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략자의 결과 (삼하17:17-23)
본문
모략은 좋은 의미로도 사용되지만 나쁜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됩니다. 즉, 이 말은 좋지 않은 계책으로 남을 곤경의 구렁텅이에 몰아 넣게 함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됩니다. 그렇지만 이 모략도 명철한 자가 얻는 것입니다. “(잠1:5) 지혜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모략을 얻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본문의 아히도벨도 명철한 자였지만 그것을 선한 데 쓰지 않고, 악한 데 사용하였기에 모략자라고 불리우게 됩니다. 우리는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해야 합니다. “(롬16:19)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하였습니다. 만일, 이 말씀에 역행한다면 그 결과는 모략자 아히도벨에게 주어진 바와 동일하게 될 것입니다. 아히도벨에게 닥친 결과를 통해서 우리의 지혜를 주의 뜻에 맞게 사용해야 하는 이유를 알아 봅시다.
1. 계획의 실패. 아히도벨의 계획은 압살롬에 의해 채택되지 못함으로써 그는 모략가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여기서 “시행되지”는 수동형으로 “행하다” “음식을 갖추다” “찾다”를 의미하는 포괄적인 용어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어떤 목표를 정확히 두고서 그 성취를 위해 전심 전력함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아히도벨은 압살롬을 도와 다윗을 죽이려는 목표를 신속히 성취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도 후새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계획이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였기 때문에 실패하였던 것입니다. “(대상2:3) 유다의 아들은 에르와 오난과 셀라니 이 세 사람은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이 유다로 말미암아 낳은 자요 유다의 맏아들 에르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죽이셨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계획하고 목표한 바들이 주께 향하고 있는지를 잘 관찰해야 합니다. 이 계획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다면 아히도벨의 경우와 같이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 여인의 지혜로운 처신으로 아히도벨의 모략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고 따라서 압살롬의 계획도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에게도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후새를 도와 하나님의 작정하심을 이루신 것처럼 한 여인의 용기와 지혜로서 하나님의 사람을 보호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모략가의 지혜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작정하심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다윗에게 다윗왕을 죽이려는 모략을 일어 주려는 두 사람을 자기집 뜰에 있는 우물 속으로 들어가게 하고 그 우물을 뚜껑으로 덮어 숨겨 주었습니다. 마치 기생 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겨주어 그 집을 구원한것처럼 그 여인도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에 역사에 동참하게되었습니다. 이로써 다윗은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도 살고 소년도 구하고 두사람도 구하고 다윗도 구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계셨습니다.
2. 명예의 실추 아히도벨은 더 이상 모략가로서의 지위를 포기하고 낙향하였습니다. 여기서 “돌아가”는 주로 “걸어가다”를 뜻하나 “처신하다”한 암시적인 뜻도 지니고 있습니다. 본문은 후자의 뜻으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며 예전의 천한 모습으로 다시 처신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히도벨은 자신의 뜻이 실행되지 않자, 모든 관직을 포기하고 고향을 찾아 갔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히도벨은 명예를 찾아 그릇된 방법으로 처신하려다 쌓았던 것까지 잃어 버렸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만이 명예와 칭찬과 영광을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십니다. “(신26:19) 여호와께서 너의 칭찬과 명예와 영광으로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그 말씀하신 대로 너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인식하여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신앙의 자세를 취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자만이 명예를 드높이며 삶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인재는 주인을 잘 만나야 빛을 발합니다. 누구를 만나느냐도 매우 중요합니다. 유비가 관우와 장비를 만난 것처럼 또한 재갈공명을 만나 중국 대륙을 통일한 것처럼 인재는 그 주인을 잘 만나야 합니다.
