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과 의 (창3:17-19)
본문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땀과 의(義)’라고 정해 보았습니다. 인간이 이 두 가지 단어보다 더 크게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단어도 없는 것 같습니다. 땀은 노력과 수고를 의미하며, 의(義)는 옳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더욱 이 두 단어가 빛나는 것은 이 세상이 ‘땀과 의(義)’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경제위기 시대라지만 요행을 바라지 않으며 진정한 땀을 흘리는 이가 적은 세상입니다. 옳음을 외치는 사람은 많지만 진정으로 옳은 사람은 참으로 드문 세상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세상이 악하다 해도 진실한 땀을 흘리며 옳음을 잃지 않으면 끝내 그 사람은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은 행복하십니까 행복하다면 그 행복은 진실한 ‘땀과 의(義)’를 기초로 해서 주어진 것입니까 행복하지 못하다면 나의 삶에 ‘땀과 의(義)’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삶을 ‘땀과 의(義)’로 일구어 가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이 삶을 진지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땀과 의(義)’를 말하기 전에 먼저 선행해야 할 것은 ‘땀과 의(義)’의 의미를 성경적으로 바로 정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해하고 말하는 차원의 ‘땀과 의(義)’는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함을 언제나 전제로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땀을 흘립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땀흘려 온 결과는 무엇입니까 또 앞으로 남은 생애 동안 무엇을 위하여 땀흘리려 하십니까 그리고 그 인생이 끝나는 날 그 땀이 여러분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세상을 살면서 땀흘리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비지땀을 흘리면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삶을 살았고, 구원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든지 상관없이 열매가 잘못되었다면 그의 삶은 출발부터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땀을 흘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땀으로 가지 않고 의로움이 있어야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천국갈 수 있는 의로움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내세우는 그 의는 과연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가 분명합니까 일전에 어떤 분의 죽음을 보면서 참으로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그분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핍박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죽는 것과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웠던지 많은 약과 운동으로 건강을 지키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교통사고를 통해 생명을 잃고 말았습니다. 위로하러 간 저에게 부인이 하는 말이 뭔지 압니까 “우리 남편 천국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그분은 평소에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죽기를 그렇게 무서워하고 싫어했습니다. 평소에는 “천국이 어디 있느냐! 나는 지옥으로 갈란다” 큰소리도 많이 쳤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자격으로 천국 운운하는 것입니까 물론 저에게는 그분을 천국 보내고 지옥 보낼 자격이 없습니다. 천국은 누가 갑니까 어떻게 갑니까 주님을 사모하는 자가 갑니다. 자신의 땀을 부정하고 주님의 의를 의지하는 자가 갑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 땀, 즉 인간의 행위가 가지는 성격과 한계를 분명하게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땀과 행위는 단순하게 우리의 생활에 해당하는 부분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자기 노력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1. 땀 1 범죄한 인간은 제일 먼저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과 수치심을 느꼈고 황급히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만들어 입은 옷은 시간이 지나면 말라 부서지는 옷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수치는 다시 드러나며 두려움과 부끄러움은 다시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벌거벗은 그들의 자신을 위한 최고의 행위는 계속적으로 수치를 가리우는 것이었습니다. 누구 시켜서 한 것도 아닙니다. 그냥 본능적으로 가렸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자신의 하체를 가렸을까요 그리고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요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항상 악한 것뿐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출발부터 마지막까지 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계속해서 가릴 수밖에 없으며 이와 같은 연속적인 행위는 죽는 날까지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삶의 고통은 인생을 마치는 날까지 계속됩니다.
