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위로의 하나님 (고후1:3-11)
본문
전도서4:1에서 전도자는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 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 자가 없도다”고 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위기 중의 하나가 심령의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또 많은 상처가 있으면서도 위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약한 사람은 권세 있는 자들에게 시달리며 학대를 받지만 그를 도와 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학생들도 너무나 많은 짐 때문에 고민하고, 학교에서, 사회에서 가정에서 까지 마음의 상처를 줄 때도 있습니다. 이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한동안 방황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개인주의가 될 수록 위로 자가 없습니다. 또 누구를 위로할 줄도 모릅니다. 그래서 선진국에는 개나 애완동물을 기르며 위로를 받는다고 합니다. 위로 자가 없는 시대에 사는 사람은 그 마음이 강팍해 지고 그 심리적인 갈등이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1. 성도 여러분 어떤 일을 위로 받고 싶습니까 본문은 하나님을 ‘위로’의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위로에도 참다운 위로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위로도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위로를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옛날 우리 나라 여자들은 시집살이가 참으로 고됐습니다. 그래서 가끔 생활이 고되면 친정 집에 가서 친정 어머니로 부터 위로를 받고 다시 새 힘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삶에서 주는 위로는 친정 어머니의 위로보다는 남편의 위로가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남편이 ‘당신 고생 많이 한다는 것을 내가 알아’ 라고 한마디만 해 주어도 남편의 위로는 그 누구의 위로보다 크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남편의 위로가 없는 사람은 친정 어머니로 부터 아무리 많은 위로를 받아도 마음이 허전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위로는 받을 사람에게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로는 아무나 하는 것도 아니며, 아무 위로나 다 치료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욥2:11“때에 욥의 침구 세 사람이 그에게 이 모든 재앙이 임하였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처소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조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상약하고 오더니” 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위로는 곧 논쟁으로 비하하여 서로가 싸우게 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영혼의 위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 외에는 참다운 위로가 없습니다. 성도의 참 위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토마스 아켐피스-“주여 내가 위로를 얻기 위하여 바라거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나는 그것을 이 세상에서 기대하지 않고 하늘 나라에서 기대합니다.”라고 하면서 ‘오로지 나만이 이 세상의 온갖 위로를 다 차지하고 이 세상의 온갖 쾌락을 다 누릴지라도 그러한 위로와 쾌락은 결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주 예수님,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계셔 주소서 모든 인간적인 위로를 받지 않고서도 즐겁게 살아가려는 것 그 자체가 내게 위로가 되게 하옵소서 당신의 위로가 없을 경우에는 당신의 뜻과 나에 대한 시험 그 자체가 나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게 해 주소서. 이는 당신께서 언제까지나 노하시지 않으며, 언제까지나 경고하시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2.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크게 느낄 수 있는 것은 환난이나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을 의지할 때에 알게 됩니다. 주님의 위로를 실체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마치 마음이 약한 사람들이 위태로울 때에 마음에 위안을 삼으려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국 사람들이 하는 큰 욕이 있는데 “중생 하지 못한 목사 같으니라고”하는 욕설이 있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를 연약한 사람의 심약한 처방으로 아는 사람은 중생 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위로는 그의 자녀들만이 아는 것이며, 또 받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는 그를 진실로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만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위로는 중생한 자들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고난 가운데서 주님을 의지할 때 주님은 그들의 심령을 만져 주십니다. 이북에서 넘어 온 사람들은 거의 99%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남쪽에 오면 자유와 평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이 평화는 정치적인 것입니다. 자유 민주주의를 원해서 왔지만 그러나 이런 것들이 주는 자유는 인간의 내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동안 술과 방탕에 생활하다가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누가 이 사람들의 아픔과 괴로움을 위로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들을 진정으로 위로해 줄 수 있는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지실 수 있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마음과 형편과 처지를 모두 아십니다. 누가복음19장에 나오는 삭개오는 여리고의 세리장입니다. 그는 세리라는 직업 때문에 참으로 많은 멸시를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외로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멸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삭개오는 돈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위로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돈이 다가 아닙니다. 참으로 나를 알아주는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누가 삭개오의 마음을 알아줍니까 모두가 다 삭개오를 욕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삭개오의 집에 가셔서 그와 교제하시고 그를 위로하십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서 하신 말씀이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자”란 바로 소외되어 위로 받지 못한 자들을 말합니다. 삭개오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그를 위로하실 수 있으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이러한 주님과의 교제가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찬송가 420장은 흑인들의 영가입니다. 여러분 흑인들의 아픔을 모두다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 세상에 그 누가 흑인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들의 아픔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의 아픔을 우리는 알 수도 없습니다. 그들의 영가에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그들의 괴롬을 알아줄 자가 없다’고 고백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픔과 괴로움을 아십니다. 