그러므로써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며 그 지혜를 통해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고 어려움에서 구해내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왕을 만났을 때는 그 지혜를 좋은 일에 선용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일이 형통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인을 배반하고 압살롬에게 그 충성심을 바꾸었을 때에는 그는 명예를 실추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보장된 미래를 포기해야만 하는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면 아히도벨과 같은 인생이 될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을 섬기면 우리에게 공명과 부와 명예는 보장이 될 줄 믿습니다.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사람의 재능은 선한 일을 위해 쓸 때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악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혜를 가립니다. 진실을 외곡하고 선을 악으로 이용합니다. 김영삼 정권이 아들의 실수로 인해 김덕룡의원의 입을 빌리자면 모든 진실의 간청은 왜곡되고 아들에 의해 부하들의 충성이 가리워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점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재능과 지혜와 은사는 모두 주님을 위해 주인을 위해 선을 위해 사용할 때에만이 그 빛을 발하며 모두 사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진리와 그 진리는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행복을 지속하고 싶으십니까 주님만을 위해 여러분에게 주신 은사를 사용하시오. 그러면 더 좋은 은사를 허락하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3. 권위의 상실 낙향한 아히도벨은 자기 집의 모든 것을 정리했습니다. 여기서 “정리하고”는 강조형으로 “위임하다” “명령하다”의 뜻입니다. 즉 이 단어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권한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물러서서 관여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히도벨은 가장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른 이에게 넘기고 죽을 준비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바른 길로 가라는 의미로 지혜를 주셨는데 그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악한 모사로서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이러한 비극이 발생하였던 것입니다. 동일하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지혜와 총명을 허락하십니다. 그 지혜를 오직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데 활용하는 자가 되어야 만이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4. 생의 포기 결국 아히도벨은 목매어 죽음으로써 비극적인 삶을 마감했습니다. 여기서 “목매어 죽으매”는 히브리어로 “하나크”입니다. 이 “하나크”가 강조형일 때는 “멸하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자신의 목을 자신이 조르므로서 스스로 멸망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결국 아히도벨은 하나님께서 주신 호흡을 자신의 의지대로 포기한 자가 되었습니다. 모략의 기쁨이 사라졌기에 그는 삶의 희망을 상실하고 죽음을 선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소망없이 죽을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분을 위해서 살아 가야 하는 분명한 삶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자신의 목숨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피 값으로 사신 지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몸을 여호와 앞에 산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아히도벨은 자기 몸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두려워할줄 모르는 행위입니다. 스스로 지옥을 자청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들의 뜻한바가 있다면 그것을 주님께 아뢰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하여금 그 뜻을 이루도록 노력하십시오. 주님은 그 아들에게 좋은 떡을 주시며 입혀주시고 가르쳐 주실것입니다. 짐승이라도 그 자식에게는 생선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녀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 훨씬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주실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거하시는 성전임을 믿으시기 축원합니다.
우리 자신은 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 믿습니다. 사자굴에서도 자기 목숨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찬양하며 영광돌린 다니엘은 그 나라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우리가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주님께 맡기면 어려움에서도 건지시며 좋은 인재로 사용하실것입니다. 인생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께 우리의 아뢸 것을 기도함으로 내 인생에 맛보지 못했던 날들을 만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떠난 무모한 일을 버리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 지혜는 하나님의 규례를 듣고 지키는데 있으며, 그러한 자만이 지혜와 지식이 있는 하나님 자녀가 됩니다. “(신4:6)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하였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헛된 지식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욥15:2)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 어찌 동풍으로 그 품에 채우겠느냐 ”하였습니다. 오직 입에 지식을 더하게 됩니다. “(잠16:23)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그 입을 슬기롭게 하고 또 그 입술에 지식을 더하느니라 ”하였습니다. 참 지혜만이 행복을 주며 평강을 허락합니다. 우리 삶에 가장 값진 것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주어지는 지혜입니다. 이를 얻기 위한 노력이 끊임없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야만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하였습니다. 만일, 이 말씀에 역행한다면 그 결과는 모략자 아히도벨에게 주어진 바와 동일하게 될 것입니다. 아히도벨에게 닥친 결과를 통해서 우리의 지혜를 주의 뜻에 맞게 사용해야 하는 이유를 알아 봅시다.
1. 계획의 실패. 아히도벨의 계획은 압살롬에 의해 채택되지 못함으로써 그는 모략가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여기서 “시행되지”는 수동형으로 “행하다” “음식을 갖추다” “찾다”를 의미하는 포괄적인 용어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어떤 목표를 정확히 두고서 그 성취를 위해 전심 전력함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아히도벨은 압살롬을 도와 다윗을 죽이려는 목표를 신속히 성취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도 후새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계획이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였기 때문에 실패하였던 것입니다. “(대상2:3) 유다의 아들은 에르와 오난과 셀라니 이 세 사람은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이 유다로 말미암아 낳은 자요 유다의 맏아들 에르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죽이셨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계획하고 목표한 바들이 주께 향하고 있는지를 잘 관찰해야 합니다. 이 계획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다면 아히도벨의 경우와 같이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 여인의 지혜로운 처신으로 아히도벨의 모략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고 따라서 압살롬의 계획도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에게도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후새를 도와 하나님의 작정하심을 이루신 것처럼 한 여인의 용기와 지혜로서 하나님의 사람을 보호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모략가의 지혜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작정하심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다윗에게 다윗왕을 죽이려는 모략을 일어 주려는 두 사람을 자기집 뜰에 있는 우물 속으로 들어가게 하고 그 우물을 뚜껑으로 덮어 숨겨 주었습니다. 마치 기생 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겨주어 그 집을 구원한것처럼 그 여인도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에 역사에 동참하게되었습니다. 이로써 다윗은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도 살고 소년도 구하고 두사람도 구하고 다윗도 구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계셨습니다.