2 땀은 범죄에 대한 형벌로 주어졌습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9) 범죄 이후에 아담과 하와에게는 여러 가지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가 땀을 흘리는 것입니다. 처음 창조된 인간은 땀을 흘리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은 범죄 이후에는 저주받은 땅에서 가시와 엉겅퀴 수풀 사이에서 땀을 흘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어느 한 동안이 아닙니다. 생명이 붙어 있어 호흡하는 일생 동안 인간은 계속적으로 땀을 흘리게끔 되었습니다. 욥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대의 고통을 한꺼번에 다 겪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꼬 언제나 밤이 갈꼬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욥7:3-4) 캄캄한 밤도 환한 낮도 그에게는 고통뿐이었습니다. 밤에는 내일이면 이 고통이 줄어들까 하여 새벽을 기다렸습니다. 낮에는 잠들면 이 고통을 잊을까 다시 밤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고통의 시간을 계속 지내야 했습니다. 범죄함의 형벌로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땀흘림을 거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살후3:10) 이 말은 곧 죽으라는 말입니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에 살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둘째 땀흘리기는 싫으나 마지못해 흘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먹고 살기 위해서 마지못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셋째 적극적으로 땀을 흘리는 사람입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목표와 이상을 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땀을 흘리며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비록 범죄에 대한 저주로 주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삶이 될 것입니다. 3 땀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땀은 단순하게 생존과 생활을 위한 수단만은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며 적극적으로 땀흘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것을 위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할 수 있다 해보자.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옛말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이 이름을 남기는 일에 온 땀을 흘릴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남보다 높이 쌓기 위해 땀을 흘립니다. 남보다 많이 모으기 위해 땀을 흘립니다. 남을 이기기 위해 땀을 흘립니다. 남보다 앞서고 높이 올라서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모릅니다.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누구나 최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설사 많은 것을 얻고 높이 쌓았다 할지라도 그 때부터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또 끝없는 싸움을 하고 끝없이 땀을 흘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의 노력으로 쌓아올린 것들을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 자랑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 앞에서는 모르되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인간의 모든 수고와 땀은 본인이 의식하든 하지 않든 관계없이 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해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범죄한 인간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수치를 가리듯 아담 이래로 모든 인간은 자신이 땀을 흘리며 수고한 것으로 스스로의 수치를 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당당함으로 하나님 앞에 서고 싶어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흘린 땀의 최고의 절정이 바벨탑입니다. 인간들이 바벨탑을 높이 쌓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11:4) 그들은 하늘 끝까지 탑을 쌓았고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벨탑을 허물어 버리셨고 그들의 이름을 흩어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버리고 인간들이 땀흘려 쌓아 올린 것들은 일체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공로, 업적이 자랑거리가 될 때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허물어 버리셨습니다.
2. 의 1 의는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주어집니다. 범죄한 인간이 자기 수치를 가리는 것으로는 다시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그들은 수치를 가리고난 뒤에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뒤편으로 숨어 버렸습니다. 이 모습은 인간이 행한 최선의 방법도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과 수치심을 없앨 수는 없다는 것을 반증해 줍니다. 인간은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를 가리고 숨어 버림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숨긴 죄를 드러내셨고, 숨은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2 의는 죄없는 제물의 희생의 피로만 주어집니다. 아담과 하와의 부끄러운 수치가 가려지기 위해서 죄없는 짐승이 피흘리며 죽어갔습니다. 생명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생명의 희생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희생 앞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저 제물이 내 죄 때문에 대신 희생당하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아담은 피흘리며 죽어가는 짐승을 보면서 저 짐승이 바로 내 죄 때문에 죽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단에 드려지는 수많은 짐승들이 자신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는다는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우리가 감당해야 죄악의 형벌을 친히 감당하신 믿고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미리 내다본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3 의는 덮어주심으로만 주어집니다.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들의 수치를 가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옷을 벗기셨습니다. 이는 인간이 시도하는 구원을 위한 모든 행위를 부정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인간의 행위를 부정하신 하나님의 역사는 어떻게 나타납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3:21) 그것이 신약에서는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됩니까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갈3:27)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그 죄를 가리움을 받은 사람이 곧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3. 싸움 범죄에 대한 형벌로 인간에게 땀흘림이 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땀흘리는 것이 인간에게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땀은 단지 범죄로 인한 형벌이요 저주일 따름입니다. 