주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아뢰면은 우리의 심령을 만지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돈과 명예가 모든 것을 다 줄 것 같지만 그 것은 사막에 가끔 나타나는 신기루 현상에 불가합니다. 위로는 언제 받는 것입니까 위로는 고난 가운데서 받는 것이지 방탕과 방종 가운데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고난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눅 16:25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보면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대문 앞에서 그 집의 음식 찌꺼기를 먹고살았습니다. 부자는 많은 재산 때문에 호의호식하면서 살았지만 거지 나사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것이 역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가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완전한 보상이 주어지는 곳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얄팍한 수단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보상을 바라야 합니다. 언제나 주님의 위로를 사모하십니까 아니면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생활을 생활을 하십니까 이 세상에서 아무리 어려운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주님이 알아주시는 일이라면 절대로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3.위로의 직분이 있습니다. 위로의 직분이란 남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위로는 누구든지 할 수 있다 할 지라도 다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위로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또 위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위로할 수 있습니까 본문은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사람이 남을 위로할 수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환난과 고난을 아는 사람은 남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위로 자가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위로를 통하여 괴로움을 덜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위로가 있어야 합니다. 만일 목사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없다면 모든 목사들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할 것입니다. 아마 가장 소망이 없고 불쌍한 사람이 될지도 모릅니다. 왜 이렇게 목사는 하나님께만 위로를 받아야 할까요 저는 나름대로 깨달은 것은 목사는 모든 사람을 위로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왜 나에게 이러한 고통이 와야 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 중에 하나가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입니다. 본문 6절“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 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위로에는 고난을 견디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8절 이하에는 바울은 아시아에서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 때문에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이 있을 대에도 더욱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였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 성도의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의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진정한 능력은 견디어 이기는 것입니다. 바로 성도의 승리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위로하여 이렇게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게 했다면은 우리는 위로의 직분을 잘 감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이십니다. 고난 중에서 더욱 크게 위로하십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연단 가운데서 위로의 직분을 얻게 됩니다.참으로 아름다운 은사이며 아무라도 가질 수 없는 직분입니다.
1. 성도 여러분 어떤 일을 위로 받고 싶습니까 본문은 하나님을 ‘위로’의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위로에도 참다운 위로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위로도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위로를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옛날 우리 나라 여자들은 시집살이가 참으로 고됐습니다. 그래서 가끔 생활이 고되면 친정 집에 가서 친정 어머니로 부터 위로를 받고 다시 새 힘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삶에서 주는 위로는 친정 어머니의 위로보다는 남편의 위로가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남편이 ‘당신 고생 많이 한다는 것을 내가 알아’ 라고 한마디만 해 주어도 남편의 위로는 그 누구의 위로보다 크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남편의 위로가 없는 사람은 친정 어머니로 부터 아무리 많은 위로를 받아도 마음이 허전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위로는 받을 사람에게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로는 아무나 하는 것도 아니며, 아무 위로나 다 치료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욥2:11“때에 욥의 침구 세 사람이 그에게 이 모든 재앙이 임하였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처소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조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상약하고 오더니” 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위로는 곧 논쟁으로 비하하여 서로가 싸우게 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영혼의 위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 외에는 참다운 위로가 없습니다. 성도의 참 위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토마스 아켐피스-“주여 내가 위로를 얻기 위하여 바라거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나는 그것을 이 세상에서 기대하지 않고 하늘 나라에서 기대합니다.”라고 하면서 ‘오로지 나만이 이 세상의 온갖 위로를 다 차지하고 이 세상의 온갖 쾌락을 다 누릴지라도 그러한 위로와 쾌락은 결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주 예수님,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계셔 주소서 모든 인간적인 위로를 받지 않고서도 즐겁게 살아가려는 것 그 자체가 내게 위로가 되게 하옵소서 당신의 위로가 없을 경우에는 당신의 뜻과 나에 대한 시험 그 자체가 나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게 해 주소서. 이는 당신께서 언제까지나 노하시지 않으며, 언제까지나 경고하시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2.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크게 느낄 수 있는 것은 환난이나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을 의지할 때에 알게 됩니다. 