성도의 삶을 보여주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돕게다는 마음을 가지고 조금만 주위에 눈을 돌리면 사랑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이웃들은 쉽게 발견할수 있습니다. '가 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막14:7)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물질적으로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정신적 고뇌와 영혼의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머리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몸의 지체 로 비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하나된 형제는 서로의 아픔을 느끼어야 합니다. 형제의 아픔은 곧 나의 아픔이 되 어야 합니다. 만약 교우의 아픔이 느끼어지지 못한다면 이는 몸이 병든 것 으로서 머리이신 주님이 매우 걱정을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사회는 날이 갈수록 인정이 메마르고 인간관계가 철저한 이기심 의 장벽으로 단절되어 갑니다. 이럴 때일수록 이웃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그리스도의 정신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풀기 어렵도록 얼키어진 구조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로 끌어 모음으로써 안도와 만족을 얻으려함에서 시 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야하는 성도라면 '나누어 줌으 로써 기쁨과 부요함을 체험하는 생활'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약한 자 들을 붙들어 주는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기 위하여서는, 스데반 집사처럼 사랑의 마음이 가득해야 합니다. 그리고 에스라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열 심이 있어서 늘 여기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아름다운 주님의 공동체로 서 약한 자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주고, 힘이 되어 주는 교회를 만들려면 우리 개개인이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무엇에든지 감사하며 자족할 줄 아는 마음과 신앙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다른 사람이 닦아놓은 길만 따라가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시류에 편승하여 살아가므로 책임을 느끼지 않습니다. 적당히 하다가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이루어 놓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결단한 성도의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몸을 주님이 계신 성전임을 잘 압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주의 법도에 충실한 말을 해야하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런 성도의 삶은 남의 뒤따르는 삶이 아니라, 개척하고 창조하며 앞서가는 삶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모범이 되어주셨드시,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들도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어야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세상의 법칙에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도를 생명만큼 소 중하게 여기고 깨어있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바로 그리스도 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성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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