일하지 않고 땀흘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 앞에 옳지 못한 행실이지만 그러나 땀을 흘린 것 역시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덮어주신 은혜뿐이며, 우리의 자랑은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의는 없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의인이 없으며 인간이 행한 의로운 행동도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의로우실 뿐입니다. 이 세상은 땀과 의의 싸움이 연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땀을 자랑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18:11-13)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18:14)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말씀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 중에 누가 더 주님을 사랑했겠습니까 누가 주님을 의지했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 예수님의 의를 의지하는 사람, 예수님의 의를 자랑하는 사람에게는 그가 비록 세리와 친구라 할지라도 주님은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모습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조롱했습니다. 나는 말씀을 지켰습니다. 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나는 헌금을 드렸습니다. 나는 큐티를 했습니다. 나는 전도했습니다. 나는 충성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자랑입니다. 자기의 땀을 가지고 스스로의 의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앞에서 절대 자기의 땀과 의를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의 자랑은 오직 주님의 의뿐이어야 합니다. 나 자신에 대한 고백은 나는 오직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행한 것은 오직 죄뿐이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베드로는 고넬료가 자신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입을 맞출 때 일어나라 나도 사람이다 했습니다. 이 말은 나도 너와 똑같은 죄인이다. 나는 이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 성에 들어가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고쳤습니다. 깜짝 놀란 우상숭배자들과 그 성의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향하여 옷을 찢으며 한 말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행14:15) 우리도 바울처럼 “나도 사람이다 나도 죄인이다. 내가 예수를 믿어 구원얻은 것처럼 너희도 예수 믿어야 산다” 이 말만 해야 합니다. 땀은 범죄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저주와 형벌입니다. 이 고통은 일생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그 어떤 노력도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에서 스스로를 건질 수 없습니다. 인간이 흘린 무수한 땀, 인고와 노력의 땀방울들이 자신을 구원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흘린 땀방울이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흘린 땀방울은 모든 인류의 저주를 자신의 육신으로 다 담당하신 땀방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22:44)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주님의 땀방울은 피로 변했네. 하나님을 거역한 나를 위하여 순종의 보배피를 흘려 주셨네. 내가 주를 위해 일생 흘린 땀방울보다 주님이 나를 위해 흘리신 한 방울의 땀이 더 귀합니다. 일평생 갈고 닦은 내 의가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라 십자가에서 내 모든 죄를 친히 담당하시고 그 공로로 덧입혀 주신 주님의 의가 우리를 구원한 것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자기 땀, 자기 의 자기 공로를 헤아리던 자들은 아무도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 곧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요6:29) 우리에게 의를 덧입혀 주신 주님, 그 주님을 위하여 땀흘리는 것은 그것 자체가 기쁨이 감사입니다. 비록 그 땀이 주를 위해 흘린 것이라 할지라도 끝없이 자기의 공로를 헤아리지 말고 주님만을 높여 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삶을 살았고, 구원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든지 상관없이 열매가 잘못되었다면 그의 삶은 출발부터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땀을 흘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땀으로 가지 않고 의로움이 있어야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천국갈 수 있는 의로움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내세우는 그 의는 과연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가 분명합니까 일전에 어떤 분의 죽음을 보면서 참으로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그분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핍박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죽는 것과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웠던지 많은 약과 운동으로 건강을 지키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교통사고를 통해 생명을 잃고 말았습니다. 위로하러 간 저에게 부인이 하는 말이 뭔지 압니까 “우리 남편 천국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그분은 평소에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죽기를 그렇게 무서워하고 싫어했습니다. 평소에는 “천국이 어디 있느냐! 나는 지옥으로 갈란다” 큰소리도 많이 쳤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자격으로 천국 운운하는 것입니까 물론 저에게는 그분을 천국 보내고 지옥 보낼 자격이 없습니다. 천국은 누가 갑니까 어떻게 갑니까 주님을 사모하는 자가 갑니다. 자신의 땀을 부정하고 주님의 의를 의지하는 자가 갑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 땀, 즉 인간의 행위가 가지는 성격과 한계를 분명하게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땀과 행위는 단순하게 우리의 생활에 해당하는 부분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자기 노력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1. 땀 1 범죄한 인간은 제일 먼저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과 수치심을 느꼈고 황급히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만들어 입은 옷은 시간이 지나면 말라 부서지는 옷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수치는 다시 드러나며 두려움과 부끄러움은 다시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벌거벗은 그들의 자신을 위한 최고의 행위는 계속적으로 수치를 가리우는 것이었습니다. 누구 시켜서 한 것도 아닙니다. 그냥 본능적으로 가렸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자신의 하체를 가렸을까요 그리고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요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항상 악한 것뿐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출발부터 마지막까지 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계속해서 가릴 수밖에 없으며 이와 같은 연속적인 행위는 죽는 날까지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삶의 고통은 인생을 마치는 날까지 계속됩니다.