주님의 위로를 실체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마치 마음이 약한 사람들이 위태로울 때에 마음에 위안을 삼으려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국 사람들이 하는 큰 욕이 있는데 “중생 하지 못한 목사 같으니라고”하는 욕설이 있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를 연약한 사람의 심약한 처방으로 아는 사람은 중생 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위로는 그의 자녀들만이 아는 것이며, 또 받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는 그를 진실로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만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위로는 중생한 자들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고난 가운데서 주님을 의지할 때 주님은 그들의 심령을 만져 주십니다. 이북에서 넘어 온 사람들은 거의 99%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남쪽에 오면 자유와 평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이 평화는 정치적인 것입니다. 자유 민주주의를 원해서 왔지만 그러나 이런 것들이 주는 자유는 인간의 내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동안 술과 방탕에 생활하다가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누가 이 사람들의 아픔과 괴로움을 위로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들을 진정으로 위로해 줄 수 있는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지실 수 있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마음과 형편과 처지를 모두 아십니다. 누가복음19장에 나오는 삭개오는 여리고의 세리장입니다. 그는 세리라는 직업 때문에 참으로 많은 멸시를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외로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멸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삭개오는 돈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위로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돈이 다가 아닙니다. 참으로 나를 알아주는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누가 삭개오의 마음을 알아줍니까 모두가 다 삭개오를 욕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삭개오의 집에 가셔서 그와 교제하시고 그를 위로하십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서 하신 말씀이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자”란 바로 소외되어 위로 받지 못한 자들을 말합니다. 삭개오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그를 위로하실 수 있으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이러한 주님과의 교제가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찬송가 420장은 흑인들의 영가입니다. 여러분 흑인들의 아픔을 모두다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 세상에 그 누가 흑인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들의 아픔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의 아픔을 우리는 알 수도 없습니다. 그들의 영가에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그들의 괴롬을 알아줄 자가 없다’고 고백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픔과 괴로움을 아십니다. 주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아뢰면은 우리의 심령을 만지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돈과 명예가 모든 것을 다 줄 것 같지만 그 것은 사막에 가끔 나타나는 신기루 현상에 불가합니다. 위로는 언제 받는 것입니까 위로는 고난 가운데서 받는 것이지 방탕과 방종 가운데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고난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눅 16:25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보면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대문 앞에서 그 집의 음식 찌꺼기를 먹고살았습니다. 부자는 많은 재산 때문에 호의호식하면서 살았지만 거지 나사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것이 역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가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완전한 보상이 주어지는 곳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얄팍한 수단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보상을 바라야 합니다. 언제나 주님의 위로를 사모하십니까 아니면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생활을 생활을 하십니까 이 세상에서 아무리 어려운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주님이 알아주시는 일이라면 절대로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3.위로의 직분이 있습니다. 위로의 직분이란 남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위로는 누구든지 할 수 있다 할 지라도 다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위로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또 위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위로할 수 있습니까 본문은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사람이 남을 위로할 수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환난과 고난을 아는 사람은 남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위로 자가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위로를 통하여 괴로움을 덜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위로가 있어야 합니다. 만일 목사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없다면 모든 목사들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할 것입니다. 아마 가장 소망이 없고 불쌍한 사람이 될지도 모릅니다. 왜 이렇게 목사는 하나님께만 위로를 받아야 할까요 저는 나름대로 깨달은 것은 목사는 모든 사람을 위로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왜 나에게 이러한 고통이 와야 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 중에 하나가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입니다. 본문 6절“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 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위로에는 고난을 견디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8절 이하에는 바울은 아시아에서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 때문에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이 있을 대에도 더욱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였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 성도의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의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진정한 능력은 견디어 이기는 것입니다. 바로 성도의 승리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위로하여 이렇게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게 했다면은 우리는 위로의 직분을 잘 감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이십니다. 고난 중에서 더욱 크게 위로하십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연단 가운데서 위로의 직분을 얻게 됩니다.참으로 아름다운 은사이며 아무라도 가질 수 없는 직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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