2. 명예의 실추 아히도벨은 더 이상 모략가로서의 지위를 포기하고 낙향하였습니다. 여기서 “돌아가”는 주로 “걸어가다”를 뜻하나 “처신하다”한 암시적인 뜻도 지니고 있습니다. 본문은 후자의 뜻으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며 예전의 천한 모습으로 다시 처신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히도벨은 자신의 뜻이 실행되지 않자, 모든 관직을 포기하고 고향을 찾아 갔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히도벨은 명예를 찾아 그릇된 방법으로 처신하려다 쌓았던 것까지 잃어 버렸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만이 명예와 칭찬과 영광을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십니다. “(신26:19) 여호와께서 너의 칭찬과 명예와 영광으로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그 말씀하신 대로 너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인식하여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신앙의 자세를 취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자만이 명예를 드높이며 삶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인재는 주인을 잘 만나야 빛을 발합니다. 누구를 만나느냐도 매우 중요합니다. 유비가 관우와 장비를 만난 것처럼 또한 재갈공명을 만나 중국 대륙을 통일한 것처럼 인재는 그 주인을 잘 만나야 합니다.
그러므로써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며 그 지혜를 통해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고 어려움에서 구해내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왕을 만났을 때는 그 지혜를 좋은 일에 선용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일이 형통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인을 배반하고 압살롬에게 그 충성심을 바꾸었을 때에는 그는 명예를 실추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보장된 미래를 포기해야만 하는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면 아히도벨과 같은 인생이 될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을 섬기면 우리에게 공명과 부와 명예는 보장이 될 줄 믿습니다.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사람의 재능은 선한 일을 위해 쓸 때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악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혜를 가립니다. 진실을 외곡하고 선을 악으로 이용합니다. 김영삼 정권이 아들의 실수로 인해 김덕룡의원의 입을 빌리자면 모든 진실의 간청은 왜곡되고 아들에 의해 부하들의 충성이 가리워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점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재능과 지혜와 은사는 모두 주님을 위해 주인을 위해 선을 위해 사용할 때에만이 그 빛을 발하며 모두 사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진리와 그 진리는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행복을 지속하고 싶으십니까 주님만을 위해 여러분에게 주신 은사를 사용하시오. 그러면 더 좋은 은사를 허락하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3. 권위의 상실 낙향한 아히도벨은 자기 집의 모든 것을 정리했습니다. 여기서 “정리하고”는 강조형으로 “위임하다” “명령하다”의 뜻입니다. 즉 이 단어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권한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물러서서 관여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히도벨은 가장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른 이에게 넘기고 죽을 준비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바른 길로 가라는 의미로 지혜를 주셨는데 그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악한 모사로서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이러한 비극이 발생하였던 것입니다. 동일하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지혜와 총명을 허락하십니다. 그 지혜를 오직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데 활용하는 자가 되어야 만이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4. 생의 포기 결국 아히도벨은 목매어 죽음으로써 비극적인 삶을 마감했습니다. 여기서 “목매어 죽으매”는 히브리어로 “하나크”입니다. 이 “하나크”가 강조형일 때는 “멸하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자신의 목을 자신이 조르므로서 스스로 멸망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결국 아히도벨은 하나님께서 주신 호흡을 자신의 의지대로 포기한 자가 되었습니다. 모략의 기쁨이 사라졌기에 그는 삶의 희망을 상실하고 죽음을 선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소망없이 죽을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분을 위해서 살아 가야 하는 분명한 삶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자신의 목숨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피 값으로 사신 지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몸을 여호와 앞에 산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아히도벨은 자기 몸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두려워할줄 모르는 행위입니다. 스스로 지옥을 자청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들의 뜻한바가 있다면 그것을 주님께 아뢰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하여금 그 뜻을 이루도록 노력하십시오. 주님은 그 아들에게 좋은 떡을 주시며 입혀주시고 가르쳐 주실것입니다. 짐승이라도 그 자식에게는 생선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녀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 훨씬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주실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거하시는 성전임을 믿으시기 축원합니다.
우리 자신은 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 믿습니다. 사자굴에서도 자기 목숨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찬양하며 영광돌린 다니엘은 그 나라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우리가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주님께 맡기면 어려움에서도 건지시며 좋은 인재로 사용하실것입니다. 인생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께 우리의 아뢸 것을 기도함으로 내 인생에 맛보지 못했던 날들을 만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떠난 무모한 일을 버리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 지혜는 하나님의 규례를 듣고 지키는데 있으며, 그러한 자만이 지혜와 지식이 있는 하나님 자녀가 됩니다. “(신4:6)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하였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헛된 지식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욥15:2)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 어찌 동풍으로 그 품에 채우겠느냐 ”하였습니다. 오직 입에 지식을 더하게 됩니다. “(잠16:23)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그 입을 슬기롭게 하고 또 그 입술에 지식을 더하느니라 ”하였습니다. 참 지혜만이 행복을 주며 평강을 허락합니다. 우리 삶에 가장 값진 것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주어지는 지혜입니다. 이를 얻기 위한 노력이 끊임없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야만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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