2 땀은 범죄에 대한 형벌로 주어졌습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9) 범죄 이후에 아담과 하와에게는 여러 가지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가 땀을 흘리는 것입니다. 처음 창조된 인간은 땀을 흘리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은 범죄 이후에는 저주받은 땅에서 가시와 엉겅퀴 수풀 사이에서 땀을 흘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어느 한 동안이 아닙니다. 생명이 붙어 있어 호흡하는 일생 동안 인간은 계속적으로 땀을 흘리게끔 되었습니다. 욥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대의 고통을 한꺼번에 다 겪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꼬 언제나 밤이 갈꼬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욥7:3-4) 캄캄한 밤도 환한 낮도 그에게는 고통뿐이었습니다. 밤에는 내일이면 이 고통이 줄어들까 하여 새벽을 기다렸습니다. 낮에는 잠들면 이 고통을 잊을까 다시 밤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고통의 시간을 계속 지내야 했습니다. 범죄함의 형벌로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땀흘림을 거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살후3:10) 이 말은 곧 죽으라는 말입니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에 살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둘째 땀흘리기는 싫으나 마지못해 흘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먹고 살기 위해서 마지못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셋째 적극적으로 땀을 흘리는 사람입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목표와 이상을 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땀을 흘리며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비록 범죄에 대한 저주로 주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삶이 될 것입니다. 3 땀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땀은 단순하게 생존과 생활을 위한 수단만은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며 적극적으로 땀흘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것을 위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할 수 있다 해보자.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옛말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이 이름을 남기는 일에 온 땀을 흘릴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남보다 높이 쌓기 위해 땀을 흘립니다. 남보다 많이 모으기 위해 땀을 흘립니다. 남을 이기기 위해 땀을 흘립니다. 남보다 앞서고 높이 올라서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모릅니다.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누구나 최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설사 많은 것을 얻고 높이 쌓았다 할지라도 그 때부터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또 끝없는 싸움을 하고 끝없이 땀을 흘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의 노력으로 쌓아올린 것들을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 자랑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 앞에서는 모르되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인간의 모든 수고와 땀은 본인이 의식하든 하지 않든 관계없이 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해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범죄한 인간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수치를 가리듯 아담 이래로 모든 인간은 자신이 땀을 흘리며 수고한 것으로 스스로의 수치를 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당당함으로 하나님 앞에 서고 싶어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흘린 땀의 최고의 절정이 바벨탑입니다. 인간들이 바벨탑을 높이 쌓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11:4) 그들은 하늘 끝까지 탑을 쌓았고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벨탑을 허물어 버리셨고 그들의 이름을 흩어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버리고 인간들이 땀흘려 쌓아 올린 것들은 일체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공로, 업적이 자랑거리가 될 때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허물어 버리셨습니다.
2. 의 1 의는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주어집니다. 범죄한 인간이 자기 수치를 가리는 것으로는 다시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그들은 수치를 가리고난 뒤에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뒤편으로 숨어 버렸습니다. 이 모습은 인간이 행한 최선의 방법도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과 수치심을 없앨 수는 없다는 것을 반증해 줍니다. 인간은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를 가리고 숨어 버림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숨긴 죄를 드러내셨고, 숨은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2 의는 죄없는 제물의 희생의 피로만 주어집니다. 아담과 하와의 부끄러운 수치가 가려지기 위해서 죄없는 짐승이 피흘리며 죽어갔습니다. 생명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생명의 희생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희생 앞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저 제물이 내 죄 때문에 대신 희생당하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아담은 피흘리며 죽어가는 짐승을 보면서 저 짐승이 바로 내 죄 때문에 죽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단에 드려지는 수많은 짐승들이 자신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는다는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우리가 감당해야 죄악의 형벌을 친히 감당하신 믿고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미리 내다본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3 의는 덮어주심으로만 주어집니다.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들의 수치를 가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옷을 벗기셨습니다. 이는 인간이 시도하는 구원을 위한 모든 행위를 부정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인간의 행위를 부정하신 하나님의 역사는 어떻게 나타납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3:21) 그것이 신약에서는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됩니까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갈3:27)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그 죄를 가리움을 받은 사람이 곧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3. 싸움 범죄에 대한 형벌로 인간에게 땀흘림이 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땀흘리는 것이 인간에게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땀은 단지 범죄로 인한 형벌이요 저주일 따름입니다. 일하지 않고 땀흘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 앞에 옳지 못한 행실이지만 그러나 땀을 흘린 것 역시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덮어주신 은혜뿐이며, 우리의 자랑은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의는 없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의인이 없으며 인간이 행한 의로운 행동도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의로우실 뿐입니다. 이 세상은 땀과 의의 싸움이 연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땀을 자랑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18:11-13)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18:14)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말씀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 중에 누가 더 주님을 사랑했겠습니까 누가 주님을 의지했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 예수님의 의를 의지하는 사람, 예수님의 의를 자랑하는 사람에게는 그가 비록 세리와 친구라 할지라도 주님은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모습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조롱했습니다. 나는 말씀을 지켰습니다. 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나는 헌금을 드렸습니다. 나는 큐티를 했습니다. 나는 전도했습니다. 나는 충성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자랑입니다. 자기의 땀을 가지고 스스로의 의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앞에서 절대 자기의 땀과 의를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의 자랑은 오직 주님의 의뿐이어야 합니다. 나 자신에 대한 고백은 나는 오직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행한 것은 오직 죄뿐이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베드로는 고넬료가 자신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입을 맞출 때 일어나라 나도 사람이다 했습니다. 이 말은 나도 너와 똑같은 죄인이다. 나는 이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 성에 들어가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고쳤습니다. 깜짝 놀란 우상숭배자들과 그 성의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향하여 옷을 찢으며 한 말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행14:15) 우리도 바울처럼 “나도 사람이다 나도 죄인이다. 내가 예수를 믿어 구원얻은 것처럼 너희도 예수 믿어야 산다” 이 말만 해야 합니다. 땀은 범죄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저주와 형벌입니다. 이 고통은 일생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그 어떤 노력도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에서 스스로를 건질 수 없습니다. 인간이 흘린 무수한 땀, 인고와 노력의 땀방울들이 자신을 구원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흘린 땀방울이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흘린 땀방울은 모든 인류의 저주를 자신의 육신으로 다 담당하신 땀방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22:44)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주님의 땀방울은 피로 변했네. 하나님을 거역한 나를 위하여 순종의 보배피를 흘려 주셨네. 내가 주를 위해 일생 흘린 땀방울보다 주님이 나를 위해 흘리신 한 방울의 땀이 더 귀합니다. 일평생 갈고 닦은 내 의가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라 십자가에서 내 모든 죄를 친히 담당하시고 그 공로로 덧입혀 주신 주님의 의가 우리를 구원한 것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자기 땀, 자기 의 자기 공로를 헤아리던 자들은 아무도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 곧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요6:29) 우리에게 의를 덧입혀 주신 주님, 그 주님을 위하여 땀흘리는 것은 그것 자체가 기쁨이 감사입니다. 비록 그 땀이 주를 위해 흘린 것이라 할지라도 끝없이 자기의 공로를 헤아리지 말고 주님만을 높여 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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